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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마르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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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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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26 03:23
-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버릴 줄도 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잘 버려야 한다.
지난주 저는 받는 것을 잘 받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좋은 것은 받고 나쁜 것은 받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한 바 있는데
오늘은 버릴 줄도 알아야 하지만 잘 버려야 한다는 성찰과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왜냐면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버리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지 않기 때문인데
이것이 어리석음이고 잘못이고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버리는 잘못에 대해 보겠는데
공통점은 사랑이 없고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중심적인 버림입니다.
제 생각에 사랑이 없으면 좋고 싫음에 따라 버립니다.
곧 좋아하면 소유하고 싫어하면 버립니다.
물건은 이렇게 버릴 수 있고 버려도 되겠지요.
그런데 사람도 그러면 되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저는 미워하는 것이 차라리 선이고 사랑입니다.
많은 사람이 특히 요즘 와서 미워하기 전에 버려버립니다.
미워하는 고통이 싫어서 미워하지 않으려고 하고,
미워하기 전에 관계를 끊어버리거나 무관심해 버립니다.
그래서 요즘 와서도 버리지 않고 끈질기게 미워하는 사람이
오히려 존경스럽고 그런 사랑에 대해 저는 훌륭하다 합니다.
또 하나는 자기 필요에 따라 소유하거나 버리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싫어서 버리는 것보다 더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중심보다 더 나쁜 이기주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 다른 것이지만 교만 때문에 버리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소유했다가 버린 것이 아니라 소유할 가치가 없기에
애초에 버려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이유로 잘못 버리는 것에 대해서 봤는데
그러면 겸손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버리지 않고
겸손하고 사랑한다면 아무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는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롭고 겸손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더 잘 버립니다.
정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정 자기를 위하여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소유하기 위하여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버릴 줄도 압니다.
욕심과 집착을 버릴 줄 알고,
지금 당장 즐거운 것을 버릴 줄 알고,
지금 당장 받을 상을 포기할 수 있고,
소유물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애착도 포기할 줄 압니다.
결론적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버릴 줄도 알고,
잘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잘 버릴 줄 아는 것임을
오늘 주님 말씀을 통해 새삼 깨닫고 그렇게 실천키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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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르 10,28–31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와 함께 백 배를 받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첫째인 이들이 꼴찌가 되고
꼴찌인 이들이 첫째가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의 길이 손해의 길처럼 보일 수 있음을 먼저 인정합니다.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은
실제로 비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든 것, 익숙한 것,
내가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비움이 공허로 끝나지 않는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비워진 자리는
하느님 나라의 더 깊은 친교와 생명으로 채워집니다.
대 바실리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상의 소유 질서에서 하느님의 생명 질서로 옮겨 가는 길로 보았습니다.
그에게 참된 부요는
많이 가진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바르게 정돈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버림은 파괴가 아니라
더 큰 선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놓는 선택입니다.
자유는 내 뜻대로 움켜쥐는 힘이 아니라
참으로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힘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삶을 가난하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더 깊은 풍요로 이끕니다.
오늘 복음에서 인상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백 배”를 약속하시면서도
“박해와 함께”라고 덧붙이신 점입니다.
곧 제자의 길은
모든 것이 순조롭고 편한 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풍요는
세상이 보장하는 안전과 같은 방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혼자 살지 않게 하는 친교,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 의미,
끝까지 잃지 않는 생명이 있습니다.
대 바실리오의 시선으로 보면
이것이야말로 참된 부요입니다.
겉으로는 적어 보여도
본질에서는 충만한 삶입니다.
영성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묻게 합니다.
영성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무엇이 영원한지 분별하여
그에 맞게 삶을 정리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내려놓는 것은
결국 더 깊은 생명을 위한 비움입니다.
기도, 침묵, 단순함은
삶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맑고 깊게 만드는 길입니다.
또 “첫째와 꼴찌”의 말씀은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순서가
하느님 나라에서는 뒤집힐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명예, 성취, 소유,
겉으로 보이는 우위가
마지막 평가의 기준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보다
얼마나 사랑했고 얼마나 비웠으며 얼마나 충실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성은
삶의 순서를 다시 정하는 일입니다.
주님보다 앞세운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첫자리에 모시는 일입니다.
오늘 화요일 성령의 날에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
더 큰 생명을 놓치고 있는가?
내가 풍요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하느님 나라의 풍요인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해 놓아라.
그러면 더 큰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
제가 세상의 기준만으로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지 않게 하시고
당신 나라의 풍요를 알게 하소서.
