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광 초상화


실학사상의 선구자, 또는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이수광은 전주이씨로 종실사람 즉,왕족이었다.
당시 서울시 종로구 낙산공원 한 켠에 조그마한 초가를 짓고 비우당(庇雨堂)이라고 하였는데 비바람만 막겠다는 의미이다.
이수광은 34세때 임진왜란이 2년전인 1590년에 처음으로, 왜란이 끝난해인 1597년 두 번째로 북경을 방문했다. 이후 1611년 세자(광해군)의 관복을 요청하러 북경을 방문하여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에서 50여 일간 머물렀다.
*주: 당시 조선의 왕들과 세자들은 중국 황제가 하사해주는 관복을 받아와야 했다
옥하관에는 안남 하노이(베트남)에서 북경까지 1년을 걸어왔다는 베트남 왕국(레러이 왕조) 사신들 23명이 먼저 머물고 있었다.
사신 무리중에서 나중에 총리대신이 되는 정계의 거물 풍극관이라는 사람과 어울리게 되었다
두 나라의 이수광과 풍극관은 나이 차이가 20세가 넘게 났지만 오랜 벗을 이제서야 만나게 되는냥 창시문을 주고받으며 50일간을 어울렸다.
처음에는 중국어 통역관을 대동하고 대화를 했으나, 통역이 못마땅해서인지 풍극관은 직접 붓을 들고 필담으로 나섰으며 두사람은 나이 차이가 있었는데도 서로에게서
운명적인 만남을 하듯이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된다.
중국황제마저도 풍극관을 처음 대면하고서는 그의 호탕한 기질에 반할 정도였다고 한다.
풍극관은 헤어질 때, 백선향, 지향 등 안남 특산물을 주었고, 이수광은 소지하고 있던 조선의 필묵을 답례로 줬다.
사실 조선과 베트남은 직접교류의 필요성이 없었으므로 중국을 무대로 이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당시 베트남은 높은 학문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 즈음 일본인은, 중국에서든 한국에 사신으로 와서든, 한시로 대등하게 화답하기에는 수준이 크게 떨어졌다고 하며 임진왜란때에 전라도 전주 출신으로 왜군에 포로로 끌려간 "강항"에 의해서 성리학이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풍극관과 이수광이 주고받은 詩가 창수시(唱酬詩)이며 두 나라에 회자(膾炙)되고, 특히 안남에서 지봉 이수광의 명성을 드높였다.
결국 조선땅의 이수광을 베트남에 알리게 되는 사람은 정치적 실권자였던 풍극관이다.
베트남의 풍극관은 중국황제가 그의 호방한 성격에 반했는지 그의 초상을 그려서 선물을 했을 정도로 중국측에서도 인정받았으며,그때 그림은 현재 안남(베트남)에 있는 고향사당에 모셔져 있다
조완벽이라는 사람은 당시에 진주태생으로서 임진왜란(1592년)이 끝나고 왜구들이 정유년(1597년)에 재차 침입을 해왔을 때에 나이 20살의 젊은 선비였으며 신혼의 아내도 고국에 남겨둔체 포로로 잡혀서 일본땅으로 끌려갔다. 처음엔 일본의 교토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한문을 안다는 것이 알려져 나가사키의 바닷가 상인 집으로 팔려갔다.
그는 현재 큐슈의 남쪽 ‘가고시마’에서 배를 타고 총 3번이나 베트남 호이안을 다녀왔다.
갈 때마다 약 3개월 정도를 머물렀고, 신기한 것들과 많은 풍물을 보고 겪었다.
당시 국제어(國際語) 였던 한문(漢文)을 아는 조완벽이 필요했으리라. 그의 배는 필리핀, 오키나와, 베트남 등을 왕래하며 국제무역에 종사하게되었다.
조완벽이 베트남 호이안에 머무는 동안엔
행동이 비교적 자유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하긴,도망을 쳐도 조선 땅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그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어 놓은 ‘조완벽전’에는 현지의 풍속과 물산 등은 물론이고 당시 베트남 사회상과 호이안의 시가지 모습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있다. 당시 베트남에도 유교문학의 또 다른 학풍인 주자학이 한창 꽃피우고 있었는데 조선 못지않은 문화였다
어느날 조완벽은 베트남 조정의 총대감댁에 초정 받아 갔다. 당시 문리후(文理侯) 장감(掌監, 어사)의 집이었다. 고관 수십 명이 열 지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가 조선인이라는 말을 듣고나서는 모두 일어나서 눈빛을 교환하며 정중하게 일일이 인사한 후에 그를 손님석에 앉게하고 , 술과 음식을 접대했다.
포로로 잡혀서 노예가 됀 사정을 듣고는 놀라운 반응과 함께 동정을 표했으며 추호도 노예로 대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조선출신 선비라는 이유로...
한류열풍 이수광!
그들은 조완벽에게 두툼한 한권의 책을 보여줬다. 고금의 명시 수백 편을 실고 있는 책이었는데, 이수광의 시가 가장 첫머리에 있었다. 나중이지만 조완벽은 베트남의 많은 학생들이 이 책을 끼고 이수광의 시를 외우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조완벽은 지방출신이며 어린나이에 포로로 잡혀와서 이수광을 모른다고 대답하니, 오히려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조완벽이 책을 들여다 보니, 이수광의 시에 모두 붉은 묵으로 비점(批點) 쳐져 있었으며, 그들이 성찬해 마지않았다 한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조완벽을 초청해 성대히 대접하며, 그 책 1권을 주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덧붙여 이 책은 "우리 베트남 선비들이 모두 필독하는 문학교과서라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그는 그 책의 일부분을 옮겨 적어 돌아왔다. 조완벽은 그들이 이수광의 시 중 특히 감탄한 대목은 아래와 같았다고 느꼈다. 山出異形饒象骨(산은 이상한 형상으로 솟았으니 코끼리 뼈가 넉넉하고), 地蒸靈氣産龍香(땅에선 신령한 기운이 피어오르니 용향을 생산하네).
실제로 안남국(베트남)에 코끼리 산(상산象山)이 있는데, 조선의 선비가 이를 어찌 알고 지었는가 하면서 정말 절묘하도다 라면서 찬탄했다는 것이다.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에 잡혀간 수만명의 백성들과 포로를 구하려고 나섰는데 1606년 조선은 일본에 잡혀간 포로송환을 위해 제1차 조선통신사를 파견하게 되고 조선과의 국교 제계를 원하던 막부정권은 포로송환의 협력을 약속했다. 1607년 6월 겨우 1천418명의 포로가 6개월 만에 쓰시마로 돌아왔으며 그중에 조완벽도 끼여 있었다.
1607년 귀국 후, 조완벽은 과거시험을 통한 출사(出仕)의 길을 도모하지는 않았다.
귀국후에 조완벽에 대한 행적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공교롭게도 동시대에 존재하며 조완벽을 알고있는 이수광이 짧게 남겼으니~
연장자 이수광은 자신의 작품 지봉유설에 조완벽의 생애를 이렇게 짧게 기록하고 있다.
“십여년 만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늙은 어머니와 아내와 함께 탈없이 사니 사람들은 모두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는 가족과 함께 평범한 선비로 살았던 것 같다.
당대 조선에서도 조완벽의 사연은 꽤나 떠들썩하게 화제가 된 모양인지 조선왕조실록에도 조완벽의 해당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인조 19권, 6년(1628년 12월)
새로운 운명에 맞서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었던 조선인 선비 조완벽의 기구한 인생을 동정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