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후기
2022-04-02 (토) 궁남지+신동엽생가+정림사지+부소산성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 시인 신동엽생가
그는 지나간 추억이 아니라 살아 격돌하는 현재이다.” 이것이 신동엽문학관의 주제이다. 명품의 요소로 스토리, 테크놀로지, 디자인을 꼽는다면 신동엽문학관은 이 세 가지를 모두 최상의 상태로 갖추고 있다고 해도 된다.
1959년에 등단하여 만 10년 동안 활동하다 39세에 요절했다. 그가 남긴 작품들과 4·19의 한복판을 관통한 시정신은 이후 세대들에게 산업사회의 너머를 꿈꿀 대안적 상상력의 모델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쳐왔다.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 사회에서 그가 저항시인으로서 자리하고자 했던 존재방식, 창작실제에서 거둔 미적 형식 또한 선구적인 모델로 평가받아 왔다. 신동엽문학관은 생가와 마을, 작품이 구상된 실제 장소들 속에 자리해 있다.
시인의 생애를 구성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의 성적표, 생활기록부, 반장 임명장, 신분증 등 성장기의 이력을 증언할 수 있는 각종 유품과 자료들도 완비된 상태다. 농업경제학자 인정식의 딸이자 시인의 아내로서 ‘짚풀생활사박물관’을 일궈낸 인병선 여사가 지켜온 신동엽의 유물들은 이미 하나의 박물관을 구성할 만큼 풍부하다.더욱이 중요한 점은 이 모든 내용이 실제 장소에 하나의 작품처럼 공간 미학화 돼 있다는 사실이다.
신동엽문학관은 오늘날 부여가 자랑하는 3대 건축물의 하나로 꼽힌다. 신동엽의 시정신에 부합하는 조형물이 어떤 것이며, 문학관이 갖추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건축예술로 펼쳐 보이는 작품 <신동엽문학관>은 건축전공 학도들의 답사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와 함께 부여 출신 화가 임옥상의 설치미술
<시의 깃발>은 신동엽의 시가 바람에 나부끼는 형상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는 신동엽문학관의 표지와 <생가>라는 시로 된 현판과 함께 임옥상 글씨예술의 정점을 이룬다고 알려져 있다.
🍄 정림사지 定林寺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대표적인 백제시대 절터. 사적 제301호.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중건 당시 절이름이 정림사 였고, 1028년(현종 19)에 중건되었음이 밝혀졌다. 1979~84년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의해서 절터가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남북선상에 일렬로 배치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두른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인 남북일탑식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회랑지 서남 모서리에서 납석제삼존불상, 소조불, 다량의 기와편, 북위시대의 도용과 관련을 보이는 도용의 파편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과 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 정림사지석불좌상
정림사지의 강당지 한복판에 있는 고려시대 불상. 보물 제108호. 높이 562㎝. 거불로 오른팔과 왼쪽 무릎이 떨어져나갔고 몸체의 마멸이 심한 편이다. 또한 머리부분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전체적인 양식고찰이 어려우며, 왼손의 윤곽으로 보아 지권인을 취한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 대좌는 불상에 비해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며, 3단의 팔각연화대좌 이다. 상대에는 앙련이 조각되어 있고, 팔각의 간석에는 큼직한 안상이 표현되어 있다. 하대의 윗부분에는 복련이 있고, 아래의 기단석에는 각 면에 안상이 3개씩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남원 만복사지에 전하는 고려 전기의 석불대좌 등과 비교되므로 정림사 중건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정림사지 오층석탑
정림사지에 있는 백제의 5층석탑. 국보(1962.12.20 지정). 높이 833㎝.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며, 석탑의 구조는 기단 위에 탑신부가 있고 상륜부는 복발을 제외하고는 모두 없어졌다. 기단은 단층으로 얕으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1층 탑신은 4개의 우주를 별석으로 세우고 그 사이에 2매의 면석을 끼웠는데, 우주는 목조건축의 기둥에서처럼 위는 좁고 아래는 넓게 표현되어 있다.
🍄 부여궁남지 扶餘宮南池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번지 일대 백제시대 원지(苑池). 백제 무왕 때에 궁궐의 남쪽에 만든 큰 연못으로,『삼국사기』에 의해서 궁남지라고 부른다. 다만 연못이 어떤 모습으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우물과 몇 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고, 동쪽에서는 주춧돌과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는 건물터가 확인된다.『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 35년(634)조에는 “3월에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고 하였고, 같은 왕 39년조에는 “봄 3월에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하였다.
