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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막에 나아가는 모세
출 33:7-11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 33:7-11 / [성막을 진지 밖에 치다] 모세는 진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장막을 치고는 하였다. 모세는 그 장막을 만남의 장막이라고 불렀다. 여호와께 여쭈어 볼 일이 있으면 누구나 진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그 만남의 장막까지 가서 여쭈어 보아야 하였다. 8) 모세가 그 만남의 장막으로 나아갈 때는 백성들이 모두 일어나 자기가 살고 있는 천막 앞에 서서 모세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 보았다. 9) 모세가 그 만남의 장막 안으로 들어갈 때 구름 기둥이 내려와 그 만남의 장막 문간에 섰고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다. 10) 온 백성은 만남의 장막 문간에 구름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모두 꿇어 엎드렸다. 11) 여호와께서는 마치 사람이 다정한 자기 벗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듯 모세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씀을 나누셨다. 모세가 진지로 돌아온 뒤에도 모세의 젊은 보좌관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장막을 떠나지 않고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도 모세는 하나님께 계속 그의 백성과 함께 해야 한다고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회막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회막이라 이름하니(7) 고대 모든 족속들은 그들이 믿는 신을 눈에 보이는 형상물로 만들어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일도 이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로 성막을 짓게 계시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중앙에 성막을 짓기 전 임시 장막을 짓고 이름을 회막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은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회막에 들어갈 때에(8-10)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가 기도하며 예배를 드리는 반응을 보였고, 하나님께서는 임재의 증거로 구름 기둥을 보이셔서 당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성경은 회막을 증거막 또는 거주막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머무신다하여 거주막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자신을 드러내 주신다하여 증거막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곳에서 모세를 만나 대면하시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회막이라 했습니다. 회막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 가운데 임마누엘하시는 분이란 것을 보여주고, 임마누엘은 성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그의 몸된 교회로 증거되었습니다.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11) 회막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는 모세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기보다 친구와 같이 속삭이듯 했다는 표현입니다. 모세는 어떤 선지자보다 친밀하고 영광된 교제를 하나님과 나눈 자입니다(민 12:8). 모세가 진으로 돌아오면 여호수아가 회막을 지켰습니다. 모세의 영성을 여호수아가 따릅니다.
적용: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장소인 회막과 같은 성전을 당신은 모세와 같이 항상 습관적으로 찾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한 성전을 세상과 거리를 두고 거룩하게 지키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매주 예배를 잘 드리는 것도 대단한데, 굳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할까요? 우리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른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생각은 내 생각과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도 생명의 샘가 앞에서 듣는 마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 설 교 >
창조적인 만남이 있는 교회
출 33:7-11 / 오정호 목사
신앙생활은 과거를 답습하는 삶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은 믿음의 원금을 잠식하는 마이너스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폭포수를 맞아들이는 플러스 인생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창조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넓어지고 깊어져야 합니다. 생산적이고 건설적이고 간증이 더 많은 창조적인 만남을 통해 계속하여 믿음의 전진과 발전이 있어야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세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창조적으로 만들 수 있는 삶의 원리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역사적 배경을 살펴봅시다. 모세가 하나님께 십계명의 두 돌비를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미숙한 백성들은 두려움이 생겨 금송아지우상을 만드는 영적 반란을 일으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두 돌비를 던져버립니다.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통해 가문을 새로 세우고, 다른 백성들은 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위기의 때에 지도자 모세는 눈물의 기도자가 되어서 하나님앞에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애굽기 32:32). 이렇게 모세가 주님앞에 눈물의 기도로 호소했을 때 주님은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아픔의 배경을 가진 모세의 사건은 우리의 삶에도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창조적인 만남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단장품을 제거(회개)해야 합니다(출애굽기 33:4-6).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불길하고, 실망되는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출애굽기 33:4).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산에서부터 그 단장품(丹粧品)을 제하니라”(출애굽기 33:6). 