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수 (3/4)
조지가 자기 바로 앞에 굴러다니고 잇는 것으로 보이는 생각을 잡으려고 손을 멈칫멈칫하고 있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백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였다.
그 눈 속에는 자기의 영상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영상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
백이 자기의 말을 하나 움직였으므로 조지의 생각은 거기서 끊어지고 말았다.
"당신 차례요" 하는 백이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게임을 더 계속하려는 생각이 당신에게 있다고 보고서 하는 말이오만 ……"
조지는 체스 판을 보고, 아직 자기 쪽 형세가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째서 내가 계속할 마음이 없겠소? 이쪽 형세는 ……"
"지금으로 보아서는 좋지만" 하고 백은 그 자리에서 말참견을 했다.
"당신은 먼 앞을 내다보는 일을 잊어버리고 있소. 나는 이길 것을 목표로 게임을 하고 있는 거요. 그런데 당신은 다만 지지 않으려는 생각만 염두에 두고 있을 뿐이오."
"둘러치나 메어치나 같은 말 아니오!"
조지가 대답했다.
"아니, 다르지" 하고 백은 말했다.
"그 증거를 말해 볼까요? 나는 이 승부에서도, 그 밖에 언제 승부를 해도 틀림없이 이기오."
그 뻔뻔스러움이란 조지를 아찔하게 할 정도였다.
"마로치는 체스의 명수였지만, 끈질기게 버티어나가는 전술을 쓰지 않았소" 하고 조지는 반박했다.
"만일 그의 게임 솜씨를 잘 알고 있다면 ……"
"마로치의 게임이라면 나도 당신이나 다름없이 잘 알고 있소." 하고 백은 말했다."
만일 나에게 그와 승부를 겨룰 수 있는 기화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내가 계속 이겼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소."
조지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꽤 높이 평가하는군."
그런데 백이 그 말에 대해 반격하는 대신 딱하다는 듯한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어 뜻밖의 감명을 받았다.
"아니 ―" 하고 백은 천천히 말했다.
"나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쪽은 당신이오."
그는 마치 감쪽같이 파놓은 함정을 발견하고 문제없이 피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지 머리를 저으며 입술을 약간 벌려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일그러뜨렸다.
"당신차례요."
조지는 머릿속에 떼지어 밀려온 막연하고 불안한 생각들을 애써 옆으로 밀어놓고, 당면한 수를 두었다.
그리고 나서는 분명 자기가 수습할 수 없는 꼴사나운 패배를 당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두 번째 게임에서도 지고, 그 다음에도 또 지자 네 번째 게임에 들어가 온힘을 다 기울여 전법을 바꾸려고 했다.
열한 번째의 수를 두려고 할 때 그는 총공격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망설이다가 결국 그 기회를 놓쳐 또 지고 말았다.
그래서 조지는 찌푸린 얼굴로 상자 속에 말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내일 또 와주시겠지요?"
이 말로 조지는 자신이 완전히 백의 위안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말았다.
"지장이 없다면."
조지는 갑자기 공포에서 오는 한기를 느끼며 가까스로 말했다.
"지장이 있을 리가 있겠소?"
백은 백의 여왕말을 집어들고 손가락 사이에서 천천히 굴렸다.
"루이즈가 방해할지도 모르오, 어쩌면. 만일 루이즈가 당신이 이처럼 게임에 열중하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결심하면 어떻게 되겠소?"
"왜 그 사람이 그런 짓을 하겠소? 지금까지 조금도 그런 눈치를 보인 적이 없소!"
"루이즈는 극단적으로 어리석고 화를 잘 내는 여자라서 ……"
"아니, 여보시오,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고 조지는 아픈 곳을 찔려 자신도 모르게 지껄였다."
"게다가 ―"
백은 옆에서 하는 불평 같은 건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녀는 이 집의 주권자니까. 그런 종류의 사람은 이따금 아무 까닭 없이 자신의 주권을 확인해 보고 싶어하는 법이오. 사실 그것은 그런 사람들의 허영심을 채워주는 양식으로 ― 호흡하는 공기나 다름없이 필요한 것이오."
"만일 그것이 당신의 본심에서 우러나온 생각이라면 ― 당신에게는 다시 이 집의 문지방을 넘을 권리가 ……"
그의 말이 끝나려는 순간 루이즈가 안락의자에서 몸을 부르르 떨며 남편 쪽을 보았다.
