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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설명] 지난 10월에 오까가 동경에 와서 맛있는 햄버거 가게에 가서 찍은 동영상입니다. 넘 긴장한 탓으로... 갑작스럽게 들이민 카메라라서. 히~ 그런것 치고 은근 행동과 시간이 너무 맞아 떨어지지만... 역시나 짜고치는 고스톱은 아니었음당... '아~~나는 진정 연예인이란 말인가~~'
헤헤. 암튼 한껏 베어 물어야한다는 생각에. 오히려 쬐끔밖에 못먹고.. 카메라앞에서 약간 흘리는... 드러운 지선이 모습이 보였지만.. 히히 이것이 솔직한 지선이로 생각되어져.. 여과없이.. 은근 느끼하고 어색한 오까모습까지.. 공개함당~ ^^(이지선)
2000년 7월 29일 오후 11시 30분쯤 서울 한강로 일가에서 서울 후암동 42살 김 아무개씨가 만취 상태에서 갤로퍼를 몰다가 마티즈 승용차 등 6대와 충돌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그 때 불이 난 마티즈 승용차에 타고 있던 이 씨는 온몸에 2도의 중화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다.
이 씨의 상반신은 사고차량에 끼어 짓이겨져 불길에 휩싸였고, 급히 병원으로 옮겨 졌으나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처했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뒤 구사일생으로 깨어난 그녀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고 당시 이화여대 사범대 유아교육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이 씨는 순식간에 청순한 외모를 잃어야 했다.
그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한다.
"새벽 4시, 폐에 가스가 찼기 때문에 그것을 빼내는 호스를 옆구리에 박고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아직 살았다고 할 수 없으며 아주 위험한 상태니 계속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지선이는 지옥같은 죽음과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의사선생님이 내 가슴을 두드리며 '이제 숨 쉴수 있지? 혼자서 숨 쉴수 있지?'라고 물으셨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떡이자 목 깊숙히 박혀있던 산소튜브를 뽑아내었습니다. 그때의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엄마와 말도 합니다. 저는 다 나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살기 위한, 살아남기 위한 싸움의 작은 시작에 불과한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 그녀가 2002년 12월 첫날 오후 11시50분 이런 일기를 남겼다.
'12월의 새날이 밝았구요~ 저는 오늘 시험을 봤답니다. 오늘 시험장에서 만났던 '이지영 자매' 쵸콜렛 넘 고마웠고요. 찾아와준 마음도 넘 고마웠어요. 그리고 지치지않을 물음표라는 재미난 책을 보내주신 '팬OG'님. 잘받았습니다. 오늘 도착한 책 보내주신 이은주 자매 고마워요. 그리고 넘넘 반가웠던 편지 보내준 친구 Yoon24! 이멜이라도 보낼수 있게 주소좀 알려주라. 모두들 감사드려요. 글 잘 받았습니다.'
그녀는 또 4일 오전 4시 일기에서 '아빠랑 엄마랑 '닛꼬'라는 곳으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온천도 하고, 산위에서 첫 눈도 만나고, 오랜만에 아빠도 놀리면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답니다. 이틀만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많은 글과 엄청난 양의 메일(어제 오늘 편지만 100통) 보내주신 글들, 마음들.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께요. 그리고 목요일부터 국민일보'나의길 나의 신앙'이란 코너에 제 글이 실리게 됩니다. 부끄럽지만 기도 부탁합니다. 지금까지 써 온 이야기가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만 영광만이 잘 드러날수 있도록 기도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지선 씨의 안타깝고 너무나 아름다운 사연을 게시판에 소개한 네티즌(denda7@paxnet.co.kr)은 "하지만 그녀는 용기와 희망을 잃지않고 꿋꿋하며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장 받고싶은 선물이 "예전의 피부"라고 자신의 소원을 밝히기도 하며... 과연 나 같으면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제가 알기론 그녀는 아마 지금 성형수술을 위해 일본에 체류중인가 봅니다. 제 자신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이걸 보고 누가 현실이 힘들고 어렵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꿋꿋이 희망을 잃지않고 항상 밝고 명랑하게 사는 이 씨에게 정말 끊임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지선씨가 자신의 홈페이지 주바라기 (http://www.ezsun.net)에 남긴 '나의 이야기 (my story)' 전문이다.