여기 구약적 표현인 “단장품을 제거한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의미입니다. 신구약 전체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한다는 의미로 재를 뒤집어쓰거나, 베옷을 입었습니다(참고, 욥기2:8, 시편30:11). 이런 행위는 자기 애통에 대한 외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자의 모습으로 있을 때 창조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사람을 만나기 이전에 하나님을 만나는 현장입니다. 단장품처럼 스스로를 꾸미고 있던 자신의 과거 죄들을 다 제거하고 주님 앞에서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임을 고백할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현대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지금도 기다리시며 죄인에게 용서의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앞에서 우리의 심령을 가리고 왜곡시킨 가면을 벗어야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이고 은혜로운 만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신약에도 보면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말했습니다(에베소서 4:22). 하나님의 의(義)의 세마포(細麻布)를 입기 위해서는 과거 옛사람의 흔적과 누더기는 벗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나의 왜곡된 체면, 허위허식, 가면, 부정적인 생각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정말로 자신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죄인인지를 깨닫는 만큼 하나님은 변화의 역사를 우리에게 일으켜 주십니다. 장식품을 제거할 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 진리로, 하나님의 의의 옷으로 덧입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과의 창조적인 만남을 이루기 위해서는 만남의 장소를 확보해야합니다(7절).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會幕, meeting tent)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7절). 영적 지도자된 모세는 백성들에게 바른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기 위해 하나님과의 만남장소인 회막을 세웠습니다. 우리들도 새벽부흥회가 있는 교회든 골방이든 직장이든 하나님을 만나는 구체적인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도 새벽 미명(未明)에 한적한 곳에 나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마가복음 1:35). 나와 주님사이에서 가면 쓰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를 완전히 드러낼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우리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전인격적으로 주님 앞에 회복의 은혜를 누리고 치유될 수 있습니다.
또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다른 죄악에 빠지지 않고 영적인 성숙과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을 지키게 하기 위해 회막을 세웠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고 영적인 간증을 회복하고 영적인 재충전을 하는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진작시키고 스스로가 주님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면 장소는 은총의 현장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곳입니다. 여러분의 만남의 지성소는 어디입니까?
셋째, 하나님과의 창조적인 만남을 이루기 위해서는 살리는 생명의 대화(기도)가 있어야합니다(11절).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陣)으로 돌아오나”(11절a).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은 관계”라 함은 허물이 없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친구와 대화함같이 우리 주님은 모세뿐 아니라 우리와도 동일하게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살아있는 대화가 창조적인 만남의 필수적인 조건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를 할 때 대화의 수준을 조정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서 과거의 뻔한(stereotype) 이야기가 아닌 뭔가 깊이 있고, 새롭고 마음 담긴 대화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에서 주목할 것은 모세의 기도가 일상생활과 연결되는 기도였다는 점입니다. 산위의 기도와 산 아래의 삶이 연장선상에 서 있어야합니다. 예배드리는 행위와 현재 삶의 모습이 연결선상에 있어야합니다. 교회생활은 직장생활로, 지상생활은 천상생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변혁은 기도의 변혁과 맞닿아 있습니다. 살리는 대화를 시도하십시오. 우리자신과 타인을 살리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바탕한 어떠한 대화도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면을 벗고, 주님과의 만남의 장소를 확보하고, 살리는 대화가 있을 때 우리는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향력 있는 삶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① 이웃에게 희망과 기대를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세가 회막에서 주님을 만나러 나아갈 때 백성이 다 일어났습니다(8절). 모세는 백성의 지도자답게 하나님 앞에 말씀을 받으러 기도하러 들어가고 온 백성들은 그 일에 마음을 모읍니다. 비록 죄지은 백성이지만,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갖기 시작합니다. 성도는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 소망과 빛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오염되어도 성도된 우리가 올바로 살려고 하는 그 모습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희망과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게 됩니다. 교회가 사회에 대한 희망의 공급원이 되지 못하면 사회는 갈길을 잃어버립니다.
② 예배의 확산으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10절). 모세가 회막문에 들어갈 때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영광의 구름기둥이 나타났습니다. 그럴때 모든 백성이 일어나서 모세가 섬기고 경배하는 주님 앞에 일어나 각기 장막문 앞에 서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하나님을 만나서 경배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이 경배가 나 혼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경배할 수 있도록 경배의 근원으로 사용해 주십니다.
