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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1차(05:23), 2차(05:24 ~ 06:00), 3차(06:20 ~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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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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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24 05:03
- 나는 성령의 사람인가?
나는 성령의 사람인가?
성령을 거부하는 사람인가?
성령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받지 못한 사람은 아닌가?
악령의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저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을 거부하지 않고 오시기를 원한다는 면에서도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뭔가 자신이 없습니다.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 같지 않고
적당히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악령의 사람은 아니지만 더러운 영에 이끌리는 면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가면서도 세상에 안주하기도 하고
가더라도 세상을 곁눈질하느라 전속력으로 가지 못하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정신이 온전히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지 못한 것입니다.
금으로 치면 불순물이 얼마간 있어서 순금이 되지 못하는 것이고,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 있다가도 육의 정신이 제 안에 있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성령을 모셔 들였다가도
육의 정신이 내 안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을 땐 온전히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성령과 악령은 우리 안을 들락날락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고
프란치스코는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라고 하였지요.
복음을 보면 어떤 집에 더러운 영이 머물다가 나갔는데 그 영이 다시 와 보니
말끔히 치워진 채로 있어서 일곱 영을 더 데리고 온다고 주님 말씀하셨더랬지요.
이는 더러운 영이 나갔을 때 얼른 성령을 모셔 들여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말씀이고 성령과 악령이 우리 안에 들락날락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모셔 들이기 위해 할 것은 정신을 차리는 것인데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서 육의 정신을 몰아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듭거듭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차리는 것이며
그런 다음에는 불을 끄지 않기 위해 이 정신을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를 반성하면 적당주의입니다.
영의 움직임과 나의 정신 상태에 민감하거나 깨어있지 못하고
육의 만족을 얼마간 눈감아주고 적당히 타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주님께 된통 혼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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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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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20,19–23
그날 저녁,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두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닫힌 자리 한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리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이는 단지 놀란 제자들을 안심시키는 인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상처를 지닌 몸으로
두려움에 갇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부활은 상처를 지워 버린 승리가 아니라
상처를 품은 채 평화를 여는 사랑의 승리임을 보여 주십니다.
성 예로니모는
말씀과 복음의 진실을 매우 사랑한 교부였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복음의 평화는
막연한 위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 자신에게서 오는 실제적 선물입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평화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닫힌 문도, 무너진 용기도, 실패의 기억도
그들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고 보여 주시고 숨을 불어넣으실 때
비로소 공동체는 다시 살아납니다.
평화는 인간이 조립하는 심리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평화가 너희와 함께” 말씀하신 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평화는 우리를 안쪽으로만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받은 사람은
다시 세상으로 파견됩니다.
그런데 그 파견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상처를 알면서도 사랑하는 방식의 파견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오셨듯
제자들도 이제 주님의 방식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부활의 평화는 도피의 평화가 아니라
사명의 평화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이 장면은
창세기의 생명 창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흙으로 빚은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듯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과 실패로 주저앉은 제자들에게
새 창조의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영성 주간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성은 내 힘으로 마음을 고상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숨을 받아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성 예로니모는
주님의 말씀을 읽는 일이
단지 지식을 얻는 일이 아니라
생명의 숨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말씀은 종이 위의 문장이 아니라
우리 안을 다시 일으키는 성령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우리를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아직도 닫힌 문 안에 머물러 있는가?
두려움과 실망,
상처의 기억 때문에
주님의 평화가 들어올 공간을 닫아 두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오늘도
잠긴 문을 비난하시기보다
그 안으로 들어오셔서
먼저 평화를 주십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는 사명을 맡기십니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
이는 매우 무거운 말씀입니다.
공동체는 단지 위로를 나누는 모임이 아니라
용서를 흘려보내는 그릇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죄와 상처,
원망과 두려움을 움켜쥔 채로는
부활의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성령은
단지 위안을 주는 영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가능하게 하시는 영입니다.
영성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영성이 현실 회피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두려워했고,
문은 닫혀 있었고,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의 평화와 성령의 숨이 시작됩니다.
영성은 문제가 없어진 상태가 아니라
문제 한가운데서도
주님의 현존을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뒤에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숨을 받는 것,
바로 그것이 영성의 길입니다.
오늘은 성체의 날입니다.
성체 앞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전히 당신 몸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 몸은 못 자국이 사라진 몸이 아니라
사랑의 상처를 지닌 몸입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상처 없는 신앙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품은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평화를 받아 모시고,
그 평화를 세상 속으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어떤 문을 닫아 두고 있는가?
두려움인가, 상처인가, 분노인가, 체면인가?
나는 평화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용서를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주님의 숨을 받기보다
내 불안의 공기를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닫힌 문 한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주님,
닫힌 제 마음 안으로 들어오셔서
당신의 평화를 주소서.
상처를 감추지 않게 하시고
그 상처 안에서도 당신의 사랑을 믿게 하시며
성령의 숨으로 저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용서와 화해의 길을 피하지 않게 하시고
받은 평화를 세상에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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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브루클린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보통 주일미사에 80명 정도 나왔습니다. 미사에 100명이 넘으면 아이스크림을 사드리겠다고 했습니다. 1년에 두 번 정도 100명이 넘었습니다. 성탄 때와 부활 때입니다. 저는 기분 좋게 아이스크림을 사드렸습니다. 2024년 2월 11일에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왔습니다. 주일미사에 700명이 조금 넘었습니다. 저는 1,000명이 넘으면 점심을 사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00명이 넘게 더 나올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작년에 곧잘 800명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올해에는 900명이 넘을 때가 두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부활 미사 때입니다. 성당은 물론 성당 밖의 복도에도 의자를 놓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했을 때입니다. 밤새 고기를 잡지 못했는데 예수님 말씀을 따라서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졌더니 고기가 그물에 가득 잡혔습니다. 그물이 무거워서 들지 못할 정도였고, 나중에 확인하니 153마리였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이번 부활 미사에 1,155명이 왔습니다. 저도 놀랐고, 교우들도 많이 놀랐습니다. 저는 약속대로 점심을 사드렸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름대로 미사에 1,155명이 참례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지리적인 이유입니다. 텍사스는 미국에서 이주를 많이 오는 주가 되었습니다. 날씨가 좋고, 세금 혜택이 있고, 상대적으로 뉴욕이나 LA 보다는 물가가 저렴한 편입니다. 타주나 한국에서 전입해 오는 교우들이 많은 편입니다. 둘째는 성당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9년 전인 2017년에 지금 자리로 옮겨서 신축했습니다. 다운타운에 있을 때는 성당이 작았고, 주차 공간이 협소했습니다. 벨리 뷰에 있을 때는 물류창고를 매입해서 사용했습니다. 교우들도 당시 성당을 ‘창고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어빙에 새로 지은 성당은 넓은 주차 공간, 다양한 용도의 교리실과 친교실, 농구장, 어린이 놀이터, 야외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성당도 밝은 분위로 아름답습니다. 공동체의 땀과 눈물로 세워진 성당은 아름답고, 쾌척합니다. 고속도로 옆이라 교통이 편리합니다.
