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50장 17절
O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몰아내는도다. 처음에는 앗시리아 왕이 그를 삼켰고 마지막에는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왕이 그의 뼈를 꺾었도다. 17)
Israel is a scattered sheep; the lions have driven him away: first the king of Assyria hath devoured him; and last this Nebuchadrezzar king of Babylon hath broken his bones. 17)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하고, 이후에 남유다가 바빌론에 의하여 멸망당하였습니다. 남유다에는 예루살렘이 있었으므로 남유다가 멸망함은 이스라엘의 근본 즉 뼈가 꺾이는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져 각자 우상숭배하며 갈등하던 이스라엘이 흩어진 양떼처럼 침략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흩어지고 약해져서 침략을 받아 멸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배신한 죄와 자신의 민족을 서로 배척하고 미워하는 죄 때문에 삼켜지고 뼈가 꺾여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에게 적용하면 한국교회가 흩어지고 반목하는 것이며 한국교회가 무너지는 이유는 흩어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통합과 같은 우상숭배와 교회안에서 서로 배척하고 미워하는 죄 때문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보면 고립된 신앙생활의 문제는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배척함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는 불교의 중들처럼 수십년동안 면벽수행을 하여 자신만의 득도를 얻는 것에 가치를 둘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예수를 사랑해야하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내가 미워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미워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공동체는 바람직하며, 다니지 않는 것보다 다니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공동체중에 하나일뿐, 공동체의 전부가 아닙니다.
O 둘이 하나보다 더 나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수고에 대한 좋은 상을 가짐이라.
이는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의 동료를 일으켜 세울 것임이라. 그러나 혼자 있는 자가 넘어지면 그에게 화로다. 이는 그를 도와 일으켜 줄 다른 사람이 없음이라.
또한 둘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서는 어찌 따뜻할 수 있으리요?
만일 누군가가 그를 압도하면, 두 사람이 그 자를 저항하리니 삼겹줄은 쉬 끊어지지 아니하는도다.
전도서 4장 9절 ~ 12절
위 말씀에 나타난 둘이 공동체의 전부입니다. 하나는 공동체가 아니지만 둘은 공동체가 됩니다.
둘이 아닌 혼자만의 신앙은 쓰러지면 도와줄 사람이 없게 됩니다.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일어서지 못하거나 다시 일어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 신앙이 없는 고립된 하나의 개인의 신앙은 위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신앙은 수십, 수백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하여 둘이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라고 표현된 공동체를 형식의 교회로 정의내리는 것은 착각이며, 이러한 착각으로 교회에 안나가는 성도들을 가나안 성도들이라고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박해하는 것이 됩니다. 바울이 사울일때 성도들을 박해하였던 것처럼 지금의 한국교회가 가나안 성도로 이웃을 낙인찍는 것은 한국교회가 성도들을 박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울일때 성도들을 율법으로 박해하였습니다. 지금도 똑같이 주일 성수와 십일조라는 율법으로 박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공동체의 전부가 아니라는 근거가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둘이라는 공동체가 없는 사람들이 있고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둘이라는 공동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국교회안에 많은 성도들이 공동체가 없는 고립된 혼자만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가나안 성도들이라 박해하는 교회밖의 성도들이 둘이라는 공동체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 증거로 우리가 하는 성경진도모임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모임에 나오시는 분들중에는 교회에 출석하는 분도 있고, 출석하지 않는 분도 있지만 모든 분들이 공통적을 똑같이 이야기하는 부분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어서 모임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상관없이 둘이라는 공동체가 있는 것이며, 만약에 당신에게 말이 통하고 힘이 되어주는 둘이라는 공동체가 없다면 지금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둘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저의 주장이 아니라 위 전도서의 말씀이 당신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듬과 시행착오속에서도 성경진도모임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진도 모임은 제가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이 둘이라는 공동체를 갖기 위함이며, 저와 마찬가지인 분들이 이 모임으로 둘이라는 공동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8장 20절
성경말씀에는 우리 영의 생존에 필수적인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반복하여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 사람이 모이면 셋이 모인 것이 됩니다.
이단들도 사람들을 낚으러 돌아다닐때 혼자 다니지 않고 둘 셋이 모여서 움직입니다. 그들이 불시에 혼자있는 사람을 압도하여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것입니다. 이단들은 논리가 부족하여 두 세사람이 한 사람을 에워싸고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씁니다. 방향은 전혀 다르지만 우리를 박해하는 자가 나타났을때에도 나홀로 상대하는 것보다 삼겹줄처럼 모여 강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