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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세우시는 언약 1
출 34:10-20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11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
12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
13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
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15 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16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17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지니라
18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 그 절기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19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20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출 34:10-20 / [계약법과 계약 체결]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이제 내가 너희와 계약을 맺겠다 또 내가 이 땅 위, 그 어떤 민족 앞에서도 보이지 않은 놀라운 일을 너희 온 백성 앞에서 보이겠다. 너희와 함께 사는 민족이 모두 나 여호와가 하는 일을 보게 되리라. 내가 너희와 함께 이룰 그 일을 보고 너희와 함께 사는 민족들은 겁에 질려 떨게 되리라. 11)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반드시 지켜라. 내가 너희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12) 너희가 분명히 기억해야할 사실은, 너희가 들어가는 땅에 사는 주민들과 어떤 형태로든 계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너희와 함께 살면 너희의 올가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3) 너희는 오히려 그들이 쌓아 놓은 제단을 헐어 버리고 그들이 세워 놓은 석상을 부숴 버리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아세라상을 깨뜨려 버려야 한다. 14) 너희는 절대로 다른 신에게 절을 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심이 한없이 많은 여호와'이다.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15) 너희가 그 땅에 살고 있는 주민들과 계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꼭 새겨 두어라. 그 땅 주민들은 자기들 신을 본떠서 그것들에게 희생제물을 서슴없이 바친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들이 바쳤던 희생제물을 같이 먹자고 너희를 초청할 때 너희가 거절하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먹어 너희가 더러워질까 하는 점이다. 16) 또 너희가 그 땅 주민의 처녀들을 너희의 며느리로 삼으면 너희 자식이 아내를 따라서 음란하게 그 땅의 신들을 섬길까 염려스럽다. 그 땅의 처녀들이 너희의 며느리가 된 뒤에도 그 땅의 신들을 섬기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17) 너희는 거푸집에 부어 그 어떠한 신의 형상도 만들지 말아라. 18) 너희는 내가 이미 명령한 대로 무교절을 지켜라. 아빕월 중 지정한 시기에 이레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어라. 너희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밖으로 나온 까닭이다. 19) 모태를 처음 열고 나온 것은 모두 내것이다. 곧 너희가 기르는 가축 가운데에서 처음 난 수컷은 소든 양이든 염소든 할 것 없이 모두 내 차지이다. 20) 나귀 첫 새끼의 목숨값으로는 양새끼를 대신 내게 바쳐야하며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면 그 나귀 새끼의 목을 꺾어 죽여야 한다. 또한 너희 맏아들의 목숨값으로 다른 제물을 바쳐야 한다. 나를 보려고 성소에 나아올 때에는 아무도 빈손으로 올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경사회로 진입하면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할 것을 아셨습니다. 18절부터 26절까지 열두 개의 구체적인 규례가 선포됩니다. 핵심은 가나안 사람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10-16)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들을 쫓아내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가나안 정착은 약속의 땅을 확보하기 위한 일방적인 하나님의 정복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 거주할 자격을 잃은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신 9:4-5). 그 땅이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냈다고 말합니다(레 18:24-26).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죄악으로 가득한 가나안의 사람들과 동맹을 맺지 말 것이며, 그들이 사용하던 제단과 주상(돌 기둥)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자녀들을 그들과 결혼시키지 말라고 하시는데, 이는 악함으로 가득한 가나안의 헛된 풍습이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변질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17) 고대 사회에서는 형상이 있는 우상을 소지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창 31:34; 삿 17:5).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황금송아지를 만든 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산 바 있습니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을 통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교절을 지키라(18-20) 아빕월에 7일간 무교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18). 아빕월은 봄철로 보리를 거두는 시기입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봄을 만물이 죽었다가 소생하는 시기로 이해했으며 이를 바알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분이 출애굽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도록 했습니다. 첫 태생을 봉헌하라고 하십니다(19-20). 당시 사람들은 봄철 번식기에 동물의 첫 새끼를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것을 다른 신이 아닌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때 나귀는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나귀를 결실의 상징으로 여겼기에 그들과 다른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제물로 바치지 말라고 하십니다(20). 당시에는 인신 제사가 횡행하던 시대였지만 그 시대의 세속적 풍습에서 떠나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무교절을 지킴으로 자신들이 언약 백성임을 스스로 확인하도록 했습니다. 당신도 스스로 내가 언약 백성인 것을 점검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보기에 좋다고 여기는 것, 행복한 것이 과연 진짜 좋은 걸까요? 불행한 것,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연 진짜 나쁜 걸까요? 우리는 그것들이 불행인지, 행복인지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좋은 일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그분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 설 교 >
질투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34:10-17 / 이상호 목사
본문요약 : 영광중에 임재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한 모세와 언약을 다시 체결하십니다.(10-11절)
하나님의 언약내용을 살펴보면 그것은 후일 성취될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을 생각하며 맺어진 언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의 문화와 우상숭배를 배우거나 닮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신부로 알아 영적인 순결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거짓된 우상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12-17)
성경에는 질투 때문에 큰 죄를 범하고 결국 자신마저 패망의 길로 걸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있을까요?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데 자신의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음을 질투하여 결국 동생을 죽임으로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만 가인이 있습니다. 블레셋 군대의 침략으로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있을 때 용감하게 맞서 싸워 적장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질투하여 결국 비참하게 죽고 만 사울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질투심은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분문 14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시면서 부정적인 이미지인 질투하시는 하나님 - 엘 칸나로 소개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여 인도하신 곳이 시내산입니다. 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심으로 그들을 언약백성으로 삼으십니다. 그러나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40일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부재로 인하여 두려움에 떤 나머지 급기야 금고리를 가지고 금송아지우상을 만들어 하나님 대신에 섬기는 죄를 범하고 맙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맺은 언약은 그만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깨뜨린 백성들에게 진노하심으로 그들을 진멸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간곡한 중보기도에 따라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금 십계명을 돌에 새겨 모세를 통해 주십니다. 다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다시는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 않도록 재삼 당부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엘 칸나 즉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여기서 엘은 하나님, 칸나는 질투하는 이란 뜻입니다. 14절“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이실까요? 