놓아야 할 것은 놓게 하시고
붙들어야 할 것은 끝까지 붙들게 하시며
적게 가져도 더 깊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성령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먼저 선택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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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를 하면서 다른 한국 성지순례 팀과 함께 미사를 봉헌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공동체서 서로 가진 것을 나누고 한 가족처럼 지낸 것처럼 우리는 같은 신앙을 가진 것만으로도 한 가족처럼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제가 서품이 빨라서 주례하고,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강론했습니다. 신부님은 강론 중에 ‘행복’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라고 하셨던 것처럼 감사와 기쁨의 바람이 불면 성지순례도 그렇게 감사와 기쁨의 순례가 될 것 같았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발현산’으로 묵주기도 하러 갔습니다. 가파른 돌산이라서 묵주기도 하면서 잠시 쉴 때가 더 좋았습니다. 그렇게 5단을 마치니 발현산 정상에 ‘성모상’이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발현산에는 원래 나무 십자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발현산에 성모상이 있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1999년 한국에서 온 순례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순례자 중에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아이와 함께 온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메주고리예 이야기를 들었고, 아이와 함께 순례하러 가려고 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메주고리예에 왔습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온 순례팀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는데 아이가 ‘Ave(아베)’라는 말을 따라 했다고 합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순례 중에 아이는 말도 하고, 말을 알아 듣기도 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아이의 엄마는 그 치유의 은사를 이야기했고, 아이의 아버지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모상을 이탈리아에서 제작해서 발현산에 모시기로 했습니다. 당시 본당 신부님도 그 사연을 듣고 발현산에 십자가를 옮기고 그 자리에 성모상을 모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셔진 성모상은 성모님 발현 20주년이 되는 해, 성모님의 탄생 축일인 9월 8일에 지금의 자리에 모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발현하시면서 ‘평화’를 세 번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모상 아래에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묵주기도를 마친 순례자들은 성모상 주위에서 침묵 중에 세계 평화를 위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저와 같이 간 순례팀도 ‘평화’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메주고리예의 성모님은 다섯 가지를 당부하였다고 합니다. 첫째는 묵주기도입니다. 메주고리예 성지에서는 매일 오후 5시에 묵주기도를 봉헌합니다. 발현산에 오르는 분들도 모두 묵주를 손에 들고 기도하며 올라갑니다. ‘환희, 고통, 빛, 영광’의 신비는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둘째는 ‘미사참례’입니다. 성모님의 발현도 그 어떤 표징도 ‘미사’를 대신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의 미사 봉헌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일 미사는 물론 가능하면 평일 미사도 함께 하라고 합니다. 메주고리예 성지에서는 묵주기도가 끝나면 미사와 함께 성시간이 있습니다. 셋째는 ‘성경 읽기’입니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방법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 만남의 자리입니다. 넷째는 ‘고백성사’입니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고백성사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쓰레기통을 치우듯이, 고백성사를 통해서 마음 안에 있는 죄를 치워야 합니다. 다섯째는 단식입니다. 단식은 음식에 대한 욕망을 절제하면서 나의 마음과 몸이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발현은 큰 표징과 기적일 수 있지만, 성모님의 발현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도 ‘성지순례’하는 우리에게 좋은 준비물을 알려줍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성지순례 하는 사람의 자세이고,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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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아프리카에는 원숭이를 잡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조롱박에 작은 구멍을 뚫어 놓고, 원숭이가 좋아하는 먹이를 넣어 튼튼한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습니다.
원숭이가 손을 넣어 먹이를 움켜쥐면 주먹이 조롱박 구멍에 걸려 손을 뺄 수 없습니다. 움켜쥔 것만 놓으면 도망갈 수 있는데, 원숭이는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붙잡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우리는 재물을 꼭 잡고 놓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녀를, 가족을 꼭 붙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움켜쥔 손은 집착일 때가 많습니다. 그 집착이 오히려 우리 생명을 갉아먹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움켜잡은 손을 놓으라고 하십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놓을 때 우리는 더 풍요로워집니다.
관계에 대한 집착을 놓을 때 우리는 참된 사랑을 발견합니다.
움켜쥔 손을 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꽉 쥔 주먹으로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지만, 활짝 핀 손으로는 하늘의 은총을 가득 담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10,31). 하느님 나라에서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내어 준 사람이, 많이 움켜쥔 사람이 아니라 많이 나눈 사람이 첫째가 됩니다.
오늘 하루,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것을 조금씩 놓아 봅시다.
영원한 생명이 성큼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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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독서>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의 말씀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1,14-15)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부자청년이 재산 때문에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하고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서 하는 말입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비추어 봅니다.
