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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5.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묵상글(강론글)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19,27)
1차(03:15) , 2차(05:22), 3차(08:55)
25일 묵상글, 03시 15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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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5일 월요일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19,27)
제1독서<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창세3,9-15.20)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9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사람이 대답하였다.
12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는<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1,12-14)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뒤에 12 사도들은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 산은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었다.
13 성안에 들어간 그들은 자기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아, 필립보와 토마스, 바르톨로메오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14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복음<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19,26-27)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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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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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5.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9,25–34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자매,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보시고,
또 그 곁에 선 제자를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십니다.
이어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마침내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흘리십니다.
오리게네스는
복음을 읽을 때
표면의 사건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깊이 보려 했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십자가 아래의 이 장면은
단지 마지막 유언의 장면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하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친교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순간에도
사랑하는 이들을 흩어지게 두지 않으시고
어머니와 제자를 새로운 관계 안에 묶으십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새로운 가족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모든 제자의 모습으로도 읽으려 했습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은
그 한 사람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교회는 단지 제도의 모임이 아니라
어머니를 가진 공동체,
곧 돌봄과 인내,
기억과 순종의 공동체로 태어납니다.
영성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상처 없는 자리에서가 아니라
십자가 아래 머무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또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오래도록 깊은 상징으로 묵상되어 왔습니다.
오리게네스의 전통 안에서도
이 장면은 단지 육체적 상처의 묘사가 아니라
교회를 살리는 은총의 흐름으로 읽힙니다.
피와 물은
주님의 생명이 더 이상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세상을 향해 흘러나오는 사랑의 표징입니다.
십자가는 닫힘이 아니라
열림입니다.
그분의 몸이 찢어질 때
구원의 샘이 열리고
목마른 인간을 위한 길이 열립니다.
영성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영성이 상처를 우회하는 길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자주
아픔 없는 평화,
상처 없는 치유,
고통 없는 믿음을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의 한가운데서
어머니를 맡기시고,
공동체를 세우시고,
피와 물을 흘리십니다.
그러므로 영성은
고통을 부정하는 맑음이 아니라
고통 한가운데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 깊이입니다.
머무름의 영성,
끝까지 곁에 있는 영성,
그리고 상처를 통해서도 생명이 흐를 수 있음을 믿는 영성입니다.
거룩한 독서의 날인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십자가 아래 얼마나 머물 수 있는가?
고통의 자리에서 너무 빨리 도망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상처를 닫힌 상처로만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 안에서 누군가를 살리는 연민의 자리로 내어드릴 수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십자가 아래 우리를 부르시며
상처를 통해서도 사랑이 흐를 수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
제가 십자가 아래 머무는 용기를 주소서.
고통을 피하기보다
그 자리에서도 사랑을 배우게 하시고
닫힌 상처가 아니라
흐르는 자비의 마음을 갖게 하소서.
성모님과 함께
끝까지 머무는 제자가 되게 하시며
당신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생명이
제 삶에도 스며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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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5.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이번에 메주고리예, 파티마, 루르드, 그리고 바르셀로나를 다녀오는 성지순례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메주고리예를 처음 찾았던 것이 2006년이니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파티마와 루르드,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성가정 성당을 처음 찾았던 것은 1996년이니 어느덧 3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입니다. 장소는 달라도, 시대는 달라도,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같은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한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 전체를 향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안에서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하셨고,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말씀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과달루페에서, 루르드에서, 파티마에서, 그리고 메주고리예에서 성모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늘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고백성사를 자주 보고, 미사에 정성껏 참례하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단식하며,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가장 소홀히 하기 쉬운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성지순례를 떠날 때마다 순례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시고,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순례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건강을 잘 챙기고, 시간도 잘 지키고, 서로 배려하라고 당부합니다. 때로는 농담처럼 늦으면 다음 식사 때 와인을 사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말의 중심에는 하나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순례자가 되십시오.”라는 것입니다. 버스 안에서도 우리는 묵주기도를 바치고, 사제의 강복을 받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본당 공동체를 위해, 가정의 성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순례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은 인간의 계산이나 지혜에 의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요셉 성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교회 역시 그래야 합니다. 세상의 방법을 찾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뜻을 식별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또 이렇게 노래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끌어내리시며,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교회가 선택해야 할 우선적인 길은 분명합니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성모님은 무엇이 필요한지 아셨고,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과 제도, 건물과 전통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도적 교회를 고백합니다. 사도들의 믿음을 이어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전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길을 잃을 때마다, 다시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순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성모님의 말씀처럼, 단순하지만, 본질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회개하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단순한 신앙인이 아니라, 부활의 증인이며,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입니다. 성모님의 손을 잡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를 저희의 어머니로 주신 하느님, 성모님의 전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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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5.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 계신 성모님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19,27).