[notice] My Story를 쓰는 나의 마음
제가 '이만큼~고생했다'고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고, 여러분을 울리기 위해서, 동정을 받기위해서 쓰는 것은 더더욱아닙니다.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 누구도 살수 있을거라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살리셨고 또 사랑하셨음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부디 제 이야기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시길 기도합니다. (2001.10.13)
사고...
[뉴스 광장]만취운전 6중 추돌사고 (2000.7.30)
⊙ 앵커: 어젯밤 11시 반쯤 서울 한강로 일가에서 서울 후암동 42살 김 모 씨가 만취 상태에서 갤로퍼를 몰다가 마티즈 승용차 등 6대와 충돌했습니다. 이 사고로 마티즈 승용차에 불이 나서 차에 타고 있던 경기도 안양시 갈산동 23살 이 모씨가 온몸에 2도의 중화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갤로퍼 승용차 운전자 김 씨는 혈중 알코올 농도 0.35%의 만취 상태였습니다.
2000년 7월 30일..
밑의 주소를 입력하시면 오빠와 제가 탔던 차가 폭발한 화면을 볼수 있습니다.
http://news.kbs.co.kr/newsplaza/20000731/2000073111.htm
The Day
2000년 7월 30일
밤 10시 10분에 학교 후문에서 오빠를 만났습니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날이면 늘 거기서, 그시간에 만나 오빠와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왔었습니다. 그날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오빠를 만나 차에 탔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후로 아주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이 후로는 기억이 나질 않아 오빠에게 들은 이야기를 대신 씁니다.) 저는 내일 초등학교 동창도 만나야 하고, 친구도 만나야하고, 학원도 가야하고, 과외도 해야하는데 어떻게 약속을 정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용산쯤 와서 신호등이 바뀌어 차가 섰습니다. 오빠가 내 쪽을 보며 "그래서 누구를 만난다구?"라고 말했고 뒤에서 '끼-익-'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그때 오빠가 "어디서 사고나는가 보다"하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이미 그 사고는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오빠, 지금이 몇년도야?
오빠가 정신을 차린 것은 차가 빙글빙글 돌고있을 때였습니다. 며칠전 여행에서 오빠와 내가 탔던 놀이기구를 탔나?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머리 뒷쪽이 후끈하여 일어나 옆을보니 조수석에 앉아있던 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자리에서 바로 안전벨트를 풀고 열려진 창문(오빠는 늘 창문을 열고 다녔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으로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빠져나왔고, 조수석 쪽으로 돌아왔습니다. 혹시나 동생이 그 옆으로 떨어졌는가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지선이는 거기 없었습니다.
차 뒤쪽을 보니 흰양말을 신은 제 다리가 보였다고 합니다. 갤로퍼와 우리차 사이에 다리가 걸쳐져 있었고 이미 상체는 불길이었습니다. 오빠는 제 두다리를 잡고 끌어당겨 보았습니다.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체를 위로 띄우듯 당겨 저를 꺼내었습니다.
오빠는 불길에 휩싸인 동생을 보고 급한마음에 불을 끄려고 저를 안았습니다. 이때 오빠 팔에도 불이 붙었고 순식간에 피부가 타서 벗겨졌습니다. 그래서 오빠는 입고있던 티셔츠를 벗어 불을 끄기 시작했습니다. 불을 다껐을때쯤 한 택시기사 아저씨가 수건을 들고와 도와주었을뿐, 큰사고를 구경하느라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빨리 비켜요! 차 터져요!' 누군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오빠가 바삐 저를 안아 몇발자국 옮겼을때 오빠와 제가 탔던 차가 폭발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1-2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정말 모든일이, 이 엄청난 일이 순간에 일어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정신이 든 저는 오빠에게 '오빠,지금이 몇년도야? 2000년도야?'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꿈이라고 생각되었나 봅니다. 무의식의 지선이는 꿈이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아직도 오빠 가슴에서 잊혀지지 않는 말을 합니다. '오빠, 나 이렇게 어떻게 살아. 나 죽여줘.'
