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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2월 27일
서해안 고속도로 기공/
인천목포간 3백53㎞에 3조 투입
2001년 완공인천∼목포구간의 서해안
고속도로 기공식이 27일 노태우 대통령
·이진설 건설부장관·윤태균 도로공사 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 건설현장에서 열
렸다.
인천·경기·충남·전북·전남을 잇는 3백
53㎞의 서해안 고속도로에는 2조9천9백
14억원이 들어가 2001년 전구간이 개통
될 예정이다.
이 고속도로구간중인천~안산간은 6차선
으로,나머지 구간은 4차선의 시멘트
콘크리트포장으로 건설되며 ▲인천~안산
(28㎞)▲안중~강진(19㎞) ▲서천~군산
(23㎞)▲무안~목포(23㎞)의 93㎞는
1조3천6백7억원을 우선 투입,96년 개통된다.
이 고속도로에는 29개의 인터체인지와
터널 22개·교량 4백14개·휴게소 11개가
들어선다.우선 완공구간중 인천∼안산의
5개 공구와 목포 인터체인지공사는 작년
12월말 착공됐으며,당진·군산 인터체인지는
3월중 착공된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아산·군산·장항 및 대불산업기지
개발에 따른 교통수요가 원활해지며
서해안지역의 발전은 물론 주행시간도
현재의 5시간대에서 3시간대로 당겨지게 된다
▶2015년경기도 화성 엽총 난사 사건
▶2009년 전여옥 국회의원, 국회서 집단폭행 당해
서울 순천향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전여옥 의원.
▶2010년칠레, 8.8 강진 발생
▶2006년비정규직 근로자 보호법안 국회 상임위 전격 통과
▶2006년창원지법, 화이트칼라 처벌기준 첫 공개
▶2006년제20회 토리노 동계올림픽 폐막식
▶2001년푸틴 러시아 대통령 방한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2월 27일 저녁
방한중인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위해 마련한
환영만찬에서 양국 정상이 건배를 하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6일 밤 10시 서울공항을 통해 방한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은 27일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남북간 화해·협력 및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양국이 공동 노력하는 것을 포함한 7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두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이 한반도의 평화정착에 기여했으며, 우리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이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했다고 의견을 모았다.
김 대통령은 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와 북한의 개혁·개방에 러시아가 적극 기여해줄 것을 요청했고, 푸틴 대통령은 우리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지지하며, 이를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두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1972년 체결된 ‘탄도탄 요격미사일 제한 조약’(ABM조약)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며 핵무기 감축 및 비확산에 대한 국제적 노력의 중요한 기반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해, NMD (국가미사일방어) 체제를 추진하기 위해 ABM조약 개정을 원하는 미국과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두 정상은 또 미사일과 미사일 기술의 확산을 규제하는 양자 및 다자적 차원의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며, 한반도 내에서의 미사일 개발·수출·배치에 관한 문제가 관련국간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조속히 해결돼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해, 북한의 미사일 문제 가 북·미간 대화를 통해 해결될 것을 촉구했다.
두 정상은 또 남북관계의 진전을 활용해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연결사업, 이르쿠츠크 가스전 개발사업 등 한·러 양국과 북한간 3각 경제협력을 적극 모색하고, 사할린 등의 석유·가스개발 사업에 한국측이 참여하는 문제를 계속 협의해 나가기로 했다 . 양국은 한·러 극동시베리아 개발위원회를 설치, 나홋카 한국 전용공단을 조속히 조성하고, 동북아지역에서의 물동량 증대에 대비하여 ‘교통협력위원회’ 를 설치키로 합의했다.
