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녀가 그때 임신한 상태였는데, 아기 낳서 키운다고해서 사람들이 영혼결혼식도 시켜주고 그랬었는데.. 그 애는 어떻게 됐나몰라..."
스포츠에 도통 관심이 없으신 울 엄니까지 기억하고 있는 비운의 복서 "김득구"의 일생을 영화화한 "챔피언을 봤다.
2001년 봄...
너무 폭력적이며 조폭에 대한 미화로 악평을 받았지만,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수없이 많은 조폭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게 만들었던 곽경택 감독의 "친구"의 강렬했던 이미지를 기억한 채 나는 극장으로 들어갔다.
1982년 11월 14일
세계 챔피언이 되겠노라던 김득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사각의 링으로 올라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되었다.
가진거라곤 사지육신 멀쩡한 몸뚱이 뿐이던 70년대...
무일푼으로 서울에 상경한 강원도 촌뜨기 김득구는 권투를 시작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가난했던 시절의 모습이 조금은 미화 되었을지는 모르나, 김득구는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성실히, 그리고 열심히 살아간다.
열심히 노력하는 김득구는 사랑에 빠졌을때도 마찮가지다.
사랑하는 여자가 탄 버스를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츄리닝을 입고 열심히 좇아가는가하면, 아버지가 반대하신다는 말에 그녀가 다니는 교회도 찾아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얼굴도장을 찍는다.
허름한 자취방 벽에 붙여놓았단 글귀 '여자는 인생의 걸림돌이다'를 '디딤돌'로 바꿔놓은 장면에선 그의 단순하지만 순박한 모습에 기분좋은 웃음을 만들어준다.
김득구는 말한다.
"너 팔 세게 달린 사람 봤어? 권투처럼 정직하고 공평한건 없어, 남들이 손을 열번 뻗을 때 나는 열다섯번 뻗으면 되는거야."
너무나 단순한 말일지 모르지만, 이 말은 권투를 하는 김득구에게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위한 절대적인 법칙이였고, 나에게는 이리저리 통밥만 굴리며 주어진 일에 게으름을 부리는 모습이 부끄러워 얼굴을 화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곽경택 감독은 유난히 픽션에 집착한다.
"친구"에서도 감독 자신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했으며,
"챔피언"역시 감독이 열일곱살때 TV에서 김득구와 멘시니의 경기를 보며 서러움과 분함에 어쩔줄을 몰라 뇌리에 정확히 박아 넣었던 "김득구"라는 이름 석자를 떠올리며 영화화했다.
픽션의 단점은 결말이 조금 엉성하거나 허무하다는데 있다.
조선 말기 최고의 화가 장승업의 삶을 다룬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에서도 그랬고, "챔피언"도 그렇다.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인물에대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배운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가슴설레이고 흥분되었지만, 그 결말은 뭔가 부족한 듯한... 아쉬움이 짖게 깔린채 자막이 올라가곤 한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픽션은, 그의 삶을 통해 그 시대의 아픔과 고뇌, 그리고 기쁨과 가슴벅찬 감동을 느끼며 그 안에 내 삶을 반추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혹자들은 기대만큼은 아니였다는 말들도 하곤 하지만...
나는 "김득구"라는 사람을 알았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맛봤으며, 영화가 개봉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세계챔피언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했던 김득구는 분명 챔피언이였다.
마지막으로 "친구"에서는 부산 사투리를, "챔피언"에선 강원도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해내며, 18개월을 오로지 김득구가 되기위해서만 매달린 내가 사랑하는 배우 유오성의 연기는 절정에 달했으며, 이번에야말로 한국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어보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