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잘 읽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해빙은 요즘 글사랑 게시판에서 보기 힘든 "나름대로의 틀"을 갖추고 있는 작품인 것 같아 무척 반갑습니다. 여러가지 장르와 형식의 소설들이 눈에 띄고 있지만, 정작 소설을 쓴다 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서 쓰는 작가분들이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아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하였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소설이라고 불리기 부끄러울 정도의 작품을 쓰곤 했었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이런 글들이 글사랑 게시판에 많이 게시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이 소설은 인터넷에서 보기 드문 역사적인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합니다. 지나치게 흥미 위주의 소재들이 난무하고 있는 요즘에 이런 역사성을 지닌 소설이 게시판에 올라오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진철이 형에서 진철이 동무, 진철이 새끼 로 호칭이 변해가는 과정은 주인공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기도 하지만, 작가 나름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물론 그 과정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사상적 주관을 가지고서 이 작품을 뜯어 본다면 더욱 재미있는 감상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 작품은 몇가지 아쉬운 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 시점에서의 문제를 들 수 있겠는데요.
해빙은 전지적 작가 시점을 시도하고 있지만, 주인공의 과거를 회상하는 과정에서 점점 적절한 거리를 잃어버리고 어느 순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변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변질"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1인칭과 3인칭의 사용이 일관성이 없고 무질서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작가의 기획아래 사용된 소설적 장치였다면, 그다지 성공적인 효과를 거두었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구성에서의 문제도 들 수 있겠습니다.
일단 이 소설은 전형적인 액자식 소설을 취하고 있는데요, 이 액자식 소설을 쓸 때에 중요한 것이 액자 부분과 사진 부분이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해빙에서는 기석의 현재 생활에서 보여지는 몇가지 모습들과 기석의 과거의 모습들을 연관지어서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단지 쓸 데 없는 포장지의 모습처럼 보일 뿐입니다. 겉 이야기와 속 이야기를 구분하기 위해 쓰여진 기석"씨" 라는 호칭 역시 거추장 스럽게 보일 뿐이구요. "어느날 문득 텔레비전 속에서 "이진철"이라는 이름 석자를 보게 되었다" 는 부분의 윗 부분은 작품 전체와 섞이지 못하고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냥 이야기를 하려니까 뭣해서 억지로 끼워넣은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구요. 그런 부분에서도 좀더 단단하게 의미의 고리들을 연결시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또한 소설적인 설득력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점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여승이 진철의 여동생이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나름대로의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진철의 여동생은 작품 속에서 어떤 작품의 결말을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나도 역활의 비중이 작습니다. 작품의 포커스는 온통 진철에게 맞추어 놓고서는 갑자기 그의 죄를 속죄라도 하려는 양, 그의 동생이 여승이 되어 불도의 길을 걷는다는 작품의 결말은 너무나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적어도 진철과 누이동생 간에 갈등구조를 한 두번쯤 보여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선악구조에 억지스런 결말구조를 가지고 독자를 설득 시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주인공의 심리묘사에 심혈을 기울였으면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소설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아버지가 붙들려 가는 장면에서 주인공이 어떠한 심리적 변화를 겪는지 구체적으로 묘사를 해 주었으면 더욱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상당히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주인공은 지나치게 논리적이거나, 혹은 자연스런 연결선 없이 급작스런 감정의 기복이 이루어져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이는 캐릭터가 처한 상황의 정확한 이해가 없이, 그저 이야기만 전개시키려는 욕심에서 생겨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뭐, 나름대로 작품을 평가해 보았습니다만.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다 작품에 관심이 가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계속해서 기대하겠습니다.
단, 무엇보다도 설득력이 없는 사상계 소설은 소외받게 된다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먼저 기억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그럼 건필하십시오.~
해 빙
그 날도 기석 씨는 아침 일찍 일어나 우리로 찾아들어 토끼와 닭들에게 모이를 주고는 식사를 하기 위해 강변으로 향했다. 밤이면 오소리들이 산에서 내려와 기석 씨 자신보다 더 애지중지하는 가축들을 잡아먹어 치우는 바람에 조양강을 끼고 흐르는 강변에 그 강의 운치 마냥 멋진 집을 지어놓고도 매일 밤을 우리 근처에 허름한 초가에서 지내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졌다.
천성적으로 일을 좋아하는 기석 씨가 이 곳 강원도의 오지인 정선을 찾아든 지 어느덧 5년여가 흘렀다. 서울에서 힘들게 시작한 사업체가 단단하게 기반을 잡자 그 곳에서의 일거리가 많지 않음을 핑계로 동생 내외에게 맡기고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자 찾아든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제 인생의 황혼인 70을 목전에 둔 그로서 다시 자기가 온 자연으로의 복귀를 내심 염두에 두고 있는 지도 몰랐다.