나자렛의 소박한 여인이셨던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을까요?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비슷한 예로 전태일 열사의 경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1960년대 청계천 봉제 공장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하여 투쟁하다 스물두 살의 나이로 분신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평범한 여인이었지만, 아들이 죽은 뒤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핍박받는 노동자들에게서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자녀가 어디에 있든 함께합니다. 자녀가 고통받을 때 함께 고통받고, 자녀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령 강림을 기다리는 제자들과도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초대 교회부터 성모님께서는 교회의 어머니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놓이든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 우리 자신을 맡깁시다.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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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5.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제 우리가 ‘성령강림대축일’을 끝으로 ‘부활시기’를 마치고, ‘연중시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기념일’을 지내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이미 교부시대 때부터 사용되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성모님을 “그리스도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였고, 성 레오 교종은 “교회의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6세 교종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을 반포(1964년)하시면서, 성모님께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부여하셨습니다.
이 호칭의 원천은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마리아와 우리를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만들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예수님의 명으로 마리아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오늘의 <독서>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들었던 <창세기>의 하와 이야기이고, 또 하나의 독서는 <사도행전 1,12-14절>인데, 그 의미는 같습니다. <창세기> 독서는 “하와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창세 3,20)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이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독서는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음”(행전 1,14)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이는 십자가에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아들을 맡기신 오늘 <복음>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여기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듯이,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성모님의 고통’과 ‘믿음’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면서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십니다.
그토록,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실패요 패배로 보이지만, 어머니께서는 그 속에서도 ‘승리’를 보고 계십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꿋꿋이 서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으시고 화해를 이루시며, 동시에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밑에서’ 고통을 받으시며 화해를 이루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시며, 아버지의 뜻의 완성에 협조하십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성모님’을 만납니다. 이제 우리도 언제나 믿음으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불신과 불목을 떨치고, 신뢰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일’, 그만큼 위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와 의탁’입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그분의 현존에서 사랑을 배우는 일입니다. 곧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서 있게 하소서.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그분의 어머니께서 서 계셨습니다.”(요한 19,25)
어머니!
당신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게 하소서.
믿음으로 서 있게 하소서.
십자가 밑이 저의 자리가 되게 하시고,
당신과 함께 아들의 남은 고통에 참여하게 하소서.
아버지를 향한 신뢰와 의탁으로
형제들을 위한 사랑의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당신 아들과 함께 사랑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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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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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5.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25 05:18
- 그리스도의 정배보다 성령의 정배됨은 어떨까?
지지난 주 어느 단체 피정을 동반하며 성모성월이라서
‘성모님처럼 살기’라는 주제로 강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강의를 시작하며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성령의 정배’와 ‘그리스도의 정배’ 중에 여러분이
무엇이 되길 원하는지 선택하라면 무엇을 선택하시겠는지.
그런데 너무도 놀랍게도 한 분도 빼놓지 않고
성령의 정배가 되겠다고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정배(Sponsa Christi)라고 했고
수도자 그중에서도 봉쇄 관상 수도자들을 그리스도의 정배라고 했는데
이분들은 어머니여서 그런지 성령의 정배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클라라와 자매들을 ‘성령의 정배’라고 한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받은 저였기에
저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씀드리며 이런 얘기를 덧붙여서 했습니다.
