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9월 13일 수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4세기 중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 터키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나 독실한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았다. 수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극기 생활을 하던 그는 또한 은수자를 본받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의 시간을 보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자선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사제품을 받고 주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임명된 그는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악습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지어 황제나 황후에게도 잘못된 점을 거침없이 지적하였다. 그 때문에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유배 생활을 하다가 407년 무렵에 선종하였다. 탁월한 설교로 ‘금구’(金口: 황금의 입)라고도 불리는 그는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루가 6,20-26)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for the Kingdom of God is yours
[출처] 2017년 9월 13일 수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작성자 진주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조욱현신부-
오늘은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인은 탁월한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성인은 설교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습니다. 저는 설교는 사제에게 필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과 설교를 통해서 만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을 위한 설교, 선교와 설교’라는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5년 동안 신학교에서 설교학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좋은 설교를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4가지를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신앙생활에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설교는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자주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성서와 관련된 책들을 자주 접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나의 주장을 설득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지, 말씀이 들러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진리를 향한 창문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설교는 ‘시대의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참된 세례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진리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 무엇이 가장 큰 계명인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의 대화에서 누가 진정한 이웃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설교는 동시대인들의 고민과 아픔, 번뇌와 슬픔에 대해서 복음적 가치를 전해 주어야 합니다.
셋째, 설교는 ‘기도’가 함께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설교는 좋은 글은 될 수 있지만 사람들의 닫힌 마음을 열기는 어렵습니다.기도하지 않는 설교는 자칫 흥미 위주의 이야기로 흐를 수 있습니다. 좋은 설교는 언제나 깊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배우라고 해도 연습하지 않으면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매일 기도하는 설교자는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의 은사를 받기 마련입니다.
넷째, 설교는 ‘삶’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자신에게는 더욱 엄격해야 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길가에 버려지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겸손해야 하고, 설교자는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해야 하고, 설교자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재물도, 건강도, 목숨까지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문제는 설교와 삶이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오선지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 오선지에 악보를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가족, 이웃, 직업, 국가와 더불어 아름다운 삶, 행복한 삶을 그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오선지 위에 ‘불신,오해, 분노, 욕심, 시기, 질투’를 그리곤 합니다. 자신이 만든 삶이라는 악보를 보면서 불평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괴로워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정의와 평화, 진실과 행복을 만들어가는 악보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자비와 연민, 나눔과 사랑의 악보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하늘나라가 그런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열과 거짓, 불신과 증오를 만들어가는 악보를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개인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는 악보는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불행의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우리들 마음에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행복한 날을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희망이 답이다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인 그리스도-
-이수철신부-
얼마전 가톨릭신문 기사에 눈길이 끌렸습니다. “생명을 살리자”라는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의 공동캠페인과 더불어, “잠시 방향이 보이지 않아도 선택은 결국 ‘삶’입니다” 제하 아래 2003년 이후 OECD국가중 자살률 1위 굴레를 지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희망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희망을 잃을 때 저절로 자살을 생각하게 됩니다. 새삼 ‘희망은 생명’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계속 ‘-답이다’의 강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엊그제 ‘사랑이 답이다’에 이어 어제 ‘기도가 답이다’가 강론 주제였고 오늘은 ‘희망이 답이다’가 강론 주제입니다. 아주 자주 드는 예가 생각납니다. 세기洗器도중 수도형제가 어느 공동체를 방문했는 데, 모든 것이 다 있는데 하나가 없다 하였습니다. 궁금해서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기쁨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있는데 기쁨이 없다면 참 공허할 것입니다. 또 하나 모든 것이 다 있는데 희망이 없다면 이 또한 공허할 것입니다. 희망이 있을 때 기쁨이 있습니다. 희망의 샘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희망은 기쁨의 뿌리입니다. 희망의 뿌리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기쁨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희망과 기쁨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음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뿌리 역시 희망임을 봅니다. 희망이 있어야 사랑도 살아납니다. 그러니 희망이 답입니다. 희망이 모두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이 출구 없는 지옥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6,20-21)
가난해도, 굶주려도, 울어도 생생한 희망을,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겨 맛보고 있기고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바로 희망입니다. 영원한 살아있는 희망입니다. 곧 사라질 세상적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로마8,24)
그리스도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희망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사도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1,20-21ㄱ)
그리스도가 영원한 희망이자 삶의 중심임을 고백하는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1독서 콜로새서에서도 영원한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추구할 것을 간곡히 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 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3,1-4참조).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자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동물세계에서, 절망의 늪, 어둠의 심연의 늪에서 구출되어 하느님 자녀, 빛의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속수무책 망가지고 추락하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자 희망이 되고 기쁨이 될 때 우리 안에 있는 현세적인 부정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은 저절로 시들어 죽어버립니다. 더불어 분노, 격정, 악의, 중상,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수치스러운 말도 뚝 그쳐 버립니다. 하여 우리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게 되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 영원한 희망과 기쁨을 둘 때 끊임없이 새로워져 새 인간이 되는 우리들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3,10) 참으로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기쁨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평화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두입니다. 그러니 ‘희망이 답’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답’이라는 말씀입니다. 새삼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날마다의 미사은총이 얼마나 큰 지 감격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자 그분을 모시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자 희망이요 기쁨이자 평화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참 행복한 미사시간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은 상이 크다.”(루카6,23). 아멘.
