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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7. 연중 제 8주간 수요일. 묵상글(강론글) 많은 이들의 몸값 (마르10,32-45)
1차(04:40), 2차(05:10), 3차(09:15)
27일 묵상글, 04시 4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30분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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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7일 수요일
[연중 제 8주간 수요일] 많은 이들의 몸값 (마르10,32-45)
제1독서<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해방되었습니다.>(1베드1,18-25)
사랑하는 여러분,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20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21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22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영혼이 깨끗해져 진실한 형제애를 실천하게 되었으니,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23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24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25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시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복음<예루살렘에서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마르10,32-45)
제자들과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서서 가고 계셨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또 뒤따르는 이들은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고 가시며, 당신께 닥칠 일들을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33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34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나서 죽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35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37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39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40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41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42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4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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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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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7. 연중 제 8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르 10,32–4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 길은 영광의 행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앞장서 가시고
제자들은 놀라며 두려워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수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신 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 엄숙한 길 위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영광의 자리, 높은 자리를 청합니다.
십자가의 길 한가운데서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높은 자리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하느님의 신비를 말할 때
늘 인간의 교만이 얼마나 쉽게
거룩한 것을 자기 영광의 재료로 바꾸는지 경계했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제자들의 요청은 낯선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따르면서도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섞어 넣기 쉽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곁에 있고 싶어 하면서도
주님의 마음보다
주님의 자리를 먼저 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욕망을 꾸짖기보다
그 욕망을 정화하시며
참된 위대함이 무엇인지 다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무엇을 청하는지 모른다”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마시는 잔,
당신이 받는 세례를 말하십니다.
곧 영광은 고난 없는 빛이 아니고
섬김은 희생 없는 친절이 아니며
주님 곁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길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그리스도인의 길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로 보았지만
그 참여는 단순한 감상적 친밀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낮아짐과 순종에 동참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주님과 하나 되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사랑의 방식도 함께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중심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자리에서
참된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의 관점에서 보면
이 길은 단순한 윤리적 모범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신 것은
인간을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올리기 위함입니다.
당신이 섬기심으로
우리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고,
당신이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깊이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섬김은 단지 착한 행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방식입니다.
영성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따라
사랑 안에서 자기를 내어 주는 길입니다.
영성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왜 주님을 따르는지 묻게 합니다.
나는 주님의 길을 따르려는가,
아니면 주님을 통해 내 자리를 높이려는가?
나는 사랑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인정과 우위를 더 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영성은 이런 혼합된 마음을 정직하게 비추는 빛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빛 안에서 우리를 부끄럽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섬김의 길로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의 관점에서도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공동체가 깨어지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누가 더 큰가, 누가 더 중심인가, 누가 더 옳은가를 다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치의 길이
권리 경쟁이 아니라
서로를 위한 섬김에 있음을 가르치십니다.
누가 더 많이 사랑으로 낮아질 수 있는가,
누가 더 먼저 타인을 살리는 자리가 될 수 있는가,
거기서 일치는 자랍니다.
하느님 나라의 질서는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며 서로를 받쳐 주는 친교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청하고 있는가?
주님의 잔보다 영광의 자리만 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섬김을 말하면서도
실은 인정받고 높아지기를 더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공동체 안에서
일치를 세우는 사람인가,
아니면 비교와 경쟁을 키우는 사람인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크고자 하는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
제 마음 안의 숨은 교만과
높아지고 싶어 하는 욕망을 비추어 주소서.
당신의 잔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섬김 안에서 참된 영광을 배우게 하소서.
