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자유민주공화국이다
지도자의 마음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확고한 국가 관이 있어야 한다
국부 이승만은 재건, 부흥과 국토를 수호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영혼과 가슴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미국이 성금을 모아 보내준 돈으로 인하공대를 세우다
대한민국의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긍지로 살았다
“대통령 8년 재임 중 자다 깜짝 놀라 일어난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6월 18일 거제도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한 데 대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의 회고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면도하던 중 이 소식을 듣고 역시 놀라서 얼굴을 베였다고 한다.
6·25전쟁 발발 뒤 이 대통령의 지상 목표는 한반도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우방국인 미국과 ‘살벌한 투쟁’을 벌인 것은 역설적이다.
전사자가 늘어나자 미국 내에선 발을 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1951년 7월 휴전 협상이 시작됐다.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미군은 철수할 것이고,
적화통일은 시간문제라고 본 이 대통령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대통령의 ‘휴전 결사반대, 북진통일’ 결의를 받아 든 미국은
이 대통령 제거를 위한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까지 세웠다.
이 대통령은 휴전을 설득하기 위해 경무대를 방문한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면담하는 내내 권총을 붙잡고 있었다고 한다.
책상 위에는 ‘북진 통일’이라는 혈서들이 쌓여 있었다.
이 대통령이 ‘단독 북진’까지 흘리며 노린 것은
미국이 휴전 대가로 한국의 안보를 확고하게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휴전 협상에 가속도를 내자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백악관에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지 않으면 싸우다 죽을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까지 보내자 미국은 한 발 물러섰다.
1953년 10월 1일 미군 주둔과 유사시 자동 개입을 명시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로
한·미 동맹이 시작된 것은 순전히 이 대통령의 분투(奮鬪) 결과였다.
한·미 동맹 70주년
1953년 한미수교 (1882년 조미수교 140년)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 다양한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지만,
정부가 바뀌어도 핵심 의제인 북한과의 관계, 경제 안보는 빠지지 않고 논의됐다.
그러나 양국 정부의 대북 강경-온건 노선 전략에 따라 한·미 정상회담은
냉·온탕을 오갔다.
박정희는 산업화, 교육, 카이스트 대학, 과학, 국방, 문화재 성역화, 민족혼 살리기,
산림녹화, 댐 건설로 미래를 열어 공업입국,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한강의 ’
‘문화 강국’‘선진화’로 G7국기의 틀를 놓았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
공식 일정 외에 대통령은 시간을 쪼개 33세 엔지니어 신동식을 만났다.
종이에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며
“3면이 바다인데 고기를 잡든 배 만들든 뭐든 해야 할 것 아닌가.
존슨 대통령이 비행기 보내줘서 타고 왔는데 자리 남으니 나랑 같이 귀국하자”
1932년생 신동식. 6·25 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피란지 부산에서 미국 군함에 실려온 군수물자와 구호품을 점검하는 일을 하면서
운명처럼 서울대 조선공학과에 진학했다. 졸업했지만 조선업 일자리는 없었다.
세계 각국에 편지를 보내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
스웨덴 코쿰 조선소가 비행기 값을 대주며 설계부 엔지니어로 받아줬다.
기능공 양성소에 입소해 현장 기술부터 익힌 뒤 선박 설계를 배웠다.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바다를 제패해 세계를 지배한 나라 영국으로 건너갔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 명성의 로이드선급협회 국제 검사관이 됐다.
조선업계 꿈의 직장이었다. 1961년 일본 파견 근무 때 박 대통령과 첫 만남이 이뤄졌다.
대한조선공사 기술고문을 맡아 귀국했지만 진척이 더딘 현실로
미국선급협회 검사관으로 떠났다.
4년 뒤 방미 길에 박 대통령이 그를 만나 청와대 1급 정무비서관으로 데려왔다.
말이 발탁이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의 가난한 나라,
대통령 측근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는 외국 가서 돈 끌어오고,
기술 얻어오고, 원료 들여오고, 인재 모셔오는 ‘대통령 공인 국가대표 거지’
역할을 도맡았다.
고달픈 책무를 다 감당했던 건 국가 발전에 혼신을 쏟는 전문가로 인정하고 믿어준
박 대통령의 리더십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보고를 하느라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고민했겠나.
국가에 유익한지 아닌지의 기준으로 판단해서 결정하라”,
“이게 성사되려면 나는 뭘 해야 하나”며 몸소 지원에 나섰다.
대한민국 경제 은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시발로 국책 연구소들을 만들고
기술 자립도를 높여가며 정부 주도로 중공업 육성 경제를 설계해
기업들로 하여금 실행에 옮기도록 한 덕에 가능했다.
씨앗은 1960년대에 뿌려졌다. 1966년 방한 때 존슨 대통령에게 받을 선물 보따리를 놓고 “존슨 대교를 짓자”는 등의 발상이 나왔다.