산비탈을 내려가는 기석 씨의 얼굴로 차가운 강바람이 다가왔다. 아침이면 부딪치는 상쾌한 기운이 그로 하여금 그 곳에 뿌리내리게 하는 일부였다는 생각을 하며 서울에서는 밟아보지 못할 상큼한 흙을 천천히 밟으며 걸어갔다.
산을 에워싸고 흐르는 강가에 그야말로 그 강의 운치에 딱 들어맞게 집을 지었다. 물론 자신의 거처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자신을 찾아와 자신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지인 들을 위해 여러 개의 방을 들였다. 자신과 자신의 지인 들을 생각하며 가급적이면 자신의 손으로 지으려고 했었다. 그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전문적인 일부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손수 했다.
방으로 들어가 TV를 켜놓고 무심결에 밥통에서 밥을 뜨는 기석 씨의 귀를 순간적으로 사로잡는 말이 흘러나왔다. 반사적으로 밥을 푸던 손을 멈추고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아나운서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던 말이 자막으로 아직도 남아있었다. 북의 이 진철이 남쪽에 있는 누이동생 이 순애를 만나고싶다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남북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한 보도인 듯이 보였다.
'이 진철(73세)'.
그리고 찾고자하는 남의 누이동생 '이 순애(70세)'. 헤어질 당시의 주소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00리.
순간적으로 기석 씨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아니 평생을 두고 가슴속에 한 파편처럼 남아있던 이름 석자였다. 이제는 들고 있던 주걱과 밥그릇이 밥통 안으로 떨어진 것도 잊고 자막을 주시했다.
온몸이 경직되어졌다. 마치 집 안마당에 서있는 오랜 고목 마냥 그대로 꼿꼿이 굳어진 것만 같았다. 화면이 바뀌고 다시 아나운서의 말이 이어질 즈음해서 기석 씨는 눈을 한번 깜박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치 동면에서 깨어난 곰이 세상의 변화를 느끼려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듯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통 유리 밖으로 유유히 흐르는 조양강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의 일제의 통치로부터 해방이 되던 시점에 그 당시 초등학교 2학년 정도였던 시기에서 기석의 기억이 시작되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에 의해 징용으로 끌려갔던 작은아버지께서 살아 돌아 오셨고 또 그 즈음해서 한 여인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기석 씨의 주위로 찾아 들었다.
그 당시 일제에 의해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경우 열 명에 일곱, 여덟은 죽었던 연유로 작은아버지의 귀향은 그야말로 집안의 경사였다. 그래 할아버지께서는 그 어려운 살림에도 아랑곳 않고 애지중지 키우던 돼지를 잡아 사지에서 살아온 자신의 아들을 위해 동네 잔치를 벌였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후 다시 해방이 주는 느낌을 만끽하며 일상을 보내는 중에 찾아든 것이 바로 이 진철의 가족이었다.
어린 기석으로서는 그의 가족이 어떻게 그 마을 특히 자신의 집으로 오게되었는지는 알지못했다. '포천댁'이라고 불리는 여인과 함께 그 작은 마을을 찾아든 남루한 차림의 가족은 거처를 포함해서 당장의 생계가 어려웠다. 그러던 것을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께서 그 어려운 살림을 무릅쓰고 그 가족에게 구석진 곳에 있던 헛간을 방으로 꾸며 내주셨던 것이 그들과의 관계의 시작이었다.
당시 근근히 먹고 살만큼 농사를 짖고 있던 기석의 가족에게 그들의 더부살이는 가뜩이나 열악한 기석의 가정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나 천성이 착한 그들로서는 그들의 동거를 불쌍하게 받아들였었다. 그리고 그 집안의 장손이었던 기석으로서는 비록 피는 달리했지만 자신보다 여섯살이 연배인 형이 집안에서 같이 산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었다.
진철 형의 말로는 자신의 아버지는 독립군이었다고 했다. 그래 일제말기에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에 참여해서 크고 작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노라고 했다. 그러다가 한 전투에서 일본군의 총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를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얘기를 하는 사람은 오직 진철 형뿐이었다. 그의 어머니나 누이동생에게서는 그의 아버지에 관해 일언반구의 얘기도 들어볼 수 없었다.
그 작은 동네의 젊은이들도 처음에는 진철 형의 이야기를 믿는 듯했다. 으레 그렇듯이 부러운 시선으로 또래들이 독립군의 아들로서 진철 형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 그의 아버지에게 빌려준 돈을 받기위해 여기 저기 수소문 끝에 진철 형의 어머니를 찾아왔던 사람의 출현과 그의 아버지가 만주로 피신해서 도망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연들을 전해 듣고는 그를 대하는 시선이 180도 바뀌었다. 어린 기석으로서는 그의 아버지가 독립군이었던 만주의 아편장수였던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냥 그 형과 함께 노는 것이 좋았다.