▶1997년콜롬비아 엘 페스카토르 호텔 폭탄테러
▶1996년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북한 신포지역을 경수로 건설부지로 최종 선정
▶1995년한국-안도라 국교 수립
▶1992년영어학자 새뮤얼 이치예 하야카와 사망
▶1991년미국 등 다국적군 쿠웨이트시 탈환
▶1991년서해안고속도로(인천~목포) 기공
▶1990년울진 원전2호기 준공
▶1990년소련최고회의, 고르비에 막강권력 부여
미국식 대통령제 승인
▶1989년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 로렌츠 사망
▶1989년부시 미국대통령 방한
▶1982년중국, 헌법개정작업 추진
▶1980년환율, 유동제로 변동실시
▶1980년로디지아 총선, 애국전선 압승
▶1979년남북탁구협회, 평양세계탁구대회 단일팀구성협의차 판문점에서 협의
▶1974년남북조절위 4차 부위원장회의 개최
▶1973년제9대 국회의원 선거 실시
▶1973년노벨생리의학상 콘라트 로렌츠 사망
▶1968년브라질 리우축제 개막
▶1968년한국일보 사옥 전소(7명 소사)
▶1964년주은래 중국 수상, 미국과 화해용의 표명
▶1963년정치지도자, 각군책임자 2.18성명 지지
정국수습 공동성명
▶1962년호주 요트 크레텔 첫선
▶1959년대법원 진보당사건 판결,
조봉암, 양명산에 사형 선고
▶1953년정부, 독도영유권 성명
1. 독도 영유권 시비의 역사:
우리 영토인 독도에 대한 일본의 부당한 시비의 역사는 조선조 때부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가깝게는 지난 53년 5월 일본인들이 독도에 상륙, 일본 영유권 표시를 한 뒤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어용수비대'를 결성해 이를 몰아내면서 한일 분쟁은 시작됐다.
일본은 이후 우익정치인을 중심으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망언'을 헤아릴 수 없이 내뱉어 왔고, 독도가 자국 영토인데 한국이 불법점거하고 있다는 것은 일본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견지되어 왔다.
2.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 주장: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마무리하기 위해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대일평화조약(Treaty of Peace with Japan)」에 실려있는 제2조 (a)항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그리고 울릉도를 포함하는 "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right), 권원(title)과 청구권(claim)을 포기한다."의 세 섬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우리나라와 일본은 큰 의견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 세 섬의 한국의 영토에 포함되는 중요한 섬의 예로서 언급된 것이며, 따라서 울릉도에 딸린 섬인 독도는 당연히 한국의 영토에 포함된다고 보고 있다. 반면에 일본은 이 세 섬은 한국 영토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외곽선을 표시하는 섬들이며, 따라서 독도는 한국 영토에서 제외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근거는 근세 이후 울릉도를 가지고 싸웠는데 독도는 울릉도의 동쪽에 있으므로, 즉 영토분쟁의 경계선이 울릉도라면 독도는 자연히 일본영토라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울릉도 독도분리정책>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독도의 대표적 옛 명칭인 우산도는 울릉도를 지칭하는 다른 명칭이라고 주장하며, 한섬에 두개의 이름을 붙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3. 이 문제에 대한 한국의 주장:
정부는 독도문제에 관해 「무대응」이 최선책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현재 우리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만큼 일본측의 「시비」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측 입장의 근거는 아래와 같다.
지정학적 근거 : 우리 영토인 울릉도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는 48해리인데, 일본 은기도에서는 이 거리의 약 2배인 82 해리이다.
따라서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우리나라에 포함되어야 한다.
역사적 근거 :
① 독도는 신라시대에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국을 형성하였으며, 우산국은 신라 지증왕13년 (512년) 신라 13년 (512년) 신라에 귀순해 왔다. 그 후 계속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도 우리나라의 관리 하에 있다.
② 일본이 1905년 도근현시 40호 행정조치를 취한 것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가 아님을 실증하는 것.
국제법상 근거 :
① 그 지역이 주인이 없어야 한다.
② 영역취득의 국가의사가 있고, 그 의사를 대외적으로 공표 하여야 한다.
③ 그 지역의 실효적인 점유가 있어야 한다
카이로 선언 : 포츠담선언 '카이로선언'을 보면 폭력과 강요에 의해 취득한 모든 영토를 돌려준다는 구절이 있으며,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통해 카이로선언을 전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을 선언하였으므로, 폭력과 강요에 의해 빼앗겼던 독도를 일본은 당연히 포기해야 한다. 당시 일본의 폭력성을 증명하는 대표적 예가 '고종강제퇴위'사건이다. 일본은 1905년 그들의 강요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다. 이에 대항하여 고종황제가 국가의 자주권회복을 위해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한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궁궐밖에 대포를 배치한 채 고종황제를 위협하여 강제 퇴위시켰다. 앞으로의 협상추이에 따라서는 독도문제가 국제해양법재판소등의 심판대상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면 정부가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일본과의 영유권 다툼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정부는 이런 상황이 오더라도 일본측의 논리를 제압할 수 있는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는 각종 역사적 자료와 지도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1939년레닌의 부인 크룹스카야 사망
▶1936년프랑스의 정치가 클레망소 사망
▶1936년조건반사 개념을 발전시킨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 사망
파블로프 [Pavlov, Ivan Petrovich, 1849.9.26~1936.2.27]
ㆍ소화액 분비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
1936년 2월27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80대 중반의 생리학자 파블로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일어날 시간이군. 옷을 입게 도와주게.” 폐렴으로 투병 중이던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 제자 한 명이 그의 세세한 변화를 기록하고 있었다. 파블로프의 마지막 실험이었다.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는 1849년 시골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 라잔의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세체노프의 <뇌의 반사> 같은 금서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는 멘델레예프 등 유명한 과학자들이 버티고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는다. 동물해부 실험의 달인인 치온 교수 밑에서 파블로프는 탁월한 외과수술 기술을 터득하고 임피리얼 의학 아카데미에서 의사 자격을 얻는다.
