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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8. 연중 제 8주간 목요일. 묵상글(강론글) 눈먼 바르티매오 치유 (마르10,46ㄴ-52)
1차(03:20), 2차(04:08), 3차(08:05)
28일 묵상글, 03시 2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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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8일 목요일
[연중 제8주간 목요일] 눈먼 바르티매오 치유 (마르10,46ㄴ-52)
제1독서<여러분은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입니다.>(1베드2,2-5.9-12)
사랑하는 여러분, 2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3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
4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5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9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10 여러분은 한때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자비를 입지 못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자비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12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10,46ㄴ-52)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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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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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8. 연중 제 8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르코 10,46ㄴ–52
예수님께서 예리코를 떠나실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곧 외치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많은 이가 그를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하지만
그는 더욱 크게 외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십니다.
그 즉시 그는 다시 보게 되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갑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에서
눈먼 이의 간절함과 집중을 매우 깊이 바라봅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시선에 눌리지도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주님께 닿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막는 소리보다
자비를 향한 자기 외침을 더 크게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집중입니다.
크리소스토모는 자주
사람의 구원이
겉모양이나 지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나아가는 진실한 마음에서 온다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바르티매오는 가진 것이 없고
보는 눈도 없으며
사회적으로도 가장 낮은 자리에 있지만
그의 부르짖음은 누구보다 곧게 주님께 향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저 지나가는 기적의 인물로 부르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곧 그는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음을
믿음으로 알아본 것입니다.
눈으로 보지 못해도
마음으로 더 깊이 본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인상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곧바로 고쳐 주시기 전에
먼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신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이미 다 아시지만
그의 갈망이 말이 되게 하십니다.
치유는 때때로
하느님이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내가 그 필요를 정직하게 고백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바르티매오는 단순하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는 둘러 말하지 않고
자기 상처를 정확히 말합니다.
영성은 바로 이런 정직함을 배웁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관점에서 보면
바르티매오의 믿음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는 앉아 있지만
영적으로는 누구보다 힘차게 일어서는 사람입니다.
그는 꾸짖음을 이기고,
군중의 압박을 이기고,
자기 처지의 무거움을 이기고
주님께로 집중합니다.
크리소스토모는 이런 믿음을
말로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온 존재로 매달리는 믿음으로 봅니다.
믿음은 방해가 없을 때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방해가 있어도 더욱 크게 주님을 부르는 용기입니다.
또 바르티매오는
다시 보게 된 뒤
자기 갈 길로 떠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치유는 단순히 문제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길로 들어가는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셨다면
그 눈은 이제 주님을 따르기 위해 열려야 합니다.
구원은 편안함의 회복에 머물지 않고
제자의 길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나는 치유만 원하는가,
아니면 치유된 뒤 주님을 따를 준비도 되어 있는가?
영성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영성이 무엇에 시선을 모으는 삶인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 안에는 많은 소음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소리,
체면의 소리,
포기의 소리,
“지금은 안 된다”는 소리,
“너는 안 된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그 모든 소음보다
자비를 향한 한 마디를 더 크게 붙듭니다.
영성은 많은 생각을 쌓는 것이 아니라
가장 본질적인 부르짖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한마디가 삶 전체를 다시 열 수 있습니다.
오늘 목요일 성모님의 날에
우리는 마리아를 바라봅니다.
성모님도 모든 것이 환히 보이는 길을 가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걸으신 분입니다.
다 알 수 없지만 간직하셨고,
다 설명되지 않아도 따르셨으며,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바르티매오의 부르짖음은
성모님의 믿음과도 닿아 있습니다.
눈앞이 분명하지 않아도
주님을 놓치지 않는 마음,
바로 그 마음이 영성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 외치고 있는가?
세상의 소음인가,
내 불안인가,
아니면 주님의 자비인가?
나는 사람들의 꾸짖음과 시선 때문에
정작 가장 중요한 부르짖음을 삼키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주님께 내 상처를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걸음을 멈추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
제가 다른 소리에 흔들리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더 크게 부르게 하소서.
제 상처를 숨기지 않게 하시고
정직하게 당신 앞에 내어놓게 하시며
치유를 받은 뒤에는
당신을 따르는 길까지 걷게 하소서.
