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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가의 의미
출가(出家)란 일반적으로 가정생활로부터 떠나 걸식하는 수행자로서 유행(遊行)하면서 수행하는 것, 또는 불교 교단의 수행자가 되기 위한 입문의식이지요. 이는 재가(在家)와 대비되는 말이며 세속적 번뇌인 티끌을 벗어난다고 하여 출진(出塵)이라고도 합니다. 출가의 전통은 인도아리아인들이 도래하여 베다 문헌을 형성하기 이전의 고대 인도에서부터 존재했으며, B.C 6세기경부터 아리아인들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오늘날까지 매우 고귀한 삶의 양식으로 존중되어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것을 비롯하여 출가의 삶이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존중되어왔습니다. 비록 한국에서는 유교가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정착되면서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 되었지만, 그 이전에 삼국과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귀족의 자녀들이 출가하는 것이 화랑도와 더불어 삶의 이상향으로 여겨졌습니다.
어째든 불교에서 대중을 칠중(七衆)이라고 하지요. 이 구성원 가운데에서 우바새와 우바이는 재가신자에 속하고,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식차마나(式叉摩那), 사미(沙彌), 사미니(沙彌尼) 등은 출가자에 속하지요. 남자 출가자는 사미로 시작하여 비구에 이르고, 여자 출가자는 사미니로 시작하여 식차마나를 거쳐 비구니에 이릅니다. 사미승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간과 의식을 거쳐야 하는데, 그 의식 자체도 출가라고 불립니다. 이러한 출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익히 알고 계시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미승은 여러 달 또는 여러 해에 걸쳐 지도를 받으며, 비구들이 탁발 나갈 때 따라나서기도 하지만 보름마다 모여 승가의 계율, 곧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를 암송하는 포살(布薩)이라고 하는 집회에는 참여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미얀마를 비롯한 몇몇 상좌부 불교 국가에서는 불교를 믿는 사춘기 소년은 누구나 출가의식을 거쳐 일정 기간 출가생활을 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티베트와 중국에서는 출가하기에 앞서 일정 기간 준비학습을 갖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출가에 대한 형태를 옛적에 네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즉, 불교에서는 넓은 의미에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출가자라 하는데, 출가에는 네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신심구출가(身心俱出家)로 몸과 마음을 온전히 불가에 귀의한 출가사문이라고 하며, 둘째는 신출가심불출가(身出家心不出家)로 겉모습은 승려지만 속은 속세를 떠도는 사람을 말하며, 셋째는 신재가심출가(身在家心出家)로 산문 밖에서 살지만 끊임없이 수행하는 사람을 말하고, 넷째는 신심구불출가(身心俱不出家)로 몸과 마음이 모두 속세에 있으면서 깨달음을 구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출가는 몸과 마음이 출가한 것이겠지만 부득이 재가신자는 세 번째가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2. 올바른 출가정신
출가재일(出家齋日)은 매우 의미가 깊은 날이지요.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삶의 근원적인 의문을 해결하고자 약속된 부귀나 영화 등 일체의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부처님 출가절에는 부처님의 진정한 출가정신이 이 땅에 다시 구현되기를 바래 봅니다. 이는 승풍진작을 위해서나 재가신자의 올바른 신행을 위해서도 매우 고무적인 일일 것입니다. 인도에는 인생의 사주기(四週期)가 있는데, 인생의 거의 절반을 출가수행의 과정을 밟는다고 합니다. 이는 여담입니다만 우리 나라도 이러한 출가정신을 전 사회로 확대시켜 본다면 사회나 국가적 인생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병리나 병폐, 부조리 현상이 치유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출가는 오욕(五欲)을 벗어나 무소유의 실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부처님께서 여러 경전에 설하고 계시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에 대해, "부모형제와 이별하고 출가한 사문은 욕망을 쉬고 애욕을 끊어 자기 마음의 근원과 법의 깊은 이치를 알아서 열반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안으로 얻을 것이 없고 밖으로 구할 것이 없어, 마음은 진리에도 매이지 않고 업도 짓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온전한 출가 정신이지요. 이러한 내용과 관련하여 좀 더 여러 경전에 나타난 출가의 의미와 출가수행자의 정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근본설일체유부 비나야잡사}와 {잡아함경}을 보면, "어떤 이가 찾아와서 출가를 원하거든 의복과 밥을 주고 4개월간 함께 살아야 하며, 만약 그를 관찰해서 제도할만한 자라고 보여지면 비로소 출가시켜 구족계를 주는 것이다. 불법에 출가하는 자는 네 가지에 의지하고 구족계를 받음으로써 비구가 되는데, 네 가지란, 먼저 누더기를 입고, 다음에 걸식으로 살아가고, 셋째 나무 밑에서 거처하며, 넷째 남이 버리는 것을 얻어 약으로 쓰는 것이다." 또 "비구들은 첫째,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바른 믿음으로 도를 배우고, 둘째,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을 얻고 스스로 후생에 몸을 받지 않을 줄 알아야 하느니라. 집을 나온 사람은 하천(下賤)하게 생활하나니 머리를 깎고 발우를 가지고 집집마다 밥을 빈다. 혹시 천대를 받더라도 그렇게 하는 까닭은 훌륭한 이치를 구하기 위해서이니,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근심과 번민, 슬픔과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현대적인 출가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 이상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다음에 {미란다왕문경}에 출가에 대한 미린다왕과 나가세나존자의 대화를 보면,
"나가세나 존자여! 당신들은 무슨 목적으로 출가한 것입니까?