‘나는 모든 것을 버렸는가?
버리지 않았다면, 왜 못 버리고 있는가? 버렸다면 따르기 위한 것인가?
그리고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스승으로 따르고 그분에게서 배우고 있는가?
혹은 다른 이에게서 배우고 있고, 다른 이를 따르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예수님께서는 ‘버린다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버리는 것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이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복음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암시합니다. 곧 ‘예수님과 복음’이 ‘그 모든 것들을 버릴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과 예수님을 더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 갑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을 넘어, ‘진정한 예수님, 진정한 복음’을 알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차차 예수님과 복음을 깨달아가면서, 우리는 예수님 외의 것들을 조금씩 버려가게 됩니다. 곧 아무리 값지고 좋은 것들도, 그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또 나에게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내려놓아야 할 것들임도 알아갑니다. 사실,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에 대한 사랑’이 작아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진정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릴 수 있게 합니다. 진정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처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갈 뿐,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부족함이 없으니(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예수님과 복음을 사랑한다면,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대변혁이 생길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구하는 데 첫째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위해 다른 것을 구하는 데는 꼴찌가 되게 하소서.
언제 어디서나 당신과 당신의 말씀이 늘 첫째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주님!
모든 것을 버리되,
버리고 온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되,
당신을 따르고 있는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온전히 당신의 것이오니,
오로지 당신만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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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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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6.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성령의 열매로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성
붙잡는 종교에서 놓아버리는 복음으로
예수님의 복음은 본래 죽은 뒤에야 효력을 발휘하는 내세 보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인간 존재를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불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먼 훗날 도착할 장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인간의 마음과 관계와 삶 안에 스며드는 새로운 존재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자주 이 현재의 복음을 미래의 상벌 체계로 축소시켜 왔습니다. 살아 있는 변화의 신앙이 아니라,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계산하는 종교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결과 복음은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아니라, 두려움을 관리하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원래 복음은 움켜쥐는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놓아버리는 길이었습니다. 내 공로를 놓아버리고, 내 의로움을 놓아버리고, 내 우월감을 놓아버리고, 내가 중심이라는 거짓 환상을 놓아버리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벌 중심의 신앙은 사람을 점점 움켜쥐게 만듭니다. 구원을 확보하려 하고,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고, 종교를 자기방어의 무기로 사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종교는 어느 순간 제국의 권력을 지켜 주고, 전쟁을 정당화하고, 돈과 탐욕을 축복하며, 집단적 에고를 강화하는 도구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원래 세상을 자유롭게 해야 할 복음이 오히려 인간을 더 두렵게 만들고 더 경직되게 만들었습니다. 자유의 종교가 불안의 종교로 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경쟁의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비교의 종교도 아니었습니다. 누가 더 구원받았는지를 판정하는 종교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인간이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거짓 자아의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러 오셨습니다. 거짓 자아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남보다 낫다는 확신으로 살아갑니다. 인정받아야 안심하고, 소유해야 안전하며, 지배해야 존재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종교 안에서도 거짓 자아는 활동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바르다.” “나는 정통이다.” “나는 선택받았다.” “나는 안전하다.” 이런 종교적 우월감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믿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붙들고 있는 또 다른 에고일 수 있습니다.
건강한 종교는 언제나 우리 손에 무기를 쥐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거울을 건네줍니다. 타인을 심판하라고 하지 않고, 먼저 자기 내면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누가 지옥에 갈지를 논하기보다 내 안에 얼마나 미움과 탐욕과 두려움이 살아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누가 옳은가를 따지기보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묻게 합니다. 복음은 타인을 굴복시키는 힘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도 본래 이런 의미 안에 있습니다. 심판은 하느님께서 어느 날 외부에서 임의로 내리는 형벌만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어떤 존재가 되어 가는가가 문제입니다. 심판은 압도적인 하느님 사랑을 경험했을 때 스스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렸을 때 베드로는 너무나 많은 고기가 그물에 걸려든 것을 보고 압도적인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사랑은 인간을 넓어지게 하고 자유롭게 하지만, 탐욕과 증오는 인간을 스스로 감옥 속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래서 선은 이미 그 자체 안에 상을 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이미 자유를 경험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숨결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반대로 악은 이미 그 자체 안에 벌을 품고 있습니다. 증오는 인간 영혼을 먼저 파괴하고, 탐욕은 인간을 끊임없는 결핍 속에 가두며, 교만은 관계를 무너뜨리고 존재를 메마르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죽어서 받는 보상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미래의 입장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징표입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는 단순한 윤리 항목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이 흐르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존재의 향기입니다. 성령께서 도구적 존재인 나를 통해 관계 안에 선의 흘러가는 과정에서 얻는 부산물로써 얻는 자유와 기쁨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흐름을 허용하는 삶입니다. 억지로 자신을 꾸며 만드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있는 참자아가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허용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핵심은 붙잡음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투명해지는 것입니다.
