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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프리드리히 von Naver(카페닉)님께서 대신 번역한걸 기반으로 허락맡아가면서 본문과 상황에 맞게 조금 의역도 섥어가면서 수정했으나 만일 지적할께 있으신다면 부탁드립니다.
카이저라이히 포럼 사이트가 2월경에 닫힌것으로 인해 원문을 찾기 힘든 관계로 만약을 위해 오래전에 복불해둔 원문파일도 올렸습니다.
작성자 : Kornilov
(카이저라이히 개발진에 참여하고있으나 최근엔 활동이 덜한듯)
아무르 사변
1935년 7월~1935년 8 월
트란스아무르(정식 국호: 러시아 자유국)는 1925년, 콜차크의 정변이 실패한 후 그에게 충성하는 군대가 구 러시아 제국령 중 유일하게 일본이 통제하던 영역으로 탈출하면서 설립됐다. 일본과 동맹 간의 이견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본은 자신이 속한 협상국이 반대하는 한이 있어도 충실한 괴뢰의 도움을 얻어 러시아령 극동에서의 영향력과 지배력을 강화하려 들었다. 콜차크는 일본의 허수아비 노릇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친세묘노프 세력과 협상국의 나약함이 자신의 독립정책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치명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트란스아무르가 "옛" 러시아의 일부로서 보수적이며 부동적인, 좌익 및 급진적 요소들을 용납치 않는, 진정으로 러시아다운 사회를 보존한 것과 달리 즉 좌익 SR, 중도 및 우익 SR는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거의 "중도좌파적인" 사회주의자들과 농민적 연방 러시아 공화국을 이끌면서도 모든 영역에서 각자의 이익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주의 : 이 부분은 직접 일부 수정한거때문에 의역이 심함)
러시아는 변해있었다. 약해지고 분열된 우익 SR 대신에 "새로운 사회"의 정당이 있었는데 사빈코프의 NRPR는 트란스아무르의 지지자들이 선호하는 옛 러시아의 모든 것을 되돌려놓겠다 주장하였다. 더 보수적이던 트란스아무르 사회의 구성원들에겐 케렌스키의 실수로 탄생한 기관이자 러시아를 통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러시아 상원이 곧 희망이었다. 최소한 트란스아무르의 눈에는, 시베리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웅게른이 통제하던 자바이칼 부분 제외)를 따라 영향력을 유지하던 군 역시 러시아의 힘을 상징하는 또 다른 존재였다. 마침내, 콜차크 지지자들의 아들 세대인 트란스아무르의 젊은 시민들은 트란스아무르의 존재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1939년~40년 및 1945년 이후 OTL의 백계이주자들과 그 자식 세대가 친소비에트적 경향을 띄게 된 것과 같은 상황이 이미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우크라이나나 백루테니아 등의 국가들과 달리, 콜차크 체제는 현지 민족주의를 활용해 친러시아파나 러시아에 우호적인 여론을 축소시킬 수 없었다. 세묘노프의 부패정치에 질린 인민은 모국과의 재통일을 바라고 있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트란스아무르 병사 4인의 탈영 사건은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트란스아무르의 도시들 중 러시아와의 국경에 접한 도시들은 꽤나 흔했다. 그러나, 탈영자의 수가 너무 많다고 판단한 트란스아무르군 측은 병력을 동원해 이들을 체포하고자 했다. 당시엔 러시아와 트란스아무르 간의 국경이 불분명했던 탓에 양국 사이에 놓인 아무르 강이 실질적 경계가 되었다. 트란스아무르군이 대 우수리 섬의 서쪽에 최대 50명까지 주둔 가능한 작은 군사초소를 보유하고 있긴 했으나, 강에 존재하던 다수의 섬들은 러시아나 트란스아무르 중 누구의 통제권에도 들지 않았다.
7월 5일 트란스아무르는 4명의 탈영병들이 러시아로 넘어가기 위해 도강을 기다리던 섬의 서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미 1930년대 초에도 1백여 명의 병력이 탈영병들을 수색하기 위해 섬으로 파견된 바 있었으나, 러시아의 반응은 이전과 달랐다. 트란스아무르군의 전진을 침공으로 판단한 중장 로코소프스키는 하바로프스크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마지막 역인 포크로프카 초소에서 군을 지휘하며 트란스아무르군을 공격했다.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던 트란스아무르군은 현장을 벗어났다. 하바로프스크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트란스아무르군은 대 우수리 섬, 혹은 언론이 그냥 "섬"이라 표현한 곳의 서쪽에 남아 러시아군의 진군을 늦추려 했다. 한 주를 넘기고 또 다른 한 주의 반을 지나가는 동안에도 총격전은 계속됐다. 러시아(언론의 표현과 같이, 러시아는 이 작은 섬에서의 교전을 "일본 괴뢰들"에게서 러시아의 일부를 해방하는 것이라 여겼다.)든 트란스아무르든 누구도 전면전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콜차크와 세묘노프의 보복에 가족들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던 병사들에게 소규모 전선의 포기는 무섭게 다가왔다. 페트로그라드는 물론 블라디보스토크에게도 이는 그저 작은 사건에 불과했다. 트란스아무르가 네 탈영병들에 대한 추격을 중지하는 한편, 케렌스키는 섬의 동부 지역에서 군을 철수시킬 것을 약속했다. 7월 18일 러시아는 파견 병력에 "해당 도서엔 보호할 러시아 민간인이 전무하므로 부대는 7월 21일 포크로프카 초소로 귀환할 것"이란 명령을 하달했다.