이 이름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첫째,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쏟아 부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질투를 인터넷사전으로 검색해보니 이렇게 정의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한 형태로서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자기 이외의 인물을 사랑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대인 감정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랑의 상대가 자기에게 무관심하고 공재(共在) 관계가 없을 경우에는 질투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질투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하지 않는 대상을 향하여 질투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자신만을 향하지 않고 다른 것을 향할 때 당연히 질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람의 사랑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향함에도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는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질투하는 하나님 - 엘 칸나로 소개하시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잘 드러낸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린 아이에게 동생이 태어나는 것은 어른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위기입니다. 그 동안 독점적으로 누리던 엄마 아빠와 가족들의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충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동생을 때리고 꼬집고 학대합니다. 때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아기티를 냅니다. 안 물던 우유병을 빨고 옷에 오줌도 싸고... 한 마디로 동생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아이는 동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여깁니다. 동생이 자기가 받아 누리던 가족들의 사랑을 다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에 밉습니다. 이 아이는 동생이 자기가 받아야 할 사랑을 가로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질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크거나 가족들의 세심한 배려를 받게 되면 가족들이 자기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질투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질투 자체가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들을 너무도 사랑하시는 것에서 비롯되었기에 어떤 경우에도 이 사랑을 접는 경우가 없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쫓는 우리 때문에 마음이 아프시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질투는 연인 사이의 사랑의 질투와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음에는 질투가 불처럼 일어납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랑이 클수록 그 질투는 억제하기 힘들 정도로 폭발합니다. 때로는 이 질투로 인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는 것을 뉴스를 통해 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심으로 표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고 우리를 하나님의 연인으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질투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하나님의 모든 것, 하나님의 가장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의 독생자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나타내셨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십자가의 그 사랑이야 말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한 절정이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길래 참으로 보잘 것 없고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을 미천한 우리를 위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정도의 사랑을 베푸신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이 사랑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둘째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독점적인 사랑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4절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17절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지니라 ”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랑이 독점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사랑이 나누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다른 배우자에게로 향한다면 용납이 되겠습니까? 만약 용납한다면 그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질투와 혼동해서 사용하는 단어가 시기입니다. 성경에도 이 두 단어는 서로 혼동해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고전 13장에서는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참된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투와 시기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질투는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자기 이외의 인물을 사랑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대인 감정”이라고 한다면 시기는 “자기의 소유가 아님에도 탐하거나 남이 잘되는 것을 시샘하여 미워하는 감정”을 의미합니다. 물론 질투의 감정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동기는 분명히 정당합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질투에 대한 구절을 연구해보면 놀랍게도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질투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는 구절은 영락없이 우상숭배를 금하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한구절만 봅니다.
신 4:23-24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거나 조각하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나누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쪼개어 나누는 행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결혼식에서 부부는 결혼서약을 합니다. 결혼서약은 이제부터 남편과 아내만을 사랑하겠노라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배우자에 대한 사랑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겠노라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이 약속을 깨뜨린다면 결혼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 순간 이제로부터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됩니다. 이는 이제로부터 하나님만을 사랑하겠노라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이제로부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보다도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자식을 더 사랑한다면 그 모든 것이 우상이 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서 독점적인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나누어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누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과 맞서 싸우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내려놓을 때까지 싸우실 것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누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질투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칸나, 헬라어로는 젤로스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젤로스는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쓰여집니다. 하나는 질투, 다른 하나는 열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질투라는 말은 하나님의 열심과 통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질투 안에는 하나님의 열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열심이 있으십니다. 어떤 열심입니까?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열심입니다. 우리를 약속하신 저 천국에까지 반드시 인도하시겠다는 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집을 피우고 자기 뜻대로 하려고 몸부림치기도 하고 곁길로 갈 때조차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열심히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결코 다른 것에 나누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 사랑과 풍성한 은혜를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으며 영원토록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사랑에 어떻게 보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이 시간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돈, 명예, 권력, 자식, 취미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보다 우선한다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놀라운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이제로부터 하나님만을 사랑하겠노라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 / 엘 칸나
출34:14,신4:23-24 / 이도원 목사
저는 지난 2월 5일 주일 미국 달라스 텍사스에 있었습니다. 북 미주 한국 목사님들의 셀 컨퍼런스를 인도한 후 달라스 몇 교회가 연합한 집회를 인도하는 마지막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 오후 미국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날 오후는 일년 중 가장 많은 미국인들 약 일억 3천 7백만 명을 텔레비전 앞으로 집중시키고 심지어 이라크 주둔중인 전시 체제하의 미군들조차 모든 일을 중단하고 시청하는 미식축구 파이널 수퍼볼 경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뉴스를 통해 보신 것처럼 이 날의 영웅은 이 날 결승 경기의 MVP인 하프 코리언 하프 블랙인 이제 막30살이 되는 하인스 워드(Hines Ward)였습니다. 그런데 이 날의 경기가 다른 해와 좀 달랐던 것은 미국 텔레비전들의 보도가 한 손에 반짝이는 롬바르디 컵과 또 다른 손에 아들 제이든을 안고 있는 모습을 방영했을 뿐 아니라 조금 늦은 밤부터는 하인스 워드의 라이프 스토리와 함께 그의 한국 어머니의 사진을 내보내며 그의 라이프 스토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미국인들의 반응을 계속해서 리플레이하고 있었습니다.