성전을 장식할 때
-양승국신부-
아프리카로 파견된 선교사 신부님께서 오지중의 오지인 한 작은 공소로 미사를 드리러 가셨답니다. 흙벽돌에 흙바닥, 허술한 양철지붕의 소박한 공소에서 미사를 봉헌하는데, 총 미사 참석 신자수는 스무명에다가, 비쩍 마른 개 한 마리, 거기다 봉헌금 총계는 망고 두개에 바나나 한 다발 ㅋㅋㅋ
신부님께서 아직 서툰 현지 부족어로 더듬더듬, 그러나 열심히 강론을 하고 계셨는데, 강론 시간 내내 한 할머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데...‘내 강론이 감동적인가보다’하는 생각과 함께, 너무 오랜만에 겪는 일이라 신이나신 신부님, 더 열정적으로 강론을 하셨다지요.
미사가 끝난 후, 그 신심 깊은 할머님을 찾아간 신부님, “제 강론 어디가 그렇게 좋으셨어요?” 할머님 왈! “^^ 강론이 좋아서 운것 아니고, 염소 수염을 기른 신부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작년 이맘때 멀쩡하다가 갑자기 죽은 우리 흑염소가 생각나서!”
이천년 교회 역사 안에 가라면 서러워할 명 강론가가 한 분 계셨으니, 설교자의 수호성인인 안티오키아 출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349~407)입니다. 그는 얼마나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묵상하였던지, 신구약 성경을 통째로 다 외울 정도였답니다. 그의 강론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 사람들은 그를 보고 ‘바오로 사도가 환생하셨나?’라로 감탄했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의 강론과 강의는 오랜 세월을 건너와, 아직도 교회사 안에서도 소중한 자료로 남아있습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미사 강론(sermones)과 성경 강의록(tractatus)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이 구사하셨던 문장들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지나친 반복과 과도한 비약으로 때로 구조가 조금 허술해 보이기도 하지만, 탄탄한 신학적 기반, 심오한 성경 지식, 풍부한 어휘력, 세련된 단어들, 날카로움, 균형감각,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크게 돋보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의 강론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 청중들의 박수와 환호, 눈물과 탄식으로 자주 중단되곤 했답니다. 그의 명쾌한 성경 특강은 한 사람도 조는 사람 없이 두 시간 이상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기도 했답니다.
강론 시간이 감동과 흥미, 눈물과 회개의 현장이 아니라 졸음과 숙면, 짜증과 답답함의 시간으로 만들어버리는 오늘 우리들의 현주소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의 강론이 지니고 있었던 특징은 구체성이었습니다. 그분은 강론대에서 구름잡는 이야기 절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설교는 당시 모순된 사회의 구조적인 악과 폐단 앞에 침묵하는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요한 크리소스코모 주교님이 훌륭한 설교가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된 가장 큰 이유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가 선포했던 설교와 그가 보여준 삶이 언제나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은 공공연하게 당시 부패한 권력자들의 위선적 신앙을 질책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강론은 특정 대상의 사람들, 특히 특히 황제나 황비, 지도자들의 마음을 굉장히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두 차례나 유배를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설교는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해서 사회적 약자들과 가난한 백성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은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예를 들면 고아, 과부, 환자들을 총애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비참한 삶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그가 관할하고 있었던 콘스탄티노플은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 가장 잘 나가던 도시, 부가 넘쳐나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난한 백성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뒷골목을 전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교좌에 착좌하자마자 당장 화려했던 주교관을 소박한 숙소로 변화시켰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대가 금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또 다른 그리스도이신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먼저 배고픈 이들을 충족히 채워 주고 난 다음 그 나머지 것으로 제단을 장식하십시오. 그러므로 성전을 장식할 때 고통받는 형제들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살로 된 성전이 돌로 된 성전보다 훨씬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황비에 대한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의 설교에 대해 어떤 처벌이 필요한가를 토의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에서 논의했던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의 거룩한 삶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①그를 투옥하면 간단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바람직한 해결책이 못됩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도 기도할 것이고, 그가 평소 원했던 대로 주님을 위해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②그렇다면 그를 추방해버립시다: 그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어디를 가든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정 그러면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는 즉시 순교자가 될 것이고, 최대한 빨리 주님께로 가려는 그의 바람을 만족시키게 될 것입니다. ④마지막으로 좋은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웃기지 마십시오. 그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 어떤 것도 그에게 형벌이 되지 못하는군요.”