또 당신들의 최상의 목적은 대체 무엇입니까?"
"대왕이시여, 우리들은 이 괴로움이 멸하고 다른 괴로움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목적으로 출가했습니다. 대왕이시여, 우리의 최상의 목적은 어떤 집착도 남지 않은 완전한 열반의 경지입니다."
"나가세나 존자여!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목적으로 출가하는 것일까요?"
"대왕이시여,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목적으로 출가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왕에 대한 공포를 피하기 위해, 도둑에 대한 공포를 피하기 위해, 빚을 갚지 않기 위해, 또는 생활을 위해 출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르게 출가하는 사람들은 이 목적으로 출가합니다."
이와 같은 출가에 대한 대화를 보면 지금도 마찬가지겠죠. 하지만 출가의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괴로움을 벗어나 열반을 얻는 것이죠. 그러면 좀더 여러 경전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비화경}과 {중아함경}에서는, "삭발하는 것만으로 출가라 하지 않는다. 대정진을 일으켜 중생의 일체 번뇌를 제거하려 할 때, 이를 출가라 한다.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과 늙음과 죽음이 없고 근심·걱정·번뇌와 더러움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을 얻기 위해서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 중국에 최초에 전해졌다고 하는 {사십이장경}에는, "나는 왕자의 지위를 문틈에 비치는 먼지처럼 보고, 금이나 옥 따위의 보배를 깨진 기왓장처럼 보며, 비단옷을 헌 누더기같이 보고, 삼천대천세계를 한 알의 겨자씨 같이 본다. 열반을 아침저녁으로 깨어 있는 것과 같이 보고, 평등을 참다운 경지로 보며, 교화를 사철 푸른 나무와 같이 본다."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중국의 초기불교의 출가에 대한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상 {사십이장경}은 중국인들이 제작한 위경(僞經)인데, 그 내용은 당시의 불교에 대한 것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수행의 총서인 {화엄경}에서는, "바른 가르침을 수지(受持)하고 여러 지혜를 닦아, 보리(菩提)를 증득하기 위해 발심한다. 심심(深心)으로 신해(信解)하여 항상 청정한 태도로 온갖 부처님들을 공경·존중하며, 법(法)과 승(僧)에도 이같이 하여 지성으로 공양하기 위해 발심한다. 보살이 생존하는 가운데 처음으로 발심할 때, 오로지 깨달음을 구해 마음이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 일념(一念)의 공덕은 깊고 넓어서 끝이 없을 것이니, 여래께서 설하시되, 한 겁(劫)을 다 소비한다해도 능히 다 헤아리지 못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올바른 출가정신이란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모든 고통을 벗어나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는 위대한 정신인 것입니다. 결코 삶의 회피나 도피처가 아닌 것이지요. 가장 적극적인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쩌면 출가정신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자아실현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러면 이를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좀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진정한 의미
먼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출가하시고 도를 깨달아 열반의 모습을 보이신 것은 만인의 고통과 근심을 벗어나 참된 행복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길은 고통이 반드시 수반되기에 그 고통을 해결하고자 출가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진정한 출가는 헛된 생각이나 부질없는 말과 행동을 떠나 진리를 생각하고 진리에 부합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익히 잘 알고 계시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간략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님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 가는 고통뿐만이 아니고,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하는 애별리고(愛別離苦), 미운 사람이나 환경과 만나서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어떤 