참자아는 이미 하느님 안에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경쟁하려 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으로 움켜쥐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내어주고, 흘려보내고, 사랑이 지나갈 통로가 됩니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라라”의 깊은 의미일 것입니다. 자기를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거짓 자아의 집착을 내려놓고 참된 생명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결국 인간을 더 작아지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 자유롭게 만듭니다. 더 가난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 풍요롭게 만듭니다. 더 비우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 충만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미래의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내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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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 씨앗은 하느님께 맡기며 Entrusting the Seed to God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Amen.
찬미예수님! 신원일 형제님, 박윤식 형제님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같은 꿈을 품은 분들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신원일 형제님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시고 함께 시작해보자고 청해 주신 그 따뜻한 용기가 깊이 와닿았습니다. 박윤식 형제님께서 조용히 기도로 뒤를 받쳐 주시겠다 하신 말씀 또한 작지 않은 힘이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1코린 3,6)
이 말씀이 지금 제 마음을 잘 대변해 줍니다. 같은 비전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께서 이 꿈에 관심을 두고 계신다는 징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앗을 심는 이와 물을 주는 이와 거두는 이가 각기 다르듯, 이 일을 어느 때에 어떤 방식으로 현실로 이끄실지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미국에 있고 형제님들은 한국에 계십니다. 거리의 문제뿐 아니라, 이런 공동체를 실제로 일으켜 세우는 일은 열정과 선한 의지만으로는 넘기 어려운 현실적인 무게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무리 아름다운 발상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의 위치에서 직접 그것을 추진하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인가 하는 물음을 겸손히 자신에게 던져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꿈을 조용히 하느님 앞에 내려놓으려 합니다. 억지로 이루려 하기보다, 주님께서 마련하신 때와 사람을 기다리는 것 또한 신앙의 한 자세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렇게 같은 열망을 나눌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사한 은총입니다.
형제님들의 신앙 여정 위에 주님의 평화가 언제나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아멘.
Praised be Jesus Christ! I pray for you, Brother Shin Won-il, and Brother Park Yun-sik.
To encounter others who carry the same dream in their hearts is truly a great grace. Brother Shin, your warmth and courage in reaching out first and inviting us to begin this journey together touched me deeply. And Brother Park, your quiet promise to support this dream from behind with your prayers is no small gift.
Saint Paul wrote to the Corinthians:
"I planted, Apollos watered, but God gave the growth." (1 Cor 3:6)
These words speak directly to my heart in this moment. The very fact that we have found one another, sharing the same vision, may itself be a sign that God is already at work in this dream. And yet, just as the one who plants, the one who waters, and the one who harvests are each different, so too the question of when and how this dream will take root in reality belongs entirely to God's providence, not to our own hands alone.
To speak honestly, I am here in the United States while you are in Korea. But it is not merely a matter of distance. Building a community like this from the ground up carries a weight that good intentions and warm hearts alone cannot easily bear. And above all, however beautiful a vision may be, I find myself humbly asking whether it is truly our calling, in our present circumstances, to be the ones who directly carry it forward.
And so I choose to quietly place this dream before God. Rather than striving to make it happen by our own effort, I believe that waiting for the persons and the moment that the Lord has prepared is itself a profound act of faith. That we were able to share this longing with one another today is already more than enough to be grateful for.
May the peace of the Lord always accompany each of you on your journey of faith.