자기주장보다 사랑을,
높은 자리보다 낮은 자리를,
경쟁보다 친교를 선택하게 하시며
당신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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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7. 연중 제 8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메주고리예 순례는 3가지 여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981년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발현산’입니다. 거친 바위산이지만 사람들은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정상까지 올라갑니다. 산 위에는 메주고리예에서 치유의 은사를 받았던 한국인이 봉헌한 성모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침묵 중에 세계평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봉헌자의 지향에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모님은 ‘묵주기도, 성경 읽기, 고백성사, 단식, 미사참례’를 권고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1933년에 세워진 ‘십자가 산’입니다. 예수님 수난 1900년을 기념하며 마을의 주님들이 가장 높은 산 위에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십자가 산은 발현산보다 높고 험하지만,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매년 8월에 있는 젊은이의 축제에서는 많은 젊은이가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산 정상까지 올라갑니다. 새벽 2시에 올라가서 새벽 5시에 미사를 봉헌합니다. 작년에도 76개국에서 젊은이가 모였고, 107명의 사제가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발현산과 십자가 산의 중앙에 있는 ‘성 야고보 성당’입니다. 매일 오후 5시에 성당에서 묵주기도가 있습니다. 묵주기도 후에는 미사와 성시간이 있습니다. 순례객이 많아서 성당 밖에도 제대와 의자를 놓았습니다. 성모님께서도 그 어떤 표징이나 기적보다 미사가 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발현산의 묵주기도도, 십자가 산의 십자가의 길 기도도 야고보 성당에서 봉헌되는 미사가 없다면 울리는 종과 같을지 모릅니다. 저는 다섯 번 메주고리예를 다녀왔습니다. 보통은 3일 정도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제가 만난 분 중에는 1달 넘게 메주고리예에 머무는 분도 있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거친 바위산으로 오르며 묵주기도를 하고, 가파른 산을 오르며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고, 1달 넘게 머물면서 기도할까요? 저는 또 다섯 번이나 메주고리예 순례를 할까요? 그것은 메주고리예에서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평화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메주고리예에서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기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수난과 고통을 받고 죽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듯이, 사람의 아들도 죽어야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야고보와 요한은 십자가 보다는 영광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야고보는 오른쪽 자리에 요한은 왼쪽 자리에 앉고 싶다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야고보와 요한과 생각이 같았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잡혀가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랬기에 다른 제자들은 두려워서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랬기에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빨아 넘겼습니다. 미국의 많은 교구는 본당을 통합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사제가 부족하고, 교우가 줄었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 야고보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교회가 십자가와 수난을 받아들이지 않고 영광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교우가 늘었습니다. 3년 전에는 한국에서 사제를 한 명 더 파견해 주었습니다. 제가 2년 전에 왔을 때는 700명이 조금 넘었는데 지난 부활에는 천 명이 넘었습니다. 꾸준히 800명은 넘게 오고, 900명이 넘을 때도 있습니다. 전임 신부님들이 씨를 뿌리고, 영적인 거름을 듬뿍 주셨기 때문입니다. 새 신자 분과를 중심으로 공동체가 새로 오는 교우들을 잘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타주에서도, 한국에서도 달라스 지역으로 이주 오는 분들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주님께 드립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영혼이 깨끗해져 진실한 형제애를 실천하게 되었으니,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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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7. 연중 제 8주간 수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은 그들을 불쾌하게 여깁니다. 사실 그들도 똑같이 높은 자리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과 다른 지도력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
‘부활의 로랑 형제’라 불리는 니콜라 에르망은 전쟁에서 다친 뒤, 스물여섯의 나이로 프랑스 파리의 한 수도원에 들어가 부엌일을 맡았습니다.
다리의 상처가 악화되어 더 이상 요리를 할 수 없게 되자 신발을 수선하고 포도주를 배달하는 등 궂은 일을 주로 맡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늘 감사하였습니다.
그는 고되고 힘든 일도 즐거운 일로 여겼습니다. 접시 하나 닦는 것도 수많은 군중에게 설교하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을 변함없이 살자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행복의 비결이 섬김이라는 것을 그의 삶이 증언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10,45)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십자가에서 당신을 온전히 바치심으로써 몸소 섬김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참으로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을 따라 다른 이를 섬겨 봅시다. 섬김으로 우리도 참된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사람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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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7. 연중 제 8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서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뒤따르는 제자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보상을 꿈꾸며 따라가지만, 박해와 음모를 예감하기에 사뭇 참담한 분위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베드로는 우리는 가족도 집도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라고 말하였지만, 진정 버린 것이 아니었던 가 봅니다. 또한 베드로로만 그런 것도 아니었던 가 봅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 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37) 라고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가 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두 제자들을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마에스트로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자신의 왕국이나 세계 전체를 떠났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그대로 움켜쥐고 있다면, 실상 그는 아무 것도 떠난 것이 아니다.
진정, 자기 자신을 놓아야,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놓은 사람이다.”
이는 자신과 세상과 가족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것들을 ‘놓은 그 자신마저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속으로부터 떠나왔다 하더라도 막상 ‘떠나 온 자신으로부터’ 떠나지 못한다면, 여전히 ‘떠나 온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44)
제자들은 비록 집과 가족을 떠나오기는 했지만, 아직 진정 ‘따르는 자’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따르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따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단순히 떠나왔다고 해서 ‘따르는 자’인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 자기 자신을 모두 ‘헌신하는 자’라야 비로소 ‘따르는 자’가 됩니다. “섬김”은 떠나 온 자의 행위라기보다, 따르는 자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미 ‘떠나 온 자신을 떠날 때’라야, ‘진정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야말로, 이미 비우고 오신 당신마저도 비우셨고, 이미 아버지를 떠나오신 자신마저도 떠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이미 버리고 온 제 자신을 버리게 하소서.
섬김으로 헌신하여,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
주님!
당신께서는 스승이시면서도 먼저 섬기셨고,
주님이시면서도 먼저 낮추셨습니다.
당신의 종이 되라 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의 종이 되라고 하시고,
당신을 섬기라 하지 않으시고 작은이를 섬기라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여주신 대로, 존경받기보다 먼저 존경하게 하소서.