어려서 그는 한국 어머니가 싫었다고 합니다. 흑인 친구들은 코리언 어머니를 가진 그를 놀려댔습니다. 워드는 코리언 어머니의 차에 타는 자신의 모습을 누가 볼까봐 차에서 늘 납작 엎드리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차문을 열고 도망치듯 차에서 빠져 나오다가 차안에서 갑자기 오열을 하며 흐느끼는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순간적이나마 다른 어머니를 부러워한 자신을 뉘우치게 됩니다. 그리고 식당 접시닦이로, 호텔 청소부로, 편의점 종업원으로 한꺼번에 두개, 세 개의 직업을 갖고 일하면서 자신에게 언제나 따뜻한 밥을 먹이며 키워온 그 엄마의 사랑을 깨달아지면서 그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미국 미디아의 뉴스들은 이런 하인스 워드의 코리언 엄마의 사랑과 희생이 그를 이 날의 챔피언으로 만들었다고 소개하며, 그의 MVP선정 소감을 되풀이하여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오늘 내가 여기에 서게 된 이유입니다. 어머니, 당신이 진정한 챔피언입니다.” 그런데 이 소감과 함께 한 미국의 뉴스 앵커는 이런 특이한 코멘트를 남겼습니다. “하인스 워드는 하프 코리언이었지만, 그의 코리언 엄마의 사랑은 하프가 아닌 모든 것의 사랑이었다”고. 그런데 이런 어머니들의 사랑은 어머니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인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 또한 하프의 사랑이 아닌 모든 것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런 하나님의 이름의 하나가 ‘엘 칸나’-곧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오늘의 본문 출34:14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엘 칸나)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신4:24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십니다. 그냥 질투하는 분이 아니라 불같이 질투하는 분이십니다. 도대체 이 질투라는 세속적인 단어로 표기된 하나님의 이름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질투-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요?
1.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질투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도대체 사랑하지 않는 대상을 인하여 어떻게 질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질투는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단어인 것은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의 가장 절실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는 질투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니 그는 그 질투 때문에 죽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죄를 범한 인류를 사단에게 내어주시기 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셔서 우리와의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인류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의 마지막 고백이었습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강하지도 않고 경건하지도 못한 죄인인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야 말로 그분의 사랑이 가진 가장 위대한 비밀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고 하십니다.
여러분, 브로드웨이의 최장기 뮤지칼의 하나인 ‘오페라의 유령’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단순한 눈과 귀로 이 뮤지칼을 감상하면 우리는 이 뮤지컬이 전형적인 크리스틴이라는 여주인공을 둘러싸고 크리스틴의 어렸을 때부터의 사랑, 자작 라울과 가면 마스크를 쓴 유령사이의 삼각관계에서 벌어지는 애절한 사랑의 드라마로만 이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평론가는 이 작품이 이토록 롱런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더 중요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이 유령에게서 바로 ‘내안에 유령’ 곧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뮤지칼의 절정은 유령의 마스크가 벗겨지고 그의 흉악한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크리스틴은 이런 상처뿐인 유령의 얼굴에 키스를 해주고 그 순간 유령은 크리스틴을 놓아줄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임을 아시나요? 그는 가면으로 숨겨놓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부끄럼을 아시고도 지하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곁에 다가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누구도 내 곁에 다가오기를 꺼려한 내 상처에 입을 맞추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질투하며 사랑하신다고 고백하십니다. 그의 이름이 바로 엘 칸나-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하나님은 사랑을 나누지 않으십니다.