셋째는 ‘새 신자 분과’입니다. 성전이 신축되면서 전임 신부님은 ‘새 신자 분과’를 만들었습니다. 새 신자 분과는 미사 때마다 매의 눈으로 새로 온 교우들을 파악합니다. 새로 온 교우들의 정보를 컴퓨터에 정리해 놓습니다. 구역장에게 연락해 주고, 1달 동안은 미사 후에 함께 식사하면서 본당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주택 마련, 자녀 교육, 직업 안내, 취미 활동까지 도움을 줍니다. 2 달에 한 번은 새 신자들을 교중 미사 때 소개하고, 선물을 줍니다. 1년에 한 번은 새 신자를 위한 ‘친교 모임’을 갖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고,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본당의 새 신자 분과 위원들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새 신자들을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낚시꾼은 잡은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새 신자 분과 위원들은 전입해 온 새 신자들을 위해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넷째는 본당의 분위기입니다. 내년이면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설립 초기 교우들은 씨를 뿌렸습니다. 사제를 모셔 왔고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사랑의 물을 주었고, 영성의 거름을 주었습니다. 몇 번 어려움이 있었지만, 성령의 이끄심으로 잘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은 더욱 단단해지듯이, 공동체는 신앙 안에서 친교와 화합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른 한인 공동체는 고령화되는 추세인데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젊은 층이 상대적으로 많은 허리가 두꺼운 성당입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한국학교’도 전교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150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글과 한국 문화를 배우려고 성당에 옵니다. 본당 교우의 자녀도 있지만, 지역의 주민 자녀도 옵니다. 자연스럽게 성당을 접한 아이들과 부모는 신앙인이 되기도 합니다. 3년 전에 서울 대교구에서 파견된 부주임 신부님도 있습니다. 신부님은 영어 미사를 담당하고, 청소년 사목을 전담합니다. 신부님은 청소년들에게 영적인 거름을 듬뿍 주고 있습니다. 다된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듯이, 저도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던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의 친교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늘은 ‘견진성사’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성령의 은사를 하나씩 뽑았습니다. 저는 ‘굳셈’을 뽑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뽑은 성령의 은사가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열매 맺어 언젠가 2,000명이 미사 참례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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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순절에 사도들이 모여 있을 때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그들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 여러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람은 그 형체가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그리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20,22)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창세 2,7 참조).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숨, 성령을 불어넣으십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들은 더 이상 문을 잠그고 숨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어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도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사랑으로 위로하셨던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과 같이, 성령과 함께하면 사랑이 생겨나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로 만드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
같은 언어를 써도 마음이 통하지 않을 수 있지만, 성령의 언어는 분열을 넘어 일치로, 두려움을 넘어 사랑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오늘 우리 모두 성령의 손길을 느낍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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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갖가지 모습으로 저희에게 오시어 동행하십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 전례>에서는 성령께서 오시는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놀라운 모습’, 곧 하늘에서 세찬 바람의 소리와 불과 혀의 모양으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고요한 모습’, 곧 ‘닫혀 진 문’을 뚫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부드러운 숨결로 들어오십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늘 문을 열거나, 땅의 문을 열거나 모두 ‘닫힌 문’을 열면서 벌어집니다. 곧 성령의 활동은 ‘문을 여는 일’을 통해 드러납니다. 성령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닫혀 진 문을 부수고, 가려진 장막의 휘장을 찢고, 죽음에 갇힌 무덤을 풀고, 우리의 굳은 마음의 문을 여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이 문을 열고 땅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묘한 것은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열리고, 닫힌 문은 마음에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늘이 열리는 자리는 바로 우리네 삶의 자리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시고, 그러기에 우리는 다른 먼 곳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바로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성령이 베풀어졌고,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제2독서>에서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신비체’는 지체로 이루어진 ‘한 몸’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몸은 바로 성령에 의해 지탱되고 존속됩니다. 그 지체를 서로 결합시키고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평화를 주시는 장면’과 성령으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는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새 백성이 탄생되고, 새 시대인 ‘성령의 시대’가 열리고, 그리스도 몸의 신비체인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닫혀 진 문’을 열고 들어 와 시작됩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닫혀 진 문’ 뒤에 숨어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문을 잠가 놓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닫혀 진 문’을 뚫고 들어오시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니다. 팔레스티나에서 보통으로 표현하던 이 인사는 이제 인간의 구원을 약속하시는 인사가 됩니다. 이제 이 ‘평화’는 주님의 축복이요, 선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재가 방황이요 두려움이라면, ‘예수님의 현존’이 곧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이제 공포는 기쁨으로 바뀌고, 혼란은 질서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숨결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요한 20,21-22)
예수님께서는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라고 하실 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의 원어의 번역은 ‘숨을 건네주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제자들에게 건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를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을 받아라.”는 말씀은 너희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주며, 그러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용서’를 통해, 평화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할 때, ‘평화’는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새롭게 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가 용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하오니, 아버지!
오늘, 이 감격스런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승복하고,
주님의 현존에 푹 젖은 성령강림절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로 저희 사이에, 저희 안에 있는 장벽을 허무소서.
바로 오늘이 ‘용서와 평화의 축제’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성령이시여!
제 안에 흐르소서!
흐르는 골골에 찌든 떼를 벗기시고,
반역과 죄를 몰아내소서!
아픔과 상처 어루만지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소서!
멍들고 굳어진 마음 문지르시고,
접히고 구겨진 마음 펼치소서!
막히고 닫힌 마음 열치시어,
당신의 숨결이 흐르게 하소서!
새로워지고, 새롭게 살게 하소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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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저는 책을 많이 읽기는 하지만, 2번 이상 읽는 책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한 번 읽고 나면 아무리 좋은 내용을 가지고 있더라도 보관하지 않고 성당 도서관에 기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읽는 감정에 지루함이 들어가고, 또 세상에는 새롭게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속 읽어도 지루하지 않은 책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읽을수록 주님께서 빛을 비춰주심을 깨닫습니다.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도 같은 내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 주님께서 직접 제게 말씀해 주시는 생생함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집을 방문해서 성경을 보면 반갑습니다.
언젠가 어느 집에서 거실 한가운데에 자그만 책상이 있고 그 위에 펼쳐져 있는 성경을 보았습니다. 경건함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책 앞에 갔다가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펼쳐 놓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인의 삶은 자기 편한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불편하더라도 계속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펼쳐 놓은 성경책처럼 말로만 신앙인이라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신앙의 기쁨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의 삶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움으로 또 커다란 의미로 매 순간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교회가 탄생한 날이자,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제자들을 통해 세상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 거룩한 날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지요.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0,19)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 또 스승을 버렸다는 죄책감으로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닫혀 있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제자들이 받은 성령은 두려움으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십자가의 참된 평화를 가져다주는 영입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 장면과 일치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는 행위는 십자가의 은총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제2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낡은 자아를 벗고 하느님의 생명을 품은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주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게 됩니다. 우리 역시 성령의 숨결을 받아들일 때 새롭게 창조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훨씬 더 나아진다(빅 페어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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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
오랜 세월 동방 전례의 전통에서 살아오신 ‘이냐시오 드 라타키에’ 총대주교님은 성령의 인도로 살아가는 현대 교회에 성령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잠시 들어볼까요?
