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해방된 뒤, 식민 지배자였던 일본과 국교를 맺기까지는 지난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전후 일본을 국제사회에 복귀시킨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직후인 1951년 10월부터 시작한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체결까지 무려 14년이 걸렸습니다.
이승만, 장면, 박정희의 3대 정권에 걸쳐 10년 이상 걸린 국교 정상화 교섭 중에서 가장 큰 난제는 일제의 식민 지배의 법적 성격을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즉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 동안의 일제 식민 지배가 불법이었는지 합법이었는지를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협상 기간 내내 한국은 식민 지배가 불법이었다고 주장했고, 일본은 합법이었다고 맞섰습니다. 그래서 양쪽이 이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찾은 묘안이 서로 편리한 대로 해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서로 '다른 것에 합의한다(agree to disagree)'라는 협상 기술에 따라 한국은 불법으로 일본은 합법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긴 채 협상을 매듭지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1965년 체제의 한계'입니다.
물론 1965년 협정과 무관하게 역대 모든 한국 정부는 일제의 식민 지배가 불법이었다는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확고하게 유지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한국 정부의 입장은 '일제의 식민 지배가 불법'이라는 2018년 10월 강제 동원 피해자 관련 대법원 판결로 법적 권위를 확보하게 됐습니다. 이제까지 말의 수준에 머물러왔던 입장이 대법원 판결로 집행력을 가진 수준으로 격상된 것입니다. 말의 공방에 머물 때는 손해를 볼 게 없었지만, 법 집행 때는 실질적인 피해를 볼 수밖에 없게 된 일본 쪽이 대법원 판결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게 윤석열 대통령의 '3.16 외교 참사'입니다. 윤 대통령의 가장 큰 잘못은 '식민 지배가 합법'이라는 일본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식민 지배가 불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을 무력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해방 이후 역대 정부가 유지해온 입장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소장은 '윤 대통령의 강제 동원 해법은 역사 인식을 1965년 체제 이전으로 후퇴시키는 것을 넘어 일제의 조선 강점을 시작한 1905년 수준으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조선을 일제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을 합리화하는, 일본의 일부 지정학론자들의 '1905년 체제' 논리와 같다는 지적입니다.
윤 대통령의 이런 퇴행적인 역사 인식은 3.1절 기념사에서 예고됐습니다. 그는 정부의 강제 동원 해법을 발표하기 닷새 전 행한 제124돌 3.1절 기념사에서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 받았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면서 일제의 식민 지배가 조선의 준비 부족, 실력 부족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당시 이완용의 논리,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를 비롯한 일본 우익 및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얘기입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 관계는 과거사 문제 해결 없는 65년 체제의 한계를 보완해온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냉전의 해체, 한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배경으로 1965년 체제에 도전하는 움직임이 거세지기 시작했습니다.
1991년에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실명 공개와 함께 시작한 위안부 운동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런 시민사회의 역동적인 운동에 대응해 양국 정부는 1965년 체제를 보완하는 작업을 꾸준히 벌여왔습니다. 1993년 고노 담화, 1995년 무라야마 담화,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10년의 간 나오토 담화가 그런 노력과 작업의 산물입니다.
이와 함께 식민 지배를 보는 일본의 시각도 애초의 '합법-합당'에서 '합법-부당'으로 발전해왔습니다. 특히, 간 나오토 담화는 일본의 자세가 한 발짝 더 진전해 '반 합법(불법)-부당'의 수준까지 왔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아직 '불법-부당'의 한국 시각까지 다가오지는 못했지만, 양쪽에서 1965년 체제의 허점을 메우려는 노력이 이어져 왔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윤 정부가 강제 동원 해법이 이런 노력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윤 대통령의 왜곡된 역사 인식에서 나온 강제 동원 해법은 '참담' 또는 '굴욕'이란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철저한 '대일 항복선언'입니다. 윤 대통령의 일본 방일에 앞서 박진 외교부장관은 6일, '제3자 변제' 방식의 강제 동원 해법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이 컵에 물을 반쯤 채웠으니 일본이 나머지 반을 채우길 기대한다는 '물컵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상은 즉각 강제 동원 사실조차 부인하는 말로 물컵론을 차버렸습니다.
16일 열린 한일정상회담은 한마디로 역사 인식에서 한국의 항복선언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정상회담이 끝난 뒤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강제동원'이나 '강제징용'이란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와 관련해 사용한 말은 모두 발언의 '구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라는 표현이 전부입니다.
질문 응답 과정에서는 아예 대명사 '이것'과 '6일 발표된 한국 정부의 조치'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강제징용'이란 말을 썼습니다마는, 기시다 총리는 철저하게 강제성을 부인하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사실 '구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라는 말은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일본 미디어가 통상적으로 쓰는 '징용공'이란 표현도 못마땅해하면서 만들어 쓰도록 한 말입니다.
