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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관련 천주교 역할 평가하는 학술대회 열려 | ||||||||||||
광주에서 ‘5·18과 천주교―역사적·철학적 관점' 주제로 서중석 · 은우근 교수, 5·18 당시 천주교 성직자 활동 자세히 살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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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중항쟁과 관련한 한국 천주교회의 역할을 정리하고 평가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광주인권평화재단(이사장 김희중 대주교)은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소장 김권일 신부)와 함께 5월 23일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5·18과 천주교―역사적·철학적 관점'을 주제로 5·18 32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열었다. 이번 학술대회는 1980년 5·18 민중항쟁 당시와 이후에 천주교가 해왔던 역할, 특히 정부의 언론통제와 탄압으로 진실이 은폐·왜곡되는 상황에서 천주교가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선 과정을 역사적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뜻깊은 자리였다.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서중석 교수(성균관대, 사학과)는 5·18 민중항쟁과 관련한 한국 천주교회의 활동에 대해 “무기 회수 활동이건 정부의 과잉진압에 대한 사과 요구건 수습위원회에서 신부들이 주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신력이 있었고, 신념에 의거한 활동이자 정치적 의도가 없는 순수한 정의의 활동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서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5월 18일부터 공수부대가 광주 시내에 진입해 무차별적인 폭력 만행을 저지르고, 이에 맞서 시민들이 대항하는 기간 동안 광주에 거주하던 사제들은 두려움과 분노에 떨며 “계엄사 측과 항쟁 측의 완충역”을 맡으려 했다. 당시 광주대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를 통해 5·18 소식을 들은 김수환 추기경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찾아가 만났지만 계엄군의 만행을 중지시킬 수 없었고, 5월 21일에 광주 사제 8명과 윤 대주교가 장백의를 입고 거리에 나서기로 의견을 모은 후 계엄사령부에 연락했으나 “책임질 수 없다”는 답변에 단체행동이 무산됐다. 광주대교구 사제들, 사태 수습과 항쟁 계승 활동에 적극 참여 그러나 5월 21일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광주대교구 사제들은 사태 수습과 항쟁 계승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조철현 신부(현재는 몬시뇰)는 치안 부재의 상황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시민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시민군 무기 회수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김성용 신부는 재야 인사로 구성된 수습위원회에 참여했다. 김 신부는 5월 26일 새벽, 계엄군 탱크가 도청 방향으로 진입해오자 수습위원들, 시민 수백 명과 함께 계엄군 대열 앞까지 ‘죽음의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서중석 교수는 무엇보다도 “언론이 계엄사나 전두환 · 신군부 정권의 발표나 보도지침에 따라, 진실을 알리기는커녕 왜곡 보도를 일삼는 상황”에서 천주교가 “미사 강론, 개인이나 집단에 의한 진상발표 등으로 진실 알리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전주교구에서는 1980년 5월 23일에 ‘광주항쟁 희생자를 위한 위령미사’를 봉헌했다. 또한, 전주교구 신부들은 광주항쟁의 실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신자들에게 배포하고, 강론할 때 옥외 마이크를 사용해 군인들의 학살만행을 폭로했다. 광주항쟁 진압 한 달 뒤에 김성용 신부는 <분노보다는 슬픔이>로 알려진 글을 집필해 광주 상황을 알리고 군대의 만행을 폭로했다. 6월 2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회의에서는 광주항쟁의 실상에 관해 공신력 있는 단체의 증언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정형달 신부(광주대교구)가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을 작성하도록 해 전국에 배포했다. 그뿐만 아니라 광주대교구 사제들은 다른 교구에 가서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는 활동을 벌였다. 광주항쟁 당시 수습위원으로 활동하고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한 사제들은 광주에서 7명, 서울에서 5명이 연행돼 고문을 당하거나 수감됐다. 서울대교구 노동문제상담소 수녀 1명도 혹독한 고문으로 심각한 장애를 갖게 됐다. 민중의 아픔에 동참한 한국 천주교 한편, 광주대교구 사제들은 대교구 내 여러 본당을 순회하며 시국기도회를 열었다. 서 교수는 시국기도회가 “외딴 섬에 갇힌 것 같았던 광주 시민들에게 위안이 되었고, 큰 힘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1981년 5월 18일에 광주 남동성당에서 1천여 명의 신자와 시민,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광주항쟁 1주기 추도 미사가 거행된 이후, 광주대교구는 매년 광주항쟁 추도 미사를 봉헌했다. 1987년 5월에는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가톨릭센터에서 광주항쟁 사진전시회를 개최했다. 이외에도 천주교는 광주항쟁으로 인한 구속자 석방과 사망자 유족, 부상자를 지원하는 활동에도 큰 역할을 했다.
서 교수는 이처럼 5·18과 관련해 한국 천주교가 “어느 때보다도 민중의 고통의 현장에 가까이 가 그들의 아픔에 동참했다”며 “민중의 고통에 적극 동참한 이후 사망자 유족이나 구속자와 그 가족들이 아니더라도 광주 지역 주민들의 광주대교구에 대한 신뢰가 컸다는 것은 이 시기에 신자가 대폭 증가한 것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다수 교구 · 사제는 침묵 … 대구대교구 사제 2명은 국가보위입법회의 참여" 그러나 서 교수는 광주항쟁 당시에 한국 천주교 전체가 광주 지역 민중의 고통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김수환 추기경과 일부 사제가 애쓴 것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교구와 사제들이 침묵을 지켰고, 주교회의도 소극적이었으며, 심지어 대구대교구의 두 사제는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의원으로 참가해 전두환 · 신군부정권의 군부독재권력 수립에 기여했다”고 비판했다. 두 번째 발표를 맡은 은우근 교수(광주대, 신문방송학과)는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5월 민중항쟁과 광주/전남 가톨릭교회>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광주항쟁 당시 사제들의 참여를 '부끄러움, 죄책감, 부채의식'이라는 정서의 형성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은 교수는 “광주항쟁 당시 광주 시민들과 천주교 사제들이 공유한 부끄러움의 집단정서는 도덕적 감정일 뿐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각성, 즉 역사의식”이라고 설명하고 “5월 민중은 국가폭력의 만행에 짓밟히며 역사적 깨달음에 도달했고, 목숨을 건 저항의 과정에서 타자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실현하고 자신들의 내부에 잠재한 신비로운 공동체의 힘을 확인했다. 민중이 이런 집단적 깨달음에 도달할 때 역사가 변화한다”고 주장했다. '5·18과 천주교' 학술대회, 2014년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어갈 것 광주인권평화재단은 이번 학술대회에서 5·18과 천주교의 역사·철학적 관점을 다룬 것에 이어서 2014년까지 사회학·신학적 관점, 영성·실천적 관점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와 더불어 광주인권평화재단은 광주항쟁 32주년을 맞이해 지난 5월 14일부터 6월 30일까지 광주 가톨릭센터 3층에서 <5·18에서 6·10항쟁까지>를 주제로 사진 · 기록물 전시회를 열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