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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과거와 국가를 넘어, 기억의 연대와 책임을 생각한다
기억전쟁 속에서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기록되지 못한 기억과 이름을 어떻게 불러낼 것인가
왜 ‘역사’ 가 아니라, ‘기억’인가?
- 승자의 역사, 국가의 기록에서 침묵당한 이들의 기억으로
2021년 겨울 전두환은 사망했다. 5?18 학살에 대한 인정이나 사죄는 없었다. 그의 세력과 지지자들은 학살 자체를 부정하거나 북한군 침투설 등으로 진실을 왜곡했다.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기억전쟁’이 치열하다. 역사적 사건의 실존조차 부정하고,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꾸거나, 피해자의 증언과 기억보다 법적 판결이 힘을 얻어 피해자의 고통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다. 권력을 가진 가해자가 문서와 역사적 서사를 독점한 상황에서 힘없는 피해자들의 경험과 목소리, 즉 기억은 배제된다. 게다가 각국의 역사부정론자들이 국경을 넘어 연합하여 전 세계적 극우주의를 부채질하고 있다. 이 현실은 역사의 승자와 국가, 법원 등의 기관이 공인한 역사에서 배제된 이들의 기억과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과 연대가 필요함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기억전쟁’의 시선을 과거 한국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와 동시대적 사건, 여성 등 소수자로까지 확장시킨다. ‘기억전쟁’은 과거 사건에 대한 역사 논쟁에 그치지 않고 기억이라는 상징을 앞세운 정치투쟁이다. 이를 통해 주류 역사에서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내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새로운 민중사이자 초국가적 기억의 연대를 향하는 첫걸음이다.
👦 저자 소개
임지현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마르크스·엥겔스와 민족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며,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창립 소장이다. 바르샤바 대학, 하버드-옌칭연구소,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 베를린 고등학술원, 파리 2대학, 빌레펠트 대학, 히토츠바시 대학 등에서 초청·방문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글로벌 히스토리 국제네트워크(NOGWHISTO)’ 회장, ‘토인비재단’과 ‘세계역사학대회’ 등 국제학회의 이사로 있다.
폴란드 근현대사와 유럽 지성사에서 출발해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로 학문적 관심을 넓혀온 그는 ‘일상적 파시즘’, ‘대중독재’, ‘국사의 해체’,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등의 독창적 연구를 통한 신선한 문제의식으로 한국 지식사회의 담론장을 흔들었다. 현재 그는 민족주의적 기억을 탈영토화해 초국적 연대를 지향하는 동아시아의 기억 문화를 탐색하는 데 학문적 실천의 주안점을 두고, ‘역사가’에서 ‘기억 활동가’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수십 편의 학술논문 외에 『마르크스·엥겔스와 민족문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오만과 편견』, 『세계사 편지』, 『우리 안의 파시즘』(공저),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을 펴냈고, 『근대의 국경과 역사의 변경』, 『대중독재』 1~3, 『프랑스 혁명사 3부작』 등 다수의 책을 엮고 우리말로 옮겼다. 국외에서는 『Palgrave series of mass dictatorship』 총서(총 5권)를 책임 편집했으며, 미국·일본·독일·폴란드·프랑스 등 해외 유명 저널에 50여 편의 논문을 기고했다.
정면
서강대 사학과 조교수. 「고대 운남雲南 ‘서찬국西?國’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강대 국제지역문화원 연구교수,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교수를 역임했다. 주로 윈난사를 중심으로 한 변경사에 관심이 있다. 지금은 윈난과 태국을 잇는 교역로와 이산의 역사에 흥미를 갖고 있다. 저서로 『남조국南詔國의 세계와 사람들―8~9세기 동아시아의 서남 변방』이 있고, 논문으로 「영웅과 매국노 사이―두문수杜文秀를 둘러싼 기억 경쟁」, 「하나의 국경, 두 장의 역사지도―근현대 시기 전?-면緬 국경 분쟁의 역사화」 등이 있다.
김정한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대중운동의 이데올로기 연구: 5·18광주항쟁과 6·4천안문 운동의 비교』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실천문학 편집위원, 문화 과학 편집위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 민간조사관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현대 정치철학연구회를 공동 운영하고 있다.