러시아군 내부의 급진파는 다수의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비겁한 결정에 매우 불만족스러운 자세를 보였다. 이들은 일본이 개입하기 전에 재빨리 트란스아무르를 꺾을 기회가 충분했으며, 설령 일본이 개입하더라도 그때 쯤이면 펑톈 정부가 중립으로 남는 동안 일본 혼자 러시아와 트란스아무르군의 잔존세력을 상대해야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급진파는 러시아가 최소한 하바로프스크만이라도 점령할 의지를 보여야 했다고 여기면서, 만일 트란스아무르를 합병했더라면 굳이 전면전을 각오하지 않을 일본은 손도 쓰지 못했을 것이라 판단했다.
7월 20일 새벽, 아무런 휘장도 걸치지 않고 최고의 러시아제 소총으로 무장한 3백여 명의 전투원이 트란스아무르군을 포위했다. 러시아군이 끼어들면서 교전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트란스아무르군은 저항을 포기하거나 러시아와 신원불명의 전투원들이 추격할 수 없는 아무르 근처 펑톈의 국경으로 달아났다. "러시아에 영광을! 영웅들에게 영광을!"이란 사빈코프의 표어 아래, 3백여 명의 전투원들은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지휘한 중장 로코소프스키를 맞이했다. 대원들은 자신들을 NRPR의 전투반에 속한 아무르 의용대대라 밝혔다. 대원들은 섬의 접수를 위해 블라고베셴스크에서 이곳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아무르 대대의 파견 목적과 주체를 이미 알고 있던 로코소프스키는 환담 후 모스크바에 "러시아 병력이 도서 서부의 민간인 3백여 명 전원의 안전 확보"란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곧, 로코소프스키의 군대와 아무르 대대는 러시아에서 진정한 영웅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도시에서 1925년 이래의 첫 승리를 축하하며 "섬은 우리의 것!"이란 구호를 내질렀다.
상황은 러시아와 일본 모두에게 급박하게 전개됐다. 케렌스키는 러시아가 대일전을 위한 대책의 미비를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상정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특히나 중요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7월 24일까진 완전히 개통해야 하는 상황에서 웅게른이 쉽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도 불확실했다. 펑톈과 독일의 입장 또한 확신할 수 없었다. 역내 러시아 함대는 분쟁을 견뎌낼 수 없을 테였다. 한편으로, 불쾌한 깜짝 선물을 건네받은 일본은 특히 트란스아무르군과 정부의 행동에 불만했다. 하바로프스크의 시민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한편 다른 트란스아무르의 시민들과 주민들은 러시아군이 입성하기만을 기다렸다. 콜차크 체제에 대한 지지도가 낮은 상태에서 러시아군이 등장하면서, 트란스아무르에선 러시아와 현지 유격대 모두를 상대로 한 끝없는 전쟁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트란스아무르군의 수준이 1918년과 같이 떨어지자, 트란스아무르를 통제권에 둘 수 있다는 보장을 할 수 없던 일본은 트란스아무르와 손잡고 "붉고 증오스러운" 체제에 맞서는 대신 분쟁에 대한 전면적 참여를 갑작스레 결정했다. 양측 모두 이와 같은 상황에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분쟁은 청과 독일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결국 러시아와 일본은 모두 독일에게 해당 분쟁을 끝내기 위한 해법을 요청했다. 8월 초 카이저는, 섬의 통제권을 러시아와 트란스아무르 누구에게도 부여하지 않는 동시에 트란스아무르가 섬에서 초소를 철거, 탈영병 넷은 그의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에 잔류할 수 있도록 한다는 해법안을 제시했다. 단기 분쟁에서의 실질적 승자는 러시아였으나, 그럼에도 러시아군을 섬에서 철수시킨 케렌스키는 러시아에서 가장 증오받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으로 좌익 SR들과 NRPR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양측은 투표를 통해 하원 해산을 통과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케렌스키의 파벌이 주류를 이루던 러시아 의회를 해산시켰다. 10월 중순에 치러진 일련의 선거는 러시아의 정책을 완전히 뒤바뀌어놓을 준비를 마쳤다.