저는 여자가 되거나 동정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어머니가 되고 싶고 마리아가 되고 싶은 생각은 있으며
그래서 동정 마리아보다는 성모 마리아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생명을 잉태하고 내 뱃속에서 생명이 꿈틀거리고 자라는 체험을 해보고 싶다고,
그 생명을 잉태하고 자라게 하기 위해 입덧도 하고 고통도 당하고 싶다고,
태어난 아기에게 내 젖을 물리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일체감을 느끼고 싶다고.
사실 존재를 있게 하고 생명을 살게 하는 것처럼
위대하고 고귀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많은 사랑이 있지만 이런 사랑만큼 위대하고 고귀한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존재가 있게 하고 생명을 살게 한다면
인류를 위해 엄청난 과학 기술을 발전시킨 것보다도 더 위대하고,
그것으로 그의 사랑은 정말 위대하고 할 바를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나 수도자들은 만인을 사랑한다면서
어쩌면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고
결국 한 사람도 있게 하지도 살게 하지도 못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언제부턴가 저는 저의 소신학교 친구들 가운데
결혼한 친구들에게 어떤 열등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사랑은 그들의 사랑에 비해 관념적인 사랑에 그치는 것과 같아서 말입니다.
어쨌거나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시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령의 정배로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낳아주시고
십자가 현장에 제자와 함께 계셨던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후에도 성령을 받기 위해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심으로써
기도하는 교회의 본보기요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본보기가 되셨지요.
그래서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마리아께서는 티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여
교회의 창설자 그리스도를 낳으시어 교회의 시작을 도우셨나이다.
또한 사도들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당신의 간구를 제자들의 기도에 결합시켜 기도하는 교회의 본보기가 되셨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리아처럼 성령의 정배들이 되어
그리스도를 세상에 낳아주는 어머니들이 되고,
마리아를 본받아 교회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교회의 어머니들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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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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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5. 연중 제 8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 23:55 추가.
숨영성 묵상글
우리의 영원하신 어머니 - 성모님!
가톨릭 전통 안에서 성모님께는 매우 많은 칭호가 붙여졌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로레토의 성모님 호칭 기도]에 나오는 긴 목록이지요. 여기에는 55개(2020년에 포함된 호칭인 '이주민들의 위로자' 포함)의 성모님 호칭이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성모님)"라는 칭호는 가장 오래되고 존귀한 칭호로, 431년 에페소 공의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물론 이 호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교회의 강력한 옹호를 바탕으로 나온 것이지만, 어쨌든 성모님에게는 가장 영예로운 칭호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세상과 교회의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우리 곁을 늘 지켜 주시는 우리의 영원하신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목록에 있는 몇몇 칭호들은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이 호칭 기도에 나오는 "존경하올 그릇", "지극한 사랑 그릇", "신비로운 장미"와 같은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또 어떤 칭호들은 마치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처럼 들리기까지 합니다. "다윗의 망대", "상아 탑", "하늘의 문", "황금 궁전" 같은 것들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의미를 완전히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박물관의 유물을 소중히 여기듯 이러한 칭호들도 귀하게 간직할 수는 있습니다.
이 모든 칭호들은 시대마다 신자들이 품었던 다양한 관심과 염려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인간의 비극적 현실을 비추는 듯한 칭호들도 있습니다. "병자의 나음", "근심하는 이의 위안"—그리고 2020년에 새로 추가된 "이주민들의 위로자"가 그러합니다.
가장 최근에 전례 안에 공식적으로 자리 잡은 칭호는 "교회의 어머니"입니다. 이 칭호는 이미 초기 교회인 4세기부터 간간이 사용되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세 번째 회기 말미에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공식 칭호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2018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기념일을 전례력에 공식적으로 삽입하여, 성령강림대축일 다음 월요일마다 기념하도록 정하였습니다.