오페라의 유령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유령은 사랑하는 여인곁을 울면서 떠나갔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질투 때문이십니다. 저는 엄밀하게 말하면 질투는 성경적이지만 시기는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물론 성경에도 이 두 단어가 비숫한 의미로 혼용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전13:4)고 가르칩니다. 맞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질투합니다. 시기는 자기 권리가 없는 대상을 부러워하거나 험담하거나 파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기는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질투는 본래부터 자기가 가진 당연한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질투의 감정을 잘못 표현하는 과정에서 질투는 추한 모습으로 변질될 수 있지만 질투의 동기는 정당한 것입니다. 아내가 자기의 배우자를 지키기 위하여 질투하는 감정 그 자체를 우리가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질투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질투는 언제나 언약 사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본문 신4:23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왜 우상을 만들지 않을 것을 언약하게 하셨습니까? 사랑을 나누지 않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부부의 결혼 언약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 남자만을 유일한 남편으로 이 여자만을 유일한 아내로 사랑을 나누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약속 아닙니까? 그래서 일단 결혼의 약속이 성립하면 남편은 내 남편이고 아내도 내 아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부부에게는 질투할 권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주인이 되셨고 따라서 그분 외에 누구와도 우리는 사랑을 나누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그분보다 더 사랑하고 더 아끼고 더 집착하는 무엇이 생긴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상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을 가르쳐 성경은 영적 음행 혹은 영적 간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야고보 4:4을 기억하십니까? “간음한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그 다음 5절을 읽어보십시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의미상으로 질투의 뜻)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만한 것이 돈이 되었다면, 명예가 되었다면, 취미가 되었다면, 권력이 되었다면 기억하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그 순간부터 우리가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가 시작된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의 이름이 엘 칸나-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관리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니지먼트(management)를 많이 강조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퇴보와 몰락은 결국 매니지먼트의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관리해야 할 것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관계의 관리요, 사랑의 관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상의 가장 단순한 정의는 하나님과 나사이에 끼어드는 모든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 더 사랑하지 못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바라보는 일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그 모든 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마치 부부사이에 그 누구도 끼어들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나사이에도 아무것도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매니지먼트인 것입니다. 부부가 사랑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바쁘게만 살다보면 어느 날 부부사이에 건너뛰기 어려운 정신적 심리적 거리가 생긴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런 실패를 경험해온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불러 온 클래식 가요가 있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해 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의 승리로운 삶의 열가지 규칙을 십계명으로 주시면서 제1 계명으로 주신 것이 “너는 나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 출34:14 이하의 말씀은 사실상 이 제1계명을 다시 풀어서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의 관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런 것처럼 이 영적인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도 신실하게 관리되지 않는다면 소위 틈새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 혹은“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7)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요즈음 하나님과 함께하는 경건의 시간(QT)을 신실하게 갖고 계십니까? 규칙적으로 그의 음성을 듣고 기도하며 살고 계십니까?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말씀을 따라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살고 계신지요? 그분의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하고 계십니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는 말씀대로 목장모임에 참여하여 서로의 믿음을 북돋아 주고 계신지요?
저는 오늘의 말씀을 하인즈 워드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봇물처럼 모든 매스콤에 쏟아져 나오는 그의 이야기를 읽고 들으면서도 한가지 궁금한 것이 없으셨습니까? 그의 아버지 이야기 말입니다. 모든 언론이 하인즈의 어머니 김영희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도하면서도 주한 미군이었던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말입니다. 좀 더 사실을 말하자면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고 쓸 말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내를 버렸고 아들을 버렸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의 인생에 투자한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머니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한 사람은 사랑의 관리를 포기했고, 또 한 사람은 사랑의 관리에 헌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웅은 어머니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아들 사랑을 희생과 눈물로 관리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 보상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녀가 챔피온이 되고 MVP가 된 것입니다. 그녀는 많이 울었지만 이제 아들과 함께 웃는 자가 되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 것입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의 인생 속에 겸손을 심었습니다. 희생을 심었습니다. 사랑을 심었습니다. 정직을 심었습니다. 땀 흘리는 노력을 심었습니다. 철저하게 사랑을 관리했고 이제 챔피온 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의 꿈은 어머니에게 좋은 옷을 입혀 드리고 호강시켜 드리는 것뿐입니다.” 이 기사를 읽고 있을 하인스의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럴 줄 알았더면 나도 내 사랑을 관리했어야 하는 건데--”
혹시 그 어느날 우리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앞에 서서 우리가 비슷한 참회의 고백을 하지 않을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럴줄 알았더면 나도 하나님 사랑을 좀더 신실하게 관리했어야 하는 건데--”, “그 분과의 사랑의 언약에 좀 더 신실하게 응답했어야 하는 건데--”라고 말입니다. 다행스럽게 아직 기회는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남아있는 우리의 인생속에 엘 칸나의 이름으로 다가 오십니다. “난 아직도 너의 사랑을 기대하고 있어. 내 이름은 엘 칸나-나는 너를 질투하며 사랑하고 있단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출 34:14-28 / 임덕순 목사
옛날에 우리나라에는 칠거지악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출가한 여성이 지어서는 안 되는 일곱 가지 악행을 일컫는 것이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남편을 질투하는 것입니다.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하든지 말든지, 겉으로 드러내지 말고 꾹 참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질투를 하면 칠거지악 중에 하나를 범한 것이 되어 이혼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생각하면 참 황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빼앗기지 않으려는 감정이 있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상대에게 자신을 전부주고, 상대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한다면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을 질투라고 합니다.
