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
황지우
山
절망의 산,
대가리를 밀어버
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 산, 사랑의 산, 침묵의
산, 함성의산, 증인의 산, 죽음의 산
부활의 산, 영생의 산, 생의 산, 희생의
산, 숨가쁜 산, 치닐어오르는 산, 갈망하는
산, 꿈꾸는 산, 꿈의 산, 그러나 현실의 산, 피의산
피투성이산, 종교적인산, 아아너무나너무나 폭발적인
산, 힘든산, 힘센산, 일어나는산, 눈뜬산, 눈뜨는산, 새벽
의산, 희망의산, 모두모두절정을이루는평등의산, 평등한산, 대
지의산, 우리들감싸주는산, 격하게, 넉넉하게, 우리를 감싸주는어머니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1985)
[작품해설]
황지우는 형태 파괴적 실험시, 정치 풍자시, 선적(禪的) 서정시 등 다양한 실험적 텍스트를 선보인 1980년대 대표시인이다. 그는 기존의 정통적 시 관념을 과감히 파괴하는 것은 물론 언어화 작업에서 대담한 실험과 전위적인 수법을 시도, 날카로운 풍자와 강렬한 부정의 정신 속에 민중의 슬픔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이 시 역시 전통 서정시의 오랜 경직성에 대해 혁명적인 도전을 감행한 형태 파괴적 실험시의 하나로, 역사적 공간과 희망적 미래의 무등산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의 형태상 특징은 기하학적 대칭 구조를 통해 무등산의 모습을 형상화한 데 있다. 특히 행이 바뀔수록 수를 많이 배열한다거나 띄어쓰기를 의도적으로 뭇하는 등의 기법을 이용함으로써 독특한 시각젖 효과를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삼각형의 시 형태는 형태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제목 ‘무등’과 첫 행의 ‘山’은, 시인이 단순히 산의 아름다움이나 그것의 철학적 의미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 속에서 쟁점이 되었던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무등산’을 이야기하려 한다는 것을 감지하게 해 준다. 결국 이 시는 ‘분노의산 · 함성의산 · 증인의산 · 부활의산 · 영생하는산 · 희생의산 · 치밀어오르는산 · 현실의산 · 피의산 · 피투성이산’ 등과 같은 민족의 현실과 관련된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무등산’을 특이한 시행 배열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시는 말없이 삼남(三南)을 내려다보며 민족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했던 ‘무등산’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를 위해 시인은 시행이 점층적으로 확장되는 형식과 맞추어 시상도 점층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즉 무등산의 이미지는 역사적 질곡으로 인한 절망적인 내용의 앞부분[절망의 산 · 민둥산 · 벌거숭이산 · 분노의산]에서부터 민중의 역사적 힘과 희망이 가득 찬 미래에의 전망을 보여 주는 중간 부분[‘폭발적인산 · 힘센산 · 일어나는산 · 눈뜨는산 · 새벽의산 · 희망의산]으로 발전하였다가 마침내 뒷부분에서는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감싸 안는 넉넉한 이미지로 나아가고 있다[평등의산 · 대지의산 · 넉넉하게 · 우리를감싸주는어머니] 이렇게 이 시는어머니의 너그러운 이미지로 시상을 마무리함으로써 시의 안정감을 획득하는 한편, 등급이 없는 완전 평등의 세상을 의미하는 ‘무등(無等)’이라는 불교 용어처럼 완전한 평등의 민중 세상을 소망하는 시인의 의식 세계의 일단을 보여 주고 있다.
[작가소개]
황지우(黃芝雨)
1952년 전라남도 해남 출생
서울대학교 미학과 및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연혁(沿革)」 입선
1980년 『문학과지성』에 시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발표하며 등단
1983년 제3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1991년 제36회 현대문학상 수상
1994년 제8회 소월문학상 수상
1999년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시집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겨울-나무에서 봄-나무에로』(1985), 『나는 너다』(1987), 『게 눈 속의 연꽃』(1990),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1995),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