† "It is God who gives the growth."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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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 세상 한가운데서 피어나는 성덕 Holiness Blooming in the Midst of the World
세상 한가운데서 피어나는 성덕
Holiness Blooming in the Midst of the World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Amen.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옛 속담에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은 넓은 초원에서 뛰어야 제 본성을 발휘하고, 사람은 세상의 중심에서 부딪히고 단련되어야 비로소 그 그릇이 커진다는 뜻입니다. 이 오래된 지혜가 오늘 우리가 나누는 이 꿈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편을 읽다 보면 그 시대의 신앙인들이 얼마나 꾸밈없는 진심 어린 말로, 삶의 한복판에서 하느님을 불렀는지가 느껴집니다. 시편은 서재에서 다듬어진 신학 논문이 아니라, 광야와 전쟁터와 눈물 속에서 터져 나온 영혼의 절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을 삶에서 길어 올리기보다, 교리서와 문헌 속에 가두어 두려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공자왈 맹자왈 하듯 과거의 언어를 현재의 삶에 그대로 이식하려 할 때, 신앙은 생동하는 힘을 잃고 박제된 관념으로 남을 위험이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수도원 담장 안에 봉쇄되어 세상과 단절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학적 지식을 정교하게 쌓아 올린 학자를 길러내는 것이 목표도 아닙니다. 성덕은 세상 한가운데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것입니다.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이는 사도로, 어떤 이는 예언자로, 어떤 이는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는 목자나 교사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에페 4,11-12)
바오로의 이 말씀은 단순히 교회 직무의 분류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다양한 자리에 다양한 사람을 세우신다는 선언입니다. 의사, 법조인, 교육자, 예술가, 상인, 노동자 — 각계각층의 전문인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성덕을 향한 같은 열망을 품고 한데 모인다면, 그 공동체는 단순한 신심 모임을 훨씬 뛰어넘는 풍요로운 힘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삶의 언어를 가진 이들이 한 식탁에 모여 신앙을 나눌 때, 성덕은 비로소 살아있는 현실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세상에 뿌리내린 성인, 그것이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성덕의 모습이 아닐까요?!
†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멘.
A thought came to me quite unexpectedly, and I share it gently.
There is an old Korean proverb that says, "Send horses to Jeju Island, and send people to Seoul." A horse must run across open fields to fulfill its nature, and a person must venture into the heart of the world — to struggle, to be refined, to grow — before their true capacity can emerge.
I find this ancient wisdom strangely resonant with the dream we have been sharing.
When I read the Psalms, I am struck by how the faithful of that era called upon God with unadorned, heartfelt words — right in the thick of their lives. The Psalms were not polished theological dissertations composed in quiet studies. They were the cries of souls erupting from deserts, battlefields, and tears. And yet today, do we not sometimes tend to confine faith within the pages of catechisms and documents rather than drawing it up from the well of lived experience? When we try to transplant the language of the past directly onto the present — reciting old formulas as though they were magic words — faith risks losing its living power and becoming a preserved relic rather than a breathing reality.
This is the heart of what I wish to say. Becoming a saint is not achieved by withdrawing behind monastery walls and cutting oneself off from the world. Nor is the goal to produce scholars of finely layered theological knowledge. Holiness blooms in the midst of the world — in the very place where each of us stands.
Saint Paul writes to the Ephesians:
"He gave some as apostles, others as prophets, others as evangelists, others as pastors and teachers, to equip the holy ones for the work of ministry, in building up the body of Christ." (Eph 4:11-12)
These words are not merely a classification of church roles. They are a declaration that God raises up different people in different places to accomplish His work. Physicians, lawyers, educators, artists, merchants, laborers — when people of every profession and walk of life gather together, each carrying in their own place the same longing for holiness, that community will possess a richness of strength far beyond any ordinary devotional group. When people who speak different languages of life sit at the same table to share their faith, holiness begins at last to speak in the living language of the present world.
A saint rooted in the world — is that not the face of holiness that our age most needs?!
† "For building up the body of Christ."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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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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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교회를 존재로 불러내시는 말씀!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성령과의 친밀한 관계성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가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생명력의 성령
교회를 존재로 불러내시는 말씀
2026년 5월 25일 월요일
신학자 윌리 제닝스(Willie Jennings)는 성령께서 "공통된 언어"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어떻게 빚어내셨는지를 들려줍니다:
오순절의 기적은 듣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깊이 "말하게 하심"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이들의 모국어로 말하게 되는데, 이는 그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께서 바라시는 바에 따른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자신들이 얼마나 깊이 목말라 있었는지도 몰랐던 이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이것이 오순절 기적의 시작이며, "친밀함의 혁명"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순전히 당신의 행위로 공동체를 열어젖히시는 시작이며,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또 얼마나 깊이 열어젖히고 계신지를 아직 다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혀와 목소리, 마음과 정신, 그리고 몸 전체를 만지시고 붙드시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전례 없고, 예상치 못했고, 때로는 원치 않았으나, 결국에는 완전한 "결합"입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던 이들은 능력을 청했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오시기를 청했을지 모르지만, 바로 이런 방식으로 오시기를 청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은총, 길들여지지 않은 은총이다. 이 은총은 우리가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환상을 버리게 하고, 하느님께서 품으시는 "사람에 대한 거룩한 열망"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십니다.