섬김 받기보다, 먼저 섬기게 하소서.
모든 이를 귀하고 소중하게 여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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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7. 연중 제 8주간 수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신앙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과거를 완벽하게 이해한 뒤에야 오시는 분도 아니고, 죽음 이후의 어느 먼 문턱에서야 비로소 만나는 분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금, 여기, 내 손에 닿는 빵과 물, 내 곁에 앉은 사람의 숨결, 오늘 나에게 맡겨진 작고 평범한 사건들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성사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이 눈에 보이는 표징 안으로 내려오는 것, 하늘이 땅을 피하지 않고 영원이 시간을 경멸하지 않으며 하느님이 인간의 일상 안으로 겸손히 몸을 낮추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사는 과거의 거룩한 사건을 추억하는 장식이 아닙니다. 미래의 천국을 약속하는 먼 보증서도 아닙니다. 성사는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느님을 맛볼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 평범한 지금이 비어 있지 않고, 이 작고 초라한 오늘이 하느님 없이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는 가장 깊은 위로입니다. 우리는 자주 신앙을 과거로 돌려보냅니다. 아름다웠던 전통, 익숙한 형식, 이미 굳어진 질서와 안전한 언어 안에 하느님을 가두려 합니다. 또 때로는 신앙을 미래로 밀어냅니다. 언젠가 죽은 뒤에야 받을 보상,
언젠가 도착할 천국, 언젠가 완성될 구원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영원은 지금을 통과하지 않고 오지 않는다. 천국은 오늘의 사랑을 외면한 사람에게 먼 훗날 갑자기 열리는 낯선 장소가 아니다. 천국은 지금 내가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내는가 안에서 이미 연습되고, 시작되고,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순간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해 줍니다. 지금 내 앞의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지금 내게 맡겨진 작은 책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지금 내 마음의 두려움과 집착을 어떻게 놓아 보내는지, 그 안에서 우리의 신앙은 말보다 먼저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처음부터 변화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굳어진 마음에서 벗어나라는 부르심, 자기중심성의 감옥을 떠나라는 초대,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서 가난하고 참된 나로 서라는 해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때때로 그 복음의 불꽃을 제도와 습관 안에 가두어 버립니다. 놓아버림에서 시작된 길이 집착이 되고, 변화에서 시작된 신앙이 저항이 되며, 비움에서 태어난 복음이 기득권을 지키는 견고한 성벽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 신앙은 더 이상 생명이 아니라 체제가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 아니라
나를 증명하는 방식이 됩니다. 성사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맛보는 신비가 아니라 익숙한 절차와 소속의 표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순수한 하느님 체험은 우리 안의 지배적 의식을 무너뜨립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끝없이 말합니다. 더 완벽해져라. 더 유능해져라. 더 부유해져라. 더 인정받아라. 더 옳아 보여라.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그 모든 조건이 힘을 잃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완벽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가난하고 평범한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진실하게 바라보게 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게 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아무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고립이 아닙니다. 또 어떤 집단을 무조건 지지하거나 무조건 반대하는 반응도 아닙니다. 좌파와 우파, 유행과 반유행, 순응과 저항이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도 타인의 시선과 집단의 논리에 묶여 있다면 그 모두는 아직 깊은 자유가 아닙니다. 복음이 말하는 자유는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됩니다. 도구적 존재로 나를 내어드린 자리, 내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자리,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내면의 성소, 하느님의 숨결이 조용히 나를 움직이는 그곳에서 사랑과 진리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자유인은 세상의 소란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박수에 취하지도 않고 비난에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남들이 정해 준 이름으로 자신을 살지 않고, 하느님이 불러 주시는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사랑 받음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람, 두려움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깊은 고요에서 흘러나오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성사적 삶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의 조각으로 받아들이는 삶, 평범한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는 삶, 내 곁의 사람을 방해물이 아니라 은총의 표징으로 맞이하는 삶, 나의 가난함과 부족함까지도 하느님께서 머무실 수 있는 자리로 내어드리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집은 먼 하늘 어딘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거처는 관계 안에 있다” 그 집은 성령께서 머무시는 내면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 집에 들어간 사람은 세상의 기준에서 잠시 물러납니다. 비교의 소음에서 벗어나고, 완벽해야 한다는 두려움에서 풀려나며, 가짜 자유의 껍데기를 벗고 참된 자신으로 하느님 앞에 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우월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이 흐르도록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맛보는 사람은 미래의 천국을 기다리기만 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 한마디를 천국의 언어로 바꾸고, 오늘의 손길 하나를 성사의 표징으로 만들며, 오늘 만나는 사람 하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자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현존이 됩니다. 종교는 체제가 아니라 생명이 됩니다. 성사는 예식 안에 갇힌 표지가 아니라 온 삶을 비추는 은총의 방식이 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비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는 하느님이 부재하시는 장소가 아닙니다. 이 순간은 이미 은총으로 꽉 차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멈추어 보고, 놓아버리고, 성령의 숨결에 마음을 열 때 비로소 그것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신앙인은 먼 곳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랑합니다. 지금 이 사람을 용서합니다. 지금 이 삶을 받아들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하느님의 집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찾던 영원은 아주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이 순간 안에 계셨고, 이 평범한 오늘 안에 숨어 계셨으며, 제 안 깊은 곳 성령께서 머무시는 가난한 자리에서 저를 참된 자유로 부르고 계셨습니다. 사랑받았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관계가 깊어집니다. 깊어진 관계 안에 하느님의 거처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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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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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7. 연중 제 8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27 05:03
- 사랑의 고배와 만족의 축배 가운데서
오늘 복음은 이런 흐름 안에 있습니다.