흐릿한 제 눈을 열어
당신을 더 분명히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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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8. 연중 제 8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순례의 여정에서 한 부부와 대화하였습니다. 눈빛만으로도 ‘성실’하게 삶을 살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순례를 마치면 부부는 아내의 ‘칠순’을 기념하여 로마, 아시시, 프라하를 다녀온다고 합니다. 로마에서는 교황님의 알현 미사를 신청했다고 합니다. 아시시에서는 프란치스코 성인 탄생 800주년을 기념하는 미사에 함께 한다고 합니다. 프라하에서는 아름다운 도시를 보며 ‘칠순’을 기념하고 싶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모든 일정을 계획한 남편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부는 3년 전에 ‘은퇴’하였다고 합니다. 작년에는 한국 ‘성지순례’를 78일 동안 다녀왔다고 합니다. 순례 중에 좋은 분을 많이 만났다고 합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좋은 사람이 함께하는 순례의 여정에는 좋은 사람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은퇴’할 나이가 훌쩍 지났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여정은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두 분이 가는 길에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 ‘바르티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 말에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아라.’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를 ‘배은망덕’이라고 합니다. 은혜를 잊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성서는 이런 배은망덕의 기억도 전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을 보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아합왕은 자기의 포도밭이 많이 있음에도 욕심 때문에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는 너를 바위라고 부르겠다. 내가 그 바위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라는 칭찬을 받았음에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성서는 어쩌면 끝없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오늘 치유의 은사를 받은 바르티매오는 눈을 떴습니다. 하고 싶은 일도 많았을 겁니다. 파란 하늘도 보고 싶었고, 사랑하는 가족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라고 기억합니다. 성서는 이런 아름다운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굶주렸을 때 사렙다의 과부는 아낌없이 엘리야에게 구운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르단강에 몸을 담구었습니다. 그리고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나아만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스라엘의 흙을 가져갔습니다. 일곱 마귀가 치유된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치유의 은사를 받았던 베로니카는 고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성서는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답하는 백성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제에게도 이와 같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제는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뜻을 드러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사제는 공동체의 의견을 존중해야 합니다. 경험과 연륜은 배려와 존중을 만나야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제는 청렴해야 합니다. 세상에 보화를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아야 합니다. 하늘에 쌓을 보화는 나눔, 희생, 사랑입니다. 한 가지 더 필요한 덕목이 있다면 선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마음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선한 마음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오늘 바르티매메오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인의 능력과 준비로는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만이 눈을 뜨게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주시지 않으면 그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다고 합니다. 눈앞에 주어진 일 때문에 정말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눈을 뜨고 있지만 주어진 일에 충실하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또 다른 것들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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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8. 연중 제 8주간 목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를 만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도움을 청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사람들이 막아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도 미국 신학교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강의를 따라가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 보려 하였지만, 결국 교수님들과 동료들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부끄러웠지만, 그들은 오히려 솔직한 저를 좋아하였고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바르티매오처럼 용기를 내어 도움을 청하였을 때 생각하지 못한 은총이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의 간절함에 응답하십니다.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0,51).
예수님께서는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0,5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곧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신앙은 용기입니다. 나의 허물이 많고 죄에 걸려 몇 번씩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께 끊임없이 다가가는 용기입니다. 죄와 허물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숨기고 혼자 해결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을 아십니다. 그분 앞에 솔직하게 우리의 부족함을 드러낼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지금 바로 용기를 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그분께서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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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8. 연중 제 8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지 장님 바르톨로메오의 치유를 통해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눈먼 이의 치유’는 ‘어둠 속에 있는 이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을 표상’하며, 메시아의 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이사 35,5;시 146,8;마태 11,5).
<본문>에서, 눈먼 거지 바르티메오는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그는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에 대한 메시아의 권능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마르 10,50). 보이지도 않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도 오늘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겉옷”은 벗어버려야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내가 걸치고 있는 “겉옷”은 무엇일까?
나에게는, 하느님의 일을 가리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내 생각’이 바로 ‘겉옷’입니다. 또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이 바로 던져버려야 할 저의 ‘겉옷’입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거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환히 아시지만, 우리가 ‘진정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이며, ‘누구에게 청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시며, ‘당신께 대한 믿음’으로 청하기 원하십니다.
