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작가와 신선수 -4-

탁.탁.탁. 오랜만에 집중해서 대본을 써 내려가는데 벨렐렐레- "여보세요. " "은호! 여기 지금 아프리카야 . 갑자기 은호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 " "선생님? 그런데 프랑스 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흐흐. 갑자기 맘이 바꼈지 뭐야. 여긴 너무 멋진 곳이야. 은호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텐데. 참. 나 보름후에 한국 들어갈거야. 그 때 작업실에서 보자구. " "네. 선생님. 건강은 괜찮으시죠? " "내 걱정은 말구. 은호도 휴가를 만끽하라구! 그럼 안녕. " "네. 선생....." 뚜 뚜-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끊긴 전화.     아프리카...초원...얼룩말도 뛰어 다닐거고...사자도 있겠지...? 억울하다. 갑자기 마구 마구 억울하다. 금보다 값진 이 휴가를 이렇게 흘려보내는 것이 너무나도 억울해졌다. 그래! 떠나는 거야! 아프리카는 못 가더라도 일단 떠나자.     무작정 짐을 싸서는 카메라 하나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여름이 끝나가는 무렵인데다 밤이라 그런지 비교적 한산한 청량리 역사. "저기. 지금 갈 수 있는 곳이 어디가 있나요? "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 여자 혼자 베낭을 둘러메고 목적지도 없이 질문을 하니 직원이 이상한 눈초리를 애써 감추며 상냥히 대답한다. "네. 고객님. 10시 40분에 출발하는 강릉행 마지막 열차가 있습니다. " "아. 그럼 그걸로 1장 주세요. "     일단 타고 보는거야. 유은호. 가다가 보면 목적지가 생길거야. 덜컹- 10시 40분이 되자 출발하는 기차. 울어대는 아이를 겨우 재우고는 한 숨 돌리는 새댁. 손을 꼭 붙잡고 앉아서 가는 다정한 연인.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듯 피곤함이 묻어나는 얼굴의 아저씨. 행여나 잃어버릴까 보따리 짐을 가득 안고 잠이 드신 할머니. 저마다의 사연을 담아 기차가 달린다. 기차의 큰 창을 통해 바라 본 바깥 세상은 휙휙 지나가 버리고. 청량리역을 떠나서는 건물과 가로등, 화려한 간판들로 인해 몰랐지만, 도심을 벗어나자 이내 암흑같은 밤이라는 게 느껴졌다. 새삼 지금 우리들은 밤을 밤답게 맞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렇게 기차에서 잠이 들었나보다.     -이번 정차역은 강릉역입니다.     그렇게 목적지도 없이 시작된 나의여행은 강릉을 지나 지금은 전라도 순천의 어디쯤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풍경들을 가슴에 담고... 그렇게 벌써 열흘이란 시간이 흘렀다.     다시 4시간 남짓 기차를 타고 도착한 서울. 드디어 나의 집에 돌아오다니 감개가 무량한 건 왜일까? 그렇게 감상에 젖어드는데... 딩동. 문자 메세지가 도착했다. 아! 내가 핸드폰을 두고 갔었지. [ 도대체 어디야. 제발 연락이라도 좀 달라구. 이 여자야. -신선수 ] 헉. 부재중 통화 132통에 문자메세지가 27건. 대부분이 신선수한테서 온 것이고, 간간이 김정미양의 메세지와 광고메세지들이 섞여있다.   [집 앞이야. 나와라. -신선수 ] [안 나올래. 죽는다. -신선수 ] [전화는 왜 안받아. 유작가. 나 무시하는 거냐. -신선수 ] [어디 간거야? 