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4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루카 12,35-38
하루 종일 깨어있으려면 머리는 지치고 마음은 마른다
영화, 과거를 잃게 되면 인생을 잃게 된다는 내용의 ‘내가 잠들기 전에’의 간단한 줄거리입니다.
여자 주인공은 매일 아침 이전의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납니다. 남편이 앞에 있습니다.
그저 믿을 뿐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출근하면 어떤 다른 남자에게 전화가 옵니다.
남편은 자신이 사고로 밤마다 기억이 지워진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담당 의사인데 사실 누군가에게 폭력을 당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옷장의 박스를 보면 사진기가 있는데 그것을 틀어보라고 합니다.
그것 안에는 지금까지 자신이 녹화한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남편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결국 아침마다 그렇게 쌓아놓은 지식으로 자기 남편 행세를 하는 사람을 이겨내고 참 자기를 찾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 주제는 ‘깨어있음’입니다.
깨어있음은 지금 주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죄를 지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현존을 잊고 죄를 지었습니다.
아니 죄를 짓기 위해 주님 현존을 잊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그러니까 깨어있음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계속 기억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연습』의 로랑 수사님은 주님의 현존을 인식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몸으로
체험하고 가신 분입니다.
이분은 매 순간 주님의 현존을 인식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 방법은 짧은 기도문을 계속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끊임없이 대화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처럼 의지가 약한 사람은 매 순간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금방 지쳐버립니다.
책 『정리하는 뇌』는 인간의 뇌가 지친다고 말합니다.
머리로 계속 기억하려다가는 지치는 것입니다. 맛없는 무를 먹느라고 지친 사람과 맛있는 초콜릿을 먹은 사람이 같은 어려운 수학 문제를 누가 끝까지 견뎌낼까요?
당연히 지치지 않은 뇌를 지닌 초콜릿을 먹은 사람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초콜릿을 먹는데 자기만 무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린 사람들은 폭발 직전이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스마트폰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은 아침부터 지친 뇌를 지니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 영화의 예처럼 하면 됩니다.
아침마다 자기가 누구인지 되새기면 됩니다.
아침에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머리’로 인식하면 그것이 믿음의 방울이 되어 ‘가슴’에 담깁니다.
이는 마치 발효주를 끓여 증류주로 만드는 과정과 같습니다.
이것이 기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머리는 살아가며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습니다. 머리로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믿습니다.
성체 앞에 앉아 머리로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생각하면 그것이 증류되어 가슴에 담깁니다.
도수가 낮은 발효주는 많이 마셔야 취하지만, 도수가 높은 증류주는 작은 양만 마시면 금방 취합니다.
따라서 아침에 기도하여 믿음을 가슴에 저장하여 둔 사람은 잠깐만 꺼내서 마셔도 금방 다시
깨어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순간순간 주님 현존을 기억해내려는 사람은 지친 뇌를 가지고 결국 실패한 하루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도 이와 비슷한 내용입니다.
아침마다 기억이 사라지는 이 여자는 자기에게 청원하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침마다 의심해야 하고 아기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짧게나마 녹화해서 매일 아침 1시간만 보면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게 합니다.
결국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둘은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주님의 기도를 한 시간씩 하며 제가 누구인지 되새깁니다.
살아가면서 가끔 이 믿음을 꺼내서 마십니다.
그러면 하루 동안 거의 주님의 현존을 잊지 않습니다.
물론 증류주도 마시면 말라버립니다.
그러니까 매일 아침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잠들기 전에’는 내가 누구인지 찾기 위해 나 자신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이고, ‘첫 키스만 50번째’는 애인의 기억을 되살려주기 위해 남자가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주님께서도 아침마다 깨어있게 하시기 위해 당신 현존을 준비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합니다.
항상 깨어있는 종이 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4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루카 12,35-38
마지막 피정, 어느 젊은 사제의 영적 유언
존경하는 광주대교구 강기남 요셉 신부님께서 정성껏 번역하신 파블로 도밍게스 프리에토(1966-2009) 신부님의 ‘마지막 피정’(성바오로 출판사)을 행복한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강한 열정과 겸손의 덕을 겸비한 사제, 따뜻한 인간미와 유머 감각을 갖춘 사제,
깊은 성체 신심과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던 젊은 사제 파블로 신부님은 스페인 사라고사에 위치한
시토회 봉쇄 수녀원 수녀님들의 영신 수련 피정을 동반해드리러 갔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피정이었습니다.
2009년 2월 11일부터 15일까지이니, 불과 닷새 동안의 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블로 신부님의 피정 강의가 얼마나 재미있고 심오했던지, 수녀님들은 짧지만,
지상천국을 맛본 듯했습니다.
그리 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텐데, 파블로 신부님의 피정 강의는 수녀님들의 마음 속에
주님을 향한 열정이 되살아나게 했고, 믿음에 확신을 갖게 했으며, 다시 한번 주님께로 돌아서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파블로 신부님은 암벽 등반 전문가였는데, 닷새간의 피정 동반을 마친 신부님은 수녀원에서 올려다보이는 몬카요 산을 등반하고 내려오는 길에 실족사하게 됩니다.
겨우 43세였습니다.