일을 성취하려고 애쓰지만 얻지 못하는 구부득고(求不得苦), 이 몸을 위해 봉사하고 우리의 오감으로 들어와 쌓여있는 모든 고통이 치성한 오음성고(五陰盛苦)등 수많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현실적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고 명상에 침잠(沈潛)하여 사색적인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뒤늦게 아들을 얻어 왕위를 계승하여 세속적 부귀와 영화를 바라는 정반왕과 왕비의 고민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궁궐에서는 왕자의 슬픈 번민(煩悶)을 씻어주기 위해 매일같이 즐거운 잔치가 벌어졌고, 그래도 왕자의 명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왕위를 계승할 자격을 가진 싯다르타 태자는 나이가 차서 야쇼다라를 맞이하여 결혼을 하였으며 아들도 갖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태어났다는 말에 태자는 "아들이 생겼구나. 장애가 생겼구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참으로 충격적인 말이지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식이 태어난 것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데 장애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당시 인도의 관습적 의무 가운데 후손이 생기면 출가하여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부모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습상 출가의 자격을 얻은 고타마 싯다르타는 출가를 감행하게 됩니다.
하여튼 세상에서 소중한 2세의 탄생을 장애로 여긴 고타마 태자는 인생의 모든 고통을 해결할 영원한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출가의 길을 결심합니다. 가필라성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문지기들이 궁궐문을 굳게 지키고 있었지만 태자는 애마 칸타카를 올라타고 훌쩍 궁궐의 높은 담을 넘었습니다. 마부 찬다카만이 칸타카의 고삐를 잡고 함께 달려갑니다. 한나라의 군왕이 될 자리를 포기하고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해방시키리라"는 구도의 염원으로 출가를 결행하였습니다. 그때 태자 나이 스물 아홉 살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위대한 포기라고 합니다. 즉, 부귀와 영화가 약속된 한 개인의 모든 것을 포기하여 모든 생명들의 행복을 위해 회향한 것이지요.
하여튼 부처님의 위대한 출가는 이렇게 단행됐었습니다. 부처님은 {중아함경 권56}에서,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들음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더러움이 없는 가장 안온하고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후 제자들에게 출가생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출가하여 걸식하는 생활은 온갖 생활 가운데 가장 낮은 생활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훌륭한 사람들이 굳이 이 생활을 하는 것은 거룩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왕에게 강요당해서도 아니고, 도적들에게 쫓겨서도 아니고, 빚을 졌기 때문도 아니며, 두렵고 무서워서도 아니며, 살기가 어려워서도 아니다. 중생들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가며 근심, 걱정, 고뇌 속에 빠져있다. 괴로움에 빠졌고, 괴로움에 포위되어 있다. 그 축적된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미 약속된 왕자의 지위마저 버린 싯다르타의 출가는 일체중생의 제도와 행복을 위한 무상대도의 실천행인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일반적으로 출가를 말할 때는 네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 몸의 출가와 마음의 출가입니다. 여기서 몸의 출가라고 하는 것은 형상적인 출가를 말하는 것이고, 마음의 출가야말로 참된 출가라고 했지요. 즉, 온갖 번뇌의 불길이 일어나는 불타는 집에서 뛰쳐나와서 진리의 언덕에서 진리의 법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을 마음의 출가라고 하였지요. 다시 말해서 출가의 참된 의미는 겉의 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에서 추구하는 것이지요. 번뇌에서 뛰어나와 진리의 언덕에서 진리의 법대로 사는 것이 출가라고 한다면 불자라면 마땅히 출가의 정신을 오뚝하게 세워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진리에 입각한 생활을 해야 하고 진리의 평화와 안정을 누리기 위한 정진을 해야 하겠지요.
