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바둑, 잡초바둑, 야전사령관….
올드팬들이라면 누구의 별명인지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야전에서 살아남은 진득한 생명력과 한국적인 구수함은 이제 팬들에게 오래된 풍경화라 치부해도 좋으리라. 이왕 부를 거라면 된장바둑보다 청국장바둑이라 부르는 것이 듣기에 훨씬 좋지 않겠냐며 껄껄 웃어대는 모습은 그의 색채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56세의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자신의 바둑은 아직도 진화중이라는 서봉수 9단. 젊었을 때나 머리가 하얗게 센 지금이나 투지 하나 만큼은 펄펄 끓고 있는 용광로 안에 거한다는 걸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9월 23일. 정관장배 2국 해설을 맡아달라는 필자의 부탁을 흔쾌히 허락하며 사이버오로 사무실을 찾았다. 옆에서 인터넷 해설 진행을 도와주다 운 좋게 그의 입담들을 전해들을 수 있었는데 필자 혼자만 담아두기엔 아까운 어록들이 많아 지면을 빌어 독자들에게 간략히 소개한다.
인터넷 해설 오랜만이시죠? 요즘 인터넷 바둑은 자주 두세요?
인터넷 해설이야 젊은 기사들이 워낙 잘하다보니 우리 같은 노땅들은 불러주기만 하면 감사하죠. 인터넷 바둑은 예전에 많이 뒀는데 요즘엔 어쩌다가 가끔 둬요. 10초 바둑에 맛 들려서 제한시간이 그 이상인 바둑은 잘 안 두게 되더라고요.
10초 바둑 좋아하시나 봐요? 워낙 속기다보니 소화하기가 벅찰 것 같은데요? 시간패는 안 당하셨는지 궁금하군요.
10초 바둑이 은근합니다. 처음엔 떡수 연발은 기본이고 시간연장책 쓴다고 엄한데다 클릭해서 '악!' 소리 많이 났어요. 관전하는 사람들 험한 말을 어찌나 쏟아 붓던지 작전 아니냐고 하도 호통을 쳐서 한동안은 10초 바둑 두기가 무섭더군요. 근데 이게 요령이 생기니까 이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어요. 마우스가 착착 달라붙는 게 감각 기르기에도 좋고 박진감 최고입니다. 마음먹고 두면 하루에 20판도 뒀는데 지금은 그만큼 못 두고 어쩌다 3, 4판씩 정도만 소화하죠.
하하. 인터넷 바둑으로 속기훈련을 했네요? 이젠 30초 바둑이 짧게 느껴지겠어요?
10초 바둑에 적응되니 30초는 여유 있더군요. 속기훈련은 제대로 받은 셈이죠.
한때 골프 치는 재미에 푹 빠지셨던 것 같은데 지금도 시간 나면 자주 치나요?
그거 중독성이 워낙 강해 깨끗이 손 털었습니다. 어쩌다 아는 사람과 같이 치면 모를까 개인적으로 시간 내는 건 아닌 것 같더군요. 바둑은 제어가 되는 게임이지만 골프는 차원이 달라요. 중독성도 강한데다 시간도 많이 빼앗겨 기사 생활하는데 전혀 득이 되지 않아요.
한국바둑리그 티브로드 감독을 2년째 역임하고 있습니다. 예전 한국바둑리그 선수로 뛴 경험이 있는데요. 선수로 뛸 때와 감독을 맡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왕이면 감독보다 선수로 뛰는 것이 낫겠죠. 감독은 팀 성적에 따라 희비가 엇갈립니다. 티브로드가 2년 연속 한국바둑리그에 참여하는지라 주위에서 관심이 많습니다. 이번엔 꼭 플레이오프에 들어가야 하는데 선수들이 제 맘을 잘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얼마 전 농심배 국내선발전 준결승까지 올라갔습니다. 진로배 9연승 신화가 새록새록 떠올랐을 것 같은데 많이 아쉽진 않았나요?
맘 같아서는 본선에 올라가고 싶지만 어디 젊은 애들 이기기가 쉬운 일인가요. 아쉬움은 없어요. 언젠가 또 기회가 오겠죠.
지지옥션배 시상식 기념대국에서 강명주 회장의 대마를 잡고 이겼어요. 보통 프로기사들 사이에서 명사들과의 기념대국은 어느 정도 계가를 맞춰주는 게 불문율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서봉수 9단은 그런 걸 전혀 고려하지 않는 기사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젊었을 땐 안 그랬어요. 상대방과 실력차가 많이 난다 싶으면 적당히 계가 맞춰서 1, 2집정도 이기거나 지는 정도였는데 나이가 드니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깨달았죠.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상대방이 알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이기고 지는 걸 떠나 성의를 다해서 둬야죠. 그래야 상대방도 배우는 맛이 있잖아요.
SKY바둑배 최종국에서 조훈현 9단이 시간패를 당했습니다. 그동안 조훈현 9단과 숱하게 두었습니다만 시간패가 나온 적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요. 많이 당혹스러웠을 것 같은데요?
시간패가 처음이긴 처음인 것 같네요. 시간패야 뭐 인간인 이상 저지를 수도 있는 거니 딱히 할 말은 없어요. 조훈현 9단도 나이가 들어 예전 같지 않겠죠.
팬들 사이에 조훈현 9단과 복기를 하지 않는 걸로 유명합니다. 라이벌 의식 때문에 그런 건가요?
라이벌이라뇨. 그 사람은 내 평생의 은인인데 무슨 라이벌 의식이 있겠어요. 조훈현 9단이 복기하면 나야 고마운 노릇이고 안 하면 그만인 거지. 그 사람이 없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어떻게 있겠습니까.
‘조훈현 9단은 내 평생의 은인이다.’ 참 대단한 표현이다. 조훈현 9단이 있지 않았으면 지금 이 자리에 자신도 없었을 거라며 확실한 선을 그어버린다. 라이벌이란 표현조차 거북하다며 조훈현 9단을 높이 평가하는 그에게 정상을 내려오는 등산가의 여유가 보인다면 과장된 과찬이려나?
‘저길 두네. 하긴 하수가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존재지. 하수의 설움은 하수만이 아는 거야.’ 인터넷 해설 도중 두 대국자의 연이은 실수를 보면서 너털웃음을 짓는다. 역시 그의 매력은 바둑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의 구수한 입담을 언젠가 또다시 들었으면 하는 기대가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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