③ 한사람을 세웁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믿음을 세울 뿐 아니라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우는 사명자들입니다.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隨從者)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11절b). 일정기간동안에 머무르다가 모세는 진(陣) 즉, 삶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한 그 모습들을 청년 여호수아가 살폈습니다. 후일에 모세가 세상을 떠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영적 지도력을 철저하게 준비된 여호수아에게 맡겼습니다. 기성세대인 우리는 다음세대를 말씀의 세대로 세워야합니다. 다음세대를 말씀으로 세우지 않으면 우리의 다음 세대는 무너지는 세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됩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지도자로 성장했듯이 우리의 다음세대가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를 디딤돌로 삼아 믿음의 세대로 우뚝 서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단장품처럼 달고 있던 체면, 허위허식, 가면, 부정적인 생각과 죄들을 주님앞에서 다 제거하고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임을 고백함으로 하나님과의 창조적인 뜨거운 만남을 회복합시다. 주님과의 영적 사이클이 맞는 곳을 확보하여 전인격적으로 영적인 재충전과 치유를 경험하는 은혜를 누립시다. 삶과 연결되는 살아있는 기도를 통해 예배와 삶을, 지상생활과 천상생활을 연결시키는 창조적인 삶을 삽시다. 우리의 가면을 벗고, 주님과의 만남의 장소를 확보하고, 살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하고 예배함으로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교회가 하나님과의 창조적인 만남이 있는 교회로 자리매김합시다. 이웃이 우리를 주목할 때 희망의 불꽃을 일으키는 이 시대의 영적지성소로 인지하도록 합시다.
성령님의 임재가 있는 교회
출 33:7-11 / 윤동규 목사
세계 3대 피자회사로 피자헛(Pizza Hut), 도미노(Domino), 리틀 시져스(Little Seasers)를 꼽습니다. 이 세 회사는 저마다 독특한 판매 전략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피자헛은 다양한 메뉴를, 도미노는 남보다 빠른 배달을 리틀 시저스는 싼 가격을 판매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특징이 그 회사들을 세계 1,2,3위의 피자 회사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마케팅 전문가들이 파파존스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를 연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파파존스는 “피자의 본질로 승부를 건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피자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두말할 것 없이 맛입니다. 최고의 재료를 사용해서 최고의 맛으로 고객을 끌어들인다는 게 파파존스의 전략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어떻게든 나의 예배가 살고 우리 교회의 예배가 살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대충 예배 드리면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기 원하세요? 오늘 모세의 회막에서 있었던 것처럼 성령님의 임재가 있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뭐 인간의 테크닉으로 기가막히게 준비한 이벤트 같은 예배로 성령님의 임재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바다의 파도를 인간이 일으킬 수 없듯이 성령님의 임재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임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언제 성령님이 임하시는지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회막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1)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 (은혜)를 사모할 때입니다.
출애급기 33:8에 보면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여기 말씀에 보면 모세가 회막으로 들어갈 때 백성들이 어떤 행동을 보여 주었습니까?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백성이 다 일어나 회막에서 눈을 떼지 않고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끝까지 회막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행동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 은혜를 끝까지 사모했음을 보여주는 바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출33:9 -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라고 했습니다. 곧 주의 임재가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주의 임재를 나타내십니다.
(2) 전심으로 (예배드릴) 때입니다.
출애급기 33:10에 보면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라고 기록합니다. “서서” 예배 드렸다고 합니다. 왜 섰겠습니까? 은혜가 임하니까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에 감격과 환희가 있으니까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예배가 이런 예배가 되기 원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시쿤둥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마음을 다해서 온 힘을 다해서 드리는 예배 이런 예배가 우리 교회에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찬양에 능력이 있습니다. 전심으로 찬양부를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에 찬송가만이 아니라 복음성가도 넣은 이유는 (1) 찬양 중에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2) 찬양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기를 원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3) 주의 임재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출애급기 33:11에 보면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라고 기록합니다. 여기 여호수아를 보세요. 여기 여호수아는 모세에 비하면 비교도 안되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홍해도 가른 기적의 사람이죠. 십계명도 받은 언약의 사람이죠. 그를 비난하던 사람이 문둥병자가 되어 버리는 체험을 한 아무도 그를 넘보거나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여호수아는 모세의 젊은 수종자에 불과 했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모세의 어린 비서입니다. 모세와는 견줄래야 견줄 수 없는 볼품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모세도 해내지 못한 가나안을 정복하는 위대한 일을 감당해 내는 인물이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세는 진으로 돌아와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곧 그는 전적으로 기도와 예배에 생명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는 모세가 체험한 하나님의 임재를 자신도 사모하면서 모세는 진으로 돌아가도 여호수아는 끝까지 남아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기를 기도했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연약한 저에게 임재해 주옵소서.” 이것이 그가 회막에 남아 드린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연약한 존재였지만 주의 영의 임재로 모세도 해 내지 못한 존귀한 존재로 쓰임받는 놀라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쓰임받기 원하세요? 여호수아처럼 성령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기도하세요. 사모함으로 예배에 임하세요. 주의 영이 여러분을 사로잡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주의 임재가 있는 인생에 놀라운 변화와 축복된 삶이 있습니다.
