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457
■ 2부 장강의 영웅들 (113)
제7권 영웅의 후예들
제 14장 의인(義人)의 길 (4)
굴무(屈巫)와 하희(夏姬)는 서로 잘 맞았다.두 사람은 이제야 만난 것을 아쉬워하며 깨가
쏟아질 정도로 붙어지냈다.어느 날, 하희(夏姬)가 굴무의 팔을 베고 누워 장래의 일을 물었다.
- 조만간 대부께서는 초(楚)나라로 돌아가셔야 하는데, 초왕께서 우리의 혼사를 아십니까?
굴무(屈巫)는 하희의 젖가슴을 애무하며 대답했다.
- 초왕께서는 우리의 혼사를 알지 못하오. 나는 초(楚)나라로 돌아가지 않겠소.
조용한 곳을 찾아가 부인과 함께 백년해로할 작정이오.
- 제(齊)나라로 가 초왕의 말을 전하는 일은 어쩌시구요?- 그것은 내가 알 바 아니오.
- 어차피 제나라로 가는 길이니 임치로 가 초왕(楚王)의 말을 전한 후 그 곳에 머물러 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니오. 나는 싸움에 패한 나라에서는 살고 싶지 않소. 나는 진(晉)나라로 가겠소.
다음날, 굴무(屈巫)는 부사(副使)를 불러 정사(正使)의 권한을 위임하고는 하희를 데리고
진나라로 망명했다.진경공(晉景公)은 라이벌인 초나라 공족 대부 굴무가 귀화해오자 몹시 기뻐했다.
- 하늘이 굴무(屈巫)를 나에게 보내셨도다.
진경공은 그날로 굴무에게 대부 벼슬을 내리고 형(邢) 땅을 하사했다.
형(邢)은 진나라 읍으로 지금의 하남성 온현 동쪽 일대다.
이에 굴무(屈巫)는 자신의 성(姓)을 무(巫)로 바꾸고 이름을 신(臣)으로 고쳤다.
따라서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무신(巫臣)이라 불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초나라 대부들은 한결같이 분노했다. 특히 지난날 굴무의 방해로
하희를 얻지 못한 공자 측(側)의 노여움은 이루 헤아릴 수없이 컸다.
그는 영윤인 공자 영제를 앞세워 초공왕을 찾아가 아뢰었다.- 굴무(屈巫)는 배신자입니다.
그가 진(晉)나라로 망명한 것은 우리 초나라를 골탕먹이자는 수작입니다. 진나라에 사람을 보내서라도
굴무의 벼슬을 막아야 합니다.그러나 초공왕(楚共王)은 굴무에 대해 별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이미 떠나간 사람은 잊읍시다. 굴무가 우리 초나라를 배신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는 선왕 때부터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오.- 또 굴무(屈巫)가 진나라를 이롭게 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만류해도 진나라가 굴무를 쓰지 않을 리 없을 것이요,
반대로 굴무가 진나라에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류하지 않아도 진(晉)나라는 스스로
굴무를 버릴 것이오. 굳이 우리가 수고할 필요가 없소.
초공왕의 반대에 공자 측(側)은 어쩔 수 없이 그냥 물러나왔다.
그러나 굴무(屈巫)에 대한 반감은 여전했다.결국 그는 5년 후 공자 영제와 짜고 다른 일을 핑계삼아
굴무의 일족을 모두 잡아들여 모조리 주살했다. 아울러 서모 하희와 간통한 흑요(黑要)도 잡아 참수했다.
자신의 일족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굴무, 즉 무신(巫臣)은 피눈물을 흘리며 이를 갈았다.
그는 공자 측(側)과 공자 영제에게 사람을 보내 다음과 같이 저주했다.
-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놈들이 이리저리 쫓겨다니다 기진맥진하여 죽게 하리라.
그 후 과연 무신(巫臣)은 진나라에서 벼슬을 살며 초나라에 해가 되는 일만 꾸몄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진(晉)과 오(吳)나라의 동맹이었다.
오나라는 장강 하류 일대에 근거를 둔 이족(異族) 국가였다. 초나라와는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나라다.
당시만 하더라도 오(吳)나라는 중원 제후들로부터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미지의 나라였다.
그러나 무신(巫臣)만은 오나라의 발전 가능성을 내다보고 진경공에게 수교를 주장했다.