성모님은 교회의 결정적 순간마다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게 우리 곁에서 우리의 가장 따스한 어머니요 보호자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은총을 전구해 주시는 지극한 사랑의 어머니로서 현존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건의 시작인 "예수님의 탄생 예고" 때에 계셨고, 십자가 아래에서도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 하고 요한 복음은 전합니다.
또한 교회의 사도적 사명이 시작된 오순절에도 성모님이 함께 계셨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분의 현존은 언제나 기도 안에서, 묵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조용한 동반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라고 루카 복음이 전하듯 그분은 우리 곁에,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우리의 어머니로서 늘 함께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어머니가 그러하듯, 성모님도 언제나 우리 곁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래 전에 개인적으로 성모님께 "성모님의 아들 사제요 수도자"로 살겠다는 각오를 바쳐 드리고 매일 묵주의 9일 기도를 바치겠다는 결심을 드렸습니다. 물론 그때는 큰 어려움을 겪을 때였지만 저는 성모님이 제가 그 각오를 바쳐 드리기 전부터 이미 제 곁을 지켜 주셨던 '천상과 지상의 어머니'셨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그러하시겠지요?!!
적어도 제가 성모님을 영원한 어머니로서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자 노력하면서, 성모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며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는 분이심을 곰곰이 새기는 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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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5.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누구에게나 열려 계시는 성령!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생명력의 성령
누구에게나 열려 계시는 성령!
2026년 5월 24일 일요일
성령 강림
리처드 로어 신부는 다음의 성령강림대축일 강론에서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성령의 현존을 깨닫도록 신자들을 초대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께서는 종종 뒷전으로 밀려나곤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께 온전히 의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형식적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겉으로는 믿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 안에 불꽃이나 확신이 부족하니, 자연히 봉사와 실천도 미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서에는 두 가지로 분명히 구별되는 세례가 나옵니다. 우리가 익숙한 "물로 받는 세례"가 있고, 또 하나는 "성령과 불로 주시는 세례"(마태 3,11)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두 번째 세례가 참으로 본질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어린 시절에 우리가 받은 물의 세례는, 사실 깊은 확신이나 이해를 크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그저 자기들의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세례를 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물의 세례가 우리 삶 안에서 "실제"가 되기 전까지—곧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그분께 의지하며, 그분을 부르고 나누고 사랑하기 전까지—우리는 그저 신앙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따라가기만 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두 번째 세례를 체험한 이들을 금세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넘치고 생기가 가득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섬김을 받기보다, 먼저 다른 이들을 섬기고자 합니다. 또한 삶이 예전에 바라던 만큼 완전하지 않더라도, 그 삶 자체를 용서할 줄 압니다. 이웃을 용서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바라는 만큼 완전하지 못한 자기 자신도 용서할 줄 압니다.
우리가 "오소서, 성령님"이라고 기도하더라도, 성령의 은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미 오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궁전이며—누구나, 객관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그렇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가 그 사실을 얼마나 알고, 얼마나 의지하며, 얼마나 의식적으로 믿고 사느냐에 있을 뿐입니다.
성경이 묘사하는 성령의 모습은 모두 역동적입니다—흘러가는 물, 내려앉는 비둘기나 불, 거센 바람. 만일 우리 안에 움직임도, 에너지나 열정도, 깊은 사랑이나 봉사, 용서, 내어맡김이 거의 없다면,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신앙이 그저 형식적인 반복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성령과의 깊은 일치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은사를 다시 불태우는 것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그 자격을 완전히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깨어 갈망하는 이들에게 이 방식으로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니 이 성령강림대축일에 아주 단순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을 갈망하십시오. 성령께 의지하십시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임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성령을, 마치 광활한 초원을 휩쓰는 들불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 불은 오래되고 죽은 풀들을 태워, 새 생명을 키우는 거름으로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강림의 은총으로 우리가 새 힘을 얻을 때, 우리는 그 불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여 그들 또한 새롭게 타오르게 할 수 있습니다. 혹은 그 불꽃을 스스로 꺼뜨릴 수도 있습니다.