답장이라도 하지? -신선수 ] [내일이라도 답장해라. 나 간다 -신선수 ] [오늘도 전화 안 받는 건 뭐냐. 진짜 혼. 난. 다. -신선수 ]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연락 좀 하라구 -신선수 ] [야! 너 어디 간거야? 도훈씨가 너 연락 안된다구 난리야. 진짜 무슨 일 있는거야? -김정미양 ] [근데 너 도훈씨랑 무슨 사이야? 도훈씨가 심하게 걱정하는 게 수상하단 말야. -김정미양 ] [휴- 어디 간거냐. 집에도 없는 거 같은데... 진짜 사람 환장하게 만들래. -신선수 ] [친구. 살아는 있는 거지? 무사귀환하면 바로 전화 주시게. -김정미양 ]     이 문자들은 뭐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에라. 모르겠다. 우선 필름 현상부터 맡기고 맥주나 몇 캔 사와야 겠다. 흐아- 우리 집이 좋긴 좋구나! "     이 무더운 여름이 언제 끝날까 했더니 어느새 벌써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온다. 또 금방 추운 겨울이 오겠지. 빠앙!- 갑작스런 클락션 소리에 퍼뜩 놀라 빵빵대는 차를 쳐다보니 차가 낯익다. 차에서 내린 남정네는 신선수다. 열흘만에 보니 더 잘 생겼네. "신선수. 왠 일이야? "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는 나와 달리 신선수는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난 사람의 표정이다. "뭐하는 거냐. " "응? 나 필름 맡기러 가는 길인데? 근데 무슨 연락을 그렇게 했어? 할 말 있었던 거야? " "도대체 그 동안 뭐한거냐구. " "아. 뭐라고 할까...그냥 나를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었다고 할까? 여기 저기 여행 좀 다녔어. 흐흐 " "핸드폰은 왜 두고 갔어? " "방해될 거 같아서. " "휴우- 둔한거냐.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님 모른 척 하는 거냐. 응? 이 쯤 되면 내가 당신한테 관심있는 거 알만하잖아. "     관심? 지금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고 얘기하는 건가. "저기. 갑자기 이렇게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면 조금 당황스러운데..." "심각하게 고민하지마. 그냥 관심 정도니까. 맥주나 한 잔 하자. 목 마르다. " "엥? 난 필름 맡기러 가야...."     질질질. 어김없이 끌려 온 맥주집. "캬아~ 맛나다. " "쿡. 근데 촌스럽게 왠 필름? 디카 없냐. " "아. 아무래도 디카는 지우면 되니까 성의없이 찍게 되는데, 그에 반해 필름은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찍게 되더라구. 또 현상될 때까지 기다리는 재미도 있고. 큭. 가끔은 아날로그가 좋을 때가 있잖아. 필름 남았는데 신선수도 한 장 찍어줄까? " "됐어. 내 얼굴 비싸. " "쳇. 내가 정성스럽게 찍어준다니까. " 안 찍는다더니 어느 새 포즈를 잡고 있는 신선수. 요즘은 초등학생도 안 한다는 그 포즈 . 손가락 두개로 브이를 그리며 웃어보인다. 쿡. 은근히 귀여운 면이 있다니까. 신선수는 대리운전을 불러 휑하니 가버리고, 맥주 몇 잔에 취한 건지 취기가 오른 나도 집으로 왔다. 에이- 필름은 다음에 맡기면 되지 뭐.     그렇게 몇 일이 흐르고. 벌써 선생님이 오실 날이다. 마중을 나가고 싶어도 원체 예상할 수 없는 행동반경의 소유자이신지라 그냥 작업실로 향하는 나. 