그제 주님을 따르는 데 실패한 부자 얘기를 들었고,
부자와 달리 주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은 현세와 내세에서
보상받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제 들은 데 이어
오늘은 제자들이 그 받을 상을 놓고 자리 다툼하는 내용을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어제 내세와 현세의 상을 다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오늘 내세에 받을 상에는 관심이 없고
현세에 받을 상 곧 높은 자리에 관해서만 관심을 표합니다.
이런 제자들이 얼마나 한심하셨을까요?
그런데도 나무람 조로 말씀하시지는 않고 차분히 타이르시고 가르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저로 말하면 관구장을 했으니 높은 자리에 올라 본 적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랬기 때문인지 책임의 무게와 고통이 먼저 생각나면서
그 자리에 다시 오를 생각이 없고 그것이 오르는 것이라는 생각도 없습니다.
사실 큰 사랑이 없으면 그 책임을 맡을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섬겨야 하는 책임 말입니다.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하니 모든 사람 밑에 있어야 하고,
그러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겸손만으론 안 되고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아기의 온갖 필요를 살펴
돌봐주는데 그것은 겸손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당신은 섬김을 받지 않고 섬기러 오셨으며,
더 나아가 당신 목숨을 바치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비허(kenosis)적 겸손이 주님을 이 세상에 내려오시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게까지 하였지만 최후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시기까지
제자들을 섬기게 한 것은 그분의 사랑이었다고 전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은 내려가는 것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려가서 섬기는 것까지 하게 하는 것
더 나아가 죽기까지 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고 수난의 사랑(Passion)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당신이 마실 잔을 제자들도 같이 마시겠냐고 하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그러자 그들도 같이 마시겠다고 호기롭게 말하는데 이때 마실 잔이 뭘까요?
주님께서 마실 잔과 제자들이 마시려는 잔은 어떤 것일까요? 같은 잔일까요?
주님께서 마실 잔은 고배인데 제자들이 마시려고 하는 잔도 고배일까요?
제 생각에 주님께서 마실 잔은 쓰디쓴 고배(苦杯)인데
제자들이 마시겠다고 한 잔은 승리의 축배(祝杯)일 것입니다.
사랑의 고배와
자기만족의 축배 가운데 우리는 어떤 잔을 들지 성찰케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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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7. 연중 제 8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영근 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id=2132809&menu=4770
2026-05-26 ㅣNo.189800
■ 성모님의 마음고통 두번째 - 부활을 기다리심
** 성모님의 마음고통, 두번째
( 마음의 고통을 희생으로 봉헌할것 )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시는
성모님의 마음을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하게
죽으신 상황, 그 시간으로 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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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배신, 은전 30닢에 스승을 팔아버린 가롯 유다에 의해
군인들에게 붙잡히어 유대 대제사장에게 심문과 모욕을 당하고
로마 군인들에게 몰매와 고문을 받아서 상처투성이인 상태로
가시면류관을 쓰고 로마총독 빌라도 법정에서 잔인하고 치욕스런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직접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
양손과 양발을 십자가에 못박힌채 물과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예수.
그 십자가 곁에는 어머니 마리아,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와 친척 아주머니 몇명만 있습니다
숙식을 같이하며 직접 가르쳤던 제자들은 두려움에 도망쳤고
스승을 팔아버린 배신자 가롯 유다는 자살을 하였고
그의 설교를 들으며 따르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고발한 대제사장과 극도의 적개심을 드러낸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사형집행을 주시하고 있고,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던 사람들, 호기심에 구경을 하러나온
군중들이 주변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힌채 고통에 겨워 크게 소리칩니다
제자에게 배신당하고 고위층들에게 모욕당하고
군중들에게 조롱받하는 고통보다도
자신이 따르고 믿었던 하느님에게 버림받는 사실이
가장 큰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지 6시간만에 결국 그는 숨을거둡니다
나사렛 예수의 일생, 그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비참하기만한 그의 죽음이 인류역사를 거대하게 변화시킨다는 것을
당시에는 아무도 몰랏을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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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어머니에게 주목합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아들의 시신을 껴안고 눈물 흘리는 어머니.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리며 기도한 것,
유대 대제사장에게 심문받으며 얻어맞은 뺨,
많은 로마병정들에게 몰매 맞으신것, 잔인한 채찍고문으로 말미암은 상처들,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생긴 어깨, 십자가에 못박히며 생긴 두팔과 두발,
로마병사가 찌른 창으로 인한 가슴의 상처 등등
온몸이 온통 상처투성이인 시신을 껴안고 눈물과 통곡으로
씻으시는 성모님의 슬픔과 고통..