- 오(吳)나라와 우호를 맺으십시오.그러고는 스스로 사신이 되어 오나라로 가서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이때 무신(巫臣)은 병차 30대와 함께 아들 무호용(巫狐庸)을 데리고 갔는데, 오나라 추장(酋長)을
설득하여 무호용을 그곳에 남겨두고 벼슬을 살게 했다.
이후 무호용(巫狐庸)은 오나라 사람들에게 중원의 주요 전투 수단인 병차 제작법과
병차 조정법, 진법(陣法) 등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또한 수시로 진(晉)나라와 교류하며 중원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 후 무신(巫臣)은 진나라에서 죽었다.
무신의 아들 무호용은 다시 성을 굴씨(屈氏)로 고치고 내내 오(吳)나라에 살았다.
오나라 추장은 굴호용(屈狐庸)을 귀빈으로 대접하여 국정에 관한 고문역을 맡겼다.
이때부터 오(吳)나라는 나날이 강성해졌다. 병차도 늘고 병력도 증강했다. 마침내 오나라는
초나라 동쪽 땅을 침범하기 시작했다.동시에 오나라 추장 수몽(壽夢)은 자신을 '왕(王)' 이라고 칭했다.
이것이 오(吳)나라의 출현이다.
458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458
■ 2부 장강의 영웅들 (114)
제7권 영웅의 후예들
제 14장 의인(義人)의 길 (5)
진(晉)나라 내부에 한 사건이 발생했다.
조쇠(趙衰) 이후 명문 세도가로 떠오른 조(趙)씨 일문이 진경공(晉景公)에 의해 멸족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이 사건은 춘추시대 중기 군주와 귀족 간의 권력 투쟁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경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齊)나라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극극(郤克)을 정점으로 한 극씨 일문의 위세는 날로 더해갔다.
그런 중에 극극에게 불행이 닥쳤다.그는 제나라와 싸울 때 옆구리를 비롯한 여러 군데에 화살을
맞은 바 있는데, 그 상처가 도져 왼팔을 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던 극극(郤克)은 왼팔의 절단에 무척 마음이 우울했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기력이 눈에 띄게 쇠해졌다.결국 그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재상자리를 난씨 집안의 당주인 난서(欒書)
에게 물려주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병으로 죽었다.극극(郤克)의 죽음 이후, 진(晉)나라 권력은 여러
귀족들에게 고루 분배되었다. 극씨를 비롯하여 난씨, 사씨, 순씨, 조씨, 한씨 등이 그 대표적인 가문이었다.
한편, 진경공(晉景公)은 진경공대로 여러 귀족과 연합하면서 나름대로 자기 지분을 확보하고 있었다.
진경공의 측근 중 그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다름아닌 사구 도안가(屠岸賈)였다.
원래부터 도안가(屠岸賈)는 조씨 집안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조씨 일문이 다시 진(晉)나라
조정의 세력가로 부상하는 것에 대해 경계와 질시의 눈길을 보냈다.
'주공을 위해서라도 조씨 일문을 멸족시키리라!'
이때부터 도안가는 틈만 나면 조순의 이복동생인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영(趙嬰) 형제와 조순의 아들
조삭(趙朔) 등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 조영(趙嬰)이 조카인 조삭의 아내 장희(莊姬)와 간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도안가는 이 사실을 조동, 조괄 등에게 슬쩍 흘렸다. 조동과 조괄은 집안 망신을 시킨 동생 조영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었다.- 떠나라!그러나 조영(趙嬰)은 형들에 대해 반발했다.
- 내가 떠나면 두 형님은 다른 집안의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해서 두 형님에게
무슨 손해가 있습니까?조동과 조괄은 가병(家兵)을 동원하여 반발하는 조영을 칠 계획을 짰다.
사전에 이 사실을 안 조영(趙嬰)은 어쩔 수 없이 재물을 챙겨 제(齊)나라로 도주했다.
그런 중에 진경공은 수도를 강성(絳城)에서 신전(新田)으로 옮겼다.
신전은 지금의 산서성 곡옥현 북쪽 땅이다. 분수(汾水) 중류에 위치해 있다.
진경공(晉景公)이 신전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의미도 있었지만, 강성을 중심으로
기반을 탄탄하게 닦아놓은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물론 이 천도도 도안가(屠岸賈)의 발상에 의해서였다.이것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1백 년 가까이 강성에 뿌리를 내린 귀족들은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졌다.
도안가(屠岸賈)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마침 그럴듯한 빌미가 생겨났다.