CAC가 매일 아침 저로 하여금 새롭게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 고맙습니다. 저는 그 에너지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다른 이들에게도 전염되기를 희망합니다.
—Florian L.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Why Do You Ask for What Has Already Been Given?” homily, June 8, 201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rman Khadangan,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의 불꽃을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불은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영감을 주며,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를 지탱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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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5.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걱정하시는 하느님!
아직 한참이나 엄마의 따뜻한 품이 필요한 어린 자녀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철부지 자녀를 남겨두고 떠나가는 젊은 부모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엄마는 그저 아이들 생각뿐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뭐라 위로의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성금요일 오후 골고타 언덕 위에서 벌어진 참혹했던 십자가 죽음 사건, 그 처절함 속에서도 우리를 걱정하시고 배려하셨던 예수님의 모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잔혹한 십자가형으로 인해 단말마의 고통을 겪는 와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아래 서 있는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남겨질 교회와 양떼인 우리를 걱정하십니다.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 감당하기도 힘겨우실텐데, 자신에게 휘몰아쳐 오는 광풍과도 같은 괴로움에 대해서는 일말의 표현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자신이 떠나신 후 남겨질 사랑하는 사람들을 염려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6-27))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임종 직전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를 새로운 모자 관계로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그 결과 남겨질 신앙 공동체를 위해 앞으로 성모님은 중개자 역할, 즉 교회의 어머니로서 역할을 지속해나가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넘어서서, 사랑하는 제자의 어머니,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 더 나아가서 교회 공동체의 어머니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 인해 그분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존재로 인해 모두 한 형제요 한 자매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신앙 안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어머니 안에서 새로운 영적 가족으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성모님의 신앙 여정은 약간의 힌트라든지, 사업계획서라든지, 로드맵 같은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습니다.
언제, 무엇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것도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갯 속을 걸어가는 불확실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엄청난 도전 앞에 뒷걸음질 치지 않았습니다.
불확실한 초대였지만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 회피하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기도하면서, 희망하면서 당당히 직면했습니다.
“그래 지금은 내가 부족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지만, 주님께서 언젠가 내 눈을 밝혀주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겠지.”
그렇게 성모님은 오로지 주님께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하루하루 살얼음판 같은 여행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평생에 걸친 철저한 순명으로 당신의 뜻을 너그럽게 수용하시며,
당신의 인류 구원 계획에 충실하게 협조한 마리아를 천주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로 높이 들어 올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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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5.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23:55 추가.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25-34)>
1)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맺어 주신 것은,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라고 말씀하셨는데(요한 14,18),
제자들(신앙인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승천 후에 고아와 같은 심정이 된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성모님이 어머니로서 우리 신앙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은, 신앙인들은 결코 고아가 아니라는 확신을 주는 일입니다.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성모님의 존재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눈에 보이는 표지’입니다.
물론 성모님이라는 존재가 없어도 ‘하느님의 사랑’을 믿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한계에 갇혀서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 하느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눈에 보이는 표지’가 필요합니다.
이 말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중개를 요청한 일이 연상됩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말하였다.
‘우리에게 당신이 말해 주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랬다가는 우리가 죽습니다.’
백성은 멀찍이 서 있었고, 모세는 하느님께서
계시는 먹구름 쪽으로 가까이 갔다(탈출 20,19.21).”
우리가 하느님을 무서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중개자가 존재하기를 바라는 심정은 구약시대 사람들의 심정과 같습니다.
성모님은 바로 그 중개자이신 분입니다.
그 역할이 잘 드러나는 이야기가 바로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요한 2,3).”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요한 2,5).”