성령을 통해, 서로 간의 친밀한 일치와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가 태어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오시고, 그들 위에 머무르시며,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이 순간은 마리아가 성령의 그늘 아래에서 맞이했던 그 친밀한 순간을 다시 울려 퍼지게 합니다. 성령께서 다시금 그들을 감싸십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행위는 이전과 닮아 있으면서도, 또한 전혀 다른, 놀라운 현실을 빚어냅니다. 성령께서는 "결합"을 창조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 목소리와 기억, 소리와 몸, 땅과 장소라는 가장 깊은 차원에서 다른 이들과 연결되는 방식으로 결합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언어"입니다. 언어는 한 민족의 존재를 잇는 힘줄과도 같습니다.
"나의 민족, 우리의 언어."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곧 그 민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한다는 것은 친숙함과 연결, 그리고 관계성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형식적이거나 선언적인 말이 아니라, 사람들 안쪽 깊은 곳에서 서로에게 건네는 친밀한 언어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를 묻습니다. "저들이 어떻게 내 언어를 알고, 내 민족을 아는가? 언제 그런 지식을 얻었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 놀라운 혀의 은사는 과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한 열망이 빚어 가는 미래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듣는 기적’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제한된 시선은, 새로운 소속됨—우리가 "교회’"라 부르게 될 그 친밀한 공동체—을 탄생시키는 혁명적 친밀함을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혁명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조금만 충실히 기다리고, 조금만 자신을 내어놓기만 해도 언제든 우리 안에서 폭발하듯 일어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성령을, 마치 광활한 초원을 휩쓰는 들불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 불은 오래되고 죽은 풀들을 태워, 새 생명을 키우는 거름으로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강림의 은총으로 우리가 새 힘을 얻을 때, 우리는 그 불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여 그들 또한 새롭게 타오르게 할 수 있습니다. 혹은 그 불꽃을 스스로 꺼뜨릴 수도 있습니다.
CAC가 매일 아침 저로 하여금 새롭게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 고맙습니다. 저는 그 에너지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다른 이들에게도 전염되기를 희망합니다.
—Florian L.
References
Willie James Jennings, Acts: A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Bib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7), 27–29.
Image credit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rman Khadangan,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의 불꽃을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불은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영감을 주며,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를 지탱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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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실한 영성 생활의 결과는 기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그리고 제가 사목하고 있는 피정 센터에서 추구하는 사목 방침이랄까 방향성이 있다면 그것은 기쁨에 찬 충만한 신앙생활입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 가급적 기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기도도 기쁘게, 봉사도 기쁘게, 사목활동도 기쁘게, 그렇게 노력하다 보니, 매일의 삶이 흥미진진하고 은혜롭습니다.
저희 피정 센터 프로그램 중에 깔깔쇼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피정 센터 모든 수도자들이 총동원해서 한 시간 내내 피정 오신 분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시간입니다.
나이 지긋한 수도자들이 자신을 망가트리면서 온몸과 마음을 다 바치니, 그 모습이 그렇게 신선한가 봅니다.
지금 내가 추구하고 있는 영성생활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내 신심생활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가?
내 신앙생활이 주님의 제자로서 바람직한 것인가?’
많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이라는 단어입니다.
지금 심연의 고통 속에서도 기쁨에 찬 기도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영성생활 잘 하고 계십니다.
갖은 시련 속에서도 기뻐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신심생활 잘 하고 계십니다.
끝도없는 역경 속에서도 기쁨으로 충만한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신앙생활 잘 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신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돈보스코와 더불어 ‘기쁨’을 삶의 모토로 삼은 성인이 한분 계시는 데, 바로 성(聖) 필립보 네리 사제(1515~1595)입니다.
돈보스코(1815~1888) 보다 꼭 300년 앞서 태어나셨고 사셨지만, 모토, 영성, 생애의 싱크로율이 거의 99.9 퍼센트입니다.
두 분 다 평생토록 염두에 두셨던 모토는 “기쁨 속에 주님을 섬기십시오!”였습니다.
두 분 다 선택하신 성경 구절은 이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필립비 4장 4절) 두분 다 그렇게 아이들을 좋아하셨고, 아이들을 위해 생애 전체를 바치셨습니다.
필립보 네리 신부님은 36세 되던 해에 사제로 서품되셨는데, 당시로서는 꽤나 늦은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사목자로서의 탁월한 그의 덕행은 사제가 되기 위한 꿈을 꾸기 훨씬 전부터 잘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성품, 호탕하고 쾌활한 성격, 탁월한 매력과 호감의 소유자였던 젊은 시절 필립보 네리는 발길 닿는 곳마다 폭풍 인기를 누렸습니다.