착한 우리오빠는 제가 아파서 고통받을때 마다 아마 이말을 되뇌였을것입니다. 자신이 괜한 짓을 했던 것은 아닌가...생각할때도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내게 미안한 마음이 든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빠의 슬픈 눈에서, 어쩔땐 눈물을 참기위해 웃는 그 슬픈 웃음 에서 그 마음을 읽어낼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TV에서 뮤직비디오 장면에서 차에 불이나 밖에 있던 여자가 어찌할 바를 몰라 울부짓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걸 보던 오빠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저렇게 밖에서 보고만 있어야 되는건데 괜히 꺼내가지구 이 고생을 시킨다. 그치? 니가 발을 내밀고 있어서 그래~ 으이구~'하고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요즘에 살맛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백번 잘 꺼냈지!'라고 했지요.
오빠가 참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2001년도 입니다. 저는 날마다 날마다 꿈처럼 행복합니다.
지선아, 잘 가
응급실로 들어갔습니다. 지선이에게 의사들이 달려들었지만 별 방도가 없었습니다. 잠시 기절했던 지선이는 갑자기 일어나 뜨겁다고 좀 치료해달라고 소리지르더니 다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의사들이 오빠의 팔을 치료하려고 하자 오빠는 자기는 괜찮다며 동생을 봐달라고 했지만 동생은 지금 화상이 문제가 아니라며 맥박조차 안 잡힌다고 이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줄게 없으니 화상전문병원으로 옮기게 될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지선이에게 산소호흡기가 끼워지고 다시 앰뷸런스를 타고 남매는 한강성심병원으로 향하였습니다.
앰뷸런스 안에서 오빠는 끝도없이 주기도문만 외웠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오빠는 정말이지 한강을 건너는 다리위에서 지선이를 안고 뛰어내리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오빠는 주기도문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다 작별인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선아 잘가. 지선아 너 너무나 좋은 딸이었고 동생이었어. 누구보다도 예쁘게 착하게 살았고 그렇게 평생 널 잊지 않을게.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조금만 기다려. 지선아 잘가" 오빠가 그렇게 인사를 했을 때 지선이는 그때까지 계속 너무나 괴롭게 내던 신음소리를 그쳤습니다.
한강성심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와서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호흡조차 잡히지 않았고 머리 뒤통수는 다 찢어져 너덜거렸으며, 이미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응급실안에 고기 탄 냄새가 진동하였고 얼굴은 새카맣게 타서 누군지 알아볼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의사가 오빠에게 치료하러 치료실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일지 모르니 동생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오빠가 인사를 하자 지선이는 부르르 떨던 다리를 멈추었습니다. 오빠의 인사를 받는 듯하였습니다.
잠시 후 아빠와 엄마가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아빠가 '지선아, 아빠야. 아빠가 왔어. 괜찮을꺼야'라고 말했더니 의식이 없다던 지선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엄마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지선이를 보고 서 있을수도 없었고, 딸의 탄냄새를 맡고 있을수도 없었습니다. 그날 어찌할 바를 몰랐던, 정말 앉을수도 설수도 없는 상황, 엄마는 병원바닥에서 그냥 굴렀습니다.