그러나 안식일 전에 장사지내려는 아리마대 요셉의 요청으로
시신을 돌무덤에 묻는것을 보시는고통 까지 겪으십니다.
이제 마리아님 께서는 아들의 부활을 기다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활동 중에 고난을 받고 죽은후에
부활하시겠다고 여러번 말씀하셨다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모님은 아드님의 말씀을 믿고 부활을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아들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시는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설레임? 기쁨? 고통? 인내?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과학과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서조차
죽은자의 부활은 불가능 합니다. 아니 죽음이
무엇인지? 죽음 이후는 어떠한지? 설명을 못합니다
원소들의 집합과 해체? 단백질이 원소로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나에게는 만족한 해석이 안됩니다.
여기에서 잠시 생각을 해봅니다
어렸을때는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이
대부분 믿은것으로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제자들과 따르던 사람들 대부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료를 가지고 간 여인들,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 조차 믿지못하여
돌무덤에 직접 달려간 베드로와 요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도 처음엔 깨닫지 못하던 제자들.
개인적으로는 성모님만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셨고
부활을 믿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여러번 미리
말씀하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공생애 활동을 함께한 제자들도 여러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말씀을 믿지 못하였다 샹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말씀을 믿은 성모님과 믿지못한 제자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부활 말씀을 믿은 성모님이시지만
이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마음고통도 있으셨다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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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이성을 초월하는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이성이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
우리들은 이성을 통하여 서로 이해할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성으로서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인간에 대한 신뢰이자 존엄성의 기반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믿음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그러합니다. 하느님의 실재도 그러할까요?
개인적으로 인간의 이성은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방법 이기도 하지만
신앙은 그것을 초월하는 무엇이라 생각합니다.
이성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
묵상해볼 필요가 있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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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바라보며 느끼는 마음의 고통을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 희생으로 봉헌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죽은자의 부활이라는 이성으로는
도저히 가능하다 생각할수없는 불가능한 일을
예수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시는 고통을 묵상해봅니다.
당연히 성모님께서는 이때의 마음의 고통을
희생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셨을 것입니다
기도와 희생은 성모님의 생활양식 이지만
우리들 크리스찬의 생활양식 이기도 합니다
크리스찬 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통해
구원 받았다 믿는 사람 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첫 크리스찬 이시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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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기다리시는 마음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좀더 나가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시나요?
이 영상을 보는 분들은 대부분 크리스찬들이기에
이 질문은 오히려 모욕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주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슴을 믿는다 라고 말을 하실것 같습니다.
네 좋습니다. 그럼 한발자국 나가봅니다.
예수님의 다시오심을 믿으시나요?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활동 중에
수난받고 죽었다가 부활 하실것과
다시 오실것을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 부활을 기다리시는 마음과
크리스찬들이 예수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마음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저는 하게 됩니다
크리스찬 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통해
구원 받았다 믿는 사람 입니다. 또한
" 다시 오시겠다 "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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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여서 :
하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가장 먼저 하신 행동은
무엇일까? 묵상해 봅니다
저는 성모님에게 당신의 부활을 드러내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 어머니, 구원이 왔습니다 "
간절히 기다리시며 마음고통 당하시는 어머니에게
당신의 아들은 부활했고, 인류에게 구원이 왔슴을 알리시는 예수님.