현대 정치철학을 통해 역사적 사회운동들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와 함께 보편적 사회운동을 위한 정치철학을 탐구하는 ‘사 회운동과 정치철학의 마주침’을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
주요 저서로 『대중과 폭력: 1991년 5월의 기억』,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제7회 일곡유인호학술상 수상), 『비혁명의 시대: 1991년 5월 이후 사회운동과 정치철학』, 『알튀세르 효과』(공 저), 『너와 나의 5·18』(공저), 『한국현대생활문화사 1980년대』 (공저), The History of Social Movements in Global Perspective(공저), Korean Memories and Psycho-Historical Fragmentation(공저), Toward Democracy: South Korean Culture and Society, 1945~1980(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폭력의 세기』,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공역)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5·18 항쟁 시기에 일어난 일가족 살인 사건: 전쟁, 학살, 기억」, 「5·18학살 이후의 미사未死: 아직 죽지 못한 삶들」, 「광주 학살의 내재성: 쿠데타, 베트남전쟁, 내전」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권력을 가진 가해자가 문서와 역사적 서사를 독점한 상황에서 힘없는 희생자들이 가진 것은 기억과 증언뿐이다. 그런데 증언은 불완전하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부정확하다. 실증주의로 무장한 부정론자들이 죄인 다루듯 증인을 압박하고 증언의 가치에 흠집을 내려고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거짓말,’ ‘조작,’ ‘왜곡,’ ‘날조’ 등의 언어폭력이 역사적 비극의 생존자들에게 가해지고, 이는 ‘실증’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기억이 흐릿하다는 이유로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빼앗긴다. 자신의 내밀한 아픔이 타자의 실증적 언어로 규정될 때, 이들은 자신의 아픔을 인정받지 못한 데서 오는 극심한 소외감과 고통을 겪는다.
---「임지현, 들어가며―‘기억을 학살하라,’ 그들이 비극의 역사를 부정하는 법」중에서
전쟁의 역사에서 비가시화되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도 낯설지 않다. 그 이름의 하나가 일본군 ‘위안부’다. ‘위안부’라는 말에는 항상 유보의 따옴표가 쳐진다. 가난한 식민지 여성의 성을 국가가 동원해 착취한 성노예제가 전장의 군인들에게 제공되어 마땅한 ‘위안’으로 미화되었다는 끔찍한 모순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전후에도 이어졌다. 태평양전쟁 세대는 ‘처녀 공출’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았고, 1975년 배봉기, 1982년 이남님, 1984년 배옥수와 노수복이 국내외 언론에 노출되었지만, ‘위안부’는 한국의 사회적 기억에서 여전히 가라앉은 존재였다. 식민 지배가 초래한 민족 수난의 표상은 될지언정, 여성의 성적 피해라는 맥락에서 공론화가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이헌미, 여자의 얼굴을 한 전쟁―일본군 ‘위안부’ 증언 이후의 풍경들」중에서
지난 40년 동안 ‘김군’과 같은 익명의 사람들은 서서히 잊혔고,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로 구성된 기동타격대는 국가의 기억이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명명할 때 그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밀려났다. 대학생들은 신원이 확실했지만, 그들은 누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은 무장 세력으로서 민주화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불투명했다. 5·18의 민주화 담론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오늘날 북한군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이유다.
---「김정한, 풀뿌리 항쟁의 ‘이름’ 없는 진짜 주역들」중에서
왜 지금 오키나와인가. 그러한 물음을 갖게 된 것은 광주행을 주저하던 메도루마가 털어놓았던 80년 광주를 향한 마음을 떠올리면서부터였다.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를 폭격하기 위해 자신들의 섬에서 출격했던 미군기를 바라보며 공포를 느꼈던, 그리고 20여 년 후 마찬가지로 베트남의 무차별 폭격에 자신들의 섬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가장 거센 반미 투쟁을 전개했던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80년 5월 당시 신군부를 지원하기 위해 부산 앞바다에 정박한 미군 함대는 어떻게 비쳤을까.