천상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
-반영억신부-
남보다 머리가 좀 뒤떨어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머리가 좋지 않다고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고 무시를 당해서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를 하였더니 어느 날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소원 한 가지를 청하면 꼭 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는 얼른 똑똑한 머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 머리보다는 돈이 좋을 듯 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머리 좋은 사람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청을 바꾸었습니다. 또 청을 바꾸고 생각하니 돈보다는 아리따운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께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니 다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간절히 청했습니다. 세 가지를 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참다못해 말씀하셨습니다.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한마디로 말 하여라.’ 그래서 큰 소리로 외쳤답니다. ‘머리 돈 여자!’ 하느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 주셨고 그는 지금 많은 어려움 속에 산답니다.‘머리 돈 여자 !’정신없는 여자와 살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행복은 똑똑한 머리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많은 돈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리따운 여인에게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골로3,2).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은’사람다운 생활을 하는 데 있습니다(골로3,9-10). 세상의 기쁨과 슬픔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께 삶의 중심을 두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모욕을 당하고 누명을 쓴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시고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르고 웃고 칭찬 받는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하시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유한 사람은 부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들은 자기 삶의 확고한 기반을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에게서 얻으려 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말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행복하다.’, ‘불행하다’를 말하지 말고 “우리 마음에 열성을 기르고 믿는 바에 관심을 일깨우며 천상사물을 갈망하십시오. 어떠한 불행 중이라도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이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마십시오”(성 대그레고리오 교황). 시편의 말씀으로 마무리 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우리는 소유와 지배에서 만족하지 않고 베푸는 사랑 안에서 만족하며 행복을 누립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는 그 사랑 안에 머물러있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행복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해지는 법입니다.
1. 나 자신을 위해서 꽃을 산다.
2. 날씨가 좋은 날엔 석양을 보러 나간다.
3. 제일 좋아하는 향수를 집안 곳곳에 뿌려 둔다.
4. 하루에 세 번씩 사진을 찍을 때처럼 환하게 웃어 본다.
5. 하고 싶은 일을 적고 하나씩 시도해 본다.
6. 시간 날 때마다 몰입할 수 있는 취미를 하나씩 만든다.
7.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내 맘대로 춤을 춘다.
8. 매일 나만을 위한 시간을 10분이라도 확보한다.
9. 고맙고 감사한 것을 하루 한 가지씩 적어 본다.
10. 우울할 때 찾아갈 수 있는 비밀 장소를 만들어 둔다.
11. 나의 장점을 헤아려 본다.
12. 멋진 여행을 계획해 본다.
13. 내일은 오늘보다 무엇이 나아질지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합니다. 곧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라는 두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행복의 길이 마치 불행한 것처럼 보이고, 불행의 길이 마치 행복한 것처럼 보여 집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세속정신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이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넘어있고 현실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세속정신이 아닌 복음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을 요청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주며, 삶에 대한 태도의 방향전환을 요청합니다.
사실, 이 두 시선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행과 불행을 구분하는 기준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지향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뜻을 실현하는데 가치를 두고 사는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가치를 두고 사는지의 차이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지막 것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26)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하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눈치보고 비위맞추며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지좌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이 하늘을 보고 있지 않는 까닭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혹은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지 인간관계를 개선하여 좋은 관계를 맺고, 단순히 공동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도, 단지 인간적인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고’(마태 6,33) 이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저 오손 도손 재미나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도, 그저 열심히 사랑하며 미워하지 않고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 사랑하는 일일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일 것입니다. 또한 사랑하되 당신이 하신 것처럼,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사람이 아니라,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음은 당연한 일이며, 그리고 이는 오히려 행복해야 할 일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2)
아프도록 사랑하면
-전삼용신부-
한 소녀가 산길을 걷다가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리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든 소녀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비를 구해 주었지만
소녀의 팔과 다리는 가시에 긁혀 피가 흘렀습니다.