『 성령이 아니시면 하느님께서는 너무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인물일 뿐이며, 복음은 죽은 글자며 교회는 수많은 기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권위는 지배로 변하고, 선교는 선전이 되며 전례는 깡마른 과거의 추억이 되고,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의 윤리로 바뀐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는 온 세상이 부풀어 올라, 새 세상을 낳는 출산의 소리를 지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며, 복음은 생명의 힘이 되고 교회는 성삼의 친교가 된다. 권위는 자유를 낳는 봉사가 되고, 선교는 오순절 사건이 되며 전례는 과거를 되살리고, 미래를 끌어당겨 지금 여기에서 맛보게 하는 잔치가 되고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활동이 된다.』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 불꽃 모양의 혀와 같은 성령을 받고 제자들은 배신에 따른 죄책감 그리고 유다인들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을 떨쳐 일어나, 복음 선포의 굳센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도 그 같은 힘을 주십사고 성령께 청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역시 안일했던 신앙, 배신적인 삶, 비겁했던 복음 정신, 나약했던 믿음에 활활 타는 불꽃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는 ‘성령 송가와 복음 환호성’에서 힘이신 성령을 이렇게 찬송합니다. 『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가난한 이 아버지, 은총 주님, 마음의 빛,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행복의 빛’이신 성령님께서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
비록 우리가 세속에 얽매여 신앙의 참된 진리를 증거하지 못하고,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으로 위로받고서 또다시 성령의 뜨거운 믿음을 청해 봅시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2코린3, 17~18)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문을 모두 닫아걸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0,23)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왜 성령을 통해, 용서의 길을 제시하시는 것일까요? 다른 당부 말씀도 많으셨을 텐데! 사실 성령은 제자들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탄생시키고 인도하시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성령을 통해 새로운 삶의 여정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용서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용서가 공동체의 바탕이요 토대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전제로 하지 않을 때, 또 이를 망각할 때,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고,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할 때 우리의 선포는 개인적인 치적이나 영광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공동체에서 살다 보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서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움에서 연유된 것인지, 아니면 서로 받은 상처와 아픔, 분노와 앙갚음에서 연유된 것인지 모르지만, 마음의 문을 닫곤 합니다. 저 역시도 예전 베트남에서 함께 살았던 필리핀 형제로 인해 내적 갈등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인식 차이는 물론 공동체 생활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 그에 따른 삶의 양식이나 습관의 차이로 마음이 불편했고 힘들었습니다. 생각으론 다름은 틀린 게 아니고 다를 뿐이다, 라고 알고 있었지만, 감정으로 동감하기엔 너무 힘들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없는 상황에서 무려 5개월 동안 저와 그 형제만이 살아야 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시간이 저에게는 힘든 도전의 시간이었고 저 자신과 처절한 싸움의 기회였습니다. 저를 단련하고 정화시키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상태는 하느님의 영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의 상태, 혼돈이고 사막과도 같은 황량함이고 어두움의 심연과도 같습니다. (창1,2참조) 이런 닫힘의 상황을 벗어나도록 이끄는 힘은 주님의 영에서만 나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준다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창2,7) 화답송 후렴은 이 신비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 당신 숨을 보내시어,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성령은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주는 생명 창조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성령의 힘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닫힌 다락방을 벗어나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했던 것처럼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영적 갇힘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시는 힘이십니다.
어느 시인이 이렇게 표현했다고 하더군요. 『 바다가 넓어서 배가 마음대로 지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 배가 다니는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하늘이 넓어서 비행기가 마음대로 지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 비행기가 다니는 길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생각도 자유스럽게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저마다 생각하는 길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 사람마다 습관적으로 드러내는 자신만의 생각의 패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없어 보이는 산길도 사람이 자주 다니다 보면 길이 나듯이, 사람의 생각도 한번 그 길이 뚫리면, 그 길로 생각하고 사유하게 됩니다. 용서란 자신이 갖고 있는 이런 좁은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때때로 일상의 틀에서 한 번 벗어나 봐야 한다고들 합니다. 고정된 틀을 깨보는 것입니다. 나무 하나를 보기 위해서는 산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숲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산에서 멀리 떨어져 봐야 합니다. 서로의 관계가 풀리지 않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는 멀리서 바라보면 뜻하지 않았던 좋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한 걸음 떨어져 삶을 바라보면 성령은 우리에게 소중한 생각을 주곤 합니다. 성령은 닫히고 폐쇄된 공동체에 죄의 용서와 함께 화해와 평화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 삶의 방향을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주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을 위해 자신의 영적 내면을 올바르게 정리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온 길을 돌아가야 한다면, 그때까지 걸어온 길에 마음을, 미련을 두지 말고 기꺼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활을 정리하고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그 때에 평화가 새롭게 시작합니다.
성령은 용서와 화해의 은총을 통해, 주님과 우리 서로를 일치시켜 주십니다. 성령은 주님 사랑을 통해 폐쇄적인 우리 마음속에서 끝없이 솟아 나오는 생명의 물과도 같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이 고여 있거나 막혀 있으면 점차 썩어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생명의 물은 나를 통해 이웃을 향해 모든 피조물을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은총은 모두를 위한 공동선에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해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1코 12,6-7)
성령의 일곱 가지 은총인 구원의 신비를 알아가는 지혜, 믿음의 신비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통찰, 마땅히 해야 할 선과 피해야 할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의견,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 될 것을 알 수 있는 지식, 악과 싸워 순교할 수 있는 용기,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공경, 하느님의 뜻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 우리 안에 머물도록 기도드립시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알렐루야”(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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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 함께 걷는 길, 성인이 되는 꿈 ?!
함께 걷는 길, 성인이 되는 꿈
Walking Together Toward Sainthood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Amen.
문득 생각이 나서 올립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결국 성인성녀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세례를 받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부르심 안에 들어선 것이니까요. 그런데 돌아보면 참 많은 신자들이 그 목표를 마음 한켠에 품으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그저 미사에 참례하고 묵주기도 한 단씩 바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마무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성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또 혼자라는 느낌이 들어서 어느 순간 그 열망이 조용히 식어버리는 것이지요.
This is just a thought that came to me unexpectedly, and I share it humbly.
What is the ultimate goal of our faith? Is it not to become saints? From the moment we receive Baptism, we are already called into that vocation. And yet, looking around, it seems that so many of the faithful carry that aspiration quietly in their hearts, while gradually settling into a rhythm of simply attending Mass and praying a decade of the Rosary here and there. The desire to become a saint is there, but they do not quite know how, and the loneliness of walking that path alone causes that longing to slowly, quietly fade away.