🍄 부여관북리유적 扶餘官北里遺蹟
전백제왕궁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사비시대 궁궐터. 사적 제428호. 충청남도 기념물 제43호에서 2001년 2월 5일 사적 제428호로 변경되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부여의 사비시대
(泗沘時代) 왕궁터로, 성왕에서 의자왕까지 6대에 걸쳐 123년간 나라를 다스렸던 곳이다. 또한 이곳은 조선시대 부여현의 관아(官衙)가 있었던 곳으로, 주변에는 백제의 유적과 유물이 산재하여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충남대학교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한 결과 백제시대 연못 및 배수로 유적, 도로 유적, 건물터 기단 및 석축시설, 공방(工房)터 등이 발견되어 왕궁터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히게 되었다
🍄 부여동헌 扶餘東軒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국립부여박물관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아.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팔작지붕 건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 조선 후기의 건물로 외동헌(外東軒)·객사(客舍)·내동헌 등 3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외동헌은 부여현의 공사를 처리하던 현청(縣廳)으로 1869년(고종 6)에 세워져 1880년에 중수되었으며, 1985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다시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부여 삼충사(扶餘 三忠祠)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백제 시대의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백제의 충신인 성충, 홍수, 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사당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죽은 장군이다.
🍄 영일루 迎日樓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봉리 부소산
(扶蘇山)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1호.
조선시대 홍산현(鴻山縣) 관아 입구에 있던 것을 1964년 옛 영일대(迎日臺)가 있던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사비도성(泗沘都城)의 비원이던 부소산 동쪽 산정에는 임금이 매일 올라가서 동편 멀리 계룡산 위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 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영일대가 있었으며, 서쪽 산정에는 임금이 달맞이를 즐기던 송월대
(送月臺, 일명 迎月臺)가 있었다고 한다. 영일루에 오르면 동쪽으로 정동리 일대의 광활한 평야와 청산성이 한눈에 굽어보인다.
🍄 부소산 扶蘇山 106m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있는 산. 금강에 연하여 있다. 백제 때 성왕이 도읍을 웅진(熊津)에서 이곳 사비(泗沘)로 천도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부여의 진산(鎭山)이며 동쪽 작은 봉에 비스듬히 올라간 곳을 영월대라 부르고, 서쪽을 송월대라 이른다.”고 한다.
🍄 낙화암 (落花岩)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내려다보듯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될 때,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 전설로 낙화암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岩-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성왕이 국가 중흥의 원대한 꿈을 펼치려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으나, 위덕왕ㆍ무왕ㆍ의자왕에 이르는 동안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단독으로 백제에 대항하기가 어려워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대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백제는 국운을 다했던지 의자왕도 정사를 소홀히 하고, 나라가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의자왕 20년(660) 사비성은 신라.당나라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성내에 살던 궁녀와 도성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침략군이 부소산성까지 몰려들자, 백제 여인들은 적군에게 잡혀가 치욕스러운 삶을 사느니보다 차라리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무너지는 국운과 함께 목숨을 깨끗이 버리는 길을 택했다. 이처럼 여자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하고, 백제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어린 곳이 바로 낙화암이다.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절벽에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 고란사(高蘭寺)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에 있는 고려시대 백제의 후예들이 중창한 사찰. 문화재자료.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
(麻谷寺)의 말사이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
(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 사자루(泗泚樓)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순조 24년(1824)에 군수 심노승이 임천군 군사리에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는 사자루라 이름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 산행코스
궁남지 ▶️ 시인 신동엽 문학관+생가 ▶️ 정림사지 ▶️ 관북리유적지 ▶️ 부여동헌 ▶️ 삼충사 ▶️ 영일루 ▶️부소산 ▶️ 낙화암 ▶️ 고란사 ▶️ 반월루 ▶️ 사자루 ▶️ 구드래나루터주차장
🍄 산행거리 ㅡ 12.02Km
🍄 산행시간 ㅡ 3시간 21분
🍄 들머리 : 궁남지 동문주차장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52-1
🍄 날머리 : 구드래 나루터 주차장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구교리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