진철로서는 나이가 한참 어린 기석을 떠나 하시라도 자신의 또래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그래 나이 어린 기석을 이용해 자신의 출신이 은근히 알려지게 함으로서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리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이제는 같은 또래에게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본전이라도 하련만 섣부른 거짓의 탄로가 진철 형의 위치를 밑바닥 수렁으로 내몰았다. 항상 마을의 또래들 그리고 나이 어린 아이들에게도 갖은 수모를 당하며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그리고 그 거짓의 대한 비참한 결과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더욱 고단한 생활을 보내야했다. 어린 기석의 눈에도 진철 형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었다.
그 당시 진철 형의 얼굴이 성해 날 날이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의 어미는 한숨으로 세월을 보냈고 그의 누이동생은 말수가 적어졌다. 언제고 진철 형과 관련한 사건이 발생되면 기석의 아버지가 전면에 나섰다. 그 옆에는 항상 기석이 함께 했다.
세월이 흘러 이남만으로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고 모든 국가의 행정조직을 정비하면서 기석의 아버지는 그 마을의 이장직을 맡았다. 남보다 특별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마음씨 착하고 한문으로 이름 정도나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아버지가 이장을 맡게된 이유였다. 문맹이 많았던 당시로서는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진철 형의 가족을 불쌍히 여기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그 즈음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기석의 가족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기석의 아버지가 이장이 되면서 진철 형의 가족은 조금 더 낳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장으로서의 작은 직위를 이용해서 남들보다도 그들 가족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베풀려고 애를 썼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철 형은 여전히 동네의 천덕꾸러기 신세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나은 것이라곤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의 심부름꾼이 되었을 뿐이었다. 하릴없이 동네 사랑방에서 화투로 소일하고 있는 또래들에게 술이며 담배 심부름 등의 시중을 들어주면서 조그마한 만족감을 느껴야했다.
해방과 임시정부 수립의 기쁨도 잠시 서서히 어른들의 말수가 줄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뭔가 행복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던 기분들이 한없이 침잠하기 시작했다. 어린 기석은 주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했고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으나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마실을 마치고 돌아오는 진철 형을 대문에서 맞이했다. 그냥 기석을 무시하고 집으로 들어가려는 그 형의 손을 어둠 속으로 잡아끌었다.
"형, 어른들이 왜 저런데? 마치 무슨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표정들인데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들을 해주지 않는 거야."
기석의 손에 잡혀 있는 자신의 손을 그대로 두고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답답해진 기석이 다시 한번 다그쳤다.
"형은 그 이유를 알고있는 거지? 응?"
물끄러미 기석의 눈을 주시하던 진철이 기석에게 잡힌 손을 풀고는 그 손으로 기석의 손을 잡고 조금 더 어두운 곳으로 끌고 들어갔다.
"너, 꼭 알고싶은 거야?"
진철의 말투에는 그 어둠만큼이나 결연한 기운이 배어있었다. 그 분위기에 맞추어 기석의 답변 또한 긴장감으로 넘쳐있었다.
"응."
진철이 자신의 눈 높이를 기석과 맞추느라 약간 몸을 숙였다.
"너, 그러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절대로 남들한테 얘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너희 엄마나 아버지에게도 말이야."
기석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스쳐지나갔다.
"형, 내 반드시 약속할게."
진철이 목소리를 깔대로 깔았다.
"조만 간에 전쟁, 전쟁이 일어날 거야."
어린 기석이 화들짝 놀랬다.
"전쟁이라고?"
갑작스럽게 퉁겨져 나온 고성을 진철이 얼른 손으로 막아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대고 소리를 낮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래, 해방전쟁이 말이야."
이제는 기석도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형, 우리나라 일본에서 해방된 것 아니야?"
"물론 일본에게서는 해방이 되었지."
"그런데 무슨 해방 전쟁이야?"
진철이 더욱 목소리를 깔면서 힘을 주었다.
"너는 지금 우리나라가 완전히 해방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기석이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연신 멀뚱거렸다.
"지금 말이야, 우리나라가 일본에게서는 해방이 되었지만 다시 그 틈을 비집고 미국이란 나라가 우리나라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는 거야."
"그러면 우리나라가 미국이란 나라와 전쟁을 한다는 거야?"
진철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저기 북쪽에 있는 김일성 장군이 우리를 미국에서 해방시키고 우리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미국 사람들과 미국의 앞잡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한다는 거지."
"미국의 앞잡이가 누군데?"
진철은 대화를 잠시 멈추고 다시 기석의 손을 잡고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배 밭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너, 진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지?"
"형, 나도 남자야. 한번 약속한 것은 죽어도 지켜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구."
"좋아, 그럼 너를 믿고 얘기할 테니 잘 들어둬라."
그 날 밤 어두운 배 밭에서 들은 바로는 지금 우리나라를 미국이란 나라가 그들의 앞잡이를 내세워 다시 일본을 대신해서 지배를 하려고 한다. 그래서 독립군 출신의 북의 김일성 장군이 우리의 힘으로 미국과 미국의 앞잡이들을,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 호의호식하던 사람들과 그와 친한 사람들, 몰아내고 우리나라만의 완전한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리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나라는 국민 모두가 주인으로 모두가 평등하게 살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어린 기석이 들어도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로 들렸다.