생각해보면 수도자들이나 신부님들은 양성과 교육, 영성지도와 공동체 생활을 통해 끊임없이 성덕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이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평신도들은 어떻습니까?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면서도 그 길을 거의 혼자 걸어가야 합니다. 레지오 마리애도 있고, 빈첸시오도 있고, 꾸르실료도 있지만, 그 단체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목적이 있어서 '성인이 되는 것'을 오롯이 중심에 놓고 함께 걷는 공동체라고 하기엔 조금 "다른 결" 이 있습니다.
When you think about it, religious and priests have a whole environment built around their growth in holiness — formation, education, spiritual direction, community life. All of it is structurally provided for them. But what about the laity? They live in the middle of the world, and yet they must walk that path almost entirely on their own. The Legion of Mary is there, the Society of Saint Vincent de Paul is there, Cursillo is there — but each of these communities has its own particular charism and purpose, and it would be fair to say that none of them are centered solely and explicitly around the shared pursuit of becoming saints.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인성녀가 되고자 하는 평신도들이 함께 모여, 같이 배우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순례도 다니고, 서로 격려하며 걸어가는 작은 공동체가 있다면 어떨까 하고요. 매달 한 번 모여 성인들의 삶을 함께 읽고 나누고, 매주 소그룹으로 모여 기도하고, 가끔은 영성지도 신부님께 함께 지도를 받고, 카카오톡으로라도 일상의 신앙을 서로 나누는, 그런 소박하지만 진지한 모임 말입니다. 성소가 있는 분이 계시다면 수도원 체험도 함께 연결해 드리고, 전국의 뜻 맞는 신자들이 네트워크를 이루어 서로 힘이 되어주는 그런 공동체요.
And so this thought came to me. What if there were a small community where laypeople who genuinely desire to become saints could gather together — to learn together, pray together, go on pilgrimage together, and encourage one another along the way? A modest but earnest group that meets once a month to read and reflect on the lives of the saints, gathers in small groups weekly for prayer, occasionally receives spiritual direction together from a priest, and stays connected through everyday faith sharing. A community that helps members discern a calling to religious life or the priesthood, and that gradually forms a nationwide network of like-minded faithful who become a source of strength for one another.
거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같은 목표를 품은 사람들이 함께 걷는 것, 그것만으로도 혼자일 때와는 전혀 다른 힘이 생기는 법이니까요. 교회 역사 안에서도 위대한 성인들은 대부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 곁에는 늘 함께 걷는 동반자들이 있었습니다. 평신도가 살아나야 교회가 완성됩니다. 이 작은 생각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언젠가 작은 씨앗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나눕니다.
It need not be grand or elaborate. Simply walking together toward the same goal — that alone creates a kind of strength that is simply not possible when walking alone. Throughout the history of the Church, the great saints were rarely solitary figures. There were always companions walking beside them.
The Church is made whole when the laity comes alive. I share this small thought gently and with hope, praying that it may one day become a tiny seed within God's loving will.
† 주님, 저희가 함께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 Lord, may we come to You together.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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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박윤식 (big-llight) 260524. 01:01
찬미예수님! Mark Choi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참 좋은 내용입니다.
성인되어 영생의 꿈이 우리 신앙인의 꿈일 겁니다.
그렇지만 '성인되는 꿈'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새계명 내지는 명령인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만큼 우리가 예수님과 이웃 사랑',
또는 '서로 사랑'으로 구체화 시키면 어떨까요?
이 이웃의 대상은 '작은 이'일 겁니다.
예수님은 아빠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시면서 작은 사랑을 지상 과제로 삼았습니다.
저는 이 사랑을 '구역모임' 활동으로 실천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물론 레지오, 꾸르실료, 빈첸시오 등 여러 제 단체 모임을
매일, 주, 월 등 여러 주기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구역모임을 5~7가족 규모로 해 월단위 활동을 통해
예수님 뜻을 정직과 겸손으로 실천하면 성인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저는 이 참에 누군가가 성인되는 멋진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서,
우리 모두가 성인되는 활동을 충실히 하면 참 좋겠습니다.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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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 박윤식 ( big-llight ) 님의 대한 답글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성덕의 핵심이며, 그 사랑의 대상이 '작은 이'라는 점에 깊이 공감합니다. 구역모임을 통한 실천적 사랑의 제안도 매우 귀하고 아름다운 생각입니다.
다만 저는 미국에 살고 있어 한국 교회 현실과 다소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음을 먼저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 전제 아래 솔직하게 나눕니다.
첫째, 구역모임 방식은 자칫 획일적인 틀에 갇힐 수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신자들의 영성적 필요와 삶의 환경은 저마다 다르기에, 하나의 형식으로 모든 이를 담기엔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둘째,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구역 중심의 공동체 구조를 유지해 왔는데, 그 안에서 신앙이 형식화되거나 친목 위주로 흘러가는 경향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구역 중심 방식에 비판적인 시각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 구역모임은 교회의 정해진 지침과 순서에 따라 운영되는 구조적 특성이 있습니다. 제가 꿈꾸는 모임은 그보다 훨씬 자유롭고 능동적이며, 오직 성덕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성격의 공동체입니다.
넷째, 구역모임은 신앙생활의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고, 레지오나 꾸르실료 같은 단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제가 나눈 공동체의 구상은 그 단계를 넘어서, 성인이 되는 것을 명시적 목표로 삼고 보다 깊은 영성 수련을 지향하는 모임입니다. 기존 모임들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워지는 또 다른 차원의 공동체입니다. 그 점에서 두 모임은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릅니다.
좋은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 다른 시각이 만날 때 더 풍성한 생각이 열린다고 믿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평화로운 하루 되십시오.
I wholeheartedly agree that the new commandment Jesus gave us —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 is at the very heart of holiness, and that the recipients of that love are above all "the lㅏㅂㄱeast of these." Your suggestion of putting that love into practice through neighborhood group meetings is a beautiful and deeply meaningful idea.
That said, I live in the United States, and I recognize that my perspective may not fully reflect the realities of the Church in Korea. With that understanding, I would like to share my thoughts honestly.
First, I do have some concern that the neighborhood group format can become overly uniform. Since each person's spiritual needs and life circumstances are different, there may be inherent limitations in trying to gather everyone under a single structured form.
Second, the Korean Church has long maintained a community structure centered on neighborhood groups, and it is fair to say that within that structure, faith life has at times become formulaic or drifted toward social fellowship rather than genuine spiritual growth. This is a perspective I hold with some critical concern.
Third, neighborhood groups operate according to set guidelines and a fixed order established by the Church. The community I envision is far freer and more active than that — a gathering where the faithful come together voluntarily, united by a single shared goal of holiness. In that sense, the two are fundamentally different in nature.