저에게는 마치 성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것과
비슷하다는느낌 입니다
둘) 예수님, 부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저희의 믿음도 헛된것이고
저희의 삶도 의미 없는것이 될것입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셋) 예수님의 부활은 믿으나, 다시오심은 믿겨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 입니다. 그런 분들은 그냥 신앙생활을 쭈욱 계속 하시다보면
믿게되는 날이 올것으로 생각합니다. 믿음은 성령님의 은사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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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최영근
다음 글은.. 성모님의 마음고통 세번째 - 성부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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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님의 마음고통 첫번째 - 십자가 수난 2026-05-20 ㅣNo.189704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94&id=2132575&Page=4&menu=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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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7. 연중 제 8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05.26. 22:47
성령께서 주시는 목소리!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성령께서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은총을 증언할 용기를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생명력의 성령
성령께서 주시는 목소리
2026년 5월 26일 화요일
여성주의 신학자 레베카 버튼 프리차드(Rebecca Button Pritchard)는 성령께서 우리의 육화된 존재와 어떻게 동행하시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긴 시간 이어진 고통스러운 산고 끝에, 깊고 빠른 호흡을 반복하던 한 몸에서 또 하나의 몸이 태어납니다. 아픔과 희망, 안도와 두려움이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피와 태지에 젖은 작은 몸이 폐에 공기를 들이마시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고통과 기쁨의 눈물이 함께 흐릅니다. 탯줄이 끊어지고, 그 아이는 살아 숨 쉬는 영혼으로 세상에 나옵니다. 오랫동안 스스로 호흡해 온 어른들은 지쳐 있으면서도 기쁨과 안도감으로 가득합니다.
숨을 받음(영감: inspiration), 숨결, 들숨, 날숨—이 모든 것은 새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새 탄생은 울음으로 확인되는데, 그것은 공기가 성대 위를 지나며 내는 소리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육화된 존재"가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모상과 닮음으로 창조된 몸의 모든 체계 안에서 생명의 숨결, 곧 생기를 불어넣는 성령께서 움직이십니다. 새 생명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숨 쉬며, 양육과 사랑을 위해 부모의 은혜에 의지합니다.
폐와 성대, 입술은 우리가 말하고, 울고, 노래하고, 이름을 부르고, 찬미하고,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숨 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여라."(시편 150,6) 하고 시편 작는 노래했습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힘 있고 창조적으로 불어오실 때, 그 숨결은 우리의 기도를 지나며 말과 언어, 음성을 형성합니다. 목소리를 찾고, 말하기 시작하고, 들려지는 존재가 되는 것—이 모든 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하느님과 피조물, 이웃,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의 삶을 이해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소리, 곧 오순절의 거센 바람은 인간의 언어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이며, 서로가 듣고 이해하는 그 신비의 순간입니다. [1]
성령께서 우리 몸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숨 쉬고 계심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용기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참된 영성, 곧 현실에 구체화한 영성은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 곧 몸과 영, 네페쉬(nephesh)와 바사르(basar), 마음과 영혼이 하나로 통합된 상태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온전한 마음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게 됩니다. 또한 바로 이 온전한 마음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부르짖을 말, 찬미의 노래, 예언의 말씀, 위로의 말, 우리의 이야기를 전할 말, 그리고 하느님과 피조물, 이웃, 자기 자신과 맺는 모든 관계를 이해할 언어를 찾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빚어내는 영성, 즉 온 마음으로 살아내는 영성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그 용기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은총을 증언할 용기, 우리를 침묵시키려는 힘 앞에서도 말할 용기, 연약한 이들과 상처받기 쉬운 이들을 북돋우고 힘을 실어 주는 진실한 행동을 선택할 용기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진실한 순간을 식별할 지혜를 주시며, 과거와 현재를 해석할 때 의심과 신뢰를 함께 가져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저는 오순절 성령 운동 교회에서 ‘거듭남’을 경험하게 되었지만, 그 후 사람들을 ‘구원하러’ 나가야 한다는 요구가 제 마음에 늘 걸렸습니다. 만일 누군가의 구원이 제 손에 달려 있다면, 세상은 참으로 안타까운 처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여러 저서와 매일 묵상,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보편적 그리스도』(Universal Christ)를 통해 저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제가 사람들을 ‘구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하면 된다는 것을요. 제 안에서 일어난 이 변화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Mandy G.
References
[1] Rebecca Button Pritchard, Sensing the Spirit: The Holy Spirit in Feminist Perspective (Chalice Press, 1999) 9–10.
[2] Pritchard, Sensing the Spirit, 29–3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rman Khadangan,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의 불꽃을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불은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영감을 주며,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를 지탱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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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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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7. 연중 제 8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차마 가기 싫었던 형극의 길
지난 성목요일 밤, 세족례 예식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늘 해오던 세족례 예식이었지만, 올해는 좀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이들 앞에 허리를 굽혀 발을 씻겨주던 순간,
아이들의 발을 수건으로 감싸 닦아주던 순간
2000년 전 똑같은 모습으로 제자들 앞에 허리를 굽히신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한 부족한 인간의 발을 씻어주시던 그 모습, 그 발에 입을 마주시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다 나오려고 했습니다.
제발 좀 겸손하라고, 끊임없이 낮아지라고 그렇게도 강조했지만 그저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던 제자들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으신 것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도통 말귀를 못 알아듣는 우리를 위해 최후의 방법, 극단적인 방법을 쓰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제자들(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 역시 마찬가지로 아직도 갈 길이 멀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핵심제자단에 속해 있던 두 사람이었지만, 하는 말들 좀 보십시오.