막바지: 1935년 9월~1935년 12월
9월, 모든 정당들과 다양한 정치집단들은 다가올 선거에서의 이익을 위해 새로운 동맹을 찾고 있었다. 국가를 트란스아무르와의 전쟁으로 몰아갈 뻔했음에도 NRPR이 가장 많은 표를 얻을 것이란 건 자명했다. 사빈코프가 은행과 대규모 산업계에 소유권 유지의 공식적 보장과 더불어 자신의.당이 이길 경우 정부 주도의 투자가 이루어지도록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NRPR은 러시아 상류층의 지지도 얻게 되었다. 사빈코프의 선언은 경제노선이 NRPR이 주도하던 국가인민주의적 정책 가운데 마지막 사회주의적 보루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졌다. 지도자(Vozhd)의 결정에 따라 이러한 흔적은 모두 사라지게 됐다.
사빈코프가 러시아의 신흥 상류층으로부터 막대한 지지를 얻었다곤 하나, 당의 노선 변경은 지지자 일부를 좌익으로 움직이게 했다. 마리아 스피리도노바(Maria Spiridonova)와 같은 일부 당원들이 아무르에서의 분쟁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점령당한 트란스아무르 노동계급의 해방”으로 보긴 했어도, 좌익 SR은 분쟁에 대해 실질적으로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부 당원들은 1905년 및 1918년과 같은 혁명을 일으킬 것을 제안했으나, 당 지도부는 혁명 시 좌익 SR이 러시아 내 민족주의 집단의 지지를 잃을 뿐만 아니라 1917년 러시아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고자 했던 반러시아 국제 단결에 좌익이 되려 기여하게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때로는 민족 대중주의적이기까지 했던 좌익 대중주의 정책과 1918년 반란 당시의 반 볼셰비키 태도는 좌익 SR을 러시아 내부 정치에서 상위권에 머물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요소였다.
하원 선거 전까지 좌익 SR의 행동은 상당히 격렬했다. 당내 급진파는 필연적인 NRPR의 승리와 함께 사빈코프가 하원을 가장 먼저 노릴 것이라며 좌익 SR이 체제에 저항할 새 혁명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중도 SR 소속이였던 빅토르 체르노프와 같은 다른 당원들은 하원에서의 멘셰비키 정당 및 중도파와 연합한 "인민전선" 관념을 제시했다. 체르노프는 연합만이 사빈코프의 승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사빈코프가 경제정책에 있어서 사회주의적 관념을 거부하고 상원의 다수가 요구하는 대로 이끌려간다면 하원 해산 한 해 내지 두 해 안에 좌익 SR이 더 많은 지지를 얻을 것이라 예상했다.
케렌스키가 이끄는 중도파 역시 좌익 SR을 비롯한 다른 좌익 정당들과의 연합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는 곧 케렌스키가 좌익 SR에 의존하게 됨을 의미했으나, 왕당파들이 NRPR과 일시적 동맹을 결성하고 상원을 도와 좌익 척결에 나설 가능성이 있었기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한편, 왕당파들은 분열되어있었다. 일부는 NRPR과의 동맹만이 기나긴 위기에서 러시아를 구원할 것이라 여겼으나, 다른 이들은 좌익 SR과 NRPR이 모두 강력한 공화정 지지자들이므로 왕당파들이 별개의 세력으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5년 10월 25일 선거 결과가 공표됐다. NRPR이 32%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민족주의 정당이 하원 내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좌익 SR과 멘셰비키 동맹 역시 그에 못지 않은 25%의 표를 차지했다. 이어 케렌스키의 중도파가 득표율 10%로서, 만일 중도가 좌익이 힘을 합친다면 사빈코프의 야망을 저지할 수도 있었다. 키릴 블라디미로비치가 이끄는 왕당파들은 거의 13%의 표를 얻었다. 보수대중주의적 성향을 띈 드미트리 로마노프의 독립 정당이 이에 더해 10%의 표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10%는 군소 정당들이 가져갔다. 이러한 결과는 러시아의 누구도, 케렌스키, 상원, 좌익 SR, NRPR 중 그 누구도 다른 한쪽과의 일시적 동맹 없이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없음을 의미했다. 마침내 안정화된 경제는 근소하게나마 성장하고 있었으나, 1936년 1월 케렌스키가 한 총잡이의 손에 죽기 전까지 정치는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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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중소 국경분쟁을 이렇게 맛갈지게 표현하니 카라 제작진이 대단하메요.
카라설정은 언제봐도 재미잇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