디리릭- "은호. 잘 지냈어? " "선생님. 오셨어요? 많이 타셨는데요? 쿡 " "그지? 해가 아주 쨍쟁이더라구. 거긴. 은호는 이뻐졌는데? 그동안 연애라도 한거야? " "연애는 무슨요. 선생님도 참. " 앗! 왜 갑자기 신선수 얼굴이 떠오르는 거야. 훠이 훠이. 물럿거라. "아! 두 달 후 방송하는 수목 드라마야. 촬영은 1달 후부터 들어갈꺼구. 푹 쉬었으니까 다시 열심히 몸뚱이를 굴려보자구! " "넵. 선생님. " 이제 서너 달은 꼼짝없이 작업실이구나. 흑. 나의 행복했던 휴가여. 안녕.     딩동. [나와. -신선수 ] 이젠 거의 술친구가 된 신선수와 나의 관계. 아주 시도 때도 없이 나오란다. [나 집 아님. ] [뭐? 이 야밤에 집이 아니면 어디야. 혹시 또 나이트 갔냐. -신선수 ] 나이트? 풋. 생각하는 거 하고는. [밥벌이 중. 바빠서 이제 답장 못해 ] [아~ 작가님이시지. 그럼 밥벌이 잘해. 내일 보자 -신선수 ] 참 이쁘게도 말해요. 운동만 하느라 국어는 못 배운건지. 근데 내일 보자니? "은호. 연애 안 한다더니 하는 거 맞네 뭘. 문자 보면서 피식거리는거 보니까. 호호 " "어. 그런거 아니에요. " 진짜 그런거 아닌데...선생님의 의심스럽다는 눈초리가 걷혀질 생각을 안한다.     다음 날. 선생님의 심부름을 갔다 오니 작업실에 낯선 신발이 놓여있다. 손님이 왔나? "선생님. 저 다녀왔어요. 누구 오셨어요? " "유작가. 왔어? " 제 집 마냥 소파에 앉아 손을 흔들어 대는 신선수. "당신이 여기 왜 있어? 아니 어떻게 알고 왔어? " "은호. 손님이 왔는데 무슨 그런 말을 해. 게다가 얼마나 귀한 손님인데. 내가 신도훈 선수 팬이잖아. " 저. 뻔뻔한...하여튼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선생님을 자신의 편으로 매수한 듯한 신선수는 차를 마시며 한 시간여를 버티더니 이제야 일어난다. "신도훈 선수. 벌써 가려구? 다음에 또 와. 언제든 환영이니까. 그리고 우리 은호 잘 부탁해. 호호. " "네. 선생님 저도 오늘 즐거웠습니다. 아! 그리고 저 은호씨 한 시간만 빌릴 수 있습니까? " "그럼. 그럼. 오늘 안 돌려줘도 되니까 걱정 마. " 이 둘의 대화는 도대체 뭐냐구요. 당사자인 나는 쏙 빼놓고 빌려주느니 마느니. 참 나.     선생님에 의해 쫓겨나다시피 밖으로 나온 나. "뭐에요. 어떻게 알고 왔어? 아! 정미구나. 그죠? " 쿡. 이 남자 또 웃는다. "하여튼. 김정미양 땜에 내가 못 살아. 휴- 아무리 그래도 내 밥벌이 하는 직장에 이렇게 막무가내로 쳐들어오는 건 좀 그렇지 않아? " "그러게 어딜 가면 간다고 미리 얘기해 주면 좋잖아. 어제도 집 앞에 갔더니 집이 아니라 그러고. " "이봐요. 신도훈씨. 뭔가 착각하나 본데. 우리가 많이 친해진 건 사실이지만 서로간에 어딜 간다느니 만다느니 하고 보고할 사이는 아니잖아? " "........." 대답이 없는 신선수. 뭔가를 고민하는 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연다. "사귀자. 이대로는 내가 안되겠다. 우리 사귀자. "   내가 어버버버 하는 사이. 덥썩- 내 양어깨를 잡더니 멋드러진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하는 남자.   "당신이랑 나 연애 하자고. "             ------------------------------------------- 폭염주의보라네요....흑흑... 입추도 지났건만 날씨가 왜 이러는지. 정말로 더위조심하세요. 그리고 그래도 나는 움직...님  감사해요. 댓글에 힘 듬뿍 받았습니다. 댓글이 달리면 무진장 힘이 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