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국보 276호였다)
[지역돋보기]재점화된 진주 촉석루 국보환원운동
촉석루를 국보로 환원하자는 운동이 재점화됐다.
특히 국보 1호 숭례문이 불에 탄 뒤 복원공사를 거쳐 국보 1호 지위를 유지하자 진주 지역에서 "불에 탄 것을 복원한 숭례문은 국보가 되는데 왜 촉석루는 안되느냐"는 여론이 일면서 환원 운동에 힘을 보태고 있다.
촉석루는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통한다.
고려 고종 26년(1241년)에 건립됐으며 수차례 보수와 중건을 거쳐 1948년 국보 276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6·25전쟁 때 폭격을 받아 원형이 소실됐다는 이유로 1956년 국보에서 해제됐다.
소실된 촉석루가 방치되자 진주지역에서 재건하자는 운동이 벌어졌고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이 진주를 방문했을 때 재건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국비가 지원돼 1959년 공사를 시작했다. 1960년 소실된 지 10년만에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났다.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에 꼽히는 진주 촉석루 전경. /경남도민일보 DB
복원 당시 전국 최고 장인들이 공사에 참여하면서 전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명성도 얻었다.
하지만 원형이 파괴됐다 다시 세워졌다는 이유로 문화재 지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난 1983년에 겨우 지방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지방문화재자료는 지정 문화재 중에서 가장 낮은 등급이다.
임진왜란 3대첩지의 중심이자 진주성 안에 경남도유형문화재 1~3호가 있는 것과 비교하면 촉석루가 제대로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환원운동은 어느 정도 = 국보환원 운동은 지난 2004년 진주문화원을 중심으로 시작됐지만 당시 문화재청이 '문화재로 지정되려면 적어도 50년은 지나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면서 추진력을 얻지 못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다 최근 숭례문 복원 이후 진주문화원을 중심으로 또다시 환원운동이 시작됐다. '이제는 세월이 지나 '50년 기준'을 맞췄고, 보물인 영남루나 숭례문과 형평성 차원에서 국보 환원이 마땅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에 진주시도 지난달 말 문화재청에 국가지정 문화재로 승격시켜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경남도문화재심의위에 조사심의를 요청해둔 상태이며 도심의위에서 촉석루의 현장조사 등을 예정하고 있다.
이에 앞서 문화재청은 진주시에 '국보가 되기 위해선 먼저 보물이 돼야 한다'는 내용의 회신을 보냈다. 따라서 촉석루가 곧바로 국보로의 환원이 곤란해지자 진주시는 국가지정(국보, 보물)으로 승격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초점은 = 국보나 보물 아니면 도 유형문화재로 승격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원형을 얼마나 유지하고 있느냐'이다.
촉석루는 1950년 완전소실된 후 7년간 방치됐다가 복원공사를 하는 바람에 원형을 보전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주춧돌을 비롯해서 기둥이나 규모도 달라졌다. '소실 전의 사진을 보고 지었다'는 말도 있다.
이에 한 향토사학자는 일제강점기 때 그린 설계도를 찾아냈다고 주장하면서 국보 환원에 힘을 싣고 있다. 설계도와 현 건물을 비교할때 기둥만 나무에서 돌로 바뀌었을 뿐이며 크기나 모양이 같고 30개 기둥 역시 설계도대로 완공됐다는 주장이다. 또 당시 국무회의록에도 '촉석루 보수 관계보고'라는 것으로 적혀 있어 '일부를 재활용해 보수했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문제는 설계도와 현재 모습을 비교하면 몇 군데에서 차이를 보이고, 무엇보다도 복원 공사 때 그 설계도를 참고했느냐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촉석루를 재건이 아닌 보수를 했다면 과연 얼마만큼 당시(소실 이전)의 목재 등을 재사용했느냐를 밝혀야 하는데 그것 또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진주시 관계자는 "촉석루가 가진 예술성이나 명성, 역사적인 가치를 따지면 국보로서도 손색이 없지만 국보 지정은 현존 건물의 원형상태 유지 등에 국한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이 부분에 대한 집중적인 보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 "당장 국보가 어렵다면 보물이나 도유형문화재는 돼야 한다"며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우리나라의 수많은 정자 중에 가장 보존이 잘 된 곳이 진주 촉석루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가장 잘 보존되고 시민과 함께하는 촉석루가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주 촉석루(晋州 矗石樓)종목수량위치주소좌표정보
문화재자료 제8호 (1983년 7월 20일 지정) | |
1동 | |
진주 본성동(대한민국) |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8번지 |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진주 촉석루(晋州 矗石樓)는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내에 위치해 있는 누각이다. 남강변 절벽 뒤편에 있는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쪽 장대로서, 군사를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이기도 했다. 일명 장원루라고도 한다.
1365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그 뒤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하였으며 앞면 5칸·옆면 4칸이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촉석루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1]
개요[편집]
남강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이다. 1241년 고려 고종 28년 축성 당시에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의 손으로 창건하여,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2]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3]
그 후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의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1747년 영조 23년 1월 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진상되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열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찬송하였다.
追憶往事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百有餘年 1년여 년이 지났네.幸得南江 다행히 남강에서 주웠던 도장에印篆宛然 새겨진 전자가 완연하니,矗石閫義烈 촉석루에서의 뛰어난 의열想像愴先 상상하니 먼저 서글퍼지네.命留嶺閫 영남의 병영애 보관토록 하여以竪忠焉 충절을 기리게 하노라”[4]
촉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가 있다. 1780년 정조 5년 다산 정약용은 19세의 나이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산 정약용은 팔검무(진주검무)를 추는 가인에게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하였고,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사에 걸게 하였다. 그 후 10년 후인 1791년에 정조 15년에 30살의 나이로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서 〈재유촉석루기(再游矗石樓記)〉를 적었다.[5]
촉석루 아래 계단을 통해 의암으로 내려갈 수 있게 작은 통로를 마련해 두었는데 중간 부분에 의암사적비가 있고,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곳에 툭 튀어나온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때 또 한번 소실되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것은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인간 문화재였던 임배근이 공사 총책임을 맡았다.
군사시설과 과거 시험장[편집]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촉석루는 본래 전쟁이 일어나면 유사시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 또는 경상우도 군사들을 지휘하는 지휘본부로서 사용하였다. 또한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 또는 향시를 치르는 고시장으로도 쓰였다.
첫댓글 촉석루가 국보가 아니였다고~~?
미국이 폭격으로 부셔버려서 제외 되엿다고 진주 참 별볼일 없다싶다
우리나라 목재국보가 원형이 어디있나 진주시의 무능이다
산청의 희망 골프장 부지 빼앗아 자립 근간을 회손해서 전원주택지로 팔아먹고
알아야 할것은 큰고목은 주변의 작은 나무들이 바람막이 수분보호를해주어야 천년을 사는것이다
꼭 명심해라 무능 산청 소멸지역 1순위로만든 진주 독야청청은 어려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