거지 장님은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어로 ‘보다’(αναβλεπω)라는 말은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항상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성전 휘장을 찢어놓으신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곧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눈’이요, ‘믿음으로 세상과 형제들을 보는 눈’이요, ‘빛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아니 마음이 완고하여 태양을 보지 않으려 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 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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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8. 연중 제 8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과 뜻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생명력의 성령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2026년 5월 27일 수요일
리처드 신부는 성령을,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광대하심으로 바라봅니다:
한 편으로 보면, 영혼과 의식, 사랑, 그리고 성령은 서로 깊이 맞닿아 있으며 거의 같은 실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원하며, 나를 넘어서는 더 큰 차원을 가리키고, 하느님과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다"거나 당신의 의식을 우리와 나누신다고 말씀하실 때 바로 이것을 의미하십니다. 이렇게 영혼이 깨어난 사람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마음" 지니게 됩니다(1코린토 2,10–16 참조). 이것이 그 사람이 심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렇게 변화된 이는 훨씬 더 넓고 자비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마음의 영적 쇄신"(에페소 4,23 참조)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심어 주신 이 성령을 "보호자"(advocate)라고 부르시며,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면서"(요한 14,16–20), 우리를 당신과 같은 생명 안에 살게 하시고 모든 존재와 하나로 이어 주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이 "진리의 영"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요한 14,26), 마치 우리가 이미 그 진리를 깊은 곳에서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총의 내적 샘을 우리 안에 지니고 있다는 뜻이지요! 우리는 이것이 너무나도 좋은 소식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였고—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잘 믿지 못했습니다. [1]
개인적 차원에서도 공동체적 차원에서도, 의식과 영혼, 사랑, 그리고 성령은 슬프게도 우리 안에서 거의 "의식되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령을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잊힌 위격"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근원적 단절감을 메우기 위해 우리가 여러 중독적 방식에 의지하려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내적으로 기억하게 하시는 분", 곧 "내적 상기자"가 계십니다(요한 14,26; 16,4 참조). 이분은 우리 삶의 흩어지고 조각난 모든 부분을 하나로 모아 주시고, 모든 빈틈을 채워 주시며, 우리의 모든 잘못을 감싸 안으시고, 모든 실패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더욱 깊은 생명으로 이끌어 사랑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이며,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는 샘이 되시어(요한 7,38–39) 영원한 생명으로 흐르십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따뜻하게 덥히고 새롭게 하시는 숨결이시며(요한 20,22), 순간의 그림자와 외양 너머를 보게 하시는 눈이시고(요한 9장), 과거를 씻고 정화하는 눈물이시기도 합니다(마태 5,4).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눈물은 단지 우리의 눈물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과 위로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2코린토 1,3–5).
여러분은 이 "광대하신 현존"과 반드시 접촉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이 광대하심의 자리에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광대하심이 이미 당신 안에 머물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이 무한한 은총에서 가로막는 유일한 것은, 전적으로 거저 주어지는 이 은혜, 아무 공로 없이 주어지는 이 선물을 신뢰하려 하지 않는 에고의 완고함뿐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저는 오순절 성령 운동 교회에서 ‘거듭남’을 경험하게 되었지만, 그 후 사람들을 ‘구원하러’ 나가야 한다는 요구가 제 마음에 늘 걸렸습니다. 만일 누군가의 구원이 제 손에 달려 있다면, 세상은 참으로 안타까운 처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여러 저서와 매일 묵상,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보편적 그리스도』(Universal Christ)를 통해 저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제가 사람들을 ‘구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하면 된다는 것을요. 제 안에서 일어난 이 변화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Mandy G.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Breathing Under Water: Spirituality and the Twelve Steps, 10th anniversary ed. (Franciscan Media, 2021), 83–84.