부처님은 출가 후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결심을 하십니다. "나는 무상보리를 이루어서 기필코 최상의 법륜(法輪)을 굴릴 것이다.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어서 감로(甘露)를 온 중생에게 뿌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어떠한 고난, 어떠한 죽음을 가져오는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한치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결단에 찬 의지가 만인의 행복과 평안과 연결돼 있고 그와 같이 확신에 찬 정진력이 무상대도를 이루게 한 것이지요. 출가는 진리를 향한 결단심, 보리심을 발하여 지혜의 몸을 얻어 일체 중생을 위한 대자비의 실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범부세간이 번뇌에 근거하고 있는 것을 알아서 번뇌가 다한 불멸의 진리를 깨우치려고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유마경}에서 말하는 출가는 "모든 악한 것을 멀리하고, 삿된 소견을 꺾어버리며, 허망한 모습이나 현상 경계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번뇌에서 벗어나 결박에서 빠져 나와 흔들림이 없으며, 안으로 기쁨을 머금고 모든 사람을 도와주며, 흔들림이 없는 깊은 마음으로 모든 허물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출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신라의 원측스님은 출가를 형출가(形出家)와 심출가(心出家)의 두 종류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다. 형출가는 집을 떠나 조용한 곳에서 수행생활을 하는 것이며, 출가 수행자라 할지라도 지켜야 할 본분과 덕을 잃어버리면 진정한 출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생구제를 위한 참다운 실천수행이 따르는 마음의 출가가 진정한 출가이지요.
또 원효스님은 출가수행을 뜻하는 사문(沙門)을 '근식(勤息)'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즉, '부지런히 선정(禪定)과 지혜를 닦아 모든 번뇌를 쉬는 이'를 사문이라고 한다고 하였고, 또 "세속에 연연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출가는 헛된 생각이나 부질없는 말과 행동을 멀리 떠나 진리를 생각하고 진리에 부합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라 하지요.
다시 말해서 진정한 출가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며, 세속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문제로부터 벗어나는데 있는 것이지요. 즉, 세속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출가인 것입니다. 평소 세속적 욕망의 늪을 벗어나 '진리의 빛'을 찾아 나서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를 진리의 세계로 승화시킨 세속적 욕망을 버린 현실 속에 있는 그대로가 진리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출가의 정신인 것이죠.
그러면 세속의 문제는 무엇이며 누가 만들어 내고 있나요. 세속에는 본래 그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내 자신에게 있는 것이며, 그 문제는 내가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문제가 없을 때 세속에 아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세속을 초월한 사람이란 세속을 떠난 사람이 아닌, 세속에 아무런 문제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진정한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재가불자의 현실 속의 출가는 무엇일가요?
4. 재가자의 출가일로써 재일(齋日)들
출가수행자들과 달리 재가불자들이 부처님 가르침대로 일상을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생업에 종사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주변에 닥쳐온 갖가지 일들을 헤쳐나가면서 삼보를 찾아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참회도 하고, 공양도 올리며, 가난한 이웃도 돌본다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재가불자들의 삶은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재가불자들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출가자들의 삶에 정기적으로 동참할 수 있도록 육재일(六齋日)을 도입했습니다. 재(齋)란 범어 우포사타(uposadha)를 한역한 것인데, '삼가하다, 부정한 것을 피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일정한 날에 계율을 지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부처님은 육재일에 한 달 동안 최소 6일은 꼭 계를 지키며 청정한 생활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재가불자들이 단순히 부처님을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출가수행자들의 수행을 체험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방편을 마련하였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재(齋)란 본래 부처님과 여러 성문제자들에게 공양(供養)을 올리는 불교의식이었습니다. 그러한 본뜻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 의업(意業)을 정제(整齊)하여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인데, 후대에 그 뜻이 달라져 부처님과 사부대중 들에게 공양의식으로부터 불보살님과 호법신장님께 불공드리는 것으로 확대되고, 현재는 애경사(哀慶事)가 있을 때나 이와 관련된 일반법회나 법회의식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제사의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공양의식은 인도에서는 일찍부터 행해졌으며, 중국에서는 양무제(梁武帝) 때 무차대회(無遮大會)를 비롯하여 많은 재가 행해졌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재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전하고 있는데, 재는 특별한 의식이나 격식 없이 간단한 예불과 공양을 올리는 불공이 행해졌지만, 그 본래의 뜻이 바뀌어져 점차 각종 의식절차를 갖추면서 여러 가지 기복(祈福)의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신라나 고려시대의 인왕백고좌도량(仁王百高座道場)이나 금광명경도량(金光明經道場) 등의 호국법회나 각종 기념행사에서 재가 목적하는 바에 따라 의식의 형태를 달리하면서 재 본래의 뜻보다는 법회의식이 중요시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적 행사는 쇠퇴하고 민간에서 각종 재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수륙재(水陸齋)나 영산재(靈山齋), 생전예수재(生前預修齋) 그리고 팔관재(八關齋) 등이 대표적인데, 대체로 산 사람이나 죽은 이의 복을 비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여튼 이 육재일이 바로 오늘날 행해지는 불교의 각종 재일의 시초가 되었던 것이지요. 육재일은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매월 음력 3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 인데, 이 재일에는 하루 24시간 동안 재가불자들이 출가수행자와 마찬가지로 여덟 가지 계를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여덟 가지 계는 팔관재라 하는데, 재가 오계에다 '높고 넓은 침상을 쓰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지 않고 일부러 구경하지 않으며 향수나 꽃, 보석 등을 치장하지 않고, 정오가 지나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의 3계를 더한 것입니다.