"아니, 그런데 형. 그게 무슨 쉬쉬할 문제야?"
"네가 한번 생각해 봐라. 만약 네가 미국의 앞잡이라면 그 얘기를 들어 내놓고 할 수 있겠니?"
기석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면 우리 엄마, 아버지도 미국의 앞잡이란 말이야?"
순간 진철은 아차 했다.
"너희 엄마, 아버지는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라 워낙 마음이 좋다보니까 미국의 앞잡이들이 불쌍하니까 그런 거지. 그리고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해방이 된다면 너희 아버지 같은 분은 그야말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야."
어린 기석이 생각할 때 진철 형의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문제였다. 학교고 집 어디서고 미국이란 나라를 지금 진철 형이 얘기한 것처럼 나쁜 나라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원하면 저희들끼리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지 왜 남을 위해 전쟁을 하겠다는 것인지 몰랐다. 아마도 진짜 독립군 출신이어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 날 밤 이후로 진철 형이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애타게 원했던 또래들과의 관계개선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피하기 시작했고 외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어디를 간다만다 얘기도 없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간혹 늦은 밤에 진철 형 엄마의 진철 형을 꾸짖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고는 했다.
그리고 어른들의 표정은 갈수록 긴장되어지기 시작했다. 어린 기석으로서는 그냥 전쟁이란 단어만 알고 있었지 그 단어가 주는 의미는 알지 못했으나 어른들의 표정을 보고 전쟁이란 것이 어른들도 무서워할 정도의 고약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날이 지나면서 고요할 정도의 침묵이 서서히 깨어지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얘기들이 오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어른들끼리 만나면 자주 고성이 오고가고 했다. 얘기인즉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는 식이었다. 그리고는 말미에 꼭 후에 두고보자는 말이 오고갔다. 어린 기석이 보아도 뭔가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었다. 그 즈음해서 진철 형의 움직임이 더욱 분주해졌다.
기석은 도대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날 저녁도 놀이를 핑계로 집 앞에서 진철 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시던 아버지께서 기석을 보고는 절대 멀리 가지 말 것을 주문했다. 한참동안 놀이를 가장하고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진철 형의 모습이 마을 어귀에 나타났다. 바삐 걸어오는 진철 형의 손을 잡고 어두운 곳으로 이끌었다. 이제는 진철 형도 기석의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이 담담하게 기석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기석이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낮은 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형, 요즈음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인민 해방 전쟁이 임박했기 때문에 양키의 앞잡이들이 당황해서 그러는 것이야."
진철 형이 담담하게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기석은 이상했다. 못 본지 얼마 되지 않건만 그 동안 진철 형의 말투며 사용 언어가 바뀌었다. 인민 해방 전쟁은 뭐고 양키의 앞잡이는 또 무엇인가. 기석의 눈이 커졌다. 그를 의식한 진철 형의 설명이 이어졌다.
"빠른 시일 내에 전쟁이 일어날 거야. 이 남한의 불쌍한 인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북의 김일성 장군이 조만간 양키와 양키의 앞잡이들을 까부수고 모두가 잘 사는 행복한 인민의 나라를 세울 거야."
진철 형의 말은 단호했다. 또한 섬뜩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항상 빌빌대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동네 어른들끼리 저렇게 싸우고 그러는 것이야?"
"일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인민 해방 전쟁을 비난하니까 저러는 것이야. 그러나 두고 봐. 금방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살려달라고 아우성 칠 테니 말이야."
진철 형이 지그시 어금니를 깨어 물었다. 사람이 완전히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형. 그렇게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데 왜들 우리끼리 서로 싸우고 그러는 것이야?"
"모두 양키 놈들 때문이지."
이제는 진철 형에게 무엇을 더 물어본들 아무 소용도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진철 형의 인민들의 세상을 위한 전쟁론은 확고했다. 그와 같이 집으로 향하는 걸음걸이가 불편했다. 내색을 않고 집에 돌아와서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고민에 빠져들었다. 전쟁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려니와 그렇게 따르고 좋아했던 진철 형이 무섭게 변했다는 것이 어린 기석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다. 동네의 형들이 그 형을 외톨이로 만들어서 그런가 보다는 생각도 들었다.
진철 형의 예언이 딱 들어맞았다. 6월 하순 일요일에 아침을 먹고 일찌감치 한내로 물놀이하려고 집을 나서는 기석을 아버지가 붙잡았다. 그 뒤에는 엄마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도 창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순간 기석은 진철 형이 묵고 있는 구석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댓돌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 시간쯤에는 그 곳에 놓여있어야 할 신발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가 하늘을 아니 온 세상을 뒤덮은 듯 했다. 아버지는 연신 담배를 피워댔고 그 곁에서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하고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아버지께 되뇌어 물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세 동생과 함께 멀뚱멀뚱 두 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날 하루 온종일 그렇게 무거운 침묵으로 날을 보냈다. 밤이 되자 그 침묵은 공포로 다가왔다. 도대체 불을 켤 생각들을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의 침묵은 낮 동안의 침묵과는 또 달랐다. 비행기 날아가는 굉음만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그 어색한 순간이 바로 아래에 살고 있는 작은아버지 내외께서 올라오신 것으로 인해 깨어졌다.