[2] Adapted from Richard Rohr, A Spring Within Us: A Book of Daily Meditations (CAC Publishing, 2016), 146–14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rman Khadangan,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의 불꽃을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불은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영감을 주며,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를 지탱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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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8. 연중 제 8주간 목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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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7 08:23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과 형제성의 신비 안에서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르 10,45)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상이 세워 놓은 높고 단단한 질서를 조용히 무너뜨립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커지라고 말합니다. 더 높이 올라가라고, 더 많이 소유하라고, 더 인정받으라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비우며 작아지는 길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흐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발견한 복음의 핵심 또한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위대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작은 형제”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세상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는 형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의 중심에는 ‘내적 가난’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 가난은 단순히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외적 가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더 깊은 곳에서는 자기 자신마저 움켜쥐지 않는 자유입니다. 내 생각, 내 자존심, 내 업적, 내 의로움까지도 절대화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내적 가난은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받은 존재임을 아는 투명함입니다. 모든 것이 은총임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타인을 억누를 이유도 없습니다. 참으로 가난한 사람은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이미 사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느님의 품 안에서 받아들여진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의 겸손은 단순한 예의범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자리 이동입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내려와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묻던 삶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태양을 “형제 해”, 물을 “누이 물”, 흙을 “어머니 땅”이라 부른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그는 피조물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모든 존재를 하느님의 숨결 안에서 연결된 형제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형제성은 단순한 공동체 생활의 규칙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깊은 관계성을 깨닫는 영적 눈입니다. 우리는 혼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사랑으로 태어났고, 누군가의 기다림 속에서 자랐으며,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위에서 살아갑니다. 숨 쉬는 공기조차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존재 전체는 이미 관계 안에서 주어진 선물입니다.
인간의 두려움은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비교하게 만들고, 경쟁하게 만들며, 타인을 경계하게 만듭니다.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불안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높아지려 하고, 더 소유하려 하고, 더 인정받으려 합니다. 하지만 높아질수록 사람은 외로워집니다. 소유할수록 더 불안해집니다. 자기 자신만 바라볼수록 영혼은 점점 메말라 갑니다. 프란치스코는 바로 그 지점에서 복음의 역설을 발견했습니다. 내려갈수록 자유로워지고, 비울수록 충만해지며, 작아질수록 더 깊은 생명과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을 사랑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 안에서 모든 존재와 형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을 때 비로소 세상 전체가 선물처럼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이 프란치스칸적 복음의 깊이를 더욱 밝혀 줍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영혼이 깨끗해져 진실한 형제애를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1베드로 1,22)진리에 순종한다는 것은 관계의 진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혼자만 구원받는 삶이 아니라 함께 살아나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깨끗해진다는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중심성의 탁함이 맑아지는 것입니다. 타인을 이용의 대상으로 보던 눈이 형제를 바라보는 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이 사랑은 감상적인 친절이 아닙니다. 상대의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때로는 기다려 주고, 양보하고, 이해받지 못해도 곁에 머물러 주는 것입니다. 관계는 언제나 불편함을 동반합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의 상처와 약함을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안에서 사랑은 깊어집니다. 프란치스칸 형제성은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의 약함을 품어주는 공동체입니다. 누가 더 위대한가를 경쟁하는 곳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가를 배우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작은 사람만이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는 사람만이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씨앗은 작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음 안에 숲이 숨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심겨진 살아 있는 씨앗입니다. 그 씨앗은 조용히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높아지려는 욕망 대신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을, 소유하려는 손 대신 내어주는 손을, 판단하려는 눈 대신 연민의 눈을 자라게 합니다. 그래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종교적 체험 이전에, 조금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형제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은 죽은 뒤에 시작되는 먼 미래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누군가의 짐을 함께 져 주는 순간, 외로운 이 곁에 말없이 앉아 있는 순간, 자기 옳음을 내려놓고 화해를 선택하는 순간, 용서를 청하고 용서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작은 형제”라 불렀습니다. 그 이름 안에는 복음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작아진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존재와 깊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비워진다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생명이 흐를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가난한 사람은 가장 충만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가장 깊이 연결된 사람입니다. 참으로 작은 사람은 가장 넓은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은 오늘도 조용히 세상을 다시 살아나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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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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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8. 연중 제 8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28 03:58
- 욕망을 헹궈낸 순수한 갈망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의 말은 제가 아주 사랑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젖을 갈망하라고,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 단어 젖도 제가 좋아하는 단어이고 갈망도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가끔 제가 엄마가 되어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말하곤 하는데
실은 반대로 제가 아기가 되어 엄마의 젖을 물고 빨고 싶은 갈망도 있습니다.
이것은 욕망이 아니고 갈망입니다.