그런데 멀리 날아간 줄 알았던 나비가 순식간에 천사로 변하더니 소녀에게 다가와
자기를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하면서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소녀는 망설임 없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 살게 해주세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천사는 알았다며 소녀의 귀에 무슨 말인가 소곤거리고 사라졌습니다.
그 후 소녀에겐 일평생 늘 행복이 떠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임종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할머니가 죽기 전에, 그 행복의 비결이 무엇인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소녀였을 때 나비 천사를 구해 준 적이 있지.
그 대가로 나비천사가 나를 평생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주었어.
그때 천사가 내게 다가와 내 귀에 대고 ‘나를 구해 줘서 고마워요.
지금 나를 구해 준 것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 꼭 도와주세요.
그럴 때마다 행복 에너지를 많이 보내드릴게요.’라고 속삭이고 떠나갔습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결국 깨달은 것은 더 많이 줄수록 더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주기 위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꽃은 꽃을 피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꽃은 아름다움을 풍기고 꿀을 주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사람 또한 자신의 것을 나누어 줄 때 태어난 소명을 다 하게 되는 것이고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다움을 풍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가난해지셨겠습니까?
아낌없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굶주린 이들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왜
굶주리셨겠습니까?
배고픈 자녀들을 보시며 당신만 배불리 어찌 드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또 왜 우셨겠습니까?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당신 자녀들을 보며 어찌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왜 미움을 당하셨습니까?
아버지의 뜻만을 따르셨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프도록 사랑하면 아픔은 없고
더 큰 사랑만 있다.”(마더 데레사)
그렇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기에 나에게 남는 것은 가난과 배고픔과 슬픔과 멸시뿐일 수 있습니다.
성모님도 당신이 가지신 전부인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해 속죄 제물로 봉헌하셨습니다.
그 때 예언자 시메온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당신의 전부를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고통스러울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모님은 아낌없이 봉헌하십니다.
스펀지는 그 안에 스며든 물을 최대한 많이 짜낼수록 더 많은 새로운 물을 흡수합니다.
우리의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이 남을 행복하게 할수록 더 새로운 행복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영광스러운 승천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비워내지 않으면 어떻게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아프도록 사랑하면 아픔은 없고 더 큰 사랑만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은 참된 행복을 가르쳐 주신다. 루카는 여덟 가지 복을 네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20절)이것은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은 죄에서 가난한 사람, 악덕에서 가난한 사람, 세상 우두머리에게 빼앗길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다(요한 14,30 참조). 부유한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그분처럼(2코린 8,9 참조)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내용을 요약한다면, “우리가 몸과 마음, 모든 힘을 다하여 또 가진 것을 다해서 하느님께 충실하고 불우한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살이의 가치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에 불행하고 바보스럽게 보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보상받지 못한 것은 영원으로 그리스도께서 책임지고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물론 현세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한 것은 좋은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이다. 문제는 하느님과 세상의 행복을 놓고 그 마음에 어떠한 순서로 정리되어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다면 모든 것은 잘 되어있는 것이다. 반대로 재물이 첫 자리를 차지한다면, 하느님께나 인간에게나 제대로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자세가 하느님을 향하여 가난하고 굶주리고, 진정으로 울 줄 아는 사람, 하느님의 아들 때문에 박해도 당할 수 있는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 앞에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살 수 있다. 그리고 우는 것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나의 잘못으로 하느님을 떠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진정으로 울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울어줄 수 있는 그러한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부유하다는 것은, 그 마음이 세상의 일로 차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 안에 들어가실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일에 즉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그 삶 때문에 결정적으로 슬픔을 맛보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복음에 나오는 불행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형벌을 뜻하며, 애통하여 소리친다는 뜻이다.
우리 신앙인들의 바람직한 태도는 나쁜 일을 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 청년의 비유에서 보듯이, 어렸을 때부터 계명을 잘 지켰던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선행을 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행복한 우리가 되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참 행복을 위한 비움과 떠남
-기경호신부-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고, 굶주린 사람들은 배부르게 될 것이며, 지금 우는 사람은 웃게 될 것이니 행복하다 하십니다. 또한 당신 때문에 미움을 받고 쫓겨나며 모욕을 당하고 중상을 받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가장 위대한 축복인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들을 행복하다고 하셨을까요? 그들은 지니지 못하고 누리지 못했기에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을 지닌 가난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처지에 있기에 삶의 주도권을 하느님께만 바쳐드린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선을 갈망합니다.