“선생님, 소원이 있습니다.
꼭 들어 주십시오.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보십시오.
두 사람이 예수님께 지금 청하고 있는 것은 어리석게도 이 세상의 권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정권을 잡으시면 국무총리나 당 대표 정도를 시켜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께서는 지금 죽어도 가고 싶지 않은 곳이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시는데, 진정 살 떨리는 공포의 골고타 언덕을 서서히 올라가고 계시는데, 철없는 두 제자는 ‘물 좋은 자리’ 운운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실 고난의 잔 때문에 괴로워 죽겠는데, 개념 없는 두 제자는 앞으로 연봉이 얼마가 될 것이며, 골프장은 어디가 좋으며...
이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진리는 참 진리이지만 어쩌면 제자들에게 있어 생각조차 하고 싶지도 않은 진리, 회피하고 외면하고 싶은 진리, 따르고 싶지 않은 진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환호 속에 걸어가는 영광과 승리의 메시아만 선호했지 수난 받는 메시아, 참혹하게 사람의 손에 죽어간 고통과 순명의 메시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수난 당하시는 하느님, 겸손하신 예수님, 봉사하고 섬기는 데 전공이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이웃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이란 생각 말입니다.
이를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일평생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것이겠지요.
한평생 지속된 겸손의 삶,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메시아를 기다립니까?
혹시라도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은 다분히 이기적인 욕구들을 우리가 청할 때 마다
즉각적으로 들어주시는 나만의 메시아가 아닌지요?
혹시라도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은 잠시 스쳐지나가는 이 세상 것들에 모든 것을 걸라고 속삭이는 가짜 메시아는 아닌지요?
우리에게 오신 메시아는 군림이나 명령과는 거리가 먼 메시아셨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나 권력과는 거리가 먼 메시아셨습니다.
현세적 축복이나 안녕만을 지속적으로 보장해주는 마술사 같은 메시아가 절대 아니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오신 메시아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호화찬란한 왕궁은 고사하고 초라한 여인숙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쓰디쓴 고난의 잔을 기꺼이 받아 마셔야 했던 고통의 왕이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눈물을 머금고
차마 가기 싫었던 형극의 길을 걸어가야 했던 슬픔의 왕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어주셨던 섬김의 왕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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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7. 연중 제 8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35-45)>
1)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가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예수님의 나라’를 세속의 왕국과 같은 나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의 다음 말씀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예수님께서 어떤 중요한 일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만 데리고 가신 일이 많기 때문에, 즉 그 세 제자가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였기 때문에,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자기들이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두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베드로 사도를 빼놓았을까?
베드로 사도를 서열 3위로 밀어내고 싶었던 것일까?
41절에, 다른 열 제자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를 불쾌하게 여겼다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베드로 사도의 기분이 가장 나빴을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5).”
하늘나라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교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만 있는 나라입니다.
또 그 나라는 남을 ‘섬기는’ 사람만 있고, 섬김을 받기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나라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만 있고 섬김을 받는 사람은 없다면,
도대체 누구를 섬기는 것일까?
섬김을 받는 사람이 있어야 섬김을 실천할 수 있지 않은가?
또 자기를 낮추는 사람만 있다면, 그 낮춤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것일까?
모든 사람이 다 낮춘다면, 낮춤의 기준점이 없어지게 됩니다.
결국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아지는 나라입니다.
섬기는 일과 섬김을 받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나라, 나를 낮추는 일과 남이 나를 높여 주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나라, 그래서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더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질 그 일을 지금 이쪽 세상에서부터 실천하라고,
즉 모두가 같아지라고 가르치십니다.
불우이웃 돕기를 예로 들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우이웃 돕기를 실천하는 것은, 불우이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불우이웃이 없는 나라이니, 그곳에서는 불우이웃 돕기를 안 할 것입니다.
이 말에서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연상됩니다(사도 4,34).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은, ‘남들보다’ 궁핍한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고, 동시에 ‘남들보다’ 부유한 사람도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 똑같아진 것입니다.
먹어도 함께 먹고, 굶어도 함께 굶는......
사랑이란, 그렇게 ‘같아지는 것’입니다.
3) 낮춤과 섬김을 실천할 때 정말로 조심해야 할 것은, ‘거짓 겸손’이라는 함정입니다.
“나는 이렇게 낮춤과 섬김을 잘 실천하고 있다. 나는 겸손한 사람이다.” 라고 스스로 의식하기 시작하는 순간, 교만한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거짓 겸손’과 ‘교만’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또 남들이 보기에는 겸손한 사람인데, “나는 겸손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교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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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7. 연중 제 8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 ------- 10:35 추가.