좀 더 육재일을 살펴보면 부처님 시대에 재가불자들의 신행이 얼마나 철저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세속의 일에 끄달리며 살아가는 재가불자라 할지라도 7일에서 8일 간격으로 출가수행자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참 불자로서의 자기 점검과 출가수행자들에 대한 존경심과 귀의하는 마음을 확고하게 다져 나갈 수 있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율장에서도 '팔관재를 실천하지 않으면 우바새가 될 수 없고, 우바이도 될 수 없다'고 하여 재가불자들이 철저히 재일을 지켜 수행토록 하였습니다. 심지어 재일에 전혀 동참하지 않는 재가불자는 문제가 있다고 여겼으니까요.
이상과 같은 육재일의 불교 전통은 점차로 변하여 {지장경}에서는 십재일로 되었습니다. 십재일은 육재일에다 1일, 18일, 24일, 28일을 더한 것으로 각 재일에 특정한 불보살을 배대(配對)하여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1일은 정광불, 8일은 약사불, 14일은 보현보살, 15일은 아미타불, 18일은 지장보살, 23일은 대세지보살, 24일은 관세음보살, 28일은 비로자나불, 29일은 약왕보살, 30일은 석가모니불로 신앙생활을 구체화하였습니다. 이를 십재일불(十齋日佛)이라고 부르지요.
이 열 가지 재일 중에 우리 나라에서 특히 많이 지켜지고 있는 재일은 초하루 신중기도나, 초8일 약사재일, 보름의 미타재일, 18일 지장재일과 24일 관음재일이죠. 관음재일이나 지장재일의 의식은 {천수경}을 독송하고 각각 [관음예문]과 [지장예문], 그리고 정근과 발원의 순서로 행해지죠. 관음재일에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구하는 예문과 정근을 하지요. 지장재일에는 돌아가신 분을 위한 발원과 소원성취를 위해 정근을 합니다. 영가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것이지요. 아는 말씀을 드리니 얼굴들이 밝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불교의 재일은 단순히 기도나 공양을 올리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출가의 삶을 본받아 정진하는 정진의 날입니다. 이와 같은 재일의 본래적 의미와 가르침을 오늘에 실천하기 위해서 재가불자들은 매주 1회 법회에 참석하거나, 보름 간격으로 철야정진이나 일일출가를 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인 불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매월 초하루는 정광재일인데, 정광불은 연등불이라고도 하시는 분이죠. 저 {금강경}에 나오는 석가부처님의 스승 말입니다. 초하루이기 때문에 초하루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분들을 향하여 한 달의 무사태평과 소원을 비는 풍습으로 되었습니다. 또 화엄성중은 104위로서 상계, 중계, 하계의 모든 보살들의 화현인 여러 신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의식입니다.
이상과 같이 부처님의 일대기와 관련된 기념일은 그 의의가 일반신자에게 재(齋)의 형태로써, 출가재일은 재가신자의 신행생활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 자등명(自燈明)과 법등명(法燈明)을 얻어 영원한 평안을 얻어 사시는 분으로 승화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출가재일에 생각해 보는 출가정신"은 바로 우리의 삶을 정화하여 영원한 행복의 터전으로 이어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부처님의 생애와 관련된 불전문학인 {열반경}이나 {팔상성도}, {불소행찬}의 내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종교는 역사적 사실과 상징, 그리고 신앙의 결집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를 잘 조화롭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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