그녀는 활기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오늘 밤에는 이제 그만하면 됐어요.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뭔가 좀더 나은 일을 하며 보낼 수는 없나요?"
"지금 치우려던 참이오." 하고 조지는 당황해서 대답했다.
아직도 그의 체스 상대자가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는 말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을 때, 그는 백이 소름끼치는 눈으로 루이즈를 관찰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백은 그가 있는 쪽으로 돌아앉았는데, 그 두 눈이 검은 유리알처럼 반짝였으며 그 속에서 불꽃같이 강렬한 빛이 새나오는 것 같았다.
"그렇지" 하고 백은 천천히 말했다.
"저 여자의 사람됨됨이와, 저 여자가 당신에게 취해온 처사를 생각하면 미워서 몸이 마를 지경이오. 이런 사실을 다 알면서도 당신은 나에게 또 와주기를 바라는 거요?"
지금의 상대방 눈은 냉혹하고 무정해 보이지는 않았다.
또 백이 그의 손에 돌려준 체스 말을 따뜻하고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조지는 머뭇거리면서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이윽고 말했다.
"그럼, 내일 또."
백의 입술이 또 일그러지며 그 차갑게 비웃는 듯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오겠소. 그러나 아무리 해봐야 똑같은 일이오. 당신은 결코 나를 이길 수 없을 거요."
백이 자기를 평가함에 있어 결코 잘못 생각하지 앉았다는 사실은 시간이 증명해 주었다.
그리고 시간 그 자체도 달력이나 시계 같은 수단에 의하는 것보다 무한히 되풀이 되는 체스의 승부에 의해, 또 한 판의 승부를 새기는 서로의 말의 움직임에 의해 훨씬 더 재기 쉽다는 것을 조지는 배웠다.
그것은 즐거운 발견이었다.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란 똑똑히 바라보면 마치 쌍안경을 거꾸로 들여다본 대상물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함부로 남을 밀어내고 찌르고 흔들어대고 끊임없이 설명이며 변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하게 보였으나, 요컨대 그것은 단순한 저 먼 뒤쪽 전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그들이 아무리 가까이 밀려와도 그의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그것은 루이즈였다.
밤마다 세계는 체스 판과 그 맞은 쪽 자리에 앉아 있는 백의 모습을 중심으로 둘러싸였다.
그러나 방 한쪽 구석에서 뜨개질거리를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있는 루이즈의 주위에는 시끄러운 불평과 피할 길 없이 터질 것 같은 비난의 분위기가 조지를 에워싸며 가득 차 있었다.
"왜 그렇게 틈만 있으면 바보 같은 장난에 열중하지요?" 하고 그녀는 나무랐다.
"뭔가 나에게 이야기할 만한 것도 없어요?"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결혼한 지 몇 년 동안에 그는 집안살림에 대해서는 아무 발언권이 없다는 것, 또 그의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의 일 따위는 그녀가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또 그녀의 말에 의하면 <인텔리 냄새가 풍기는> 문제에 대해 그가 생각하는 일은 본인의 가슴에 묻어두는 편이 좋다는 것을 안 뒤부터 그녀에게 할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녀의 방법은 적절하지 않소" 하고 백은 비웃듯이 말했다.
"만일 당신이 집 안에 필요한 가구 같은 것을 들여놓거나 하면 아주 깨끗해져서 루이즈는 쑥스럽고 이상한 느낌이 들 거요. 또 만일 당신과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너무 잘 알게 되면 루이즈는 그 사람들과 사귀고 대접해야 하므로 자기가 교양이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의 판단 앞에 드러내놓게 될지 모르오. 이런 상황 아래 있기 때문에 그런 비참한 판정을 받는 일을 피하여 자기 혼자만의 진공 같은 세계에 틀어박혀 있는 편이 그녀에게 훨씬 좋지요."
늘 그렇기는 했지만, 백의 태도는 조지를 크게 화나게 만들었다.
"중산모 속에서 꺼낸 듯한 고견을 아주 그럴 듯하게 들리는군요. 그럼, 좀 알아야 겠소. ― 어떻게 당신은 루이즈의 일을 그처럼 잘 알고 있소?"
백은 멍청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당신이 아는 일을 알고 있을 뿐이오. 당신이 아는 것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소."
이 말은 주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하게 했지만, 게임에 대한 일을 생각하고 꾹 참았다.
