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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P 생년월일: 1955년 6월 21일 출생지: 죄위프, 프랑스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음 미셸 플라티니는 축구 선수 최고의 명예인 FIFA 월드컵™에서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다. 실제로 월드컵 트로피는 쟁쟁한 트로피들이 모여 있는 플라티니의 트로피 진열장에서 빠져 있는 단 하나의 트로피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축구계의 전설이 된 그의 이름에는 전혀 흠집을 남기지 않는다. 뛰어난 축구 기술과 게임을 읽어 내는 능력, 그리고 골문을 파고드는 맹렬한 공격으로 그는 시대를 초월하는 축구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푸른 유니폼’ 프랑스 대표팀 주장이었던 플라티니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선수 이상이었다. 그는 지적인 축구와 품위의 화신이었으며 바로 이런 모습으로 그의 이름이 팬들의 마음에 영원히 새겨졌다. 프랑스를 최고로 이끌다미셸 플라티니는 AS 낭시-로렌, AS 생테티엔느, 유벤투스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스스로 “나는 로렌 지역의 가장 큰 클럽에서 뛰기 시작하여 프랑스에서 가장 큰 클럽에서, 그리고 마침내 세계에서 가장 큰 클럽에서 뛰었다”고 즐겨 말하곤 했다. 1978년 그의 나이 23세가 채 못 되었을 때 그는 유명한 그의 등 번호 10번을 달고 처음으로 FIFA 월드컵 본선에 출전했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는 경험을 쌓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966년 이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 보지 못한 프랑스 팀이 16강의 문턱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조 편성도 좋지 못했다.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두 나라,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가 같은 조에 편성되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프랑스는 첫 번째 관문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플라티니는 이 대회 우승국인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한 골을 넣어 그의 첫 번째 FIFA 월드컵 골을 기록했다.. 1981년 플라티니는 4년 전 불가리아와의 경기와 4년 뒤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요 국제 대회 본선 진출을 결정짓는 중요한 골을 기록한다. 파리 파르크 데 프렝스 경기장에서 열린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얻은 값진 프리킥 득점으로 프랑스 팀은 1982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던 것이다. 플라토쉬라는 애칭을 얻다© Popperfoto 플라티니는 1984년 프랑스에서 열린 UEFA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프랑스 팀에 주요 국제 대회 우승의 영광을 안겨 주면서 최대의 역량을 발휘했다. 프랑스인들은 이제 그를 “플라토쉬(Platoche)”라는 애칭으로 부르게 되었고 벨기에와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보여 준 두 번의 ‘완벽한’ 해트 트릭(양 쪽 발과 머리로 각각 한 골씩 넣는 것)을 포함해 총 다섯 경기에서 아홉 골을 넣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1984년 대회에서 보여 준 플라티니의 이러한 활약은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이탈리아 내에서 플라티니가 이끄는 유벤투스가 국내 축구를 평정하는 것을 익히 봐 왔기 때문이었다. 플라티니는 유벤투스의 그 유명한 검은 색과 흰 색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각종 대회의 상과 영예를 휩쓸었다. 두 번의 이탈리아선수권대회 우승을 비롯해 코파이탈리아, UEFA컵위너스컵, 유러피언수퍼컵, UEFA 챔피언스리그, 인터컨티넨탈컵에서 우승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최고 득점왕이 되었으며 세 시즌 연속으로 골든볼(Ballon d’or)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말 놀라운 기록이다! 절정기와 그 사이에서© Popperfoto 그러나 플라티니가 이러한 명승부를 펼치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우선 여러 가지 부상이 겹쳐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수 개월간 치료해 오던 발목이 심하게 부어 올랐다. 또한 헤이젤에서 흥분한 관중들에 의해 벌어졌던 참사는 삶과 축구에서 즐거움을 가장 크게 생각하던 플라티니에게 깊은 심리적 상처를 남겼다. 플라티니의 페널티 킥으로 유벤투스가 리버풀을 꺾고 유러피언컵을 쟁취하기는 했지만 그는 훗날 "그날 밤 일은 축구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탈의실에서 우승컵을 받아야만 했다"고 말했다. 여전히 강한 영향력© AFP 프랑스가 1998년 FIFA 월드컵 개최국으로 결정되었을 때 플라티니는 다시 한 번 나라의 부름에 응했다. 프랑스의 월드컵 개최를 기획한 페르낭 사스트르와 함께 프랑스월드컵조직위원회의 공동 위원장으로 일해 달라는 어려운 요청을 수락한 것이다. FIFA 회장 선거 기간 동안 조제프 S. 블라터 지지 운동을 벌이기 전까지 플라티니는 늘 그래왔듯이 그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그리고 그 후 지금까지 프랑스축구연맹(FFF)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일하고 있다. 이제 그의 경력은 축구계 최고의 위치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가 즐겨 하는 말처럼 그는 지금 "나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주었던 축구 경기에 무언가를 되돌려 주기 위해서" 일하고 있다.. 선수경력
국제경기 경력
클럽 경력
클럽경기 경력
지도자 경력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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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에 유럽축구연맹 회장직을 맡았죠...
플라티니 스페셜을 다운 받아 봤었는데 다른건 몰라도 키핑력은 진짜 역대 최고라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자국에서는 지단을 더 높게 쳐준다던데..;
20세기 최고의 프랑스 축구선수 1위가 플라티니 입니다...피파가 선정한 투표 뿐만이 아니라 프랑스 풋볼지 선정 1위도 플라티니고요...2위가 지단....3위가 레이몽 코파입니다...아직 플라티니의 영향력은 프랑스에서 따라갈 선수가 없습니다...지단이 커리어는 능가 했지만 아직 그 영향력은 능가 못했죠..
하지만 제작년에 유럽축구 50년사 최고스타를 선정한 자리에서는 지단이 베켄바워 플라티니 크루이프등을 따돌리고 1위를 차지했었습니다.플라티니도 자신의 입으로 지단은 이미 나를 능가했다 커리어 실력 등 모두...라고...;;;;
그건 저도 압니다...전세계 인터넷 투표를 통해 뽑혔었죠...플라티니 역시 지단이 자신보다 위대하다며 치켜세워 주는것도 당연히 알고요...하지만 아직 자국에서 지단이 플라티니 보다 영향력이 높다고는 말못합니다...지단조차 플라티니에게 비교되는건 나에겐 크나큰 영광이라 할정도로 플라티니는 커리어를 뛰어넘어 프랑스 축구계의 신적인 존재죠...
또하나 재밌는것은 플라티니가 지단보다 토티를 조금더 높게 평가하는것같더군요..ㅎㅎ 플라티니가 이탈리아계라고 어디서 들었는데 그영향도?(퍼퍽..)
그리고 유럽축구 50년사 최고스타에 보면 베르캄프가 78위...클린스만이 64위....의외의 경우가 많죠...클린스만이 던컨 에드워즈라는 21살에 요절한 선수보다 순위가 낮게 나오는...클린스만이 그렇게 인기가 없나???ㅎㅎ
켁...클린스만이 64위...좀 그러킨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