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수 (4/4 完)
그러나 백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냉소적인 찌푸린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아아, 대단한 일이오. 루이즈에겐 너무 대단한 일이라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고 나서 백은 말을 움직여 조지의 관심을 다시 체스 판 위로 쏟게 했다.
마치 백은 조지의 급소를 찾아내어 몇 번이고 탐색을 거듭하는 일에 잔혹한 쾌락을 맛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체스의 말을 움직이는 한편 말로 상대편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잔혹하고, 빈틈없고, 언제나 반스디 홍수처럼 쏟아붓는 거만한 말투로 피할 수 없는 결론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
조지는 절망적으로 괴로와하며 루이즈의 이야기는 앞으로 절대로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 볼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해보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조지의 머릿속에 있는 그 무엇인가가 백의 대화에 나오는 기호는 체스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분인 자신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조지가 그에게 상대역을 부탁하려면 백의 조건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조지는 백을 상대역으로 원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턱대고 원하고 있었으며, 집에 돌아가 루이즈에게 한동안 회사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 무서운 날 밤에는 더욱 그러했다.
물론 파면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회사에서 몸의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쉬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들은 것은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루이즈의 얼굴에서 맥이 빠지며 파래지는 것을 보로, 조지는 일생을 통해 지금처럼 건강하게 느껴진 적은 없다고 당황해서 곧 덧붙이기는 했지만.
이어서 루이즈가 그 앞에 떡 버티고 서서 지겹게 들어온 잔소리를 열심히 지껄여대는 광경이 전개되었다.
그런 경황 중에 조지는 백이 했던 말이 격한 분류처럼 뇌리를 치닫는 것을 느꼈다.
루이즈가 기운이 빠져 의자에 주저앉아 멍한 시선을 앞쪽 벽에 못박은 채 위안으로 삼는 뜨개질거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조지는 테이블을 향해 체스의 말을 늘어놓으려고 했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소금기를 띤 고통의 흐름이 물러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에 완전히 결정을 내버리는 해결법이 없는 것은 아니오" 하고 백은 조용히 말하고 나서 루이즈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알고 보면 참으로 간단한 해결법이지."
조지는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소"
"당신은 알아차린 일이 있소, 조지?" 하고 백은 말을 계속했다.
"루이즈가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바로크 풍의 액자에 넣어 저기 벽에 걸어놓은 저 보잘것없는 그림은 마치 최대한의 소리를 내어 연주하고 있는 오케스트라와 맞서서 자기의 소리를 내려 하고 있는 히스테리컬한 작은 피리와 같다는 사실을."
조지는 체스 판을 가리키며 "당신이 선이오" 하고 말했다.
"아아, 게임 말이오? 게임은 도망치지 않소, 조지. 그보다 지금 나는 이방이 ― 아니, 이 훌륭한 집 전체가 완전히 당신 것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당신 혼자의 것이라면."
"나는 체스를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소" 하고 조지는 항의했다.
"그리고 또 이런 방법도 있지요, 조지."
백은 몸을 앞으로 굽혔다.
그의 두 눈에서 조지는 다름아닌 자신의 영상이 기묘한 눈초리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 한가지 다른 방법이란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아도 되는 재미있는 것이오. 만일 이 방에 당신 혼자만 있다면, 알겠소, 당신보고 체스를 그만두라고 할 사람을 아무도 없을 거요. 당신은 밤낮으로 체스를 둘 수 있고, 그래도 더 하고 싶다면 다음날 아침까지 밤을 새워 해도 상관없단 말이오! 그러나 그것으로 다 된 게 아니오, 조지. 저 그림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고 좀더 좋은 다른 그림을 걸 수도 있을 것이오. 알겠소? ― 그러나 매일 당신이 이 방에 들어와 그것을 보는 순간 기운이 솟아날 수 있는 느낌의 그림을 두세 장 걸면 되는 거요. 게다가 레코드 판도! 요즈음 멋진 판이 많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지만, 조지, 방안에 그런 것이 가득 있다면 어떻겠소? ― 오페라를 비롯하여 교향곡, 협주곡, 4중주 등 무엇이든 다 ― 그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 실컷 즐기는 거요!"
천천히 계속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그 눈 속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쳐다보며 조지는 기쁨에 넘친 말의 흐름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그 말에 내포된 무서운 뜻을 생각하자 그만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미친 듯 머리를 저었다.
"당신은 미치광이요!" 하고 조지는 소리쳤다.
"그만해 두시오!"
그러나 귀를 막았는데도 백의 목소리가 여전히 무섭도록 뚜렷하게 들려오는 것을 조지는 알았다.
