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은 아니지만 동화책에 실려 있는 그림이 참 마음에 든다. 시베리안 허스키 그림이 참 예쁘다. 그린이가 글에 알맞게 그렸다. 그림만 보더라도 눈앞에 시베리안 허스키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도 개를 좋아한다. 시골학교로 첫 발령을 받아 관사에 살 때 동네에서 강아지를 얻어 키운 적이 있다. 혼자 자취를 하다 보니 끼니를 제 때 준 적이 없다. 풀어놓고 키우다 보니 점심때에는 나를 대신해서 우리 반 아이들이 급식 때 남은 음식을 줬다. 저녁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뭐든 주워 먹었던 것 같다. 개 집도 만들어주지 않았다. 아무 데서나 잤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나를 주인으로 알고 충성심을 보였다. 아직도 예전에 키웠던 그 개가 생각난다. 오늘 『나의 블루보리 왕자』 시베리안 허스키를 보니 더욱 그렇다.
학교에 개를 키워 보는 것은 어떨까 잠깐 생각해 본다. 물론 위험이 있다. 개한테 물리면 안 되니까. 전염병의 위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정서적으로 아이들에게 큰 유익이 있지 않을까 싶다. 쉬는 시간마다 또는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을 뛰며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어떤 아이들은 개에 대해 나름 연구하며 개와 친해지는 법, 개의 건강을 위해 먹지 말아야 음식, 개의 특성들에 대해 조사하지 않을까. 시골학교에서는 나름 마스코트 역할도 하고. 물론 안전성에 대해 신경을 바짝 써야 되고 관리에 대한 부분도 그렇고. 그냥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인디언 속담에 친구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학교에서는 친구 관계가 무척 중요하다. 친구 관계를 배울 수 있는 곳은 학교다. 아파트라는 공동 주택에 살고 있는 환경에서는 친구를 사귈 기회도 많지 않다. 학원도 그렇다. 마음 놓고 친구를 사귀고 관계를 맺어 갈 수 있는 곳은 학교가 유일하다. 학교는 우리 사회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공동체다.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 공동의 가치를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인디언들이 가르쳐 주는 친구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이익을 떠나 슬픔과 아픔을 함께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친구라고 한다면 학교는 우리 아이들에게 친구에 대한 개념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학교가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주변에서는 기다려주고 학교가 추구하는 가치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조금만 자녀가 손해를 보고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면 전후상황을 살피지 않고 무작정 전화를 걸어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어른들의 성급함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 선생님을 통해 친구 관계에서 빚어진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신뢰를 보내야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런 힘이 있다. 다양한 친구 관계를 형성해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어른들의 개입만 줄여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