이 질투가 일어나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등한 관계에서만 일어납니다. 사람과 짐승 사이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개를 너무 좋아한다고 해서 개를 질투하는 아내가 있다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일 것입니다. 또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귀족과 노예 사이에는 질투의 감정이 생길 수 없습니다. 질투는 대등한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상대에게 사랑을 다 쏟아 부은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상대에게 자기 전부를 쏟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상대를 질투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이만큼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사랑의 불만이 질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충격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질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대등한 관계일 수 있습니까? 인간은 한 줌의 진흙에 불과하고, 하나님은 그것으로 그릇을 만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흙과 같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희생하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러하기에 우리가 그분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질투의 감정을 품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개미를 질투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질투하신다는 말씀은 우리를 피조물의 하나로만 생각하지 않으시고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하신다는 증거이고, 또한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쏟아 사랑하셨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질투의 감정을 가지신다는 이 말씀은 충격 스러울 정도로 감격스럽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놀 때에 어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어울려서 모든 것을 다 해보고 싶어 합니다. 만일 아이들이 노는데 어른이 끼어서 사사건건 ‘이렇게 해라. 그것은 안 돼’ 하면 아이들은 재미없어 합니다.
그것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들의 삶에서 손을 떼시고 간섭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맡겨놓으시고 멀리서 구경만 하시다가 우리가 실패하고 도움을 청할 때만 도와주기를 바라는 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택한 백성이 아닌 사람에게는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그대로 보고만 계시지만, 당신이 사랑한 택한 백성들에게는 절대로 방임만 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스스로 설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놓아두시면 망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질투까지 하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예를 들어 어떤 여자가 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나를 위해서 자기를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여자는 당연히 나도 자기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나도 그 여자를 그만큼 사랑한다면, 그가 나를 질투하는 것이 도리어 고마울 것이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가 나를 질투하는 것이 너무나 귀찮기만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의 질투가 나에게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하는 것은 내가 그를 사랑하느냐 아니냐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질투하도록 사랑하신다는 것이 너무나 고마운 말씀이 되겠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나를 질투하신다는 사실이 귀찮고 고통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멋대로 살게 놓아두지 않으시고 사랑하시고 간섭하시며,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질투까지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서 우리를 그냥 놔두면 우리가 망하게 되어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복을 다 빼앗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3-14)
인간들이 하는 대로 가만 놔두면 자동적으로 어디로 가게되는지 아십니까? 신이 아닌 것들을 신이라고 만들어서 섬기면서 우매무지한 길로 가고, 서로 미워하며 싸우고 망할 길로 갑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생이 하는 짓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이방민족을 따라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옛날에는 부족들 간에 전쟁이 많았습니다. 마치 연례행사처럼 전쟁을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피하고 싶은 경우에는 상대와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이 평화협정을 맺을 때에는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상대방의 종교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협정을 맺을 때 서로의 신상을 교환하였습니다. 너희가 섬기는 신을 우리가 섬기고, 우리가 섬기는 신을 너희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를 서로 수용하지 않으면 평화협정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이라 하는 것들은 사람이 만든 가짜 신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그날로 하나님이 주신 어마어마한 약속이 폐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가 비록 고립되는 경우다 있더라도 다른 나라와 우상교환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하고 처음 약속했던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해주겠는데, 하나 꼭 명심할 것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그곳 주민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거나 그들과 어울려서 살지 말고 그들의 우상을 깨뜨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13)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14) 얼마나 분명하십니까?
왜 이렇게 과격한 명령을 내리시는 줄 아십니까? 우상숭배가 무엇일까요?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등지고 이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여기 저기 풀밭을 따라 이동하며 목축을 하는 사람이어서 문화라는 것이 없었지만, 그들이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사람들은 이미 관개수로를 만들고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여 문화를 가지고 사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훨씬 과학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절기에 맞추어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최신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추수하여 풍성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앞선 생활방식이 부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들에게서 무엇이라도 배우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과학적인 농사방법과 안정된 생활과 문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사람이나 짐승 형상의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게 절하며 섬기는 무지한 면도 있었습니다. 그 우상숭배는 단지 무지한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쾌락의 요소가 있었는데, 당시 가나안의 종교는 간음 그 자체 였습니다. 신전에 가서 풍년 들기를 빌며 우상에게 제사하고는 여자 사제와 음란을 즐기는 것을 풍년을 기원하는 종교행위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이 왜 과학과 문화를 숭상하면서도 한편은 무지한 생활을 하는지 아십니까? 그들이 가인의 후예들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 제사를 소홀히 하다가 시기하여 동생을 죽인 가인의 후예들은, 성을 쌓고 악기를 만들고 철제 무기를 만들며 세상의 문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 가인의 후예들은 지금도 하나님보다 과학을 신뢰하며 전쟁무기를 만들고, 문화라는 이름으로 우상을 숭배하며 자기들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이 과학을 숭상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 우리의 힘과 지혜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몸짓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우매한 우상숭배가 있습니다. 최단과학의 산물인 우주선을 쏘아 보내면서도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온갖 미신을 의지하고, 한국에서는 돼지대가리를 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과학자가 어떻게 저렇게 미신적일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필연적인데, 하나님 없이 우리 힘으로만 살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니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없으니 자기들이 만든 우상이나 귀신에게라도 부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상숭배는 교만과 무지와 음란인데,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지혜와 능력만으로 살아가려는 교만이요, 자기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생길 때는 도리어 자기만 못한 것에게 의지하는 무지한 행위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과학을 숭상하고 인간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미신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감시자와 심판자를 인정하지 아니하니까 그들의 생활은 난잡하고 음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사회가 기술이 발전한 사회 같지만 여전히 미신이 득실거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그것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나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인간의 자연스런 결과였던 것입니다.