---「이영진, 5?18 그리고 ‘철의 폭풍,’ 희생의 연대는 가능한가」중에서
여기서 ‘4·3’에 대한 국가 차원의 공적 기억과 4·3 피해 당사자 개인과 가족의 기억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이 간극은 ‘4·3의 기억’을 재현하는 포스트 기억의 범위와 다양한 매개 양식의 위계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4·3의 모든 피해자가 ‘희생자’의 신분을 자동적으로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희생자’로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 위하여, 피해자의 기억은 국가의 기억 안에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는 모순적인 요구를 하게 된다. 여기서 죽음의 윤리적 가치를 판단하고 위계화하는 의례적 경합의 정치학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제주4·3의 문화적 트라우마의 전승과 관련하여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에서, 4·3 희생자와 시신에 대한 문화적 믿음과 도덕적 관념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 의례적 경합의 정치학과 탈냉전 시대의 기억의 윤리에 대하여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김성례, 제주4?3 사건의 위령―트라우마와 포스트 기억의 정치학」중에서
천안문민주화운동 당시에 대한 회고문 등 기록을 보면 노동자와 타지방 거주민 등도 많이 참여했으며, 이들에게 당시의 천안문 시위는 일상을 잠시 멈춰 세운 휴업, 휴강, 휴식의 카니발 공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많은 통계들이 당시 희생자들의 대다수가 일반 시민들이었다고 기록한다.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민주화라는 목적의식하에 강력한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다 희생되었다는 기억은 매우 중요한 구성 부분이지만, 이 기억은 당시 참여했던 많은 이들의 각양각색의 기억을 더하여 더 풍부해질 수도 있다. 집단기억의 풍부화는 단지 더 많은 개별 기억을 포함하는 것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소리, 음성, 후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 영역을 발굴해내는 것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농민 여성들이 옷감에 새겨 넣은 기억의 흔적 등 문자나 시각 이미지가 아닌 여러 형태의 기억들은 기억의 전 세계적 연대를 확대할 것이며, 이는 부정론자들의 증거 물신주의를 에워싸는 포위 전선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홍지순, 천안문, 중국과 서구의 집단기억 정화」중에서
재난에는 준비와 대처, 복구라는 키워드가 뒤따른다. 그러나 재난에 대한 기억, 그 아픔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강남역 10번 출구와 구의역 승강장 9-4 스크린도어에 붙은 형형색색의 포스트잇 물결을 기억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내가 거기 없었기 때문에 네가 죽었어”라고 말하는 문구들은 재난의 피해자들에게 보내는 위로이자 거리에서 실현된 기억의 아카이브였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줄곧 피해자의 위치에 서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들의 아픔을 교감하고 현실의 변화를 요청하는 소리였다. 재난이 있는 곳에 아카이빙이 있어야 한다. 기록을 담은 장소로서 ‘아카이브’는 과거가 보존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기억이 만들어지는 장소다. 아카이빙 작업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회적 참사와 재난에 대한 아카이브는 누구의 그리고 누구를 위한 기억을 담고 있는가? 재난의 기록이 진상 규명과 대처를 중심으로 한 사건 기술을 넘어서 미래의 상상에 열린 창조적 작업이 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재난의 정치적 미학을 상상할 것인가? 재난 아카이브의 중요성은 최근 전 세계에서 공유되고 있는 상황이다.
---「박현선, 모든 것을 무릅쓴 기록들, 재난 아카이브」중에서
‘기억전쟁’은 과거와 과거의 전쟁이 아니다. 기억이라는 상징을 앞세운 현실 정치투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000년대부터 효창공원을 두고 벌어졌던 논란을 보면, 효창공원의 ‘기억전쟁’은 현실 정치투쟁임이 더 명확해진다. 같은 장소에서 호명되는 대상은 동일하지만 갈등의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국회에서는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만들기 위한 법안이 수차례 발의되었다. ‘민족정기’를 강조한 법안을 발의하면 역사관이 올바른 정치인이란 인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인지, 다양한 정당 소속의 의원들이 법안을 발의하거나 지지했다. 하지만 정작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중략)… 혹시 효창공원의 국립묘지화를 반대했던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이유는 멀리 있지 않다. 결국은 돈의 문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묘지는 기피 시설 혹은 혐오 시설이고, 아무리 독립운동가의 묘역이라 할지라도 묘지는 묘지일 뿐이다. 효창‘공원’이 아니라 국립‘묘지’가 들어서면 개발 이슈가 사라져 땅값과 집값은 하락할 것이 뻔했고…(후략)….
---「정일영, 민족의 토포필리아 자본의 토포포비아, 효창공원」중에서
한국 사회는 성과 사랑, 오락, 유흥과 같이 주한미군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과 비용을 기지촌 여성 개인에게 맡겨두었다. 때로 여성들을 “당신들이야말로 외화 버는 애국자”라고 추켜세우기도 하고, 때로 ‘양공주’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이제 민주화된 신개발주의 아래에서도 가난한 여성 개인의 희생과 추방이 요구되고 있다. 미군 주둔이 초래한 문제를 해결하고 여성들과 아이들에 대한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 ‘불건전한’ 기지촌 여성을 겨냥한다. 기억은 그것을 촉발하는 현재와 미래를 전망하고자 하는 의지와 분리될 수 없으므로 언제나 정치적이다. 그러므로 이태원을 기지촌으로 기억한다는 것은 여성과 이들에 대한 혐오를 동원하며 발전을 거듭한 한국 사회의 역사를 드러내는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부동산 개발의 광풍에서 속절없이 밀려나는 여성을 위한 정의의 프레임을 작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김주희, 이태원×기지촌, 혐오와 망각의 투기촌」중에서\
🖋 출판사 서평
이 책은 한반도를 포함해 전 지구적 기억공간에서 과거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기억전쟁’이 미래에 대한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국가 중심의 공식적 기억에서 민중의 풀뿌리 기억으로, 자국 중심의 일국적 기억에서 국을 넘는 초국가적 기억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노력은, 20세 기 역사의 이데올로기적 족쇄에서 역사적 상상력을 해방하고 기억의 연대를 향하는 첫걸음이다. 미래를 바꾸는 것은 과거를 바꾸는 데서 시작한다. _임지현
전두환-홀로코스트-일본군 ‘위안부’ 부정론
- ‘기억전쟁’ 속에서, 교차하고 중첩하는 역사
전 세계적 ‘기억전쟁’의 현황은 국경에 갇힌 일국적 관점으로는 역사 연구가 더이상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전두환과 그 지지자들의 학살 책임 부정론은 홀로코스트 부정론,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과 놀랄 만큼 닮아있다. 각국의 극우주의 세력이 표현의 자유를 앞세워 역사적 망언을 일삼고 이에 대항하는 세력은 이들에 대한 법적 처벌을 호소하는 움직임으로까지 이어져, 역사 부정론자들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이철우, 이소영, 이하 해당 글의 저자로 표시함).
