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3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루카 12,13-21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능력
영화 ‘더 룸’(2019)은 어느 날 시골의 값싸지만 커다란 집을 산 젊은 부부, 매트와 케이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 집에는 폐쇄된 비밀의 방이 있었고, 그 방 안에서는 원하는 것을 모두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물건이나 예술 작품 같은 것을 만들어내며 그 방의 능력을 즐깁니다.
하지만 케이트는 자신들의 아기를 두 번이나 유산한 슬픔 속에서, 그 방의 능력을 이용하여
아기를 다시 가지고 싶어 합니다.
매트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소원대로 방에서 아기를 가져오게 됩니다.
매트는 소원의 방에서 얻은 돈으로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돈이 재가 되어있었습니다. 집에 와서 돈을 집 밖으로 뿌렸더니 재가 되어 떨어졌습니다.
아기를 데려나갔더니 아기는 1초에 1년씩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집 안에서 만들어진 것의 시간과 집 밖의 시간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매트는 그래서 괜히 아이에게 상처 주지 말고 아이를 다시 소원의 방에서 돌려보내자고 합니다.
그러나 케이트는 아이에게 집착합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자기를 다시 없애려는 것을 알고는 일부러 집 밖으로 나가 청년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소원의 방으로 들어가서 다른 세상을 만들어내고 아버지가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이 아버지의 모습이 되어 어머니와 남편처럼 살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안 케이트는 아들을 이겨보려 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매트는 아내가 소원의 방에 갇힌 것을 알고는 벽을 뚫고 그녀를 구하러 갑니다.
결국 아내를 구하고 아이를 집 밖으로 유인하여 재가되게 합니다.
케이트는 자기 아들이 재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재물이나 쾌락, 권력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 세상의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기 때문입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는 자기 형더러 자기에게도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말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사람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은 영원의 시간을 살고 계십니다.
영원 안에 사시는 분은 이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재와 같음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재를 나누어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며 어떤 부유한 사람의 예를 들어주십니다. 그는 소출을 많이 거두어 곳간을 늘리려 하였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불교에서 집착은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집착하는 자아를 없애는 것입니다.
결국 나아가는 방법은 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죽음입니다.
죽으면 이 세상은 마치 꿈처럼 의미 없는 세상이 됩니다. 깨어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늘 죽는다고 믿어야 합니다.
동물들이 사랑할 능력이 없는 이유는 집착에서 벗아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바로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저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첫 기억 때문에 잠을 무서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 때는 잠을 자도 부모님이 지켜주실 것임을 믿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며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해 달라고 자기 전에 매번 기도합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사는 사람은 집착에서 벗어납니다.
그래야 나뿐인 사람에서 내어줄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됩니다.
잠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고 그 능력을 발휘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이 세상에 영원히 갇히느냐, 아니면 이 세상을 꿈처럼 즐기며 살 수 있느냐가 결정됩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우리는 선택할 능력도 있고 그 선택대로 믿을 능력도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 삶이겠습니까? 결국 집착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며 즐기다 가는
삶일 것입니다.
그러려면 오늘 죽을 수 있다고 믿읍시다.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3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루카 12,13-2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습니다!
신앙 없이,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느님 없이 살다 보니 자신의 힘만 믿습니다.
인간의 힘이라는 것이 어디 믿을 수 있던가요?
지금은 혈기왕성해서 뭐든 다 할수 있을 것 같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나이 들고 여기저기 아프고 시들기 마련입니다.
그때야 인간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 자신의 능력, 자신의 돈만 믿고 기고만장한 얼굴로 살아가던 어느 날,
갑작스레 다가온 한계, 능력 밖의 상황에 직면하고서야 겨우 하느님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 매달리고, 묵주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고 비웃습니다.
기도는 힘없고 나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대놓고 무시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큰코다치는 사람 한두 명 본 게 아닙니다.
죽기 살기로 모아 들이는데 혈안이 되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들 다 놓쳐버리기 마련입니다.