Fourth, neighborhood groups can certainly serve as a wonderful starting point for faith life, as can communities like the Legion of Mary or Cursillo. However, the community I have in mind goes beyond that stage — it is a gathering explicitly aimed at becoming saints, oriented toward deeper spiritual formation and growth. It is not meant to replace existing communities, but to build upon them as a different and higher dimension of communal life.
Thank you again for this enriching exchange. I truly believe that when different perspectives meet, something more abundant is born. Wishing you a peaceful and blessed day in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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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신원일 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6&id=2132684&menu=4770
신원일 [msggsjcy4] 2026-05-23 ㅣNo.189749
■ 본당 내에 '성인성녀가 되기위한 모임'이 생겨야합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모두 성인성녀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많은 천주교신자들이 다 공통적으로 성인성녀가 되고싶어하지만 그것을 달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탓일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성인성녀가 될 수 있는 매개체, 즉 단체모임이 없어서일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천주교신자들은 성인성녀가 되기위해 공동체적으로 서로 협조하며 노력하는게 아니라 혼자 개별적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성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실정입니다. 만약 이러한 신자들의 성인이 되고자하는 원의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있다면 혼자서 성인이 되기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훨씬 더 진보적인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인성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천주교인들의 모임'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 단체의 특성은 성인성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정보와 자료를 학습하고 서로 공유하고, 같이 기도하고, 서로 친교를 나누고, 서로 웃고 즐겁게 지내며, 같이 순례를 다니고, 서로 성인성녀가 되기위해 격려하며 의욕을 북돋아주고,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고,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영성지도를 받고, 혼자 성인이 되기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같이 노력함으로써 외롭지 않고 신나는 신앙생활을 하고, 성소가 있는 신자는 수도회나 교구신부로써 성소를 계발시키도록 하고, 기타 등등의 특성이 있고 그 외에도 참신한 안을 기획시켜 나갈 것입니다. 물론 본당과 수도회가 그러한 성인성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단체로서의 면모를 이미 갖추고 있지만 제가 구상하는 단체가 설립된다면 본당과 수도회에서 하는 기본적인 역할 외에도 많은 면에서 교회에 크게 기여하고 그저그런 신앙적 목표를 넘어 성인이라는 큰 목표를 심어줌으로써 교회의 성덕을 크게 진전시키는 계기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현재 본당과 수도회는 신자들이 영성적으로 성인이 되기 위해 사목하는 시스템이 질적으로 낮은 수준만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인이라는 큰 수준의 목표를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프로그램, 단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수도자, 교구신부님들은 영성을 높이기위해 많이 교육과 양성을 받는 기회가 많으시지만 일반 평신도들은 영성과 성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을 기회, 모임, 단체가 없어 영성적으로 낮은 수준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평신도들이 살아나야 교회가 완성됩니다. 평신도들의 영성수련모임을 만들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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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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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령으로 인한 참 생명, 영적 생명, 종말론적 생명!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 세상 그 어떤 진귀한 선물보다도 값진 선물을 선사하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건네는 과정이 특별합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요한 20,22)
여기서 ‘숨을 불어 넣는다.’는 표현은 아주 의미심장한 상징입니다.
창세기에 이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 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생명을 주셨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냥 생명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입니다.
생명 유지의 본능에 따른 아무런 의식 없이 호흡하는 생명을 넘어, 죄로부터 해방된 인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사랑의 숨, 영혼의 숨을 쉬는 새로운 생명 말입니다.
하느님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 성령과 무관하게 살아가며, 그저 한 생명체로서의 숨만을 쉬는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엄청난 특권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작 한번 밖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 번이나 거듭 태어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해도 과분한데, 세례를 통해 우리는 두 번째로 태어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상에서의 삶이 다하는 죽음의 순간, 또다시 영적으로 새출발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 인한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생명의 숨, 성령의 숨을 불어넣으시며
참 생명, 영적 생명, 종말론적 생명을 수여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장,22)
생명의 수여는 유다교 전통 안에서 죄의 용서와 늘 연결되었습니다.
죄는 죽음을 상징했으니까요.
죄의 용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기 위한 사다리였습니다.
죄의 용서는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말끔한 청산, 부서진 인생의 완전한 복구, 새 출발의 기점을 의미합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숨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진정 생명의 숨결, 성령의 숨결, 사랑의 숨결을 호흡하고 계신가요?
혹시라고 그저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한 거친 동물적 호흡만 숨 가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하루 우리들의 숨결, 호흡을 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호흡을 좀 더 길게 가져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막의 교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매 순간 끊임없이 거듭되는 이 호흡을 좀 더 의식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숨을 들이마실 때, 이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들이마신다고 생각하며 숨을 들이마십시다.
그리고 잠시 멈춘 다음 날숨을 내쉴 때는, 우리 내면의 죄와 죽음을 몰아낸다고 생각하며 호흡합시다.
내 안의 분노, 상처, 용서못하고 있는 사람들, 복수심, 중오심을 말끔히 몰아낸다고 생각하고 호흡합시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위대한 성인들의 기도방법이었습니다.
호흡만 길게 가져가며 잘 살펴도 아주 좋은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당 15분만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하찮게 여기지 마시고 진지하게 한번 반복해보시기 바랍니다.
보호자요 인도자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 삶, 새 생명을 다시 한번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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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성령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세상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장면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던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은 흙에 불과했지만,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자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주심으로 죄로 인해 죽어버린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일을 이어받아 세상을 새롭게 하십니다.
먼저 성령께서는 우리를 세상으로 파견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 20,21)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이제 제자들을 보내시어 그 구원의 사명을 이어가게 하십니다. 제자는 단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죄와 욕망에 대해 죽고, 은총과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또한 용서의 은총을 주십니다.
죄는 인간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며, 인간 안에서도 분열을 일으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후 하느님을 피해 숨었고, 서로를 탓하기 시작했습니다. 죄는 관계를 깨뜨리고 생명의 흐름을 막아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는 막힌 것을 열고,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주며, 분열된 삶을 하나로 회복시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일치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일치이시지만 죄는 분열입니다. 성령께서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게 하시고, 낯선 사람들을 한마음 한 뜻이 되게 하십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입니다. 각자 다른 모습과 역할을 지녔지만, 모두 한 몸 안에서 사랑과 생명을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두려움에 숨어 있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좇던 사람들이 자신을 내어놓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도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세상은 여전히 분열과 갈등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보다 물질과 욕망을 더 따르고, 서로 다투며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또한 유혹과 죄 앞에서 자기 자신 안에서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는 더욱 성령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용서와 화해를 전하고, 사랑과 생명을 나누며, 분열된 세상을 하나 되게 하라고 부르십니다. 옛 인간은 죄와 욕망에 대해 죽고, 새로운 인간은 사랑과 생명 안에서 살아가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 저희 안과 밖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가 사랑과 일치 안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는 하루의 삶 속에서 정말 성령의 이끄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욕심과 욕망, 두려움과 유혹에 더 쉽게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 지 깊이 돌아보십시오.