책 내용은 말 마디 그대로 파블로 신부님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 피정’ 강의록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신부님의 마지막 피정은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흥미진진하면서도 깊은 영성으로 가득한 신부님의 피정 강의는 이제 한국어로 잘 번역되고,
멋진 책으로 출간되어 한국 땅에서도 계속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피정’을 읽으면서 너무나 은혜로웠습니다.
마치 파블로 신부님이 강사석에 앉으셔서 영성 강의를 펼치시고 저는 연피정에 참석한 느낌입니다.
딱딱하고 지루한 강의가 아니라 너무나 편안하고 따뜻한 강의였습니다.
마지막 장을 탁 덮는 순간, 8박 9일간의 은혜로운 연피정을 끝낸 기분이었습니다.
이게 웬 횡재냐,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도 연피정 강의를 좀 더 정성껏 준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피정 강의 안에는 여러 감동적인 스토리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사람,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 이야기, 디하우 나치 포로 수용소 안에서 사제로 서품된
카를 라이스너 신부님 이야기, 32살에 직장암 진단을 받는 볼리비아 선교사 헤수스 신부님의 신앙 간증...
파블로 신부님 자신을 비롯해서 신부께서 강의 중에 소개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리에 띠를 꽁꽁 동여매고 손에는 환한 등불을 켜 든 사람들이었습니다.
혹독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했던 분들이었습니다.
죽음과 관련된 파블로 신부님의 말씀은 허리에 띠를 매고 손에 등불을 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포옹이요, 사랑하는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만이 아시는 그 날과 그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하느님과 만나는 그 죽음의 날, 우리가 맞이할 그 은총의 시간을
한결같은 열정으로 열망하고 경외하며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죽음의 결정적인 마지막 순간에 갖게 될 그 마음과 시선으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께 간청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중요한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죽음의 그 순간 부차적인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차적입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 그분만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것만이 중요합니다.”(마지막 피정, 성바오로)
구입문의: 02) 944-8300, 986-1361, 인터넷 서점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월24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루카 12,35-38
<재림>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루카 12,35-38)"
10월 24일의 복음 말씀인 루카복음 12장 35절-38절, '깨어 있어라.'의 내용과 루카복음
17장 7절-10절, '겸손하게 섬겨라.'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비슷하면서도 너무나도 대조적인 장면입니다.
12장 35절-38절에서는 종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고, 돌아온 주인이 종을 식탁에 앉히고 시중을
들고 있는데, 17장 7절-10절에서는 주인이 종을 기다리고 있고, 돌아온 종이 주인을 위해서 식탁을 차리고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두 내용 모두 '주인'은 '주님'을 뜻하고, '종'은 '신앙인들'을 뜻합니다.
17장 7절-10절의 내용은 현실 세계의 일상적인 모습을 묘사하면서 종의 자세를 강조하는 내용이고, 12장 35절-38절의 내용은 주님의 재림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종이 얻게 될 행복을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두 내용을 합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종'은 주인이 밖에 있든 집에 있든, 언제 어떤 상황이든 주인을 위해서 시중을 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왔더라도, 또는 밖에 있는 주인이 돌아오기를 밤새도록 기다렸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종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인(주님)은 그렇게 충실하게 일하는 종을 주인의 자리에 앉히고 종이 주인에게 하듯이 시중을 들게 됩니다
밖에서 종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든지, 집에서 종을 기다렸든지 간에 주인은 충성스러운 종에게 최상의 은혜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17장 9절의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라는 말은, 주인이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종의 입장에서 주인에게 고마워하라고 요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내용에서 강조하는 것은 주인의 태도가 아니라 종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종의 모습으로 우리를 주인처럼 섬기는 분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주인을 섬기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주인'과 '종'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주님과 신앙인의 관계는 보통 생각하는 주종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벗의 관계입니다.
(연인 사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입니다.)
뜻을 생각하면,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종'은 사실상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입니다. 어린 시절에 혼자서 집을 지키면서
엄마가 돌아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려본 사람이라면 그 심정을 알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사랑하는 분이 하루라도 빨리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몽룡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성춘향의 심정?)
그래서 신앙인들이 종말과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잘못한 일을 심판받기 위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 전의 무서운 재앙들을 피하고 싶어 하면서, 또는 지상에서의 수명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그 시기가 조금이라도 더 연기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죄인의 입장에서는 재림하신 주님의 심판이 무서운 일로만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분을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온갖 억울하고 서러운 일들을 주님께서 바로잡아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시는 일이 바로 '종말의 심판'입니다.
그것 때문에라도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요한 묵시록을 마치면서 묵시록 저자는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이라고 외칩니다(묵시 22,20).
바오로 사도도 "마라나 타!" 라고 외쳤습니다(1코린 16,22).
'마라나타'는 '저희의 주님, 오십시오.' 라는 뜻인데,
주님께서 하루라도 빨리 오시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심정을 표현한 말입니다.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로만 생각한다면, 재림하시는 주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마라나타'를 외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에 지금 그렇게 무서워하고 있다면, 자기가 왜 그분을 무서워하고 그날을 무서워하는지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뭔가 칭찬받을 일을 해서 엄마의 칭찬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아이와 뭔가 잘못한 일을 해서 엄마에게 혼날 것을 걱정하고 있는 아이의 차이...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