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지혜 1,1-7; 루카 17,1-6 / 2023.11.13.;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이기우 신부
구약성경의 지혜를 간추린 지혜서에서는 아브라함 이래로 조상 대대로 전해준 신앙의 가치를 의로움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정의를 사랑해야 하고, 비뚤어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며, 거짓을 멀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는 이들을 멀리하시고, 당신을 불신하는 이들에게 당신을 감추신다고도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사람들의 숨은 생각을 모두 꿰뚫어 보시고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은밀히 나누는 말도 다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께 대해서 구약 시대의 유다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분의 심판 때문에라도 의롭게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다인들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대하여 선포하셨습니다.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 드려야 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관심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의 마음속에 계시므로 그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을 사랑해 드리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산수만 알던 학생들에게 방정식과 미적분을 가르치는 격이었던지, 그 당시 율법에 대해서는 해박하던 바리사이들도 알아듣지 못했고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답답해지신 예수님께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죄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방정식을 쉽게 풀 수 있는 인수분해를 가르치신 셈입니다. 오죽하면, 이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당시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던 가난한 이들에게 죄를 짓게 하면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더 낫다고까지 강조하셨습니다(루카 17,2). 그런데도 알아들을 귀가 없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엉뚱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질문만큼이나 엉뚱한 답변으로 응수하시고 말았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대로 되리라”(루카 17,6). 그렇게 선문답 같은 대화를 나누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정답은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었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는 대속적 행동이야말로 그분의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이 의로움을 넘어서는 거룩함입니다. 의로움은 신앙 진리의 산수요, 거룩함은 그 수학입니다. 의로우신 하느님을 섬기되,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도록 애를 쓰는 일, 이것이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을 지향해야 하는 의로움에 대해서 지혜서의 지은 이들은 특별히 독자층을 구별하여 당부하였습니다. 통치자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는데, 그들은 정의를 수호하는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통치자들은 종종 정의를 수호하여 공동선을 증진시키기보다 자신들을 지지하는 특권층들의 선을 채워주려고 불의를 저지르곤 합니다. 대기업들의 대표적 세금인 법인세를 인하하는 것도, 그들의 치명적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일본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것도, 또한 미국 주류 시민들의 패권적 편견을 가급적 한미동맹이라는 명분, 그러나 실제로는 준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맹종하는 것도 통치자들이 해방 이래 줄곧 민중들에게 가해 온 불의입니다.
하지만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의 권능을 시험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로 드러나기”(지혜 1,3) 마련입니다. 지혜는 간악하기 짝이 없는 자들의 영혼 안으로는 절대로 들지 않기 때문이며,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는 결코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엄정한 섭리를 드러내자면, 믿는 이들이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야”(지혜 1,1ㄴ) 합니다.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은 거짓을 피해 가고, 미련한 생각을 꺼려 떠나가 버리며, 불의가 다가옴을 수치스러워 함”(지혜 1,5)을 믿는 이들이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의식해야 합니다.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을 다 안다.”(지혜 1,7)는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강조하시기를,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루카 17,6)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장담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겨자나무는 공중의 온갖 새들이 깃들일 수 있을 만큼 크게 자라납니다. 그 씨앗 안에 생명의 에너지가 가득 담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씨앗은 비록 작아도 그 안에는 생명의 기운이 꽉 차 있어서 밀도가 100%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도 크기에 있어서는 보잘 것 없어 보일 수는 있어도 밀도에 있어서는 100%여야 합니다. 마치 물을 끓이는 냄비의 바닥이 100%로 촘촘하지 않으면 물이 샐 수 있기 때문에 버려야 하는 이치와 비슷합니다. 99.9%의 밀도로도 물은 샙니다. 즉, 0.1%만한 틈만 있어도 물은 새고 말지요. 그래서 반드시 냄비는 100%의 밀도로 만들어져야 쓸모가 있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도, 하느님께는 작아도 좋으나 꽉 차 있어야 쓸모가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서가 말하는 ‘순수한 마음’(지혜 1,1ㄴ)입니다. 믿는 이들의 믿음이 지니는 밀도와 순도에 따라서 불의한 통치자들의 간악함이 현세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실제로도 우리 믿는 이들은 현세의 악인들을 선과 정의로 심판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루카 2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