루이즈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온 세계는 다시 비현실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제 현실의 것은 체스 판과 그 위를 너울너울 날아다니며 공격하고, 조지를 감탄케 하고, 실망과 낙담으로 몰아넣는 대담무쌍한 산뜻한 솜씨로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차례차례 쓰러뜨려하는 백의 손이 있을 뿐이었다.
만일 백에게 뭔가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체스 솜씨가 아니라 게임을 할 때마다 체스의 철학에 대해 약간의 잔소리를 늘어놓는 ― 그래서 언제나 마지막에는 주제넘게도 으례 조지의 개인문제에 대한 빈정거리는 말을 늘어놓는 ― 불쾌한 화술에 있었다.
"이것 보오, 체스 두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다 알 수 있다고 하는데 ―" 하고 백은 언젠가 말했다.
"그 사실을 알리라 여기고 말하겠소만, 당신은 자기가 언제나 수세를 취하기를 택하고 ― 그리고 언제나 진다는 사실에 중대한 뜻이 있다는 것을 모르겠소?"
이 정도만이라면 참겠는데, 백이 가장 사납고 악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루이즈가 게임을 방해할 때 ― 조지를 비난하거나 체스 판을 치우라고 말할 때였다.
그런 때 백은 턱에 힘을 주고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그 눈 속에서 무서운 증오가 연기를 뿜으며 불타고 있었다.
한 번은 루이즈가 체스 판 위에서 말을 하나 집어들어 상자 속에다 거칠게 던져넣었는데, 그때 백이 증오를 참을 수 없는 듯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으므로 조지는 그가 어떤 행동으로 나올까 두려워 그를 막기 위해서 일어났을 정도였다.
"그렇게 놀라 일어날 건 없어요" 하고 루이즈는 나무랐다.
"부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이건 알아야 해요. 만일 당신이 지금처럼 바보 같은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내가 손을 끊게 해줄 테니까요. 당신을 그전처럼 착실한 인간으로 되돌아가게 하는데 필요한 일이라면 그런 것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부숴버리겠어요!"
"대답해 주시오!" 하고 백은 말했다.
"멍하니 있지 말고 …… 왜 딱 잘라 말해 주지 못하는 거요!"
조지는 그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멍청히 서서 머리를 내젓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 사소한 사건이 백의 태두에 한 가지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즉 그 뒤부터 말 끝마다 사악한 의도를 비추는 태도가 시작된 것이다.
"저 여자도 만일 체스를 할 줄 안다면 이렇게 소홀히 여기지는 않을 터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도 두려워할 일이 없어질 거요."
"안됐지만" 하고 조지는 소극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루이즈는 바빠서 체스할 시간이 없답니다."
백은 의자에 앉은 채 자세를 바꾸어 그녀를 바라보더니 독기어린 미소를 띠고 다시 돌아앉았다.
"뜨개질을 하고 있군. 저 여자는 언제나 뜨개질만 하던데, 당신은 그것을 바쁘다고 하는 거요?"
"당신도, 참!"
"아니" 하고 백은 말했다.
"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겠소. 옛날에 페넬로페는 남편일 돌아올 때까지 몇 년 동안이나 베를 짜서 끈질기게 치근대는 남자들을 가까이 못오게 했소. 그런 신화에서처럼 루이즈는 몇 년이고 뜨개질에만 열중하여 죽음이 찾아오는 날까지 생명을 근접 못하게 하려는 거요. 저 여자는 무슨 일을 하든 기쁨을 느끼지 못하오. 그것은 누구나 외눈의 반만 있어도 알아볼 수 이는 일이오. 뜨개질을 하여 바늘에서 하나하나 빠져나가는 코는 그대로 죽음으로 다가가는 표시인데, 저 여자는 한순간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기뻐하고 있는 거요."
"그래서 어떻다는 거요! 당신은 그녀가 체스를 하려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그런 당치도 않은 결론을 만들어내려는 거요?" 하고 조지는 믿을 수 없는 말이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체스에 대해서만이 아니오" 하고 백은 말했다.
"생명을 근거로 하여 말하는 것이오."
"그래, 그 생명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지요 ― 지금 당신이 말한 그런 경우에는?"
"여러 가지 것을 뜻하지요" 하고 백이 말했다.
"무엇을 배우려고 하는 의욕, 창조하려는 욕망, 깊은 정서를 느끼는 능력 ― 그밖에도 많지."
"그야 많겠지요" 하고 조지는 비웃었다.
"엄청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을 그게 모두가 아니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