여러 번 결심하고 넘어지고 또 넘어져서 아예 변화될 것을 포기한 분이 계십니까? 몸부림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는 것 같아서 주저 않은 분이 계십니까? 은혜의 파도, 응답의 파도는 여러분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정확한 계획과 타이밍으로 축복의 파도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사모하며 전심으로 예배 드리고 기도할 뿐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가 주의 임재를 체험해서 제단에 발을 디디기만 해도 주의 임재가 느껴지는 감동과 눈물과 변화와 기적이 있는 그런 축복의 제단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막을 떠나지 아니한 모세와 여호수아
출 33:9-11 / 피종진 목사
모세와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회막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성막이 지어지기 전에 모세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사용한 장막입니다. 회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의 대지도자가 회막을 떠나지 아니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명이 중요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회막을 떠나지 아니한 모세와 여호수아는
첫째, 성전 출입을 귀중히 여겼습니다.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출 33:8)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에 출입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출입하는 것이 유엔본부나 미국의 백악관, 영국의 왕실, 한국의 청와대에 출입하는 것보다 귀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전에 출입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신앙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를 가까이 할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신앙으로 구원을 받았고, 신앙으로 축복을 받았으며, 신앙으로 나라가 부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에 안주하여 신앙의 본질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성전 출입을 등한히 하고, 예배를 등한히 하고 있습니다. 본질을 상실하면 마치 골조 없는 집과 같습니다. 신앙은 본질입니다. 신앙은 인생의 기초요, 국가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없는 인생과 국가는 영원한 승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신앙의 본질이 있으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 때문에 자유롭고 담대하게 성전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인 휘장을 찢어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히 10:19,20).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성전 출입을 귀중히 여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출 33:9) 하나님께서는 회막에서 모세와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곧 기도입니다. 이사야 56장 7절을 보면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향하여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고 말씀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을 체험하는 통로이며, 신령하고 은밀한 지혜와 지식의 창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이사야 55장 6절을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을 주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삶이 힘들고 복잡하십니까? 지체하지 말고 성전에 나와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셋째,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 33:13) 회막을 떠나지 아니한 모세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출 33:17). 은총이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부와 지위, 명예를 얻었다 할지라도 마음에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항상 메마른 사막과 같은 갈증과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비록 가난하고 지위와 명예가 없어도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다니엘 9장 23절을 보면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다니엘에게 전해준 말씀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귀한 사람이 된 것은 그가 하나님께 크게 은총을 입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495장 1절을 보면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는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변화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은총을 얻게 해주십니다(잠 11:27). 또한 은총을 입은 자의 생애를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빛나게 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막을 떠나지 아니한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성전 출입을 귀중히 여겨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출애굽기 33:9-11, 요한복음 4:20-24 / 이성희 목사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일 때 영국정부는 온 국민이 존경하는 윌리엄 템플 감독에게 전쟁공포에 떨고 있는 영국 국민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템플 감독은 전 영국국민들에게 라디오메시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다른 어떤 때보다도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 예배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상처받고 신음할 때, 하나님의 사람이 빛을 잃을 때가 예배할 때입니다. 세계가 전쟁과 테러와 갈등 가운데 고통당하고 있을 때가 예배할 때입니다. 자연과 환경이 신음하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물과 식물이 죽어갈 때 우리는 예배할 때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꾸시는 일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는 일입니다. 토미 테니는 “어떤 것도 열정적인 예배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신다면 어떤 사람을 찾으시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찾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예배 때문에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구약에는 두 천사가 아브라함을 찾아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예고합니다. 이 두 천사는 다시 소돔에 가서 롯의 집을 찾아갑니다. 천사들은 롯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예고하고 가족들과 함께 떠날 것을 일러줍니다. 천사들은 의인을 구하려고 소돔에 찾아온 것입니다. 신약에는 천사가 가이사랴의 고넬료를 찾아갑니다. 그는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에 힘쓰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천사는 고넬료에게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오라고 하였고 베드로가 와서 고넬료의 집에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찾으십니다.