일본이 사죄도 배상도 하지 않은 것은, 강제성을 부인한 데서 나온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강제로 조선 노동자를 끌고 오지 않았으니 사죄도 배상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입니다. 윤 정권을 응원하는 한국의 일부 학자와 미디어는 앞으로 일본 정부가 점차 성의를 보일 것이라거나 보여야 한다고 추임새를 넣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제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이 그럴 가능성이 일도 없다는 걸 그들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강제동원 인정도, 사죄도, 배상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한국이 체면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구상권 행사입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질문 응답에서 너무도 확실하게 한국 정부가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현장에서 확인까지 해줬습니다. 구상권을 행사하면 3월 6일 발표한 해법이 무효로 돌아간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구상권 포기는 일본이 줄곧 포기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3월 6일 정부의 해법 발표 때 익명을 요구한 관계자가 "구상권의 시효 기간은 10년"이라는 말을 흘릴 때 '당장은 안 하면서 대일 압박 카드로 사용하려는가'라는 생각도 했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상대국 총리와 양국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까지 명확하게 구상권 포기를 밝히는 걸 보고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구상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일본이 강제 동원 문제와 관련해 아무런 후속 조치를 하지 않아도 한국으로서는 문제 삼지 않겠다는 확인서를 써준 것과 다름없습니다. 즉, 구상권 포기로 강제 동원 문제와 관련한 '대일 항복선언'이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 나라의 체면과 관련해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윤 대통령이 기자회견 모두 발언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를 쓰지 않고 '한국'이라는 약칭을 쓴 것입니다. 미디어나 상대국에서 약칭으로 부를 수는 있으나, 한 나라의 원수가 정식 국호를 쓰지 않고 약칭을 사용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윤 대통령의 저자세 대일 외교를 보면서 콧노래를 부르는 일본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를 안겨주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 대통령이 방일 마지막 날 게이오대 강연에서 대표적인 조선 멸시론과 침략론자이며 식민 지배를 적극 지지자였던 오카쿠라 덴신을 거론하며 "메이지 시대의 사상가 오카쿠라 덴신은 '용기는 생명의 열쇠'라고 했다"라고 발언한 대목도 나라의 체면을 크게 구긴 사례입니다.
윤 대통령이 이번 방일의 성과로 내세우는 반도체 수출 금지 해제, 군사정보보호협정 복구, 셔틀 외교 재개 등은, 한국이 적극적으로 끌어낸 성과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일본이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반도체 수출 금지 조치를 하고, 이에 대응해 한국이 군사정보호협정의 잠정 중단을 선언한 건 다 아는 일입니다. 이 과정에서 정부 사이의 교류도 얼어붙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 꼬임의 원인인 강제 동원 문제가 풀렸으니 그동안 양쪽이 보복과 대항 조치로 내놓은 조치를 원상으로 돌리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이런 일련의 원상회복 조치가 강제 동원 문제에 대한 한국의 일방적인 '항복 외교'의 결과로 나왔다는 점입니다.
양국의 경제단체가 만들기로 했다는 청소년 교류 기금도, 한일 관계 냉각 속에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하게 자율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청소년 교류의 흐름을 생각할 때 무슨 일을 더 잘하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저 강제 동원 해법에 대한 불만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눈속임처럼 보입니다.
윤 대통령은 16일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유독 안보를 강조했습니다. 짧은 모두 발언에서 '안보'라는 단어를 4번이나 사용했습니다. 반면 기시다 총리는 모두 발언에서 안보라는 단독 용어를 한 번도 쓰지 않았습니다. 윤 대통령은 "안보,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공동의 이익" "안보, 경제, 인적·문화 교류 등 다양한 분야"라는 대목에서 단독으로 안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한국 정부가 썼던 순서와 달리 안보를 가장 앞에 내세웠습니다.
그전까지의 정부는 한일 관계에서 가장 껄끄러운 분야인 안보를 가장 뒤쪽에 배치해왔습니다. 또 "경제 안보와 첨단 과학 분야" "한일 경제안보 대화 출범" 등에서 안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는 '일한 안전보장 대화' '경제 안전보장에 관한 협의'라는 대목에서 안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를 봐도 윤 대통령이 안보를 위해 역사 문제를 희생했다는 걸 강하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안보 협력을 강조해오던 일본이 이런 윤 대통령의 '안보 타령'에 오히려 뒷짐을 지고 지켜보는 자세를 취하는 게 역설적으로 보였습니다.
윤 대통령의 일방적인 항복으로 찾아온 '한일 정상화'는 '새로운 문제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일본 쪽 미디어에선 위안부 합의 이행, 독도 영유권 주장, 초계기 레이더 조사 문제 등도 일본의 입장을 한국에 확실하게 관철해야 한다거나 한국의 시정을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도 부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일본의 한국 압박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일본의 대외정책은 전통적으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자세를 취해왔습니다. 윤 대통령이 약세를 보인 만큼 일본의 공세는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강제동원 해법이 한일 양국 사이의 합의가 아니라 한국의 일방적인 발표로 이뤄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해법을 수정하는 것이 양쪽 합의보다 쉽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중요한 것은 윤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이 한국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부실 해법'이란 걸 확실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를 통해 한국과 일본 정부가 '과거 직시 없는 미래 지향은 있을 수 없다'라는 걸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