아빠는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가망없어 보이는 지선이를 위해 애쓰셨습니다. 지선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아빠는 지선이가 의식이 있다며 의사를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지선이 머리를 깎고 찢어진 뒷통수를 꼬매고, 응급치료를 하고, 온몸을 붕대로 감았습니다. 그리고 CT촬영을 하였고 다행히 뇌는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새벽 4시, 폐에 가스가 찼기 때문에 그것을 빼내는 호스를 옆구리에 박고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아직 살았다고 할 수 없으며 아주 위험한 상태니 계속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지선이는 지옥같은 죽음과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이 때를 위한 믿음이라
새벽 6시, 사고소식을 듣고 전가화 목사님이 달려오셨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 엉망이 되어버린 지선이와 함께 기도를 하신후,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목사님은 한 20분을 아무말도 하지 않으신 채 앉아계셨습니다. 사선을 넘는 고난을 겪으셨던 목사님도 이 기가막힌 상황에 차마 엄마를 위로할수도, 지선이가 괜찮을 것이라고 말하시기가 어려우셨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 때를 위한 믿음이라, 이 사건을 위한 믿음이라.' 십년이 넘게 하나님을 믿어온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일이.. 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그간의 신앙생활이, 지금 가진 믿음이 이 어려운 때를 이겨나가기 위한 것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을때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어려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우리가족은 그럴때마다 이말씀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고, 힘이되었으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어디선가 웅~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빙글빙글 도는것 같기도 하고, 보이진 않지만 누군지 모를 여러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습니다. 우습지만 저는 외계인에게 잡혀서 우주선을 타고 실험을 당하고 있는것같이 느껴졌습니다..
'이게 뭐지? 꿈인가? 자고있나? 이게 뭐지? '
그러다가 '누가 구급차좀 불러주세요! 지선아 괜찮아. 괜찮을꺼야.' 라는 울부짓는 오빠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습니다. 시끄럽고 정신없는 사고현장의 소리가.. 소리만이 제 머리속에 계속 떠올랐습니다. 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내게 뭔가가 아주 큰 일이 일어난 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사고구나.. 사고가 났구나...내가 다쳤구나' 그 때 그 기분을 지금도 잊을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당황스럽고 무서운 그 기분... 무섭다는 말한마디로는 표현이 안되는 느낌...공포였습니다. 되돌릴수 없는 길을 지나온 것을 직감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죽으려고했었습니다. 얼마나 다쳤는지 모를때였는데, 정신이 왔다갔다 할때였는데 어떻게 그런 못된 생각까지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산소호흡기로 목을 눌러 산소가 들어오지 못하게 해보았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몸에 무언가 줄이 달려있어 그걸 뽑으면 죽을까 싶어 발로 당겨서 뺀것이 나중에 알고보니 겨우 소변을 받아내는 줄이었습니다.
내 힘으로 불가능하자 가스펠송을 부르기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뒤에 가사는 생각지도 않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간다고..그렇게 천국으로 하나님께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계속 불렀습니다. 정신이 있는 동안은 부르고 또 불렀던것 같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 하나님께 가고 싶다고,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 찬양을 하고 있을때 믿음의 집 가족들,시온성가대 또 사랑하는 식구들의 간절한 기도가, 뿌려진 눈물이, 안타까운 마음들이 하늘보좌를 흔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지선이,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을 만나 이렇게 살아서..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전하고 증거하며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라고... 하나님은 제게 그런 계획이 있으셨나 봅니다.
죽음에서 삶으로
그러던 어느날, 면회시간에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는 온몸이 부어올라 볼수도 말할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게 손발을 묶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엄마가 발을 묶은 끈을 풀어주어 발로 글씨를 썼습니다.
"여기가 어디야?"
엄마와의 첫 대화는 그러했습니다. 얼마전 친척분이 중환자실에 계셨던 적이 있어서 면회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엄마는 하루에 세 번, 삼십분씩 만날 수 있었습니다. 면회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고, 정작 엄마를 만날수 있는 시간은 너무 짧아서 그것이 중환자실에서 있는 동안 화상치료만큼이나 힘들었습니다.
저에겐 생명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한가지 더 있었습니다. 저는 사고당시 눈에 콘텍트렌즈를 끼고 있었습니다. 얼굴이 까맣게 타버렸는데 눈안에서 렌즈가 녹아버린 것은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이젠 지선이가 살아도 앞을 볼 수 없게되는 것은 아닐까... 온가족들은 걱정하였습니다.