오늘 현대사회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성적인 문란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가인의 후예들의 생활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을 썩게 만들며 영원히 멸망할 가나안 족속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을 거부하고 무지하며 음란하게 살아가는 가나안 사람들의 삶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신자가 그들의 삶을 부럽게 여기고 따라가면, 하나님은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시겠다는 표현으로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해서 스스로 고난 속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앙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올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이 주신 것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만 의지할 때 하나님은 철저하게 책임을 져 주셔서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 뛰어나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삶을 사랑하면, 그들의 신인 교만과 무지와 음란을 섬기게 될 것이고 하나님도 잃고 세상도 잃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머리 좋은 사람으로 뽑혀서 특별한 교육을 받을 기회를 만났습니다. 바벨론의 왕은 출중한 인재를 찾아내기 위해서 포로중에서도 똑똑한 사람들을 골라서 최고의 음식을 먹이고 최고의 학문을 배울 기회를 주었습니다. 잘만하면 바벨론에서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공부하던 중에 자기들에게 주는 고급음식이 우상에게 제사하고 물려낸 음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먹는 것이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것이 될까 두려워해서 앞으로는 왕이 내리는 음식을 거절하고 채식만 먹어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것이 잘못되면 출세는 고사하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만 올인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고 그에게 남보다 훨씬 나은 건강과 지혜를 주셨고, 바벨론의 총리로 등용되어 아주 오래오래 일하며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음식이 아니라 우리 생각과 영혼을 이 세상의 미신문화로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에 경계선을 긋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것은 해야 할 일이고, 저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경계선을 긋고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런 경계선이 없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은 이때는 이렇게 하고 저런 때는 저렇게 하는 선택이 아니라 언제든 오직 한 길로만 가는 올인의 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잠깐 동안인 세상에 살아가는 목적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들을 피하고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보여주어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복되신 뜻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오늘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만 올인 하는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질투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목축하여 얻은 짐승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리는 것과 장자를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바치는 것입니다.(18-20)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옥 같은 애굽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생명과 얻은 재물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 명절을 지키라고 하셨는데, 세 명절 모두 출애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명절은 유월절인데 이때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다음은 맥추절인데 이스라엘은 이 맥추절에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았고,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첫 곡식을 거둔 때도 맥추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물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과거를 기억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세 절기는 모두 추수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보리추수를 시작할 때이고, 오순절은 보리 추수를 끝낸 때이며, 장막절은 과일추수를 끝낸 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들에게 명절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셨고 풍성한 삶을 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질투의 대상이 된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은혜요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상속자의 오늘의 생활도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도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풍성한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 난 것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게 했을 뿐 아니라 모든 짐승의 첫 새끼를 바치게 하셨고, 아들도 장남은 하나님의 것이라면서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소나 양이나 모든 짐승의 첫 새끼는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고, 제물로 드릴 수 없는 나귀나 다른 짐승은 양이나 소로 바꾸어서 바치라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에게 엿새 동안만 일을 하고 일곱째 되는 안식일에는 절대로 일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비록 시간을 다투는 추수철이나 파종하는 계절에도 안식일에는 절대로 일하지 말라고 엄명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첫 새끼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보면 엄청난 손해였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바쁜 파종철이나 추수철이라도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신 것도 경제적으로 막대한 손해를 보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첫 새끼를 포기하고 중요한 시간을 포기함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힘으로 세상을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기억하고 고백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믿음과 똑같은 고백을 갖기 원하십니다.
창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살에 얻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가 달려있는 아들입니다. 그 아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은 우리가 보기에도 하나나님이 피도 눈물도 없는 분 같고,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분 같고, 아브라함을 파탄 내려고 작정하신 분도 같습니다. 그런데 장본인 아브라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우리 하나님이시다. 늙은 내게 아들을 주신 분이시다. 그분께서 바치라 하시면 더 좋은 것을 주실 계획이 있기 때문일 것이고, 이 아이를 불로 태워 바치면 하나님은 그 재속에서도 다시 살려주실 것이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무 망설임 없이 말씀대로 아들을 단에 올려놓고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올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순간 가로막으시고, 그의 믿음을 인정하셨으며, 아들도 죽이지 않게 하셨을 뿐 아니라, 바닷가의 모래 같은 후손을 약속해 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경험이나 과학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과학보다 그 과학의 근거인 우주의 법칙을 제정하시고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이 홍해 앞에 있든지 광야에 있든지,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이고 물질이고 삶의 대책이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그 사실을 믿고 고백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우리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야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웃이 어떻게 사나, 이웃만 바라보고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질투를 느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책임지시는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담대한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하였는데, 우리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그분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언약을 맺으시고 책임지신 하나님이 이 시대의 이스라엘인 우리를 그렇게 책임져 주십니다.
