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가입하고선 거의 첨 쓰는 글일겝니다.
제소개를 간단히하면 5일후 정확히 우리나라 나이로 50이 되는
사람입니다.
오랜만에 들러보니 꽤 많은 식구들의 진지한 물음과 답에
한자라도 아니쓸 수가 없어 몇자 긁적댐을 혜량하십시요.
아마 1980년도 석지현 번역한 마하무드라 노래를 처음 보게된 것이
계기가 되어 여지껏 한번씩 펼쳐보고 있습니다.
요즘은 42장경을 아무 페이지나 넘겨 슬쩍 보곤 다 아는듯한 얘기를
제나이에 다시 대입해 보곤합니다.
깨달음과 필요한 장비인 명상에 대해선 한번도 제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인 기억이 없습니다.
깨달음이란 삶이란 비빔밥위에 뿌려져있는 깨소금이 아닐까...
명상이란 일상을 제대로 압축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닐까...
해서 주어진 하루라는 음식을 제대로 맛있게 그리고 감사하게 잡숫고
또한 하루를 빈들거리며 지내는 자신을 한번씩 봐주는 일외엔
내가 나서서 할 일이라곤 없어 보입니다.
오쇼의 말씀들은 이제 내속에 녹아 다 없어져 흔적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소화를 다해서가 아니고 오쇼의 삶과 제삶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삶을 어느정도 살다보면 심각할 일이 없습니다.
오늘은 첨 쓰는 글이라 진도가 나지 않습니다.
아래글은 얼마전에 쓴글입니다.
시절인연이 땡기면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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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행자승의 심각
심각한 사람들을 자주 본다. 특히 수행한다는 사람들 속에서.........
삶의 문제에 너무 심각한 나머지 삶의 뿌리인 생존과 생활조차 내팽개 치는 이들도 많다.
나 역시 심각한 적이 있었다.
우선 생존본능을 개무시하고 단식과 브라마챠라를 했었다.
생활도 건성으로 하며 묵언에 들어가고 오롯이 홀로 독각을 염하곤 했다.
끝말 잇기처럼 지난한 일이었다.
무기공에 빠져들 즈음 나의 모습은 너무나 심각하여 내자신에게 조차 어떤 물음도 할 수 없었다.
심각함의 약기운이 떨어질 즈음 나는 쉬운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스승이나 도반같은 선물은 애시당초 나에게 없었다.
심각이란 깊게 어떤 대상을 판다라는 뜻이다.
보통 하는 말로 머리카락 홈파는 일이다.
나는 어느날 부터 본능의 덩어리인 몸뚱아리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식욕 성욕을 견제치 않았다.
수행의 길을 결혼의 길로 대치했다.
심각 대신에 본성이 흐르는데로 게으름과 단순함으로 바꾸었다. 그리곤 책을 놓아버렸다.
오로지 본능과 일상과 깨달음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모양새를 넋놓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오행이니 기감이니 독각이니하는 진통제는 먹지 않았다.
심각하지 않은 것만 하더라도 나는 편안했다.
그리고 동시에 찾아오는 잊어버림과 단절이 아닌 무관심.
i am nothing 이었다.
엊저녁 kbs에 행자승이야기를 보곤 암갈색 행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참 슬퍼 보인다.
얼굴이 모두 심각하다.
부처님 도를 깨달아 성불 해야 한다는 심각함 속에 나는
그양반들의 전생 업장의 무거움에 마음이 서늘하다.
자유로워야 말씀이 들어온다.
평안심속에 지혜가 생긴다.
심각함은 마구니가 즐겨 찾는 곳이다.
심약함의 결과가 심각이다.
나는 늘 집에서 키우는 강생이의 심각하지 않음을 좋아한다. 심각하게 수행하여 깨달아 본들 본말은 넌 왜 그렇게 심각하게 살고 있니 자슥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