틈만 나면 아이들은 그를 뺑 둘러쌌습니다.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그와 함께 있기를 즐겼습니다.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그의 이야기에 쫑긋 귀를 기울였습니다.
깊이있는 그의 영적 말씀에 큰 감동을 받고 주님께로 돌아섰습니다.
1551년 사제가 된 이후에도 필립보 네리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웃들을 향한 강렬한 사랑, 한결같은 겸손, 탁월한 유머감각, 검소한 생활이 똑같았습니다.
사제가 된 그에게 착한 목자로서의 여러가지 덕행들이 추가되니,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떴다 하면 즉시 수많은 사람들로 삥 둘러쌓였으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영과 존경을 받았으며, 잠깐이라도 더 함께 있기를 원했던 필립보 네리 신부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오늘 우리들의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사목자로서 대상자들로부터 진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딘가 나타나면 양들의 얼굴이 환해지고, 기뻐합니까?
양들은 우리가 너무 좋아 조금이라도 더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 합니까?
유머감각은 덕중에서 아주 큰 덕입니다.
기쁨 역시 성덕의 여정에 아주 중요한 덕입니다.
기쁨은 여러 그리스도교 덕행 가운데 아주 향기로운 덕행입니다.
기쁨은 가장 두드러진 성성(聖性)의 한 표현입니다.
울적한 성인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충실한 영성 생활의 결과는 기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상의 기쁨을 주님 안에서의 기쁨, 영적인 기쁨으로 승화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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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28-31)>
1) 이 말씀의 바로 앞에 ‘낙타와 바늘귀’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4-25).”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도들은,
‘바늘귀를 통과한 낙타’입니다.>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는,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실 정도로(마르 10,21)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마르 10,20).
그렇지만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2).”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의 부족한 점은 무엇이었을까?
그 사람과 예수님의 대화를 아주 단순하게,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나를 따라라(마르 10,21).”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나를 따라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예수님만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모든 것에서부터 떠나야 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버림’과 ‘떠남’을 먼저 실천해야
‘따름’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2) 그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는 십계명 잘 지키고, 착하고,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율법에 정해져 있는 대로 불우이웃 돕기도 잘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부족한 점을,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이기심’이나 ‘집착’으로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재물을 모두 버리지는 못할 만큼 재물에 대한 애착심은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애착심과 집착은 많이 다릅니다.
집착은 재물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영원한 생명은 완전히 외면하는 것이고, 애착심은 영원한 생명을 원하면서, 재물을 일부는 포기해도 전부 다 포기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부자는 영원한 생명도 원하고, ‘현세의 삶’에 대해서도 만족하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을 내세에서도 그대로 누리기를 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편안하게 살기를 원했던 것인데, 예수님께서 “빈손으로 와서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시자 크게 놀라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힘들었을까?
가진 것을 전부 다 버리는 것이 힘들었을까?
그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따르면 안 될까요?”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재산을 그대로 집에 놓아두고 예수님을 따르면 안 될까요?”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생각으로만, 또는 마음으로만 따르는 것으로는
안 된다.
‘온 삶’으로, 인생 전부를 걸고 따라야 한다.”
다시 정리하면, 그의 부족한 점은 희망에 대한 간절함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절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그의 부족한 점입니다.
3) 신앙생활의 궁극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인데,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것을 얻는 생활”입니다.
이 말에서, ‘모든 것’이라는 말에는 ‘목숨’도 포함됩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이 말에 대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때에는 공동체가 나서야 합니다.
당사자 입장에서 말하면, 공동체에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의 고통’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외면해도 안 되고, 무시해도 안 됩니다.
가난을 제대로 겪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 무시하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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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6:00 추가.
마르 10,28-31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오늘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 이야기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그 청년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었기에,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냥 그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지요. 그가 기대한 ‘영원한 생명’이란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는 지금의 상태가 영원토록 이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삶을 영위하게 만들어주는 기반인 재물을 포기하라고 하시니 그 말씀만은 따를 수 없었던 겁니다. 이처럼 재물에 대한 과도한 탐욕과 집착은 부유한 이들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에,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하십니다.