성모님은 우리의 사정을 주님께 말씀드리는
분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시키시는 일들을
우리가 잘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2) ‘모성애’에 관해서, 창세기에 나오는 ‘레베카’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에사우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을 때, 레베카는 야곱을 라반에게 보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형의 분이 풀릴 때까지, 얼마 동안 그분 집에 머물러라.
너에 대한 네 형의 분노가 풀리고, 네가 형에게 한 일을 형이 잊을 때까지만이다.
그러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너를 그곳에서 데려오게 하겠다.
내가 어찌 한날에 너희 둘을 다 잃을 수 있겠느냐?(창세 27,44-45)”
만일에 에사우가 야곱을 죽인다면, 에사우도 살인죄로 사형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사악과 레베카는 아들 둘을 모두 잃게 됩니다.
“너희 둘을 다 잃을 수는 없다.”는 말은, 레베카의 모성애를 나타냅니다.
에사우가 여러 가지로 마음에 안 들어도, 그래도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모성애는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랑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선인이든 악인이든 잘났든 못났든 차별 없이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그 사랑이 성모님의 모성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3) 사랑은 언제나 항상 ‘구원’을 지향합니다.
하느님께서 악인들도 사랑하시는 것과 성모님께서 죄인들도 사랑하시고, 또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누구든지 무슨 죄를 지었든지 간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성모님께 도움을 요청하면, 성모님의 보호와 중개로 구원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 자신이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성모님의 기도와 노력이 ‘헛일’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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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5.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23:55 추가.
요한 19,25-34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다 챙겨주시기 어려워 어머니를 보내주셨다.” 그래서일까요? 어머니의 마음은 참으로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미우나 고우나 내 자식이기에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생각 없는 말과 행동으로 당신 가슴에 대못을 박아도 참고 또 참아주십니다. 당신 몸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는데도 가족을 위해 기꺼이 양보하고 배려하며 희생하십니다.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이 고운 얼굴엔 주름이 늘고, 두 손은 푸석해졌으며, 허리는 구부정해졌습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다 그럴 것입니다. 이처럼 어머니 은혜는 하늘과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더 높아지기에, 어머니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어머니를 보내주셨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 당신 어머니를 내어주셨습니다. 오늘은 그런 예수님과 성모님의 특별한 사랑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당신께서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임박했음을 아시고, 당신 곁에 서 있던 요한과 성모님을 특별한 모자관계로 묶어 주시지요. 이는 ‘청상과부’가 될 어머니의 처지가 걱정되어 제자에게 봉양을 부탁하신 게 아닙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성모님을 ‘믿음의 어머니’로 공경하며 사랑하도록, 성모님은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 순명의 모범으로써 그분의 제자들을 이끌고 보살피시도록 하기 위한, 즉 양쪽 모두가 믿음과 사랑을 통해 참된 행복에 이르게 하기 위한 특별한 배려였던 겁니다.
그 때부터 그 제자, 즉 요한은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고 합니다. 이는 오늘날 각 가정에 성모상을 모셔두는 것처럼 성모님을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 안에 모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모님을 ‘신앙의 모범’으로 내 마음 안에 모셨다는 뜻입니다. 믿음과 순명, 인내와 포용, 희생과 용기 같은 성모님의 덕을 본받고 따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는 뜻입니다. 성모님을 통해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도록 기꺼이 그분께 자신을 내어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성모님을 내 안에 모시면, 그분께서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중개자, 우리로하여금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을 잘 식별하고 따르도록 도와주시는 안내자, 그렇게하여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주시는 인도자가 되십니다. 어떻게 하면 부족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처한 입장과 상황을 하느님께 잘 말씀해주실지, 어떻게 해야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 우리를 잘 변호해주실지 늘 노심초사하시며 애써주십니다. 그러니 그런 성모님께서 나에게 해 주시는 말씀을 ‘어머니 잔소리’처럼 대충 흘려듣지 말고, 한 마디 한 마디를 마음 깊이 새기며 그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야겠습니다. 그렇게 깨달은 의미를 즉시 삶에 반영하여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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