어두워서 얼굴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작은 엄마의 얼굴 색은 그 목소리로 보아 아마도 완전히 백짓장 마냥 하얄 것 같았다. 사지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아버지께서 다시 국방군에 입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께 하소연하고 있는 작은 엄마의 목소리는 울음인지 분간이 힘들었다. 아버지는 연신 담배를 피워대며 혀만 차다가는 작은 엄마에게 서둘러 피난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그때 아버지께서 왜 피난을 종용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앞으로 다가올 상황을 미리 알고 있는 듯 했다.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작은 엄마의 물음에 침묵을 지키던 아버지가 두 분이 집을 나설 때 이곳에 그냥 남아있겠다고 전했다. 아울러 작은아버지에게 몸조심 할 것을 신신 당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 소리와 함께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들려오던 포탄 소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크게 들려왔다. 지금까지 근심으로 일관했던 아버지의 표정이 이제는 담담하게 변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진철 형이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 나라가 완전히 해방이 되어지면 아버지같이 착한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표정이 전보다 그렇게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포탄소리가 정겹게까지 들려왔다. 이제는 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진철 형의 가족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물어보았다. 그 말에 아버지는 다시 한숨으로 일관했다. 어린 기석으로서는 이제는 좋은 세상이 오는데 그새를 못 참고 어디로 가버렸는가 하는 아쉬움의 한숨으로 받아들였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던 진철 형이 마을에 나타난 것은 인민 해방군이 마을을 점령한 다음날이었다. 멀리 나가지 못하고 집 앞마당에서 하릴없이 서성이는데 마을 어귀로 들어오고 있는 진철 형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굴은 그 얼굴인데 복장이 특이했다. 인민군 복장과 똑같은 색의 옷을 입었고 검은 장화 같은 신발을 신고 왼쪽 팔에는 빨간 완장을 차고 있었다. 옷만 변화가 있던 것이 아니었다. 걸음걸이도 상당히 바뀌었다. 팔을 휘젓는 것이 흡사 도마뱀이 앞다리를 벌리고 걷는 것 같았다.
어쨌든 기석으로서는 반가웠다. 급히 진철 형에게로 다가갔다.
"형, 어디 갔었던 거야?"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그런지 우쭐한 표정을 짖는 듯했다.
"내가 전에 언뜻 얘기했었지. 불쌍한 인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그래서 그 일로 여태껏 일하다 온 거야. 그리고 너 앞으로는 나에게 형이라고 부르지 말아. 그냥 동무라고 불러, 응. 알겠냐?"
어린 기석이 생각해도 이상했다.
"아니 형, 그럼 나하고 형하고 동무란 말이야?"
"그래, 우리 인민 공화국에서는 누구나 다 똑같아. 전부다 같은 동무란 말이야. 그러니 앞으로는 반드시 동무라고 부르라고."
기석은 재미있다는 듯이 동무, 동무를 되뇌었다.
"진철 동무, 그런데 그 완장은 뭐야?"
자신을 동무라고 부르고 있는 기석의 말이 조금은 어색한 듯했다. 그러나 이내 정색을 했다.
"그래, 그렇게 동무라고 부르라고. 그리고 이 완장은 위대한 인민 해방군의 전사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야."
"위대한 인민해방군이 하는 일이 무엇인데?"
"그야 물론 양키의 앞잡이들을 잡아내는 것이지. 인민의 피를 빨아먹고 살았던 반동 새끼들을 잡아내는 일이지."
기석은 진철 형이 대단한 감투를 썼다고 생각했다.
"형, 아니 진철 동무, 내 아버지한테 형 돌아왔다고 얘기할게. 잠깐 기다려."
진철이 급히 기석의 행동을 제지했다.
"기석 동무, 오늘은 바빠서 안되고 내가 나중에 들르도록 할게."