‘기억전쟁’은 시대를 넘어 국경을 넘어 교차하고 중첩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국가와 지도자를 교조적으로 숭배하는 정치종교의 어린 ‘순교 성인’으로 소련의 파블리크 모로조프(이종훈)와 북한의 한현경(김보민), 남한의 이승복이 조우하고, 나아가 국가의 선전·선동에 묻힌 인물의 초상(김영주)을 살펴본다. 또 5?18민주화운동에서 잊힌 이들(김정한)과 제주4?3 희생자(김성례), 혼돈의 국제 정세 속 오키나와인들(이영진), 홋카이도 강제노동 희생자(류석진)가 겹쳐 읽힌다. 최근 한국 사회를 뒤흔든 수차례의 사회적 재난(박현선)은 기록을 기초로 한 기억 연구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기록과 기억의 긴밀한 관계는 국사 교과서 논쟁(정면)과 역사 교육 논쟁(김상훈)을 독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특정한 장소와 선주민의 역사가 지워지고 자본과 욕망만이 남은 현실은 효창공원(정일영)과 이태원(김주희), 뉴욕 로이사이다(황은주)에서 목격할 수 있다. 이 책은 이처럼 역사의 수많은 교차점을 발굴하고 기억의 다층적 연구를 수행한다.
새로운 기억 연구, 풀뿌리 기억의 연대를 위해
이 책은 전공과 세대를 넘나들며 이뤄낸 연구 성과다. 역사학(한국사, 서양사, 동양사)과 역사 교육학은 물론이고 문학, 법학 등 학문 분과와 경계를 넘은 여러 세대, 31명 학자들이 참여했다. 또 새로운 기억 연구자를 ‘기억 활동가’로 명명하고 이들이 기억 연대 활동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기록해야 함을 제안한다. 홋카이도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 발굴, 송환을 둘러싼 한일 시민 간의 연대(류석진), 파독 광부의 생애사와 한인 네크워크 구축의 기록(이유재), 기억 문화를 새롭게 일구고 있는 칠성조선소 이야기(우찬제) 등이 그 예시다. 지금까지 이런 서사는 역사학에서 진지하게 취급되지 못하고 곁가지 에피소드로 다루어지는 데 그쳤다. 또 교가와 유행가, 도시 재생 등 이미 지나갔거나 청산된 것으로 여겨진 식민 통치와 전쟁이 남긴 문화적 유산(이용우, 배묘정, 허윤, 전재호), 빈곤(황병주) 문제에 현재성을 부여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기억전쟁’에서 잊히고 배제된 이들,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이들, 이름 없는 이들을 복원해낸다. 이들을 기억공간에 되살리는 것은 국가나 법원, 정치 지도자 등 권력을 점한 사람과 기관의 공인과 공식기억이 아니라 풀뿌리 민중과 약자, 소수자의 기억 연대다. 국가폭력을 입증하기 위해 국가가 만든 공식기억에 편입되어야 하는 모순과 역사부정의 이중고 속에 있던 이름 없는 피해자들인 일본군 ‘위안부’(이헌미), 강제노동 희생자(류석진), 5?18(김정한, 이영진), 4?3 희생자(김성례), 사북항쟁 참여자(김정한) 등을 역사의 장으로 소환한 이들은 피해자들과 이들의 목소리에 주목한 시민들이다.
이 책을 출간한 재단법인 진실의 힘은 1970~80년대 권위주의 정부 시절 조작 간첩이 된 이들을 재심 재판을 통해 무죄를 밝히고 국가 책임을 물어왔다.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침묵당한 그들의 기억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는 것은 그동안 진실의 힘이 추구해온 가치이다. 진실의 힘은 이 책 역사에서 기억으로-침묵당한 목소리를 불러내다』를 통해, 권력자 중심의 역사에서 풀뿌리 민중의 기억으로, 힘 있는 가해자의 시선에서 배제된 피해자와의 연대로, 자국 중심의 기록에서 국경을 넘는 보편타당한 초국가적 기억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