아기의 것은 욕망이 아니고 갈망입니다.
갈망이라는 단어를 사랑하게 된 제법 긴 역사가 있습니다.
미국에 가 살 때 성무일도 주일 아침 기도 시편을 바치면
제 마음을 아주 달콤하게 하는 영어 단어가 있었습니다.
“O, God, you are my God, for you I long! For you my body yearns;
for you my soul thirsts, Like a land parched, lifeless, and without water.”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
영어에서 목말라하고 갈망하는 뜻으로 ‘long for’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아시다시피 ‘long’이라는 말에는 ‘긴’, ‘오랜’의 뜻도 있지 않습니까?
갈망이란 오랫동안 목말라야지만 그 갈망이 진짜이고 강렬하지요.
마침 어제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독서도 제가 너무도 사랑하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한 부분을 들려주어 묵상했습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님을 찾았사오니!
향 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에게도 그렇고 오늘 베드로 사도에게도 이 갈망은
한번 맛보고 이미 맛본 사람들의 갈망으로서 맛보면 맛볼수록
더욱더 갈증/기갈을 느끼게 하는 갈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이미 한번 맛본 사람은 그 맛을 자신도 잊지 못하고 다른 이에게도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으라.”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번 이미 맛보았다고 해도 자신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다른 맛들로 더럽혀진 입은 맛 고수들이 새 맛을 보기 위해
입을 헹궈내듯 입의 정화와 맛의 정화를 먼저 해야 합니다.
저의 하루 시작은 이것의 반복입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입이 아주 텁텁하고 씁니다.
그래서 입을 헹구고야 녹차를 끓여 마십니다.
그리고 이런 의식과 함께 어제의 욕망을 헹궈내고
새로운 갈망으로 하느님 말씀을 맛보고 깨닫고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느낄 것입니다.
제가 어떤 날은 욕망이 덜 헹궈진 갈망으로 하느님 말씀을 맛보고 나누고,
어떤 날은 잘 헹궈진 갈망으로 하느님 말씀을 맛보고 나누고 있음을 말입니다.
그래도 저는 희망을 가집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아기가 되어가고 욕망은 사그라들고 갈망이 자라서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라는 말씀처럼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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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8. 연중 제 8주간 목요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체험. Mark Choi 님
■ 태도는 말보다 오래 남는다
태도는 말보다 오래 남는다 — 사랑의 방식이 드러나는 곳
Attitude Lasts Longer Than Words — Where Love Reveals Itself
오늘 묵상글을 읽으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같은 지역에서 지내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문득 한 가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오래 지켜보면 결국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가졌는가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아내와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그 차이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것이 경제적 수준이나 직업, 학력의 차이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함께 걸을 때의 작은 배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태도,
감정이 부딪힐 때 존중하는 방식,
사람들 앞에서 아내를 바라보는 눈빛과 말투.
처음에는 작은 행동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태도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르코 10,43)
우리는 종종 사랑을 큰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사랑은 감정보다 태도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를 존중하는 말 한마디, 기다려 주는 인내, 먼저 배려하려는 선택은 결심 없이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사람은 자신이 믿고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 드러내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누군가를 대하는 태도는 예절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방향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받고 싶은 방식으로 타인을 대할 때 가장 아름답고, 섬김받기만 원할 때는 점점 관계 안에서 외로워집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도 같은 길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힘으로 이긴 자리가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기로 결심한 자리였습니다.
오늘 제 마음도 이렇게 기도해 봅니다.
“주님, 제가 사람 위에 서려 하기보다 사람 곁에 설 수 있게 하시고, 사랑받으려는 마음보다 먼저 사랑하려는 마음을 허락해 주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Attitude Lasts Longer Than Words — Where Love Reveals Itself
As I read today's reflection, one thought came to my mind.
Having lived in America for many years, I have had opportunities to live among people from different cultural backgrounds. Through those experiences, I began to notice something important.
When you observe people long enough, something eventually becomes clear.
It is not what a person owns or possesses that matters most, but rather how they treat those who are closest to them.
I especially noticed this in the way people treated their wives and women.
Interestingly, the differences were not about wealth, occupation, or education.