‘영혼이나 신앙, 사랑이나 우정이 밥 먹여 주냐?’며 정신없이 허상만을 쫓아다니던 우리에게 어느 순간 청천벽력 같은 주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복음 12장 20절)
시편 작가의 강조처럼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습니다.’.
세상의 논리와 그저 육(肉)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릴 것입니다.
복음서 전반을 살펴볼 때 부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은 그리 매끄럽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당신이 가난한 집안 출신이어서 그런가 생각도 듭니다.
부자들을 향한 질책과 경고는 아주 매섭습니다.
그래서 때로 부자로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좀 더 심사숙고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부자, 열심히 일해서 벌은 돈을 아낌없이 ‘살아계신 하느님’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봉헌하는 부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낌없이 칭찬하시는 부자입니다.
매서운 질타의 대상이 되는 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돈이라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돈의 위치를 하느님보다 위쪽에 설정해놓은 사람들입니다.
죽어도 자선 한번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돈 많다고 함부로 가난한 사람들 업신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경고 말씀은 너무나 무서운 말씀, 섬뜩한 말씀입니다.
개념 없는 부자가 강한 경고를 받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또 다른 한 가지 반성을 해보게 됩니다.
돈이라고는 땡전 한 푼 없는 수도자들에게 오늘 말씀은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묵상입니다.
재물 외에도 ‘부’라고 칭할 수 있는 대상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시간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긍정적인 측면들입니다.
장점들, 경쟁력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좋은 재능들, 어떻게 보면 재물보다 훨씬 가치 있는 ‘부’입니다.
이런 ‘부’를 공동체와 이웃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기쁘게 내어놓는 노력, 그것이야말로 칭찬받는 부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다시 한번 설레는 마음으로 공동체와 이웃, 그리고 세상과 하느님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루카 12,13-21
탐욕
오늘 복음 말씀은 탐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돈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탐욕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풀이한 것과 같은 '부자들에 대한 경고'가 야고보서에 나옵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야고 5,1-6)."
복음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어떤 부유한 사람'은 원래 부자였는데 많은 소출을 거두어서 더 부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모든 곡식과 재물을 보관할 방법만 궁리하고, 그 재산으로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날 밤에 그의 목숨을 가져가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그런데 그 부자가 순전히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일해서 많은 소출을 거두고, 많은 재물을 모을 수 있었을까? 그는 일꾼들을 고용해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농사를 지었을 것이고, 이웃 사람들의 도움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꾼들이나 이웃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소출을 거둔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드릴 생각도 없습니다.
그 부자가 고용한 일꾼들에게는 계약한 대로 정당한 품삯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노동자의 품삯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태도, 또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의 실천 여부입니다.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그 부자의 모습에는 사랑은 없고 이기심만 있습니다.
'사랑'이란 계약한 것 이상으로 베푸는 일입니다.
신명기에 이런 율법이 있습니다.
"너희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손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
너희가 올리브 나무 열매를 떨 때, 지나온 가지에 다시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와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포도를 수확할 때에도 지나온 것을 따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신명 24,19-21)."
룻기에 나오는 '보아즈'는 룻이 수확꾼들 뒤를 따라가며 이삭을 주워 모을 수 있게 허락할 뿐만 아니라 종들에게 일부러 이삭을 흘려주라고 시키기까지 합니다(룻 2,16).
보아즈는 율법에 정해져 있는 것 이상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어떻든 '내 밭에서 난 것'이라도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고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복음 말씀에 나오는 부자가 어리석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자기 재산만 생각하고 자기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어리석음이고, 자기 자신의 쾌락만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하면 저 세상에서 멸망할 것이고, 이웃을 생각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고립되어서 혼자서 살다가 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탐욕은 부자들만의 죄가 아니라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모든 사람'이 다
경계해야 하는 죄입니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가지려고만 하고, 가진 다음에도 더 가지려고만 하는 탐욕은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멸망시킬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자본의 힘으로 빼앗아서 부자들이 더 부유하게 되는 자본주의도 나쁘고,
부자들의 것을 폭력으로 빼앗는 공산주의도 나쁘고...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