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50장 18절 ~ 20절
그러므로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앗시리아 왕을 벌한 것같이, 내가 바빌론 왕과 그의 땅을 벌하리라. 18)
Therefore thus saith the LORD of hosts, the God of Israel; Behold, I will punish the king of Babylon and his land, as I have punished the king of Assyria. 18)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우상숭배하다가 멸망당하였는데 앗시리아와 바빌론이 마치 이스라엘에 대한 침략에 대한 댓가로 벌을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보일 수 있으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앞에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고, 앗시리아는 앗시리아며, 바빌론은 바빌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징계든 심판이던 모두 각자의 죄에 의하여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우리 모두는 각자 하나님앞에 혼자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앗시리아와 바빌론이 벌받음은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가 되기 때문에 그러므로(Therefore thus)가 붙었다고 느껴집니다. 지금 이땅에서 당신을 핍박하는 자는 당신을 핍박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핍박자의 죄로 인하여 벌을 받을 것입니다. 핍박하는 자가 상을 받을리는 없습니다.
또 내가 이스라엘을 그의 처소로 다시 데려오리니 그가 칼멜과 바산에서 먹을 것이며 그의 혼이 에프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만족하게 되리라. 19)
And I will bring Israel again to his habitation, and he shall feed on Carmel and Bashan, and his soul shall be satisfied upon mount Ephraim and Gilead. 19)
열거되는 지명들의 위치를 보면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칼멜과 바산에서 먹고, 치료제 유향이 나는 길르앗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근처 북쪽인 에프라임에서 그들의 혼이 만족을 얻는 것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그 날들과 그 때에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아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유다의 죄들을 찾아도 발견되지 않으리니 이는 내가 남겨 놓은 그들을 내가 용서할 것임이니라. 20)
In those days, and in that time, saith the LORD, the iniquity of Israel shall be sought for, and there shall be none; and the sins of Judah, and they shall not be found: for I will pardon them whom I reserve. 20)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들이 발견되지 않음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많은 죄들이 용서되었기 때문입니다. 결말이 이렇게 되는 재앙이 징계이며, 멸망하여 소멸되는 심판의 재앙과 구분되는 점입니다. 그리고 남겨 놓는 그들이 용서받음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징계속에서 끝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용서받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말고 버티는 것이 연약한 우리가 살아남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뛰어남으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으로 살아남는 것이 이 마지막때에 살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도 재앙의 회피보다는 끝까지 인내하여 남는 것이 생존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때도 이렇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백신에서 도피처는 없었고, 오직 각자의 믿음의 신념으로 인내함만이 우리를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앞으로 나타날 징계의 재앙에서 도피하려하기보다 끝까지 어떻게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짐승의 표의 도피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하듯이 일루미나티와 천주교는 전세계를 장악하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피를 생각하는 사람은 인내가 어쩔 수 없이 약해집니다. 인내가 싫어서 도피를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인내와 도피는 함께 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주께서 연약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재앙을 감해 주실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재앙의 감경이나 도피를 요구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 날들이 단축되지 아니하면 어떤 육체도 구원받지 못하리라. 그러나 택함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 날들이 단축될 것이라.
마태복음 24장 22절
위 말씀으로 단축될 그 날들을 겪지 않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십시요. 성경에 없는 휴거를 바라는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게 우리에게는 이 땅의 재앙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요. 그리고 당신은 이미 이런 흐름속에 있습니다. 백신사기극이라는 재앙에서 인내가 필요없는 도피를 한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재앙의 과정에서 우리가 확신해야할 것은 인내, 즉 버티는 것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계획은 이 마지막때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전 한국축구 국가대표 감독 클린스만처럼 아무런 전술이나 계획이 없이 경기에 나가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일루미나티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그들을 이긴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맡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예로 요하난과 같이 뛰어난 군인은 자기의 전술에 매달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불순종하여 멸망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뛰어남으로 살려고 하기보다 미련해보일 수 있는 버팀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백신사기극에서도 그러한 과정으로 나타났습니다. 방송과 유트부와 작은 인터넷 카페의 글에 까지도 검열이 들어왔고, 사람들은 선동되어 양심을 외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격하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뛰어남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저 묵묵히 맞아가면서 진실을 다룰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기독교인들을 기억하고 마음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백신 사기극이전과 이후에 사람들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생각은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습니다. 겉으로 작은 차이로 보이겠지만 사실 내면에서는 매우 커다란 변화입니다. 코로나이전에 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은 매우 비판적이었고 무능하고 쓸모없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사기극 속에서 불교, 천주교, 대부분의 기독교의 무능한 모습과 달리 유일하게 메시지를 외쳤던 소수의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그들이 기억하고 부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인내가 이 사회에 짠맛을 조금 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O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 그러나 그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쓸모없어진 소금은 밖에 내어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성읍이 숨겨질 수 없느니라.
마태복음 5장 13절 14절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만 살기 위하여 도피처에서 숨어서 살아남으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소금은 소금이 없는 곳에 뿌려져야 하며, 빛은 어두운 곳을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짠맛이 없어 썩고, 어두움에 갇힌 사람들이 백신의 위험을 밝게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소수의 성도들이 외쳤고, 그들이 지금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휴거를 소망하여 도피한다면 이 땅의 빛과 소금의 역할은 누가 감당합니까?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세상이 어두움과 부조리로 이웃이 고통받고 있을 때 당신은 이 땅에서 분리되어 도피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불이익을 감당하고 인내하며 진실을 외칠 것입니까?
저는 도피를 소망하기보다 진실을 외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제가 되길 소망합니다.
당신의 소망은 휴거입니까? 인내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