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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진 변호사·필적학자
독립운동가 글씨 분석하며 필적학 공부해
실용적인 학문으로 발전시키고 싶어
“원래 글씨는 손이나 팔이 아닌 뇌로 쓰는 거예요. 글씨를 ‘뇌의 흔적’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씨체를 보면 내면 상태나 평소 성향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범인을 밝혀내려는 검사와 범행을 인정하지 않는 피의자 사이 심리전이 한창인 검찰청 조사실. 더이상 입을 떼지 않는 피의자에게 한 검사는 종이 한 장과 펜 하나를 건넨다. 자필 진술서를 써서 제출하라는 요구였다. 그가 중요하게 여겼던 건 진술서 내용뿐 아니라 피의자의 글씨체였다.
구본진(55) 변호사는 검사로 일했을 당시 살인범, 폭력범 등 자신이 맡은 사건 피의자들한테 자필 진술서를 쓰게 했다. 살인범들이 쓴 글씨는 일반인들 글씨보다 각져 있었다. 연필을 세게 쥔 채 꾹꾹 눌러쓴 흔적도 역력했다. 많은 범죄자들이 일반인들에게서 찾기 어려운 독특한 특징의 글씨를 쓰자 구씨는 필체와 성향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필적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경찰 버스를 동원해 조직폭력배 두목을 잡아 후배들 사이에선 ‘전설’이라고 불리던 구씨는 이제 글씨를 통해 사람 마음을 들여다봐 ‘필적학자’로도 불린다.
◇예술 대한 관심, 필적 공부로까지 이어져
-현재는 변호사로 일하고 계신데 주로 어떤 사건들을 수임하시나요?
“형사 사건과 미술·문화재 관련 사건들을 주로 맡습니다. 2015년부터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전엔 21년간 검사로 일했어요. 강력부에서 살인, 마약, 폭력 같은 사건들을 주로 담당했기 때문에 지금도 형사 사건들을 많이 수임합니다. 모교인 서울대학교 법학과 대학원에서 예술법을 공부했던 경험을 살려 지적재산권 관련 사건들도 맡고 있습니다. 작년엔 가수 조영남 씨 대작 사건을 담당해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예술법을 공부하셨던 점이 눈에 띄네요. 평소 예술 분야를 좋아하셨나요?
“원래부터 관심이 많았어요. 평소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다니면서 다양한 작품들을 많이 접했습니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도 편안해지더라고요. 특히 실제 현장에서 예술을 경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작가, 박물관장, 학예사 같은 업계 종사자들과 만나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눴죠.”
-필적학자로도 알려져 있어요. 필적학이 정확히 뭔가요?
“글씨체 분석을 통해 글쓴이가 어떤 성향과 성격을 가졌는지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글자 크기, 모양, 기울기 같은 기준들을 이용하죠. 필적학은 글씨가 ‘뇌의 흔적’이라는 전제에서부터 출발해요. 왜냐하면 글쓰기는 손으로 하는 활동이 아니라 머리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글씨를 쓸 때면 머리는 손과 팔 근육에 글을 쓰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요. 손은 이걸 기반으로 선, 굴곡, 점으로 이루어진 글자를 만듭니다.
이 모든 것은 개인의 두뇌활동이 글씨체로 표현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유명 학자들도 여기에 공감했어요. 실제로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 칼 구스타프 융 같은 심리학자는 사람 성격이 글씨체에 드러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즉, 필적학은 개인의 내면세계가 한 사람의 손끝에서 써 내려가진다는 걸 보여주는 학문이죠. 우리나라에선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프랑스, 독일 등 해외 국가에서는 박사 학위도 딸 수 있는 하나의 정식 학문이에요. ‘필적학(Graphology)’이란 연구서는 17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편찬된 이후로 유럽, 미국뿐 아니라 일본, 중국에서도 출판됐습니다. 이 연구서와 다른 실용 지침서들을 이용해 필적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필적은 어떻게 분석하나요?