2. 내 마음 안에는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상처와 끊어진 관계가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께서 주시는 화해와 일치의 은총을 받아들여, 먼저 손 내밀 용기를 가지고 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3. 성령께서는 오늘 나를 어디로 파견하고 계십니까? 나는 말과 행동 안에서 사랑과 생명을 전하며, 세상 안에 희망을 비추는 작은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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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참 좋은 선물”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 복음 환호송이 참 좋습니다. 오늘 성령강림대축일은 교회가 태어난 생일이요 사랑하는 이웃 불자들에게도 참 반갑고 기쁜 <부처님 오신날> 입니다. 성령의 은총이 불자들에게도 풍성히 내려 한 형제자매들로 살게 되었으니 참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제 오늘로서 부활시기는 끝나고 내일부터는 성령 충만한 연중시기를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과 성령강림 부속가는 얼마나 가슴 가득 행복을 안겨 줬는지요! 아쉽지만 일부만 인용합니다.
“하느님, 당신 얼을 보내시고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그 빛살을 내리소서.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저희 생기 돋우소서.
성령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성령칠은 베푸소서.”
성령의 은총 선물이 얼마나 황홀합니까! 차고 넘치는 행복의 5월 성모성월,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더욱 성모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성령입니다. 하느님이 저에게 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하면 저는 두말할 것 없이 성령을 청할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진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강림대축일을 맞아 뽑게되는 성령칠은의 은총은 얼마나 풍성합니까?
1.굳셈; 어려움 속에서도 선을 실천하는 은사
2.효경; 하느님께 자녀다운 마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은사
3.경외; 잘못에 무뎌지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서게 하는 은사
4.의견; 선택 앞에서 길을 찾게 하는 은사
5.지식;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보게 하는 은사
6.통달; 말씀과 진리의 숨은 뜻을 꿰뚫어 보게 하는 은사
7.슬기; 하느님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게 하는 은사
성령의 열매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는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롭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두가 은총이요 은사이옵니다, 도대체 성령님의 선물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랑할 분이 있다면 주님이요 성령뿐입니다. 이를 깨달아 알 때 저절로 겸손이요 감사와 찬미입니다.
무엇보다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 주님을 통한 평화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임할 때 <두려움의 벽>은 활짝 열린 <평화의 문>으로 변합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 말씀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와 더불어 기쁨 충만한 제자들인 우리들에게 평화를 다시 선사하시며, 세상에 평화의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주님의 준비가 참으로 치밀합니다. 숨을 불어 넣으며 말씀하십니다. 이 생명의 숨, 성령을 받음으로 새롭게 창조되어 비로소 진짜 하느님 자녀로서의 참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마음 활짝 열고 무상의 참 좋은 선물 성령을 받기만하면 됩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가 용서하지만 실제 우리를 통해 성령님인 하느님이 친히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은혜가 은사가 차고 넘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은사는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당신 교회공동체를 좋아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보십시오. 오늘 독서 셋의 배경은 한결같이 교회공동체요 성령의 1차 활동무대 역시 교회공동체입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성령 강림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모두가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을 때 놀라운 소통의 일치의 기적이 발생합니다. 바벨탑 사건의 불통으로 뿔뿔이 헤어졌던 사람들이 성령의 은총으로 소통의 일치, 다양성의 일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이 만드는 것은 불통에 분열이지만 성령은 소통에 일치를 이뤄줍니다. 사방에서 온 사람들의 고백이 바로 소통과 일치를 증언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은가?”
성령이 함께 할 때 소통에 다양성의 일치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중대한 일을 앞에 둔 공동체가 반드시 부르는 <오소서, 성령이여>로 시작되는 성령성가입니다. 일치의 성령이자 은사의 성령입니다. 은사중의 은사가 사랑의 은사요 공동선을 위한 은사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명쾌한 설명이 고맙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이 모든 은사는 한분이신 성령께서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니 모두가 성령님의 은총이요 은사이니 자랑할 분은 내가 아니라 성령님입니다. 그러니 형제자매들의 은사에 질투하거나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공동선에 기여하는 은사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이들 역시 남을 무시하거나 교만함이 없이 성령의 선물에 감사하며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어지럽고 혼란스런 세상입니다. 꿈들은 사라지고 길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요 자기를 잃은 사람들이 날로 늘어갑니다. 죄도 많으니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이런 영육으로 병든 이들 위에 건축되는 AI 문명은 말그대로 사상누각, 모래 위의 집처럼 위태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5월 <신록의 산>같은 사람입니다. 오래전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산이다."<2006.5. >
성령임이 답입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께는 하루하루 날마다 성령을 보내주시니 날마다 성령강림축일이 됩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성령뿐이요, AI에 대한 궁극의 답도 성령뿐입니다. 성령에 따라 성령 충만한 삶을 살 때 비로소 온전한 참삶의 실현입니다. 정말 공부하고 배우고 살아야 할 <성령학>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매일미사를 통한 성령의 은총이 우리 삶을 부요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나 성령의 은혜를 간직하고,
이 영혼의 양식으로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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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07:00 추가
<“성령을 받아라.” -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19-23)>
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는 일부터 하신 것은, 그들이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7-49).”
이 말씀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받는다고)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여라.”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신 다음에 곧바로 ‘용서의 권한’을 주신 일”은, 루카복음에 있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선포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대리해서 사람들의 죄를 실제로 용서하는 일을 하는 것까지 사도들의 임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용서의 권한’을 주신 일은, 단순히 권한만 주신 일이 아니라 실제로는 ‘직무’, 또는 ‘임무’를 맡기신 일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게 하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죄를 용서하는 일은 예수님을 대리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수행해야 하는 일이고, 권한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면 안 되고, 직무유기나 직무태만도 안 됩니다.
사도들이 받은 ‘고해성사의 권한과 직무’는 주교들에게 계승되었고, 신부들은 교구장 주교로부터 그 권한과 직무를 위임받아서 수행합니다.
<고해성사를 보는 사람 쪽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고해성사는 예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신 특별한 은총입니다.>
2)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나서 곧바로 ‘용서’를 말씀하신 것을, 그 당시의 교회 공동체의 내부 상황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직후에 공동체의 내부 분위기는 몹시 안 좋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배반자 유다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사도들이 잘못한 일들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일도 있었을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탓하는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공동체의 일치가 아주 많이 깨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공동체의 일치를 회복시켜 주는 일부터 하셨을 것입니다.
<성령은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이고, 일치는 사랑, 용서, 화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하면,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지만, 만일에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그것은 성령의 도움을 거부하는 것이고, 일치를 이루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3) 오순절 날 ‘성령 강림’의 가장 큰 ‘수혜자’는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사도 2,41),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을 잘 모릅니다.
사도들이 배운 적 없는 외국어를 갑자기 말할 수 있게 된 것인지, 그렇게 되었다면 그 능력은 그날만 있었는지, 그 후에도 있었는지,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도들 쪽이 아니라, 사도들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들 쪽입니다.
창세기에 있는 바벨탑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흩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창세 11,7-9), 실제로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닫히고, 멀어지고......