진나라 산 중 하나인 양산(梁山)이 아무런 까닭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양산은 지금의 섬서성
한북현 동남쪽에 있는 산이다. 이 바람에 하수(河水)가 막혀 사흘간이나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하늘이 내리는 재앙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진경공(晉景公)은 점을 취기 위해 복관인 대부 백종(伯宗)을 불렀다.
그런데 마침 백종은 옛 수도인 고강에 나가 있었다. 뒤늦게 진경공의 부름을 받은 백종(伯宗)은
수레를 타고 부리나케 신전을 향해 달렸다.
이 사실을 안 도안가(屠岸賈)는 심복 부하를 불러 귓속말로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백종(伯宗)이 한창 수레를 몰아 달리는데 길 앞쪽에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 하나가 뒤집혀진 채
길을 막고 있었다. 갈길이 바쁜 백종은 수레에서 내려 짐수레의 주인에게 지시했다.
"그 짐수레를 빨리 비켜주시오."짐수레 주인이 대답했다.
"대부께서는 주공의 부름을 받고 가시는 길이지요? 내가 비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옆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빠를 것입니다.""나를 아시오?""그렇습니다.""어디 사시오?"
"신전(新田)에 삽니다."
"그대 말대로 나는 지금 주공의 부름을 받고 신전으로 가는 길이오. 그런데 신전에 무슨 일이 생겼소?"
"양산(梁山)이 무너져 그 일로 점을 치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우스운 일이라니요?"
"주공께서 형벌을 분명히 내리지 못해 하늘이 재앙을 내린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밖에 나가 있는 신하까지 불러 점을 치려 하니, 이것이 우습지 않은 일이고 무엇이오?"
"일찍이 조순은 도원에서 진영공(晉靈公)을 시해했습니다. 그런데도 진성공(晉成公)께서는
조순을 죽이기는커녕 나라일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오늘날도 조순의 핏줄은 조정 가득히 퍼져 있습니다."
"이것이 형벌을 분명히 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번에 양산이 무너진 것은
억울하게 죽은 진영공(晉靈公)의 원한 때문입니다. 굳이 점을 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짐수레 주인과 헤어져 궁으로 들어온 백종(伯宗)은 진경공에게 이와 같은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진경공(晉景公)은 산이 무너진 것이 진영공의 원한 때문이라는 말에 마음이 우울해졌다.
"어찌 되었건 점을 쳐보시오."백종(伯宗)이 점을 치자 '대길'이라는 점괘가 나왔다."이상하군."
진경공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옆에 있던 도안가(屠岸賈)가 끼여들었다.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신이 보기에는 짐수레꾼의 말이 옳습니다. 점괘에 대길이라 나왔다 함은
지금이라도 조씨 일족에게 벌을 내리어 진영공(晉靈公)의 원한을 달래주어야 나라의 모든 일이
좋아진다는 뜻이 분명합니다."도안가(屠岸賈)의 말에 진경공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음날, 그는 한궐(韓厥)을 불러 물었다."진영공을 시해한 조씨 일문의 죄를 다스릴까 하오."
한궐은 어릴 적 조순의 집에서 자랐다. 조순에게서 은혜도 많이 입었다. 오늘날 그가 신중군 대장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조순(趙盾)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기겁하여 아뢰었다."진영공의 죽음과 조순(趙盾)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더욱이 조씨 일문으로 말하면, 조쇠 이후 대대로 많은 공훈을 세운 집안입니다.
주공께서는 암귀(暗鬼)에 빠지지 마십시오."
신흥 세력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한궐의 반대에 부딪치자 진경공(晉景公)은 주춤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엔 이미 조씨 일족에 대한 불신이 들어찼다.
이번에는 전통 명문가인 극씨와 난씨 집안의 당주인 극기와 난서(欒書)를 불러 물었다.
극기(郤錡)는 극극의 아들로서, 새로이 당주에 오른 사람이다.
"조씨 일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극기와 난서로서는 라이벌인 조씨 일문이 사라져준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은 일이다. 더욱이 그들은 이미 도안가로부터 수차례 뇌물을 받은 터였다.
"조씨 일문이 비록 공훈의 집안이기는 하나, 공실과 백성들에게 끼친 폐해도 적지 않습니다.
신들은 주공의 처분에 따를 뿐입니다."
두 집안의 당주로부터 이런 대답을 듣자 진경공(晉景公)은 새롭게 마음을 굳혔다.
마침내 도안가(屠岸賈)를 불러 영을 내렸다."조씨(趙氏) 일족을 처형하라."
459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