한마디 내뱉고는 마을 한복판으로 걷기 시작했다. 기석은 그런 진철 동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걷고 있는 진철 동무를 마을의 한 부잣집 어른이 발견하고는 말을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더니 진철 동무가 갑자기 가래침을 내뱉고는 휑하니 걸어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석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있던 아버지에게 진철 형이 돌아온 것과 그리고 방금 전의 상황을 얘기했다. 아버지의 끌끌거리며 혀를 차는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렸다. 뭔가가 크게 잘못되어지는 모양이었다. 뭔가 조용한 듯하면서도 긴박한 기운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어딘가를 다녀오신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제 진철 형이 만났던 마을의 어른뿐만이 아니고 여러 명의 마을의 유지가 여러 사람이 보는데서 참혹하게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엄마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신음소리를 냈다. 순간 기석으로도 진철 형이 하고 있는 일이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아버지를 걱정했다. 아버지께서 이장을 맡고 있고 그리고 작은아버지께서 국방군에 입대했으니 아버지도 안전치 못하리라 얘기했다. 기석은 이상했다. 분명 진철 형은 기석에게 이야기했었다. 자신의 아버지는 더 잘 될 것이라고. 그런데 그것을 아버지, 엄마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의 행동은 바삐 움직였다. 먼저 안방에 있는 다락방의 한 구석을 치우기 시작했다. 요강을 올렸다. 입구 쪽을 어지럽게 여러 가구로 위장을 했다. 그리고는 어린 자식들을 모두 모아서 다짐을 받아냈다. 누가 와서 아버지를 찾거든 전혀 모르겠노라고 얘기하도록 강요했다.
진짜 엄마의 말대로 몇 번인가 진철 형처럼 빨간 완장을 찬 모르는 아저씨들이 집에 와서 아버지를 찾았다. 누군가가 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면 아버지는 급히 다락으로 올라가셨고 엄마가 손님을 맞이했다. 물론 엄마가 모른다고 딱 잡아떼었지만 그럴수록 기석의 마음은 어지러워졌다. 그러면 우리 아버지도 미제의 앞잡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사람들이 잘못 알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모르는 아저씨들 대신에 진철 형이 왔으면 하는 생각도 가졌다. 어린 동생들은 지금 아버지가 마치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듯이 생각하는 듯했다.
그 날도 기석은 멀리 나가지 못하고 집 앞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마을 안쪽에서 진철 형이 여러 젊은이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기석은 얼른 진철 형에게 달려갔다.
"형,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진철이 표정을 험상궂게 짓다가는 이내 온화한 표정으로 얼굴을 위장했다.
"형이라고 부르지 말고 동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응. 그런데 너는 혼자 뭐 하는 거야?"
기석은 진철 형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그 형의 손을 잡아끌어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형, 아니 진철 동무, 그런데 해방전쟁이 일어나면 우리 아버지같이 착한 사람이 잘 될 거라고 했잖아."
"그거야 당연하지. 그래서 인민해방군에서도 너희 아버지 같은 분을 찾고 있지."
이제야 기석의 의문은 풀리는 듯했다. 그렇게도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고는 한 것이 아버지를 해코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를 잘 살게끔 해주려고 했던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와 엄마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이 오고 하니 지레 겁을 먹고는 숨고 했던 것이다. 기석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기석은 저간의 사정을 설명해주고 다음에는 형이 직접 와서 그런 뜻을 아버지께 전하라고 했다. 진철 형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렇지 않아도 너희 아버지를 한참 찾았는데 집에는 안 계신 모양이더라구. 그래, 지금 어디 계신 거냐?"
기석은 조금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진철 형의 귀를 잡고 지금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락에 숨어 계시다고 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진철이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는 기석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일행들과 함께 마을을 벗어났다.
바로 다음날 방안에서 동생들과 놀고있는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아버지는 급히 다락으로 숨으셨고 엄마가 대문으로 나갔다. 기석은 문틈으로 밖을 엿보고 있었다. 대문을 열자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중에는 총을 멘 인민군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그들 틈에, 아니 그들의 앞에 서있는 진철 형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 이제는 아버지가 다락에 숨지 않아도 될 것이란 생각에 가슴이 콩당콩당 뛰기까지 했다.
잠시 뭔가를 얘기하는 것 같더니 고성이 오고갔다. 기석은 '배은망덕한 놈'이라는 소리와 '반동새끼'라는 고성을 동시에 들었다. 순간 일이 잘못되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성이 이어지더니 진철 형을 필두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런 진철 형의 목을 부여잡았으나 이내 마당으로 나뒹굴었다.
순간 기석은 방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그를 본 진철이 고개를 돌렸다. 기석은 그런 진철을 외면하고 마당에 쓰러진 엄마에게로 다가갔다. 엄마는 흐느끼고 있었다. 엄마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안방으로 뛰어들어갔다. 평소 기석과의 놀이로 집안의 구조를 자기 손바닥보다 훤히 알고 있는 진철이 새끼가 다락으로 통하는 문에 서있었고 일부는 다락위로 올라갔다.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석은 있는 힘을 다해 진철을 향해 돌진했다. 그대로 머리로 진철의 배를 들이 받아버렸다. 진철이 잠깐 끙하는 신음 소리를 내더니 이내 그 큰손으로 기석의 얼굴을 후려쳤다. 순간 옆에 있던 한 남자가 기석의 등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절규의 소리도 들렸다. 기석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종료되어 있던 상태였다. 대문 가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는 엄마의 곁에서 이웃 아주머니들 몇 분이 엄마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진철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마음 굳게 먹으라는 말 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오는 기석의 양팔을 잡고 엄마는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둘러싸고 있는 아주머니들의 입에서는 절망적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한번 끌려가면 그걸로 끝이라는 것이었다. 잘못이 있고 없고 그리고 잘못을 뉘우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일단 끌려가면 그걸로 끝이라는 것이었다. 기석의 아버지로서는 마을의 이장을 맡고 있고 또 동생이 국방군에 가 있는 만큼 살아올 확률은 없으니 마음 크게 먹고있으라는 것이었다.