실패한 사람들에게도 다시 언약을 세우시고 스스로 얽매이시면서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자기 독생자까지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며, 그들에게 질투의 감정을 가지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여야 할까요?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 감격합시다. 우리도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께 올인 하고 그분만 의지하여 삽시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기도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모이는 자리요, 하나님께 올인하고 그분께만 문제의 해결을 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열심히 모여 기도합시다. 하나님만 사랑하며 순종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바라보는 이웃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께 굴복하게 하는 동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합시다.
삼대절기가 주는 영적 의미
출 34:!8-24 / 김양인 목사
어느 민족이나 고유의 명절을 갖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설날, 대보름날, 단오, 추석, 동짓날 등의 명절을 지켜 왔으나 현대에 이르러는 설날과 추석이 대표적인 명절로 남아 있고 나머지는 유명무실해 지고 말았습니다. 설과 추석은 중국인들도 큰 명절로 지키는데, 그들은 설을 춘절, 추석을 중추절이라고 부릅니다. 설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반기는 의미가 크고, 추석은 무엇보다도 가을 수확과 관련이 깊다고 봅니다. 곧 추석은 수확의 즐거움을 나누는 명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설이나 추석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명절이 되면 맨 먼저 조상의 혼령에게 제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런 전통은 지금도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한편,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자손도 고유한 명절을 지켰습니다.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 그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설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의 유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이스라엘의 경우는 삼 대 명절의 유래과 의미에 대하여 율법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명절은 인간들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명절들이 하나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중심이 되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민족의 명절인 설과 추석을 쇠면서 가족 친지들을 만나 혈육의 정을 나누는 것은 미풍양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가족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에게 명절은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조상 제사에 동참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율법이 명한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를 살펴보고 추석 명절을 대하는 성도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해 드리려 합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의 유래와 의미를 알아봅시다.
율법에 명한 삼대절기는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입니다.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 날부터 칠일 동안 지켰는데, 히브리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유대력으로 1월 14일을 유월절이라고 하며, 15일부터 칠일 동안을 무교절이라고 합니다. 아시는 대로, 유월절은 애굽 땅에 장자가 죽는 재앙이 임할 때, 히브리인들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발라서 재앙을 면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 밤에 애굽인의 집집마다 장자가 죽었으나 양의 피를 문에 발랐던 히브리인들은 재앙을 면했습니다.
그러면 무교절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출애굽기 12장 17절에 이르기를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고 하신 대로, 무교절은 히브리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첫 유월절을 지킬 때 짐을 다 사두고, 옷을 입고 허리띠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서 저녁에 잡은 어린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서 쓴 나물과 누룩을 넣지 않은 빵 곧 무교병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바로의 허락 하에 히브리 민족은 모세의 영도에 따라서 고센 땅을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관계로 반죽한 밀가루를 그릇에 담아 메고 출발했습니다. 무교절은 바로 이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명절에는 그 이름과 같이 칠일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었습니다.
무교병을 먹은 이유에 대하여 신명기 16장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2)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소와 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3)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히브리인들은 유월절 밤에, 쫓겨나다시피 서둘러 떠나느라 누룩을 넣어 부풀린 재료를 준비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무교병을 “고난의 떡”이라고 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무교절은 출애굽 당시에 한 동안 무교병을 먹어야 했던 역사적 사실을 재현함으로써 출애굽 사건을 잊지 않고 큰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히브리 민족과 이방 민족의 명절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명절은 우상을 숭배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 목적이 있지만, 이스라엘의 명절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념하고 감사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유월절과 무교절은 우리를 마귀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십자가 사건을 상징합니다. 유월절에 죽임 당한 어린양은 우리 인생들을 대속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어린양의 피를 대문에 바른 집 안에 있던 자들이 죽음의 재앙을 면한 것처럼,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무교절 역시 성도들이 받은 구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무교절에 먹었던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은 곧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히브리인들이 무교병을 먹었듯이 성도들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구약시대의 무교절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인 우리에게도 큰 유익이 됩니다.
히브리 민족의 두 번째 명절은 칠칠절인데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출애굽기 12장 16절에 이르기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고 하였고, 출애굽기 34장 22절에 보면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라고 했습니다. 맥추절은 무교절 이후 오십일 째 되는 날로서 밀이나 보리를 수확한 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로서 수장절과 함께 추수감사절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레위기 23장을 보면, 무교절기의 첫 안식일 다음 날에 곡식의 첫 단을 거두어 하나님께 요제로 바쳤으며, 그 날부터 일곱 안식일 곧 49일을 지난 다음 날을 칠칠절 곧 맥추절로 지켰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밀이나 보리의 처음 거둔 단을 하나님께 바친 것처럼, 사람이나 가축 중에서도 처음 난 것을 하나님께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의 경우는, 제물로 바칠 수 없으므로 은 다섯 세겔을 성소에 바쳐 대속했습니다.
여기서 무교절 첫 안식일 다음날에 바친 첫 곡식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그 후에 수확한 곡식들은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하신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의 대표로서 부활하신 것이며, 이는 장차 성도들이 부활에 참여할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맥추절은 단순히 밀이나 보리의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의 삼대 절기 중 세 번째는 수장절입니다. 출애굽기 34장에 보면, 세말 곧 연말에 수장절을 지키라고 명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이르기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추수감사절의 성격을 띤 명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추수감사절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는 수장절의 또 다른 이름이 초막절인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23장에 보면, 초막절을 지키는 규례를 이 같이 말씀합니다.
