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야성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을 다시 읽었다.
이 소설은 1890년대, 황금이라는 꿈을 찾아 떠나는 골드러시 광풍을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안락한 저택에서 살갗 시린 북극의 썰매를 끄는 개가 된 벅,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문명의 세계에서 야만의 세계로 내동댕이쳐진다. 벅은 채찍으로 얻어맞고 다른 개들의 날카로운 이빨에 위협당하며 단단하게 여물어간다. 약육강식의 법칙을 온몸으로 습득한 벅은 마침내 야성의 세계에서 우두머리로 우뚝 서게 된다.
10년도 훌쩍 넘기고 다시 읽은 '야성의 부름'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 주었다.
오랜 세월을 나는 야성이 부르는 것을 눈치채지 못 하고 지냈다. 혹은 부름을 들었다고 해도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눈 질끈 감고 못 들은 척하기도 했다. '야성의 부름'을 읽으면서도 내 안의 야성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내 마음속의 야성이 눈을 뜬 계기가 있었다.
2014년 7 월, 새벽에 출발하여 마곡사와 우금티 전적지, 무령왕릉과 공산성을 둘러보고 마지막 코스로 정안천에 도착했다.
그때 연꽃에 반사 되어 흩어지던 노을빛과, 달착지근한 한여름의 바람, 그리고 뭉게 구름이 흘러가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으로 내 마음에 저장되었다 이런 곳에서 오전에는 책 읽고 오후엔 산책하면서 살면 참 좋겠구나., 생각했다. 그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2년 후, 공주대학교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그마한 공간을 마련하고 서울과 공주를 오가기 시작했다.처음부터 글을 쓰겠다고 공주에 온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도 나름 잘 성장했으니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유유자적하며 살고 싶었다. 공주에 와서 지내보니 시간은 여유롭다 못해 정지된 것 같았다. 이 시간에 뮐 하면 좋을까 ᆢᆢ
괴테는 시간이 내가 받은 유산이며 나의 소유이며 나의 경작지라고 했다.
태어나는 순간, 시간이라는 유산을 받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의 무게나 질량은 분명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나에게 시간은 얼마큼의 부피로 남아있을까. 결국 나는 그 남아있는 시간에 글을 경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거칠고 강력한 힘만이 야성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야성은 반짝이는 창의력이며 상상력이기도 하다. 보잘것없이 작더라도 내 안에 숨어있는, 나 자신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불꽃 하나쯤은 누구나 품고 살아갈 것이다. 그 욕구가 내 안에서건 밖에서건 어떤 자극으로 인하여 불씨가 확 당겨질 때. 그걸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나에겐 공주가 실험 무대이며 '인디아나 존스'이며 일탈이다.
여기에선 소중하게 간직했던 것들이 먼지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에서 빛을 발견하기도 한다. 벽은 다시 나에게 바싹 다가와 속삭이며 유혹한다. 제멋대로 자란 긴 털을 자랑스럽게 휘날리고 햇살에 반사되어 후루룩 불타버릴 것 같은 야성의 눈동자를 반짝이며, 벅은 여기 '너머'를 향하여 달려간다. 너머에 아슴아슴한 바다가 보인다. 우렁우렁 울리는 벅의 부름에 응답하며 그의 발자국에 내 작은 발을 살며시 겹쳐 올려놓는다 어디로, 왜, 라는 물음엔 답하지 않으련다.
손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