거의 실신하다시피 한 엄마를 방으로 모셔다 눕히고 기석은 뒤꼍으로 가서는 낫을 찾았다. 그 낫을 들고 숫돌에 갈기 시작했다. 진철이 새끼를 죽인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다. 초저녁에 시작해서 완전히 어둠이 깔릴 때까지 낫을 갈고는 그 낫을 부엌에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마치 실성한 사람 마냥 흐느꼈다. 그 주위에서 어린 동생들은 영문도 모르며 같이 따라 울었다.
기석은 되는 대로 엄마와 동생들에게 밥을 차려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진철이 이 새끼를 죽이고 말겠다는 일념밖에는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밤에는 무서워서 홀로 나다니지도 않았던 밤길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새벽이 되도록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낫을 들고 온 마을을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종래 진철이 새끼를 찾을 수 없었다. 후에 안 바로는 그 새끼들의 본부가 다른 마을에 있었다고 들었다.
지난밤 한숨도 못 자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눈을 멀뚱거리며 누워있는데 대문 밖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의 목소리도 들렸다. 또 진철이 이 새끼가 왔는가 하는 생각에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서 낫을 들고 대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순간 기석은 자기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을 맏이 했다.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다. 비록 성해 보이지는 않으나 아버지께서 마을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집을 향해 오고 계셨다. 엄마가 바로 아버지의 한쪽 팔을 끼셨다. 기석도 손에 들려있는 낫을 안마당에 던져버리고는 바로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외관상으로는 그렇게 많은 상처가 보이지 않았으나 무던할 대로 무던한 아버지가 남의 부축을 받고 들어오는 것을 보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안방에 뉘였다.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는 두 가지로 요약이 되었다. 하나는 이렇게 착한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것과 그리고 그들에게 끌려가서 이렇게 살아왔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어린 기석은 혼돈스러웠다. 진철이란 인간이 그래도 인간의 탈은 쓰고 있는 놈이라 차마 제 아버지를 어쩌지 못하고 풀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난밤에 그 인간을 죽이지 못한 것이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생각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엄마에게 얘기하는 아버지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인민공화국에 참여하고 있는 이웃 마을 사람이 아버지를 적극 변호했다는 것이었다. 기석의 아버지는 비록 양키의 앞잡이들에 의해 이장 일을 맡고 있었으나 본인이 원해서 한 일이 아닌 만큼 그 놈의 양키 앞잡이 새끼들에게 그 죄를 물어야 할 것이고 기석의 아버지같이 청렴하고 가난한 사람이 통일된 인민공화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라고 했다. 더불어 동생이 국방군에 입대한 것도 있고 하니 더욱 충성 할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입을 통해서 진철이 새끼의 얘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진철이 새끼 얘기가 나오고 안 나오고 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셨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어린 기석으로서는 그 인간의 배신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증오스러웠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진철이 새끼는 기석의 마을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간혹 동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옆 마을로 자리를 옮겨 그 곳에서 그 짓거리를 계속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유엔군이 참전하고 인민군이 북으로 밀려가면서 그 새끼 소식은 완전히 끊겼다. 아버지의 말로는 아마도 북으로 인민군과 함께 올라갔을 것이라 했다. 그 짓을 해놨으니 이제는 더 이상 남에서는 살 수 없을 거라고 하셨다.
아무튼 그 후에 아버지는 그때의 육체적인 후유증을 앓으셨고 그리고 그들에게서 잡혔다가 살아 돌아온 것에 대한 주위의 의심의 눈초리를 한동안 받으며 살아야했다.
기석 씨는 강의 가장자리에 떠 있는 얼음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 전체가 꽁꽁 얼어붙었던 것이 봄이 가까워 오면서 서서히 녹기 시작해서 이제는 가장자리 일부에만 얼음이 남아있었다.
아버지께서 그 당시의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으로 불편한 생을 일찍 마감하셨을 때는 어린 시절 갈아둔 그 낫으로 이 세상 끝까지 이 진철을 쫓아가 결말을 보고자 했었다.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이남에 살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했다. 그 어디에서고 이남에 살아 있다는 흔적을 찾아낼 수 없었다. 차마 인간으로서 못할 짓을 해놓고 이곳에 살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었으나 조금은 허탈했었다. 그래 미국에서 시민권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을 통해서 이북에 있는지의 생존여부도 확인해 보았으나 종래에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마 그 곳에 살고있다면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을 것이란 얘기를 전해 들었었다.