마르 10,32-45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두명의 핵심 제자만 따로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당신께 닥칠 일들을, 즉 당신께서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께서 반드시 겪으셔야 할 ‘과정’들입니다. 인류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일’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그 중 어느 하나도 빠져서는 안되지요. 그런데 나름 예수님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가서는 이렇게 청합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수난과 죽음은 흘려듣고, ‘영광’만 귀담아 들은 모양입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걸으셔야 할 ‘십자가의 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분의 부활과 함께 도래할 새로운 세상에서 ‘한 자리’씩 차지할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말 그대로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그런 마음을 지닌 게 그들 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광의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을 보고 다른 제자들이 ‘불쾌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그들 역시 ‘같은 마음’이라는 점이 고스란히 드러나지요. 나도 그 자리가 탐나서 앉고 싶은데, 다른 이가 상의도 협상도 없이 덜컥 그 자리에 앉겠다고 ‘선수’를 치니 그 모습이 얄밉고 기분 나빴던 겁니다. 그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주님과 함께 ‘영광의 자리’에 앉기 위함입니다. 물론 영광의 자리를 희망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요. 문제는 신앙생활을 통해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하는데, 노력과 희생이라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그런 건 생략하고 영광만 얻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수고와 땀 없이 얻는 영광에 무슨 기쁨과 보람이 있을까 싶지만, 기왕이면 쉽고 편한 길을 찾는 게 우리 인간이 지닌 속성이니 무조건 탓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하나 하나 차근차근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주님께 영광의 자리를 청하기 전에 먼저 그 자리를 청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과정’과 ‘결과’는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니 신앙생활의 ‘결과’로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고 싶다면, 거기에 따르는 ‘과정’인 십자가까지 기꺼이 끌어 안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둘째, 그러니 주님께 영광을 누리게 해달라고 청하려면,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잔’을 마실 용기가 나에게 있는지,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 자녀가 된 이에게 주어지는 의무와 책임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그런 용기와 각오도 없이 무턱대고 덤볐다가는 ‘신앙’이라는 탑을 끝까지 쌓지도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신앙의 길을 끝까지 충실히 걸으려면 그 길이 하느님으로부터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걷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을 기꺼이 내어드림으로써 그분과 완전히 일치되기 위해 걷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도 그러기 위해 우리를 사랑으로 섬기시고,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까지 바치셨지요. 우리가 이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주님의 뒤를 충실히 따른다면,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영광을 누리게 될 그 날이 반드시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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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7. 연중 제 8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 23:55. 추가.
숨영성 묵상글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십니다.
신약성서에서 82회나 나오는 예수님의 이 호칭은 첫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실 때, 앞으로 겪게 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실 때, 또 세상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할 때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십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니엘서 7장에 나옵니다. 이는 단순히 어떤 한 인간의 아들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느님으로부터 세상을 심판할 전권을 부여받은 존재를 표현하는 말로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당신에게 적용하시면서 그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넘겨져 수난과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에 대한 심판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심판은 단죄의 의미보다는 구원과 완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겠지요?!
다만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과 완성을 은총으로 부여받기 위해 전제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러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요.
오늘 우리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에고가 지향하고 있는 당연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정신 구조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해 주시는 은총을 인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은총을 입을 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지요!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정해진 이들이란 뒤에 말씀하시는 그런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섬기는 종이 되는 이, 자신을 내어주며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이 말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힘을 과시하는 오만한 왕국이 아니라… 자비와 온유의 위엄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주님의 통치는 공격적이고 화려한 권세가 아니라… 겸손과 은총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통치입니다.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직전에 세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이루실 승리가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그 영광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날지를 제자들에게 밝히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르코는 "제자들은 놀랐고, 뒤따르던 사람들은 두려워했다."고 전합니다(마르 10,32).
우리의 삶도 종종 이 제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보였던 오해와 무지 속에 우리도 자주 머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명예와 인정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단순함과 겸손의 길임을 잊곤 합니다.
우리는 권력과 지위를 향한 헛된 욕망에 쉽게 흔들리면서… 겸손과 절제라는 복음적 덕목을 자주 놓칩니다.
우리는 때로 자리 다툼과 보이지 않는 경쟁에 휘말리며…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주님의 모범을 흐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요한 17,15 참조).
성 프란치스코가 포르치운쿨라(작은 몫이라는 뜻)를 사랑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어떤 일을 하든 이곳에서 시작하고 이곳에서 마치라고 권고했는데, 이는 우리의 에고가 무의식 안에서 지향하는 방향을 의식하고 그 반대쪽으로 삶의 방향을 잡으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이런 삶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붙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어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하염없이 당신을 내어주시며 우리 삶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또 그분과 일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일상 안에서 우리 내면의 에고가 지향하는 바가 무언지를 자주 진솔하게 바라보고 그 방향을 바로 잡고자 하는 수양을 해나가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모든 일을 포르치운쿨라에서 시작하고 마치라고 권고한 의미는 단순한 외적인 행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을 진솔하게 점검하고 방향을 조정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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