몸이 퉁퉁 부어있었기 때문에 렌즈가 녹았는지 조차 확인할 수 없는 며칠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사고 난지 4일째 되던 날, 붓기가 조금 가라앉으면서 전혀 녹지않은 렌즈를 꺼낼수 있었고 그것을 간호사님께서 엄마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만큼이나 중요한 저의 눈을 지켜주셨음을 감사했습니다.
심한 화상의 경우 대개 일주일이 생사의 갈림길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병원에서는 저를 살 가망이 없는 환자로 분류하여 간호스테이션에서 가장 가까운 침대에 두었습니다. 제가 2층 중환자실에 있던 40일간, 그 침대에 있었던 환자중에 살아난 사람은 저 하나였습니다.
일주일이 생사의 고비라는 그동안. 폐에 차있던 가스를 제거하는 관도 빼어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의사선생님이 내 가슴을 두드리며 "이제 숨 쉴수 있지? 혼자서 숨 쉴수 있지?"라고 물으셨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떡이자 목 깊숙히 박혀있던 산소튜브를 뽑아내었습니다. 그때의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엄마와 말도 합니다. 저는 다 나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살기 위한, 살아남기 위한 싸움의 작은 시작에 불과한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2001년 10월12일)
* 이 기사는 인터넷신문 뉴스킹 에서도 보실수 있습니다.
편집시각 2002.12.04(수) 16:10 KST
아무렇지 않게.. 남의 이야기로만 들어오던 뉴스 속 '이 모씨'가 되었습니다. 그 엄청나고 무서운 불속에서 건지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자기 팔을 태우면서까지 동생을 구해낸 오빠의 용감함과 사랑에 감사하며.... 이제 덤으로 사는 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합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오빠와 나는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참 이상한 날이었습니다. 공부를 하려고 앉았지만 오빠도 나도 무언지 모를 기분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집에 갈까말까, 저녁을 먹을까말까, 만나서 같이 먹을까말까...별것도 아닌 일에 우리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흘렀습니다.
신호대기하고 정지해 있던 우리차를 향해 술을 마시고 이미 작은 사고를 내고 도망치려던 갤로퍼가 돌진해와서 박았고, 우리차는 그 충격으로 앞차와 충돌하고, 또다시 중앙선 건너편에서 오던 차와 충돌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차가는두바퀴 돌게되고 다시 그 갤로퍼에 가서 박혔습니다.
처음엔 지선이를 구해낸 것이 실수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일이 실수가 아니었음을 우리 하나님께서 계속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미 지선이 안에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나타내실 것으로 믿습니다.
앰뷸런스가 오고 지선이와 오빠는 용산중대부속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오빠와 지선이가 용산 전쟁기념관옆 신호대기에 선후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해있었습니다. 더 이상 평화로운 주일밤에 집으로 향하던 남매가 아니었습니다. 검게 탄 동생, 맨발에 반바지만 입은 검게 그을린 오빠, 그렇게 변해 있었습니다.
너무 기가막혀 눈물도 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우리 지선이 교통사고 났어. 지선이 죽는대"라고 가깝게 지내는 권사님께 전화한통을 했고, 곧 이모와 삼촌들, 목사님들, 전도사님, 그리고 권사님 집사님들이 병원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사고가 나고 며칠동안은 기억이 없는데 지금도 뚜렷이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정신이 돌아오는 무렵의 기억인것 같습니다.
사고후 며칠간 저는 의식이 있었다가 없어지고...를 계속 반복했습니다. 타버린 몸이 부어오르기 시작하여 붕대로 싼 얼굴에 구멍이라고는 눈, 코, 입밖에 없는데 그곳으로까지 부어올라 저는 정말 쳐다보기 어려울만큼 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병원이야. 중환자실이야. 지선이가 다쳤어...."
"그럼 언제언제 만날 수 있는데?"
하니리포터 김성훈 기자/ webmaster@newsking.co.kr>webmaster@newsk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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