“컴퓨터나 핸드폰을 통해서 글씨의 인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긴 해요. 하지만 실물을 통해서 분석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또 특징이 두드러진 글씨는 육안으로 쉽게 분석할 수 있어요. 특히 글 쓴 사람의 지적, 인격 수준도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밀히 들여다봐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양립하기 어려운 특성들이 한 글씨에서 보이는 경우입니다. 정밀함과 통 큰 성격이 한 사람 글씨에 다 나타나기도 해요. 이런 식으로 상반되는 특징이 한 글씨에 모두 보이는 경우엔 분석할 때 시간이 며칠씩 걸리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글씨 같은 경우엔 아직 분석을 끝내지도 못했어요. 웬만한 사람들의 글씨는 금방 분석할 수 있는데 이순신 장군 글씨는 자료를 많이 읽어봐도 알아내기가 어렵더라고요. 지금도 계속 연구하는 중입니다.”
◇독립운동가 글씨는 친일파 글씨와 달랐다
-언제부터 필적학을 공부하셨나요?
“2005년쯤에 독립운동가들의 글씨를 모으면서부터 필적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려고 했다기보단 친필 여부를 확인하려는 목적이 컸습니다. 특정인이 썼다고 알려진 글씨인데 정말 그 사람이 쓴 게 맞는지 확인하려고 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필적 연구를 통해서 수집의 정확성을 높일 필요가 있었어요. 그 사람이 쓴 글씨가 많이 남아 있다면 글씨끼리 서로 비교해서 진위 여부를 파악할 수 있겠지만 독립운동가들 글씨가 생각보다 적게 남아있어요. 안중근 선생의 글씨는 60점 내외, 김구 선생의 글씨는 약 300점 정도 남아있는데 이게 많은 편입니다. 한 점만 발견되는 독립운동가도 있어요. 이런 분들의 글씨는 후손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이 아닌 이상 출처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독립운동가 본인이 쓴 게 맞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이럴 땐 필적학 연구를 통해서 사람의 배경을 파악합니다. 글씨체를 보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누구의 제자였는지, 어느 지역 사람인지 등에 대해서 알 수 있어요. 이 자료들을 기존에 알려져 있던 기본 정보와 비교한 뒤 글쓴이가 맞는지 확인 과정을 거칩니다. 일종의 ‘팩트체킹’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왜 독립운동가의 글을 모으기 시작했나요?
“20대때부터 평소 이것저것 모으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수집의 범위를 좁히고 테마를 구체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88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94년 검사 초임으로 일할 때부터 동양화, 서양화, 공예품 등 여러 물건들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중 1998년 미국 뉴욕으로 연수를 떠났어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휘트니 미술관에 자주 갔죠. 여기엔 기증품들이 많이 전시돼 있더라고요. 한번은 박물관을 빙 둘러보고 나오는데 직접 모은 물건들을 기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미 있고 훌륭한 테마의 물건들을 모은 다음에 이것들을 기증하면 사회에 공헌도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후 어떤 테마로 정하면 좋을지 계속 고민했어요. 적당한 가격과 크기, 사회적 의미 등 몇 가지 기준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독립운동가 곽종석 선생이 쓴 편지를 읽게 됐어요. 글씨가 굉장히 작은데 힘이 넘쳐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성균관대를 설립한 김창숙 선생의 스승이자 독립운동에 지대한 역할을 한 분이셨어요. 이 사실을 안 뒤에 독립운동가들이 쓴 글씨를 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집 테마를 글씨로 정하게 된 거죠.”
◇사람 성향에 따라서 글씨체도 달라져
-이후 사람들의 성향에 대해서 공부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사람에 따라서 글씨체가 달라지는 걸 보고 흥미롭다고 생각했어요. 독립운동가 글씨를 모으면서 친일파 인사들의 글씨도 같이 수집했는데 서로 다른 특징을 보였습니다. 당시 글을 쓸 줄 알았던 지식인들은 독립운동이나 친일행위 중 하나를 선택해서 사회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자연스럽게 두 집단의 글씨를 모으게 됐습니다.
독립운동가의 글씨는 작고 느리고 행간이 좁았던 반면 친일파들은 글씨가 크고 빨랐어요. 실제로 독립운동가들은 소심하고 보수적이면서 공손하고 검박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반면 친일파들은 과시적이고 사교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이 많았어요. 이것이 그대로 글씨에 드러나더라고요. 이후 필적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향에 따라서 글씨체가 달라지는 또다른 사례가 있나요?