그 말씀에 마음이 불안해진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이유와 의도를 제대로 헤아려야 합니다. 베드로는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 그 부자 청년과는 달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자기 모습이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또한 그처럼 주님 말씀을 철저하게 따랐으니, 주님께서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주시리라고 기대했겠지요. 그러나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버린 사람은 자신이 그것을 버렸다는 사실을 자랑할 게 아니라, 그런 부질 없는 것에 연연하고 집착했던 그래서 주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던 자기 과거를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린 건 주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더 좋은 것을 채우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버리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어떻게 해야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조건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크게 ‘버림’과 ‘따름’이라는 두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요. 첫째로 주님 때문에,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음식을 안먹는다고 다 같은 단식이 아니라 욕망을 다스리고 주님 뜻을 철저히 따르는 것이 중요하듯, 주님을 위해, 그분께서 알려주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내 삶 속에서 구체화하기 위해 세속적인 것들을 버릴 때 그 행동이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과정이 된다는 겁니다. 둘째로 나에게 불필요하거나 쓸모 없는 것을 버리는 게 아니라 ‘집’, ‘가족’, ‘토지’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며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기꺼이 하느님께 내어드려야 그 봉헌이 참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하십니다. 셋째로 나의 버림과 봉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래서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지, 더 큰 보상을 받기 위한 ‘거래’나 ‘투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결과나 행동보다 마음과 뜻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주의하면서 ‘올바른 버림과 따름’을 실천하면, 당신께 대한 믿음과 순명을 보시고 꼴찌를 첫째로 만드시는 하느님 섭리 안에서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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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 16:00 추가.
숨영성 묵상글
소유 없는 삶과 영원한 생명~~~
오늘 우리가 듣는 마르코 복음의 내용을 마태오 복음도 전하는데, 마태오 복음의 베드로의 질문은 마르코 복음보다 더 노골적입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 19,27) 마르코 복음에는 이 두 번째 문장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사로운 이익을 경계해야 할까요? "부(富)의 복음"을 말하는 이들은 베드로의 질문을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여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노력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시리라 기대하는 것이 "이기적인 태도"일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끊임없이 말하는 "영원한 상급"(영원한 생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12세기에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명확한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보상 없이 사랑받지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보상을 생각하며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사랑(카리타스)은 공허할 수 없지만,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기'(1코린 13,5) 때문입니다. 사랑은 계약이 아니라 애정입니다. 주고받는 조건이 아니라 순수한 선물입니다. 참된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합니다. 만일 어떤 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사랑을 통해 얻을 다른 무엇을 더 사랑한다면, 사실 사랑하는 것은 그 '목적물'이지, 그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닙니다."
이 권고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신앙 안에서 '상거래적 정신구조'를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처럼 상업적 사고가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있는 사회에서는 이는 매우 역문화적인 요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교를 사업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사업'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사업'이기 때문입니다.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버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도록 부름받았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수도자들은 특별하게 이 말씀을 더욱 직접적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초대로 알아듣습니다. 이른바 복음적 권고, 즉 가난, 정결, 순명의 서원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라는 초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순명이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고, 가난과 정결은 그 순명의 한 형태로 이해되곤 했습니다. 규칙이 그러하니 가난하게 지내고, 규칙이 그러하니 독신으로 사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왜 이 세 가지를 모두 "가난"의 다양한 형태로 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정결도, 순명도 결국 자아를 비우는 가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 서원은 모두 에고를 해체하는 영적 빈곤을 지향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이라는 말 대신 "소유 없이"(sine proprio)라는 말을 씁니다. 게다가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소유 없이" 사는 덕을 순종과 정결의 덕 가운데에 위치시킵니다. 물론 우리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성 프란치스코는 이 두 가지 덕이 다 "소유 없는 삶"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유 없는 삶'이란 단순히 물질적 가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에고의 해체'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가난'이라는 말 대신 '소유 없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저는 오늘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의 권고에서 "참된 사랑은 공허할 수 없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베드로가 에수님으로부터 들은 답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참된 사랑이 지닌 근본적인 목적지를 가리켜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 즉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처럼 자신을 비워내는 케노시스(kenosis: 자기 비움)를 기꺼이 수용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처럼 되고자 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계속해서 부어주시는 당신과 일치할 수 있는 은총을 의식하고 인식할 수 있고, 그래서 그 은총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는 성지 순례에 참여하면서 다시 한번 저의 인내심 없음에 대해 반성해 보게 됩니다. 불편함이나 불만족스러움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던 저의 결심이 이곳에 와서 특히 비염 때문에 괴로운 상황에서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전의 성지 순례는 온전히 걸어서 예수님의 성지를 방문하던 전통에서 유래되었는데도 그것을 그저 어떤 특별한 곳을 다녀왔다는 만족감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께서 지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있기에 새롭게 시작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성 프란치스코의 삶의 터전이었던 아시시를 중심으로 하는 프란치스코 성지를 순례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성 프란치스코 선종(파스카) 800주년을 맞이하여 시작한 성지 순례의 참된 열매를 맺게 해 주십사고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전구를 청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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