"당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고독이지요, 조지?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오. 기꺼이 당신의 친구가 되어주고, 당신에게 이야기를 걸어오고, 나아가서 고맙게도 당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소. 뿐만 아니라 원한다면 당신을 사랑해 주려는 사람도 얼마쯤 있소."
"고독이라고?" 하고 조지는 잘못 들은 게 아닌 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당신은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고독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렇지 않다면 뭐요?"
"당신은 나 자신과 다름없이 모두 잘 알고 있잖소" 하고 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자신이 나를 어떤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하는가를 잘 알고 있소. 당신을 내가 ― 아니, 누구이든 이처럼 선량한 사나이가 그런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다고 보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소!"
백은 경멸하듯 이를 드러냈다.
"그럼, 한 가지 묻겠는데, 자신은 결점투성이의 어리석은 여자인 주제에 자기보다 굉장히 훌륭한 사나이와 결혼하여 그 사나이를 자기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고도 부족하여 자기의 약점과 어리석음을 감추는 일을 생애의 과업으로 삼고 있는 여자보다 더 잔혹한 존재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오?"
"당신에겐 루이즈에 대해 그렇게 말할 권리가 없소!"
"권리는 다 갖추어져 있소" 하고 백은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지는 속으로 이 말이 무서운 진실임을 깨달았다.
마침내 그는 허둥거리며 테이블 끝을 꽉 움켜잡았다.
그는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싫소, 그런 일을 하는 것은! 그런 일은 하지 않겠소, 절대로!"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거요!" 하고 백도 지지 않았다.
그 목소리에는 너무도 분명하게 무서운 결의가 나타나 있어 조지는 자신도 모르게 눈
을 들었다.
마침 루이즈가 날카롭고 작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테이블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분노로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는 혼란된 사고의 중간중간에 그녀가 되풀이 퍼붓고 있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거칠게 악을 쓰고 있었다.
"바보! 바보! 이 체스 탓이에요! 이제 지긋지긋해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갑자기 체스 판 위로 손을 뻗쳐 말들을 쓸어냈다.
"그만두지 못해!" 하고 조지는 루이즈가 아니라 그녀 앞에 서서 무거운 쇠부지깽이를 휘두르고 있는 백을 향해 소리쳤다.
"그만두지 못해!"
조지는 거듭 소리를 지르며 그 부지깽이가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달려나갔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 루이즈가 경찰의 시체 수용 궤짝 안에 자신이 보기흉하게 나뒹굴어 있는 것을 보았다면 아마 시끄럽게 떠들어댔을 것이다.
그 수용 궤짝이 질질 끌려 현관문으로 운반 될 때, 닦아놓을 마룻바닥에 보일까말까한 조그마한 흠집이 생긴 것을 보았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을 것이다 ― 물론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고 가정하고 이야기지만.
그러나 랜드 경감을 부하들이 그 짐을 운반하여 나간뒤 아무렇게나 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경감보는 분명 체스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조용한 작은 사나이의 심문을 이미 끝낸 것 같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우울해 보였다.
작은 사나이가 잠자코 앉아 자기 쪽을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그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수첩에 적어놓은 것은 음미하면서 방 한 가운데를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래서?"
랜드 경감이 물었다.
"네" 하고 경감보는 대답했다.
"꼭 한 가지 납득이 안 가는 접이 있습니다. 사실을 종합해서 말씀드리자면, 여기에 지금까지 아무 이상도 없이 인생을 살아왔으며 모든 일을 순조롭게 해결해 온 한 사나이가 있는데, 그 사나이가 갑자기 또 한 사람의 자기, 즉 다른 인격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즉 주 부분으로 분열해 버린 사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신분열증인가?" 하고 랜드 경감이 말했다.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잫나."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고 경감보는 대답했다.
"아뭏든 그 또 한 사람의 자기라는 것이 아주 나쁜 녀석으로 그가 이 살인사건을 일으킨 겁니다."
"모든 사실이 다 들어맞는 것 같군." 하고 랜드 경감이 말했다.
"납득이 안 가는 점이 뭔가?"
"꼭 한 가지 ― 이름 확인에 대한 일입니다."
경감보는 눈살을 찌푸리고 수첩을 들여다보더니 체스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작은 사나이 쪽으로 향했다.
"당신의 이름은 뭐라고 했지요?"
작은 사나이는 비난하는 듯 차갑게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렇게 여러 차례나 말씀드렸는데 또 잊어버렸단 말입니까?"
작은 사나이는 즐거운 듯이 미소를 띠었다.
"나의 이름은 화이트(백)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