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리본
강 문 석
서촌을 어슬렁거리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 낯선 풍경은 충격적이어서 노인네가 더위를 먹어 헛것을 본 것인가 하고 자신의 주먹을 다시 쥐어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조금 전 광화문 네거리에 붙어있던 노랑리본이었다. 5층 건물 앞면에 작은 리본을 수도 없이 연결하여 하나의 거대한 얼굴형상을 만든 것이었다. 세월호를 잊지 말자며 일흔 명이 넘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실명을 자랑삼아 밝히면서 ‘서촌에서 제일 큰 노랑리본 만들기’란 프로젝트 명칭까지 내걸었다. 세월호처럼 나라가 완전히 뒤집힌 것일까. 섬뜩했다.
청와대와 헌법재판소 감사원 정부서울청사가 지근거리이고 그들의 묵인 내지 동조 하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건물 시민단체에서 뽑힌 법무장관 후보자가 낙마했고 온갖 비리로 얼룩진 몇몇은 그 관문을 용케도 뚫은 듯 보이지만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는지 걱정이다. 벌써 한세대 세월이 지난 1980년대 중반 필리핀의 마르코스가 미국 망명에서 귀국하는 정적 아키노 상원의원을 마닐라공항에서 암살했다가 이에 분노한 국민들의 시위로 권좌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
그 사건을 피플 파워로 미화해 한국의 DJ가 1997년 대선에서 제대로 재미를 봤다. 그때 필리핀 시위군중이 들었던 노랑리본을 김대중은 평화민주당 색깔로 썼고 결국 그 노랑이 노무현을 거쳐 오늘날 세월호 리본으로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마르코스가 축출되고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이 되면서 필리핀도 민주화를 내세워 건방을 떨기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가 "양키 고 홈!"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키노 역시 사탕수수밭 대지주로서 필리핀의 부호였다. 한마디로 오늘날 한국의 강남좌파였다.
필리핀의 이러한 반미정책에 식상한 미국이 1992년 수빅만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를 철수하면서 필리핀에서 빠져나갔다.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필리핀의 바로 코앞에 있는 스카보로 섬을 중국이 무력으로 강탈했다. 필리핀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서 작년에 승소했음에도 중국이 그 섬에다 아예 군사 활주로까지 만들어 남중국해 군사요충지로 사용 중에 있다. 게다가 미군철수와 함께 필리핀에 들어와 있던 외국자본이 빠져나가면서 경제는 건방떤 대가를 톡톡히 치렀고 아직도 7백만이나 외국에 나가 가정부 등으로 번 돈으로 지탱하고 있다.
캐나다의 우리 교민 함창기 선생이 보내온 따끔한 충고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문재인이 사드 가지고 장난치는 꼬라지를 보니 한미동맹 파괴와 미군철수가 목표인 것은 분명한 것 같고 솔직히 아쉬울 것 없는 미국도 대충 마음을 정리하는 것 같다. 미군이 철수하면 경제적 충격은 차치하고 당장 우리 조국의 안보가 작살 날 것 같다. 서해는 중국 바다와 어장으로 변하고 동해는 일본 바다 그리고 독도에 일본 해군이 주둔하는 건 시간 문제다. 중국은 지금도 서해를 인구와 땅덩어리 기준으로 75퍼센트가 자기네 거라고 우긴다.
그러니 미군 철수하면 백령도를 무력으로 점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주한 미군 없으면 일본이 독도를 무력으로 빼앗으려 들어도 속수무책일 것이다. 일본과 한판 붙는다면 해상전일 텐데 지금의 해군전력이면 우리 해군은 일본에 반나절이면 괴멸된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있다. 이런 일이 소설 같고 영화에나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교만한 매국노다. I do not think so. It should be coming soon. 그래서 이곳 밴쿠버에 평안히 살면서도 솔직히 조국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다.
그래도 안 믿겨 지는지? 제가 조국에 가서 간증이라도 하고픈 심정이다" 서촌 중에서도 부촌에 드는 청운파츨소 옆에는 한국 자동차의 해외수출을 주도하고 있는 정몽구 현대그룹 회장의 집이 있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네거리에 포승줄에 묶인 정 회장의 밀랍인형이 서있다.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넘쳐나는 곳에다 자동차 로고까지 붙여서 이렇게 공격한다면 차는 어떻게 팔아먹으란 말인가. 이런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을 바라만 보고 있는 치안담당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오늘 서촌은 참으로 가슴이 답답했다.
어느 날부터 한옥이 잘 보존된 서울의 북촌이 관광명소로 떠오르더니 이제는 서촌을 찾는 관광객들이 더 많아졌다. 경복궁을 기준해서 붙인 이름이니 서촌이 서쪽이라면 북촌은 동촌이 되어야 방위상 맞을 것 같은데 그렇질 못하니 혼란스럽다. 효자동을 비롯한 서촌 15개 동네는 반세기 전 고학시절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서촌에서 서울성곽이 복원된 야트막한 인왕산을 오르면 지금은 종로구 무악동으로 바뀌었지만 당시엔 서대문구 현저동 달동네가 있었다.
그곳 판잣집에서 신문배달과 여름철 빙과행상을 위해 서촌을 밟아야만 했다. 동란이 끝난 지 채 10년도 안 된 그때에도 서촌 사람들은 가난을 모르고 사는 것 같았다. 원래 대부분 한옥이었던 서촌이 그동안 카페나 찻집 등 업소로 많이 바뀌었고 지금도 변화의 물결은 멈추질 않고 있다. 하지만 모처럼 서촌을 찾은 나그네의 마음은 부글부글 끓었다. 노랑리본과 길거리에 피켓을 들고 나선 시위꾼들과 '현행범' 밀랍인형 때문이다. 힘없는 발걸음을 터벅터벅 "미국 물러가라!"며 미 대사관을 포위한 시위현장으로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