“39)너희가 토지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40)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너희는 매년에 칠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찌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월에 이를 지킬찌니라 42)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찌니 43)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말씀처럼, 초막절은 추수감사절이면서 동시에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특히, 그들이 유월절 밤에 고센 땅 라암셋을 출발하여 숙곳에 이르러 초막을 짓고 머문 것을 기념하기 위한 명절입니다. 초막은 안락한 집이 아니라 초라하고 불편하지만 출애굽 당시 히브리인들은 초막에서 지내면서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은 초막절이 되면 마당에 나뭇가지를 잘라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지내면서 출애굽 당시의 감격을 재현했던 것입니다.
초막절은 신약시대의 교회가 누릴 구원의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초막절을 지키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명절 끝 날에 성전 마당에 서셔서 외쳐 이르시기를 “37)…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생수의 강은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킨 것입니다. 지금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몸을 성전 삼아 임재하셔서 구원의 즐거움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항상 기쁨이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초막절은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영영한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을 말해 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여호와께 구속된 자들이 돌아와서 노래하며 시온으로 들어와서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사 51:11)고 하였는데, 이는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을 언급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인 무교절과 맥추절과 초막절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세 명절의 특징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셨으며, 그것도 이스라엘 자손에게 베풀어주신 구원과 보살핌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가진 절기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방 세계의 명절들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방 나라들의 절기는 대부분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지만 율법에 명한 삼대 명절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명절 기간 내내 하나님을 섬기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로써 우리는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데 그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을 나눔으로써 누리는 기쁨은 죄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기쁨입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얻는 기쁨은 죄로 오염되어 있으므로 결국은 유쾌하지 못한 상태로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말 가운데 하나가 흥진비래(興盡悲來)입니다. 흥이 다하면 슬픔이 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오염되지 않은 순전한 기쁨이므로 슬픔으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사야서 12장에 “2)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고 하였듯이, 성도들이 누리는 기쁨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므로 변함이 없고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도들이 누리는 구원의 기쁨을 목마른 사람들이 우물을 만나 시원한 물을 퍼 올릴 때의 기쁨에 비유합니다. 이러한 기쁨이 성도님들의 심령에 늘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은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 속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심령에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신령한 기쁨을 동반합니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에 보면, 어느 중국 시인의 이런 시구가 나옵니다.
得子愛情痛苦, 失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실료애정통고)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랑을 얻어도 고통이요 사랑을 잃어도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기쁨이 충만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세상에는 고통을 주고, 슬픔으로 끝나는 사랑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영원히 불변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6:22)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번 추석 명절에 부모 형제 친지들을 만나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될 터인데, 하나님을 자녀로서 먼저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친절한 태도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식구가 많아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라도 성도님들을 통해서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때로 기독교인으로서 거북한 분위기를 만날 때도 있을 것이지만 그런 경우에 양보와 이해를 통해서 덕스럽게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우상 숭배에 동참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조상 제사를 받들어 왔고 이러한 형편은 지금도 미풍양속이라는 이름으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0장 20절에 이르기를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혼령이 제사를 받기 위해 찾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했습니다. 한번 죽고 나면 그 영혼이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때까지 낙원이나 음부 가운데 한 곳에서 머물게 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보면, 부자는 죽어 그 영혼이 음부 불꽃 가운데 떨어졌고, 나사로는 죽자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 곧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부자가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크게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같이 대답했습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낙원과 음부 사이를 오갈 수 없듯이, 한번 죽으면 생존 세계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을 갖지 못한 부모 형제들은 제사에 동참하지 않는 성도님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타협하지 마시고 핍박을 기꺼이 받으십시오. 그러나 완강한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겸손한 태도로 왜 제사에 참예할 수 없는지 이유를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할 때 핍박하던 가족들이 감동을 받고 주님을 믿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한 사람이 핍박을 잘 이겨냄으로써 점차 모든 가족이 다 주님을 믿고 명절에 제사 대신에 추모예배를 드리게 된 사례를 여러 번 보았습니다. 본디 우리 민족의 명절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상관없이 조상 숭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할지라도, 이제 성도들은 설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을 하나님 중심의 명절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명절에 온 가족이 모여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음식을 나누며 즐거워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은 삼대 절기가 되면 성인 남자는 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명절을 지켜야 했습니다. 매년 세 번씩 모든 남자가 성전에 올라가서 일 주일씩 명절을 지키면 그 빈틈을 노리고 적군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 씩 여호와 너의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출 34:2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영토를 이민족들의 손에서 지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28장 7절에 보니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어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율법에 명하신 대로 삼대절기를 성실히 지켰을 때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우환이 없었으나,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절기를 범했을 때에는 이민족에게 짓밟히고 약탈을 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절기를 지키지 않았다 함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떠났으며,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위대한 구원을 망각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신약시대에는 성도들이 구약의 삼대절기를 지킬 의무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더 이상 어느 특정한 날이나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을 나누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롬 13: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무엇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혼과 몸과 생활을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님들의 심령 속에 추석의 기쁨과 풍성함을 능가하는 천국의 기쁨과 부요가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