천사가 세상에 내려와 찾을 때마다 의인을 찾습니다. 경건한 자를 찾습니다. 진실한 자를 찾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막 예배는 예배의 원형입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는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실 때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은 내려오셔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10에는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라고 합니다. 광야에서 회막을 지으신 뜻은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11절에는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대화는 인격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혜 중 가장 뛰어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 중 가장 뛰어난 행위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오신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가 되심을 축하합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데 오늘 여러분들을 바로 찾으셨습니다. 우리의 평생의 삶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되고 주일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 예배가 되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요한복음 4:21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합니다. 아버지께 예배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예배는 예배의 대상이 분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예배를 받을만한 바른 대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라고 하나님의 백성을 출애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라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으로 합당하신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배의 유일한 대상입니다. 시편 29:2에는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고 합니다.
브라우닝은 모든 예배는 하나님과 같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배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주를 찬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배는 한 마디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데서 시작합니다.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1:3에서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예배하라고 해방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배를 잊었다는 하나님의 한탄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이방신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가나안의 신은 ‘바알’이라는 남신과 그의 배우자 ‘아세라’가 있습니다. 모압에는 ‘그모스’라는 신이 있었습니다. 블레셋에는 ‘다곤’이라는 신이 있었습니다. 암몬에는 ‘몰렉’이라는 신과 ‘밀곰’이라는 신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변방국가가 가지고 있던 이런 신들을 받아들여 하나님과 바꾸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런 이방의 신이 이스라엘에 들어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아합왕의 왕비인 이세벨은 ‘아세라’를 들여와 하나님을 대치하여 악을 행하고 하나님은 노엽게 하였습니다.
인간에게는 숭배본능이 있습니다. 해, 달, 별, 나무, 바위, 산, 바다, 짐승 그 외에 닥치는 대로 신을 만드는 인간의 본능이 있습니다. 이 숭배본능으로 예배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일본에는 팔백만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인도에는 일억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놀라지 마세요. 한국에도 팔만팔천 신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민족이 가지고 있는 신도 만만찮습니다.
사도행전 17:23에는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아테네에 갔을 때에 얼마나 많은 신이 있는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 너무 많아 이름이 없는 신도 있었습니다.
월터 윙크(Walter Wink)는 “예배란 집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행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합니다. 교회는 누구의 집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이곳에서 오로지 하나님만 예배의 대상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에서 어떤 다른 대상도 예배의 주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느헤미야 7:1에는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라고 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마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이냐 하면 문지기를 세우는 일입니다. 외적의 침입을 막는 일입니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벽을 잘 쌓고 문단속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가 침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한 일이 예배자를 세운 일입니다. 노래하는 자들인 찬양대를 세우고, 레위사람으로 하여금 성전 봉사자로 세웠습니다. 이들을 세워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하게 하려고 예배자를 세운 것입니다. 바른 예배자를 세우고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장 우선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목사나 장로가 아닙니다. 돈이 많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로지 찾으시는 사람은 예배자입니다.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참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시편 84:10에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합니다.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참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되려면 좋은 예배자가 되세요. 좋은 예배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찬송가 503장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 요구하도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여기 오면 있더라’라고 할 수 있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인 우리교회를 통하여 이 집의 주인인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가 참 예배하는 교회, 하나님의 찾으시는 사람들을 만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요한복음 4:23에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되 참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참 예배란 말은 참 예배가 아닌 예배가 있다는 뜻입니다. 참 예배가 아닌 예배는 영과 진리가 빠진 예배입니다. 알맹이가 없는 의식적인 예배입니다. 바리새인의 형식적인 예배를 예수님은 책망하십니다. 마태복음 15:8에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고 하십니다. 마음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마음에 없는 찬송, 입으로 하는 기도, 가슴에 담지 않는 말씀, 정성이 없는 봉헌,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기록은 성경에 두 차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성전을 숙정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한 번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숙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성이 없는 예배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제사는 정성이 빠져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성전에 올라와 성전 뜰에 와서 적당히 돈을 바꾸고 제물을 사서 제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가 어떤 예배일까요? 21절에서 말하는 ‘아버지께 예배’와 같은 말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는 영과 진리의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므로 진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의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참되게 예배’하는 것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도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참’이란 말은 ‘진리’라는 말입니다. 참 예배는 진리의 예배인데 진리의 예배란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믿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이고 진리의 예배입니다.