마음이 멀어지면서 말도 멀어졌을 것입니다.
성령 강림 때의 상황을 보면, 열린 마음으로 사도들의 말을 들으려고 한 사람들은 말을 알아들었고, 믿었고, 회개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열자 성령께서 그들의 귀를 열어 주셨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사도들의 말을 알아듣고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새 포도주에 취했군.” 하면서 비웃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사도 2,13).
그들은 안 들으려고 해서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만능 해결사도 아니고, 자동 기계 장치도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성령께서 알아서 다 해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에 사로잡혀서 로봇처럼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사람들 앞에 섰고, 자신들의 믿음을 ‘능동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스스로 노력한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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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ang 26.05.24 02:52
“성령을 받아라.” -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 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는 일부터 하신 것은, 그들이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7-49).” 이 말씀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받는다고)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여라.”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신 다음에 곧바로 ‘용서의 권한’을 주신 일”은, 루카복음에 있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선포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대리해서 사람들의 죄를 실제로 용서하는 일을 하는 것까지 사도들의 임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용서의 권한’을 주신 일은, 단순히 권한만 주신 일이 아니라 실제로는 ‘직무’, 또는 ‘임무’를 맡기신 일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게 하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죄를 용서하는 일은 예수님을 대리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수행해야 하는 일이고, 권한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면 안 되고, 직무유기나 직무태만도 안 됩니다. 사도들이 받은 ‘고해성사의 권한과 직무’는 주교들에게 계승되었고, 신부들은 교구장 주교로부터 그 권한과 직무를 위임받아서 수행합니다. <고해성사를 보는 사람 쪽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고해성사는 예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신 특별한 은총입니다.> 2)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나서 곧바로 ‘용서’를 말씀하신 것을, 그 당시의 교회 공동체의 내부 상황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직후에 공동체의 내부 분위기는 몹시 안 좋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배반자 유다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사도들이 잘못한 일들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일도 있었을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탓하는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공동체의 일치가 아주 많이 깨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공동체의 일치를 회복시켜 주는 일부터 하셨을 것입니다. <성령은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이고, 일치는 사랑, 용서, 화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하면,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지만, 만일에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그것은 성령의 도움을 거부하는 것이고, 일치를 이루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3) 오순절 날 ‘성령 강림’의 가장 큰 ‘수혜자’는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사도 2,41),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을 잘 모릅니다. 사도들이 배운 적 없는 외국어를 갑자기 말할 수 있게 된 것인지, 그렇게 되었다면 그 능력은 그날만 있었는지, 그 후에도 있었는지,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도들 쪽이 아니라, 사도들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들 쪽입니다. 창세기에 있는 바벨탑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흩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창세 11,7-9), 실제로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닫히고, 멀어지고...... 마음이 멀어지면서 말도 멀어졌을 것입니다. 성령 강림 때의 상황을 보면, 열린 마음으로 사도들의 말을 들으려고 한 사람들은 말을 알아들었고, 믿었고, 회개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열자 성령께서 그들의 귀를 열어 주셨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사도들의 말을 알아듣고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새 포도주에 취했군.” 하면서 비웃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사도 2,13). 그들은 안 들으려고 해서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만능 해결사도 아니고, 자동 기계 장치도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성령께서 알아서 다 해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에 사로잡혀서 로봇처럼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사람들 앞에 섰고, 자신들의 믿음을 ‘능동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스스로 노력한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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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07:00 추가.
요한 20,19-23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모두가 한 성부로만 노래를 부르는 것을 ‘제창’이라고 합니다. 전체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이는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노래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이는 짜릿한 전율을 느낄 수 있지요. 그에 비해 테너, 베이스, 소프라노, 알토와 같이 성부를 나누어 함께 노래하는 것은 ‘합창’이라고 합니다. 각각의 성부가 내는 서로 다른 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졌을 때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하모니'는 듣는 이들에게 더 풍요롭고 깊은 울림을 주지요. '다름'을 배제하는 제창에서는 느낄 수 없는, '다양성 안의 일치'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차원 높은 감동입니다. 하지만 서로의 ‘다름’을 그대로 간직한채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지요. 고집과 불통, 오해와 갈등, 욕심과 이기주의가 팽배한 각박한 현실에 지치고 실망한 이들은 자연스레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열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완전히 잠가 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아픈 현실이자, 예수님 사후 제자들이 마주해야 했던 암울한 현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잠긴 문을 열기 위해 제자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분은 반대자들의 손에 붙잡힌 당신을 버리고 달아난 그들의 약함을 책망하지도, 그들의 배신을 단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박해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스승을 배신했다는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잔뜩 움츠러든 제자들이 참된 평화를 누리기를 바라셨을 뿐입니다. ‘나는 너희의 약함과 부족함을 충분히 이해한단다. 그래서 너희를 원망하지도, 비난하거나 단죄하지도 않아. 그저 너희가 나에 대한 믿음을 통해 마음 속 상처와 두려움을 극복하고 참된 기쁨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란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인사말 안에는 예수님의 그런 따스한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 따스한 진심으로 꽁꽁 얼어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녹임으로써, 그들이 굳게 닫아건 마음의 빗장을 스스로 풀고 당신 앞으로 나오게 만들고자 하신 것이지요.
그런 마음으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이 가득 담긴 숨결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상처와 두려움으로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은 밖에서 억지로 열 수 없음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문이 안 열린다고 고함을 치고 성질을 부릴수록 더 단단히 잠길 뿐이지요. 상대방이 지닌 허물과 잘못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그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진심을 보여주며 그가 용기를 낼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그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과의 참된 일치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숨을 불어넣으셨다”라고 번역된 부분의 그리스어 원문은 ‘숨을 건네주었다’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 한 번, 부활하신 후에 또 한 번 우리에게 당신의 숨을 건네주셨지요. 첫번째로 건네주신 숨, 즉 그분의 ‘생명’을 통해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구원의 은총을 누릴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로 건네주신 숨, 즉 ‘성령’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함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함으로써 그분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숨을 공유하는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같은 믿음, 같은 성령을 공유하는 형제, 자매들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1코린 12,13)이 된 겁니다. 그러니 나와 한 몸인 이웃 형제 자매들이 죄의 고통과 어둠 속에서 병들어 죽어가도록 방치해 두어서는 안되겠지요. 내 몸 어딘가에 생긴 병을 방치하면 온몸이 병들어 죽게 되는 것처럼, 나와 한 몸인 그들의 고통을 방치하면 우리라는 공동체 전체가 멸망하고 말 테니까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누가 나에게 어떤 잘못을 했든지, 그가 그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멸망하는 일이 없도록,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시는 하느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일이 없도록, 그를 진심으로 용서함으로써 그를 죄라는 속박에서, 나를 미움과 원망이라는 속박에서 풀어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모두가 자유로운 상태로 주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다양성 안의 일치’가 우리 삶에 다채롭고 아름다운 ‘행복의 하모니’를 울려퍼지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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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성령 강림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 17:30 추가.