굶주린 이들은 부의 근원인 하느님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슬퍼하는 이들은 억울함을 벗어나 정의이신 하느님을 간절히 바라지요. 그들은 기쁨 자체이신 하느님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이런 갈망은 하느님을 향하고 있고 하느님이 그 존재이유이기에 거룩한 갈망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듯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을 지니고 살아가가는 이들을 ‘먼저 선택하시고’ 축복해주시며 행복을 약속하십니다. 우리도 이런 갈망을 지닌 가난한 사람이 된다면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요. 나는 하느님과 무관한 것들, 세상의 편의와 물질과 감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며 기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참으로 행복을 바란다면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는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행복선언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부유한 이들, 배부른 이들, 그리고 웃는 이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시며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한마디로 세속적 삶의 풍요와 안정 때문에 아쉬움이 없는 이들이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부유한 사람은 자기 삶의 기반을 하느님이 아닌 재물에서 찾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삶에 필요한 것들을 반대하시지 않지만, 그런 것들을 우상화하고 행복의 원천으로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불행한 이들은 세상 재물과 권력에 기대어 삶의 주도권을 자신들이 움켜쥐었다고 착각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리가 없으며, 이기적이며 세속적인 것들로 자신을 가득 채웁니다. 결국 그들은 마지막 날에 참으로 공허하고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인간이 하느님 없이 죽어가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음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따라서 행복을 원하거든 삶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좇으면서 재물이 나를 끌고 가도록 내맡긴 채 살아간다면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소유하고 그분을 삶의 중심에 두기 위해, 우리는 ‘소유없이’의 삶을 선택해야 하고 비우고 떠나는 연습을 계속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현세 재물과 세속의 가치로부터 떠나 주님께로 가는 길이 바로 행복의 길입니다. 물론 그 길은 편하고 낭만적인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은 행복하다(22절).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박해를 겪을 제자들의 운명이 오히려 행복의 조건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기꺼이 일상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으로 견뎌내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아무런 반대도 받지 않고,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차별, 비인간적 상황 앞에 침묵하고 자신만의 안위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는 가난한 자 되어, 그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일상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행복한 우리이길 간절히 희망합니다.
<지금여기에서 참으로 행복한 당신>
-상지종신부-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진 것 하나 없어
재물, 명예, 지위, 권력, 인맥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가난한 사람이라면.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 이미 하느님이 주님이신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미움에 설자리 잃은 사랑에 굶주리고
불의에 자리 뺏긴 정의를 목말라하며
탐욕으로 죽어간 생명을 보듬고
폭력에 희생된 평화를 애타하는
의로운 사람이라면.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 이미 더불어 함께 살 맛 나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일상의 웃음 지어도
착하고 약한 이웃의 억울한 아픔과 고통에
남몰래 흐느껴 울며 가슴 찢는
따뜻하고 선한 사람이라면.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 이미 아름다운 연민 가득한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물질주의와 이기적 탐욕에 무릎 꿇지 않으며
부활을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기쁨과 희망으로 함께 걷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 이미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카 6,20-26 (참 행복, 불행 선언)
그때에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지금여기에서 참으로 행복한 당신>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진 것 하나 없어
재물, 명예, 지위, 권력, 인맥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가난한 사람이라면.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 이미 하느님이 주님이신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미움에 설자리 잃은 사랑에 굶주리고
불의에 자리 뺏긴 정의를 목말라하며
탐욕으로 죽어간 생명을 보듬고
폭력에 희생된 평화를 애타하는
의로운 사람이라면.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 이미 더불어 함께 살 맛 나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일상의 웃음 지어도
착하고 약한 이웃의 억울한 아픔과 고통에
남몰래 흐느껴 울며 가슴 찢는
따뜻하고 선한 사람이라면.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 이미 아름다운 연민 가득한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물질주의와 이기적 탐욕에 무릎 꿇지 않으며
부활을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기쁨과 희망으로 함께 걷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 이미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상우신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 20)
하느님께서
슬프고 아픈
우리마음을
비추어주십니다.
용서할 수 있게
하시는 분또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끝내 행복합니다.
믿기에
행복합니다.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행복은
하느님 사랑에
있습니다.
하느님께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은
잊지 않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살면 살수록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임을
깨닫게됩니다.
살면 살수록
제 자신이 얼마나
작고 어리석은지를
깨닫게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하느님의 행복을
보여주셨습니다.
행복은 오늘
이 순간에도
존재합니다.
하느님이 바로
행복이십니다.
[출처] 2017년 9월 13일 수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작성자 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