진철에 대한 증오를 가슴속에 묻어두고 살아가는 중에 기석 씨가 정선으로 들어오기 얼마 전에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면서 어머니는 과거의 일은 과거로 묻어버리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이미 기석 씨도 60이 넘은 나이였건만 아직도 이진철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지 않고 가슴 한 쪽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이제 그 나이 되면 모든 것 훌훌 털어 버릴 만한 나이였는데도 말이다.
어머니의 발인 전날 다소 늦은 밤에 한 승려가 찾아들었다. 으레 상갓집을 찾는 승려들이 간소하게 조의를 표하고 영정 앞에 앉아서 불경을 외는 것과는 달리 그 승려는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건성으로 조의를 표하는 일반인보다도 더욱더 진지하게 고인에게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상주인 기석 씨에게도 맞절로 애도를 표하는 것이었다. 고개를 드는 순간 기석 씨는 그 승려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는 움찔했다. 얼굴에 은은하게 주름이 싸이기 시작한 한없이 평화로운 표정의 여승이었다.
예를 마친 여승은 빈소 한 쪽으로 비켜 앉아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알 수 없는 불경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너무나 청아했다. 옆에는 다른 문상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건만 그에 아랑곳 않고 여승의 목소리가 상갓집을 뒤덮었다. 처음에는 다소 애절하게 들렸던 그 목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맑은 호수 저 한복판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노랫소리같이 변해갔다. 상갓집에 있는 모든 사람의 귀가 모두 그 곳으로 쏠렸다. 아니 삼라만상의 모든 눈과 귀가 그 여승의 독경소리와 함께 했다.
한참을 불경을 외던 여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옆에서 그 분위기에 빠져 있던 기석 씨가 정신을 차리고 여승에게로 다가섰다. 뭔가 말을 해야했다. 여승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인과 그리고 먼저 가신 고인의 부군 되셨던 분과 속세에서 모진 인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 이제 가시는 길 모든 티끌 훌훌 털어 버리시고 왕생 극락하시라는 소망으로 염불을 외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잘 알고 있었다면 기석 씨가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기석 씨가 급히 입을 열려고 하자 다시 여승의 입이 열렸다.
"지내놓고 보니 속세의 일은 한낱 흘러가는 뜬구름인 것을 부디 부처님의 자비가 언제고 함께 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리고는 기석 씨에게 가벼이 합장을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무 말 없이 기석 씨가 그 여승의 뒤를 배웅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승의 뒷모습이 멀찌감치 사라졌을 때 기어이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이진철의 누이동생 이순애였다. 갑자기 머리 속이 흐릿해졌다.
그녀에 대해 특별나게 생각나는 것이 없다. 이상하리만치 말수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었다. 자신의 집에 같이 살면서 기석 씨와 대화를 나눈 것이 몇 번 되지않을 성 싶었다. 지난날의 어스름한 기억으로 그녀가 그녀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여승이 된 사연을 유추해 보았다. 결국은 오라비 이진철이 때문이었단 말인가.
지금 여승이 되어 나타난 그의 누이동생은 동란 중에 있었던 자신의 오라비의 못된 행동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모진 인연이라고 표현했고 그 모든 것이 흘러가는 뜬구름이라고 했다. 이진철의 누이로서 그리고 살아있을 지도 모를 그의 어머니로서도 이제까지의 삶이 결코 간단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직접 피해 당사자인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그로 인해 가장 많은 상처를 받은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그런데 왜 자신은 그를 용서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결국은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한 사실, 자기 입으로 아버지가 다락방에 숨어 있다고 진철에게 전해준 그 사실 때문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말이다.
강가에 지난해 그 지역을 쓸고 간 홍수의 흔적이 곳곳에 어지러이 남아있었다. 그 홍수에 기석 씨도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다. 하마터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그 소용돌이에 휩쓸릴 뻔했었다. 어서 빨리 봄이 와서 산 위에 있는 눈과 얼음이 녹아내려 아직도 곳곳에 배어있는 어지러운 자국을 말끔히 씻어버렸으면 하는 바램이 일어났다.
첫댓글글이 무지 길어서 움찔했잖아...이 녀석이 감상평을 쓰는게 아니라 논문준비하나? 그렇게 생각했다는...풋.. 웬지 미안하군.. 원래 소설감상평은 내 주력분야였는데..풋..도통 관심을 못 썼는데, 에구...나 요즘 왜 이러지...암튼 좋은 작품, 좋은 감상평, 행복하다네..^^
첫댓글 글이 무지 길어서 움찔했잖아...이 녀석이 감상평을 쓰는게 아니라 논문준비하나? 그렇게 생각했다는...풋.. 웬지 미안하군.. 원래 소설감상평은 내 주력분야였는데..풋..도통 관심을 못 썼는데, 에구...나 요즘 왜 이러지...암튼 좋은 작품, 좋은 감상평, 행복하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