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를 관통하는 가을 강, 무심천은 단아하다. 여름 강처럼 바짝 말랐다가, 갑자기 폭식증 걸린 듯 비대해져 거칠게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겨울 강 마냥, 개미 허리처럼 가늘어져 졸졸 흐르다가 끝내 얼음 속으로 숨어 버리는 소심한 강(江)도 아니다. 적당하고 넉넉하다.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이런 모습을 나는 얼마나 갈망했던가. 나의 강은 물길을 만들 수 있을만큼 힘이 있을 땐 홍수가 되어 범람했고, 조금이라도 힘이 부대끼면 꼬리를 내리고 숨어들기 바빴다. 분에 넘치지 않고 굴하지 않는 지조를 닮고자 조언을 구했으나, 무심천은 말이 없다.
무심천은 유심천이다. 대부분의 강들이 동해로, 서해로 내달릴 때 의연히 북쪽을 향해 간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다르게 움직인다는 건 뜻을 가졌다는 것이다. 무심천의 속내를 알고 싶었다. 같은 길을 걸어보지 않고 서로를 속속들이 알기 어려운 법이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박자박 걸었다.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쉬지 않고 소곤거린다. 다리가 뻐근해질 즈음, 그제야 실토를 한다. 무심천이 북으로 가는 까닭은 미호천(美湖川)을 만나기 위해서 였다. 무언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흔들림없이 가는 길은 늠름하다.
유심(有心)의 무심천. 뜻을 갖고 길을 나서되, 마음은 비우라는 것인가.
무심천은 연회장(宴會場)이다. 스스로 찾아와 입구를 장식한 쑥부쟁이는 화려하지도 빈약하지도 않다. 부족하다 싶었는 지, 때 이른 코스모스 몇 송이 자색 빛깔로 눈길을 끈다. 봄, 여름 따사롭던 날, 저마다 꽃잎을 피울 때 이 가을을 기다렸을 끈기가 경이롭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를 아는 이의 모습은 얼마나 고상한가.
행사장 길목의 환영 물결은 물억새 담당이다. 갈대와 억새가 비슷하다지만 연회장은 야들야들한 억새 몫이다. 옅은 회색빛 보드라운 손을 연신 흔들며 손님을 맞는다. 누가 이 유혹을 거절할 수 있을까.
첫손님은 하얀 연미복 차려입은 백로다. 꾸미지 않아도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기 위해선 얼마나 깊이 마음을 닦아야 할까. 홀로인 듯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저만치 친구가 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더 정겨울 수 있다함은 백로만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석양이 붉어지면 청둥오리는 초청장을 꺼내 본다.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찾아 갈 만찬장 주소는 무심천이다. 창공을 가르던 힘찬 날개를 접고, 활공으로 내려 앉는다. 피라미는 비늘 번뜩이며 테이블로 안내한다. 억새 수풀엔 참새들 조잘대는 소리로 잔치 분위기는 무르익는다. 텃새는 철새 보고 어딜 가느냐고 묻지 않았고, 철새는 텃새를 부러워한 적이 없다. 텃새는 자신이 머무르는 곳에 감사할 뿐이고, 철새는 가야할 곳이 멀다고 염려하지도 않는다. 오늘의 이 순간을 기꺼이 같이 할 뿐이다. 해가 설핏할 무렵이면 오색영롱한 저녁놀이 조명을 밝히고, 서늘한 바람이 흥을 돋구는 무심천 저녁은 그렇게 깊어간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고 했다.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말이다. 내가 발을 담근 이 강물도 벌써 저만치 흘러가고 없다. 하지만, 강물이 돌고 돌아, 내 손에 든 생수병에 담길지도 모른다. 내 몸의 물과 저 강물이 별개가 아님을 느낀다.
내가 마음을 열고 눈을 감으면, 무심천이 베풀고 있는 연찬장에 이미 초대된 것이다. 야생화 향기 그윽한 무심천 억새밭에서 텃새와 철새의 조잘거림에 귀를 열어 보자.
무심(無心)의 경지를 느끼기엔 시월의 무심천이 제격이다.
첫댓글 무심천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되는군요 무심의 경지 선생님이 한발 앞서가실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춘자 선생님~
관심은 세상의 힘입니다.
무심천을 많이 사랑하시는 군요? 벌써 청주분 다 되셨네요?
저도 가끔 산책을 무심천으로 갑니다.
김교수님!
날 잡아서
무심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같이 걸어 보실래요?
청주 시청 홍보요원으로 착각하겠습니다.^_^
무심천을 단아하다고 표현하시는 분은 처음입니다.
언제 무심천을 걸어봐야겠습니다.
밀짚모자님~
닉네임 멋지게 쓰고
현장 검증 한 번 가보시지요.
시월이어야 합니다.
대단하십니다. 멋진 수필 잘감상 했습니다. 선생님 누구신지 뵙고싶습니다.
입이딱 벌어집니다.
해당화 선생님~
칭찬을 시원시원하게 해 주시는군요.
해당화 피는 날,
차 한 잔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요즘 무심천에 갈대들이 갈을 연출 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관찰력과 표현 멋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글이 참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