박 대통령은“과학기술연구소를 만들어달라”는 신동식비서관의 의견에 귀 기울였다.
대통령이 직접 홍릉 임업시험장으로 달려가 KIST 부지를 정하고
수시로 건설 현장을 들러 공사를 챙겼다.
양철 한 조각 못 만드는 나라에서 초대형 조선업 마스터플랜을 보고하니
다들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했는데 대통령은 달랐다.
조선업이 철강·기계·전자 등 산업 유발 효과도 크고 장차 해상 물동량이 늘어나
유망할 것이라는 그의 비전을 경청하고 수용했다.
1965년 방미시 원자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재미 원자력 최고 권위자 이휘소박사를
만나 오직 조국을 위해 헌신하자로 결의를 다졌다
이휘소 박사는 원자력 설계도를 촬영하여 허벅지 다리 살깣을 열어 설계도를 숨겨
1967년 귀국하다가 미국 FBI에 의해 교통사고를 가장한 제거에 희생 되었다
포철의 을 만든 박태준에게 제철을 맡꼈다
1968년 청와대 직제 개편으로 경제수석이 신설됐다.
대한민국 초대 경제수석에 엘리트 관료, 사공일, 김학렬(경제1수석)과
36세 엔지니어 신동식(경제2수석)이 기용됐다.
조선·철강·기계·화학·전자 등 제조업 중장기 발전 계획 등을 수립하고
6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감한 뒤 조선업계로 되돌아갔다.
편한 길 대신 경영난을 겪던 중소기업 한국해사기술(KOMAC)을 인수해
반세기 동안 선박 설계 및 감리를 도맡았다.
경비정, 고속정에서부터 컨테이너선, 유조선, 쇄빙선, 핵폐기물 운반선,
심해자원탐사선에 이르기까지 2000여 종 선박을 설계했다.
국내외 조선소 건설 및 운영에도 도움을 줬다.
‘한국 조선업의 아버지’로 세계 조선업계에 알려졌지만,
신동식은 공직에 남지 않아서 조선업을 넘어선 한국 산업화 역사에서
그의 기록을 조목조목 찾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신동식 박사의 육성으로 역사를 기록에 남겼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이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문화 선도국으로 G1을 향한 현재 진행형이다.
위대한 지도자의 마음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내 일생을 조국’오직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사랑과 희생을 다했다
위대한 지도자 한 사람이 대한민국이 대한민국되게 하였다
역대 가장 많은 한·미 정상회담을 열었던 대통령은 이명박 전 대통령으로 11회에 달한다.
문재인(10회), 김대중(9회), 김영삼(8회), 노무현(8회), 노태우(7회), 박정희(6회),
박근혜(6회), 이승만(2회) 전 대통령 순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방미는 역대 대통령 중 7번째 국빈방문이며, 의회 연설도 7번째였다.
윤 대통령 이전엔 이승만(1954), 박정희(1965), 노태우(1991), 김영삼(1995),
김대중(1998), 이명박(2011) 전 대통령이 국빈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이승만,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방미 중
미 상·하원 합동 연설을 실시했다.
한국을 국빈방문한 미국 대통령은 1960년 아이젠하워를 시작으로
도널드 트럼프(2017)까지 총 7명이다.
아이젠하워, 린든 존슨,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 빌 클린턴, 트럼프 등 6명의
미국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국회에서 연설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 중심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이다
2022년 외교(3회)
6월 스페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참석
9월 영국·미국·캐나다 순방,
11월 캄보디아(아세안+3)·인도네시아(G20 정상회의) 순방
2023년 외교 (9월말 현재 9회)
1월엔 아랍에미리트(UAE)를 국빈 방문
3월 16~3월17 윤석열 대통령 일본(기시다) 방문
4월 미국을 국빈 방문해 ‘워싱턴 선언’을 발표 (핵공동 선언)
5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계기로 일본 히로시마(한미일 정상회담)
5월 2일~5월4일 (바이든, 윤석열)
5월 7~8 기시다 총리 방한
5월 19~21 일본 한국, 미국, 일본 3국 정상회담(윤석열, 바이든, 기시다)
5월 21일 한독 정상회담 숄츠 총리
7월 프랑스·베트남 방문이다.
프랑스 파리에선 국제박람회기구(BIE) 4차 경쟁 프레젠테이션(PT)
베트남은 국빈 자격으로 방문해 보 반 트엉 주석과 정상회담
8월 한미일 정상 회담
9월 윤석열 G20 회의 인도네시아, 인도 방문, UN 총회 참석
외교의 중심엔
지도자의 가슴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국민복리, 국익 우선, 한국의 미래로 자부심과 지존감으로
외교를 추진하여야 한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기 위해 외교를 국익, 국민복리, 나라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역사를 두러워하라.
역사 앞에 죄를 짓지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