숨영성 묵상글
성령을 입는다는 것?~~
프랑스의 어느 저술가는 인간의 영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절대로 침범될 수 없고, 변하지 않으며, 파괴될 수 없는 핵심, 절대자께 나아가 그 신성함과 일치할 수 있는 영혼의 날카로운 지점"(자클린 켈렌 Jacqueline Kelen, La Faim de l’Âme)이라고요.
이처럼 영을 내면의 견고한 핵심(그녀는 이를 "침범될 수 없는 내면의 핵"이라 불렀음)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더 나은 통찰을 기대할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널리 이해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1817–1862)는 그의 유명한 책 [월든]에서 숲 속 오두막에서 살기로 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의도적으로 살고자 숲으로 갔습니다. 삶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마주하기 위해…. 나는 깊이 살고, 삶의 골수를 빨아내고, 삶이 아닌 모든 것을 몰아내고, 넓게 베어내고 바짝 깎아내며, 삶을 궁지로 몰아넣어 그 최소한의 요소로 환원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이 얼마나 공격적인 동사들인가요! — '마주하다', '빨아내다', '몰아내다', '베어내다', '몰아넣다', '환원하다'….
이런 '내면의 단단한 핵'에 대한 이와 같이 강력한 언어는 어딘가 설득력이 부족하지 않나요?!!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하거나 쓰지 않습니다. 이런 표현은 묘사라기보다 일종의 도전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영"은 본래 히브리어에서 '숨'(ruach)을 뜻합니다. 이는 단단하고 공격적인 핵을 떠올리게 하기보다 부드러운 들숨과 날숨, 주고받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마 데리비드 소로보다 훨씬 강인했을 성 베드로는 그 '내면의 핵'을 이렇게 부드럽게 표현합니다. "온유하고 정숙한 정신과 같이 썩지 않는 것"이라고요(1베드 3,4).
우리가 내면을 어떻게 묘사하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자기 이해뿐 아니라 하느님 이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첫 번째 모상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을 단단한 기계적 구조로 이해한다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도 그와 비슷하게 딱딱하고 거래적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이미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특히 중세의 하느님에 대한 이해와는 관련이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아버지요 어머니이신 하느님과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보다도 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에페 4,30).
하느님의 영은 온유합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약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한 힘은 언제나 온유합니다.
하느님의 영을 단 한 순간이라도 체험해 본 사람이라면, "절대자께 나아가 신성과 일치하기 위해 파괴되지 않는 내적 핵이 스스로 노력한다"는 식의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 금세 알게 됩니다. 우리가 무슨 영웅적 노력으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말인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입은 사람은 자신의 한없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사랑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을 하느님의 영이 이루시는 업적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사람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처절한 수난과 죽음의 순간에 당신을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죄책감과 내면의 아픔을 치유하고 용서해 주시기 위해 당신의 온유하고 부드러운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며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의 가장 큰 힘은 용서요 사랑이며 끌어안음이고, 이 힘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부드러움의 힘입니다!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겠지만 지금과 같은 혼란과 분열, 단절, 폭력, 불관용의 시대에 이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런 부드러움과 온유의 영을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이런 부드러움과 온유함과 용서와 끌어안음의 영이 내려오시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어쩌면 이런 성령을 입고 살아가는 것은 단 몇 번의 기도를 통해서나 성령 세미나 같은 것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이런 사랑과 용서의 주님 안에 머물고자 하는 끈기 있는 수양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일 겁니다! 물론 성령께서는 사도들에게 하셨듯이 우리의 마음을 단 한 순간에 변화시켜 주실 수 있으십니다만, 그 변화를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데에는 우리의 지긋한 수양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제 마음을 차분하고 가볍게 가지고,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을 묵상하며 쓴 가르멜 수녀회 수도자 제시카 파워스(Sr. Jessica Pawers)의 시 한 구절을 묵상해 봅시다.
"그날,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사랑의 첫 봄을 열어젖혔다.
얼어붙은 핏줄이 녹아 흐르고,
가장 작은 새 한 마리도
영혼 깊은 숲에서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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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 매일묵상
왜 묵상하는가? - 스무 번째 주간 실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저는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기 위해 묵상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관상!
왜 묵상하는가?
2026년 5월 23일 토요일
영적 지도자 테레즈 데스캠프(Therese DesCamp)는 관상적 삶에 대한 자신의 깊은 헌신을 성찰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저는 정신을 더 예리하게 만들기 위해 묵상하지 않습니다. 노화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도 묵상하지 않습니다. 혈압을 낮추거나 스트레스를 줄이거나 마음가짐을 개선하기 위해 묵상하는 것도 아닙니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묵상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묵상에서 따라오는 열매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열매일 뿐입니다….
저는 묵상하지 않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눈먼 사람처럼 되기 때문에 묵상합니다. 이 관상 안에 담긴 내어맡김이 없으면, 저는 가장 깊은 통찰과 내적 시야를 잃어버립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그리고 겸손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도 잃게 됩니다.
제 관상 수행에 대해 덧붙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저는 특별한 깨달음이나 신비로운 체험을 얻기 위해 묵상하지 않습니다. 20분 동안 자리에 앉아 있을 때 무엇을 느끼는지, 어떤 체험을 하는지로 제 수행을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진정한 관상의 기준은, 그 나머지 스물세 시간 동안 제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수행은 말 그대로 수행일 뿐입니다. 수행이란, 본래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도록 나를 준비시키는 과정입니다.
어떤 이는 피아노에서 음계를 반복해 연습함으로써 아름답게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됩니다. 또 다른 이는 프랑스어를 익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지요.
저는 "향심 기도"(centering prayer)를 실천합니다. 삶이 갈라지고 무너지는 듯한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도록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향심기도를 실천합니다. 제가 한쪽으로 비켜 서서 하느님께서 제 안에서, 그리고 저를 통해 일하시도록 길을 내어 드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묵상은 저를 하나의 스펀지처럼 만들어 줍니다. 스펀지의 본래 성질은 물을 머금고, 또 흘려보내는 데 있습니다. 스펀지는 물을 소유하지도, 붙잡아 두지도, 스스로 만들어내지도 않습니다….
묵상 안에서 나는 하느님의 은총, 곧 생명의 흐르는 물로 가득 채워집니다. (운이 좋다면, 그 은총을 실제로 느끼는 순간도 있겠지요. 그러나 내가 그 은총을 의식적으로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나는 언제나 그 은총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묵상 수행의 목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계속해서, 거듭해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채워져 메마르고 먼지 쌓인 이 세상 속에서 사랑을 흘려보내는 젖은 스펀지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References
Therese DesCamp, Hands Like Roots: Notes on an Entangled Contemplative Life (Santos Books, 2025), 135–13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trick Hendry, untitled (detail), 201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고요한 밤하늘 아래, 어떤 사람이 “오직 이 순간(Just This)”에 머무는 관상을 하며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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