1890년대 러시아 실험의학연구소에서 그의 소화액 분비 연구는 꽃을 피운다. 그는 사람의 소화계를 닮은 포유동물 중에서도 개를 주로 활용했다. 동물을 정교하게 수술하고 나서 회복기간을 주며 긴 시간동안 관찰하는 실험에서, 토끼는 쉽게 죽고 돼지는 예민하고 고양이는 심술궂었다. 그는 위장을 둘로 나눠 음식이 위에 들어갔을 때 소화액 분비와 소화과정을 동시에 관찰하는 정교한 실험에 성공했다.
파블로프가 침샘연구 과정에서 만들어낸 ‘고전적 조건화’라는 개념은 그의 연구 지평을 뇌신경학과 행동과학으로 넓히는 계기가 됐다. 음식을 입에 넣으면 침을 흘리던 개가(무조건 반사) 먹이 주는 사람의 발소리만 들려도 침을 흘리게 되는(조건 반사) 이 실험은 ‘파블로프의 개’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다. 흔히 종소리와 침 흘리는 개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전기자극과 호루라기, 메트로놈 등도 사용됐다. 그는 소화액 분비에 관한 연구로 190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는데, 볼셰비키당은 상금을 압류해버린다. 파블로프는 국외로 망명하겠다는 편지로 레닌을 자극하고, 국가 차원의 지원을 이끌어낸다. 1924년에는 홍수로 실험용 개들이 단체로 익사할 뻔한 사고가 있었고 생사를 오간 개들은 미리 학습된 조건자극을 잊기도 했다. 파블로프의 명성 뒤에는 동물 학대에 대한 비난이 늘 따라다녔다.
▶1933년독일 베를린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발생
▶1932년미국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출생
1958년, 레인트리 카운티
1959년,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1960년, 지난 여름 갑자기
1961년, 버터필드 8
1967년 두 번째 여우주연상 수상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라)
▶1926년조선도량형령 공포(미터법 적용).
▶1913년우리나라 추상화의 선구자 김환기 출생
환기미술관http://whankimuseum.org/new_html/main.php
▶1902년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 출생
스타인벡 [Steinbeck, John (Ernst), 1902.2.27~1968.12.20]
스타인벡은 미국의 대공황을 배경으로 농지를 잃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온 빈농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그려낸 소설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1939)로 큰 명성을 얻은 소설가이다. 그밖에 캘리포니아의 한 농부와 두 아들 사이의 도덕적 관계를 다룬 작품 <에덴의 동쪽 East of Eden>(1952)이 1955년 영화화(제임스 딘 주연)되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크게 목가적 작품, 사회비판적 작품, 해학이 풍부한 작품으로 구분되는데, 그의 명성은 주로 프롤레타리아를 다룬 1930년대의 자연주의 소설들에서 비롯되었다. 196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브리태니커
"작가의 오랜 임무는 바뀌지 않았다.
작가는 모름지기 개선을 목적으로 우리의 많은 중대한 과실과 잘못들,
그리고 어둡고 위험한 꿈들을 드러낼 의무가 있다."
- 존 스타인벡
▶1899년여성교육자 김활란 출생
▶1894년한성신문 창간
▶1888년독일 소프라노 가수 레만 출생
▶1884년남아프리카공화국 성립
▶1873년이탈리아 테너 가수 엔리코 카루소 출생
▶1869년한국 신소설 대표작가 이해조 출생
▶1863년도미니카공화국,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844년미국의 금융업자 니콜라스 비들 사망
https://youtu.be/l-7Z89VU0qw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