“범죄자들이 쓴 글씨를 보면 일반인들 것과는 완전히 달라요. 강력부 검사로 일할 때 조직폭력배, 살인자, 마약사범 등 많은 범죄자들의 필체를 봤죠. 그 중에서 가족을 살해했던 정신이상자들 글씨가 기억에 남아요. 이 사람들 글씨는 내용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반인들 글씨와는 모양새가 달랐어요. 당시 필적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도 전이었는데도 필체 차이를 보고 글씨와 사람 사이에는 분명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강력범죄자 글씨체가 따로 있는 건가요?
“네, 물론 범죄자들마다 범행을 저지르게 된 동기, 당시 처해있던 상황 등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유형화하긴 어려워요. 모든 살인범이 동일한 특징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연쇄살인범들 글씨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과거 한 방송에 출연했을 때 사전정보 없이 필체만 보고 어떤 사람이 쓴 글씨인지 맞춰야 했던 적이 있어요. 당시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글씨가 문제로 주어졌는데 예전에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누가 쓴 건지 맞췄어요. 반면 다른 글씨는 누가 쓴 건지는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연쇄살인범의 글씨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필압이 강했고 행 간격이 좁았어요. 선이 선을 침범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1970년대 17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김대두가 쓴 글씨였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연쇄살인범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이었죠. 필적학은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일반 살인범과는 다르게 살인을 습관적으로 저지르는 연쇄살인범들이 주로 이런 글씨를 쓴다고 분석해요. 김대두의 글씨가 이 유형에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직업별로도 글씨를 유형화할 수 있나요?
“학자들 필체가 있어요. 그런데 학자들 중에서도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에 따라서 글자 모양이 달라집니다.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작고 정밀하면서도 규칙적인 글씨를 씁니다. 빈틈이 없고 실수도 없음을 나타내죠. 반면 철학자 프로이트, 문인 최남선 같이 통이 크고 과시욕이 강한 학자들은 글씨체가 또 달라요. 연예인들은 시작 부분을 주로 크게 써요. 남들 앞에 서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정치인들 글씨체도 주로 이런 경향을 보입니다. 위아래가 길고 마지막 획이 길게 늘어져요.”
◇더욱 심도깊은 연구 통해 학문 발전시키고 싶어
-필적학이 결과론적이거나 끼워맞추기 식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런 이야기를 꽤 많이 들었습니다. 필적학이 글씨 인상을 보고 사람 성향을 파악하는 학문이다 보니 사주나 관상과 비슷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글씨만 보고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파악할 수 있냐며 황당해하는 분들도 계셨죠. 그렇지만 약 15여년간 꾸준히 연구하면서 정확도를 끌어올렸어요.
전문경영인들의 글씨체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하루는 제가 분석했던 기업인의 친형이 제 검찰 상사였어요. 이 분이 동생한테 글씨 분석이 얼마나 정확했냐고 물어봤더니 동생은 95% 정도 맞았다고 답했습니다. 동생을 사전에 만나보지도 못했고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했어요. 그런 사람의 성격을 끼워맞추기란 굉장히 힘든 일이겠죠. 저는 글씨에서 보이는 특징들을 분석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럼 글씨를 바꾸면 인생도 바뀌나요?
“적극적으로 노력한다면 글씨도, 삶도 모두 바꿀 수 있죠. 외국에는 글씨체를 바꿔서 성격이나 내면 문제를 치유하는 필적요법(grapho-therapy)이라는 심리요법도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글씨를 바꾸면 사람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해서 꾸준히 연습해요. 보통 글자 가로선이 오른쪽으로 올라가 위쪽을 향하는 글씨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향을 상징해요.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오른쪽 끝이 올라간 글씨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필적학도 하나의 학문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쓰일 수 있도록 발전시켜 나가고 싶어요. 사실 학문은 대상을 분석해서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에서 그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들이 글씨를 바꿔서 성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항상 생각했어요. 물론 한글을 쓴 역사가 짧은 만큼 한글 모델을 구하기가 어려워 연구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에요. 조선시대에도 딸이나 부인에게 보낸 편지 정도가 한글로 쓰였고 해방 후에도 한동안은 한자를 주로 쓰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계속해서 연구를 해 나가 관련 책들도 집필할 예정입니다.”
글 jobsN 신재현 인턴
jobarajob@naver.com
잡스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