히브리서 11:6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예배하는 자입니다. 예배하는 자의 도리는 하나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고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라는 말입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란 예배의 예복을 잘 갖춘 예배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예배의 내용과 형식이 잘 갖추어져야 합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란 경건성과 축제성을 겸비한 예배입니다. 이 중에 어느 하나도 상실하면 참 예배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2:11-12 상반절에는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이라고 합니다. 임금의 잔치에 초대 받아 갈 때에는 최소한의 예복이 필요합니다. 왕에게 나아갈 때는 예의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최소한의 예복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복은 예배하는 자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경건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배자의 최소한의 예를 갖추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배자의 마음이 필요하고, 예배자의 의복이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과 형식이 없이는 참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방 사원게 가보면 어떤 사원에는 꼭 모자를 써야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원에는 다리를 보이지 않게 가려야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지난 번 발리에 갔을 때 ‘울루와뚜 절벽사원’에 가보니 그 사원에 들어갈 때는 허리에 띠를 묶어야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원에도 들어가는 최소한의 예복이 있는데 하물며 교회이겠습니까?
신학자 하비 콕스는 세 가지 유형의 교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자유와 정의를 지향하는 출애굽기의 교회입니다. 둘째는 감사와 축제가 있는 시편의 교회입니다. 셋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하는 계시록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나 계시록보다 시편이 훨씬 더 깁니다. 이건 저의 해석인데 우리의 교회생활에서는 감사와 축제가 다른 것보다 더 많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비 콕스는 “예배에서 축제성이 상실된 다음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이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축제와 같은 기쁨이 없으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예배가 역동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경축입니다. 예배는 즐거움이 있는 잔치입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볼 때 가장 기독교가 강하게 성장하는 지역이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입니다. 이 지역의 교회들은 열정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가 축제입니다. 찬송과 춤이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예배에 참여해보면 3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습니다. 찬송과 기도와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성장하고, 기쁨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우간다에 가서 그들의 예배에 참여해 보니까 작은 북인 봉고를 껴안고 치면서 쉴 새 없이 ‘하나님 사랑합니다’란 뜻의 ‘아포요 뭉구’를 외칩니다. 예배 전체가 춤이며, 찬양이며, 축제입니다. 오래 전에 브라질에서 예배를 드리고, 코스타리카에서 예배를 인도하는데 이 사람들은 서서 노래하고 몸 찬양을 하는데 거의 3시간가량 예배합니다. 쉬지 않고 웃으며 즐거워하며, 박수치며 예배하는 것이 마치 잔칫집이었습니다.
시편 118:24에는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예배는 경건함과 더불어 이런 즐거움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의 기자는 이런 예배를 드릴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결 론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가 즐거워야 한답니다. 첫째, 눈이 즐거워야합니다. 둘째, 입이 즐거워야합니다. 셋째, 귀가 즐거워야 합니다. 넷째, 몸이 즐거워야합니다. 다섯째, 마음이 즐거워야합니다. 예배는 우러러 하나님을 보면 눈이 즐겁고, 찬송하면 입이 즐겁고, 말씀을 경청하면 귀가 즐겁고, 교회에 오고가면 몸이 즐겁고, 성도가 서로 교제하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예배야말로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참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일마다 마음이 흥분되고, 즐거움이 살아나고, 새로움이 샘솟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들어오시는 모습만 보아도 설렘이 있고 기대가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마음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보다 더 설레고 더 크게 웃고 계실 것입니다.
예배 받기를 즐겨하시고, 예배 받으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예배하는 자를 행복하게 하십니다. 오늘도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너 왔구나”, “너도 왔구나” 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반면에 ‘어, 아무개 안 보이네“ 하시는 하나님의 근심이 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예배자가 됩시다. 우리 예배가 경건하고, 축제 있는 예배가 되어 하나님도 우리도 기쁨이 충만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