It was found in small everyday actions:
The consideration shown while walking together,
The willingness to listen until the other person finishes speaking,
The respect shown during moments of disagreement,
The expression in one's eyes and tone of voice when speaking about a spouse in front of others.
At first, these seemed like small details.
But over time, I realized something:
Attitude is not simply a habit; it reflects the direction of love within a person.
In today's Gospel, the disciples desired places of honor.
Yet Jesus showed them an entirely different path:
"Whoever wishes to become great among you shall be your servant."
(Mark 10:43)
We often think of love as a powerful emotion.
But in real life, love seems to be closer to attitude than emotion.
Saying "I love you" is not difficult.
Yet speaking words of respect, being patient, and choosing to put someone else first often require a conscious decision.
Perhaps people reveal what they truly believe through the way they treat those closest to them.
In the end, the way we treat others may not simply be a matter of manners; it may reveal the direction of the soul.
People become most beautiful when they treat others the way they themselves wish to be loved. But when they seek only to be served, relationships gradually become lonely places.
The love shown by our Lord followed the same path.
The Cross was not a place won by power; it was a place where love chose to remain faithful until the end.
Today my prayer is this:
"Lord, help me not to stand above people, but beside them. Grant me a heart that seeks not only to be loved, but first to love others."
†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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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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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8. 연중 제 8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단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답게 한번 살아보고자 하는 간절함!
나이를 살짝 먹다 보니 지난 시절을 종종 돌아보게 됩니다. 치명적인 실수나 흑역사가 떠올라 자책하고 후회하기도 하지만, 좋았던 시절, 꽃 같던 아이들 얼굴도 떠올리며 흐뭇해하기도 합니다.
지난 시절을 성찰하던 중, 참 많이 부족했던 부분이 있었음을 확인합니다. 진정성의 결여! 간절함의 상실! 적당주의! 뭐든 적당 적당, 대충대충 해치우려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치밀하게 계획도 세우고 최선을 다해보려고 노력하는 적극성이 부족했음을 인정합니다. ‘잘 되면 그만, 잘못 되도 어쩔 수 없지’ 하고 어물쩍 넘어가곤 했습니다. 틈만 나면 우스갯소리로 위기를 넘겼니다. 어떤 때는 진담인지 농담인지 하는 말들로 사람들을 햇갈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반성하는 마음으로 매일 매 순간 좀 더 충실한 나날, 좀 더 계획적인 삶, 좀 더 진정성 있는 하루,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고자 나름 발버둥칩니다.
이런 면에서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보여준 태도는 크게 칭찬받을 만합니다. 물론 그의 처지는 처절할 정도로 절박했습니다. 그냥 거지들도 먹고살기 힘든 시대였는데, 바르티매오는 눈까지 멀었습니다.
동업자들과의 경쟁에서 언제나 뒤로 밀렸습니다. 한 푼 얻어 볼까, 아무리 기다려 봐도 그에게 눈길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수입이 없다 보니 굶기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거지 사회에서도 그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던 왕따였습니다.
이런 바르티매오 인생에 기적 같은 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구원자이자 치유자이신 예수님께서 그가 구걸하고 있던 장소를 지나가십니다. 바르티매오는 마치 기적처럼 찾아온 그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간의 서러움, 그간의 깊은 상처, 그 간절함과 절박함을 목소리에 담아 크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기회 앞에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간절한 목소리로 외친 것입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사람들 눈치를 본다 던지 체면을 차릴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자신 안에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동원해서 외친 것입니다.
이런 바르티매오의 간절한 목소리를 어떻게 주님께서 외면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 절박함, 그 진정성과 강한 믿음은 곧 치유와 구원, 새 삶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당시 바르티매오 옆에는 수많은 다른 거지들과 환자들이 죽치고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바르티매오 같은 간절함, 적극성, 진정성, 능동성이 없었습니다. 그저 흐리멍텅한 눈으로 강 건너 불 바라보듯 예수님을 바라봤습니다. 적극성과 절박함이 없는 그들은 일생일대 선물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 내면의 상태는 어떤지 점검해볼 일입니다. 바르티매오가 지니고 있었던 그 적극성이 있습니까? 단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답게 한번 살아보고자 하는 강렬한 원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치유시켜 주실 분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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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8. 연중 제 8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46ㄴ-52)>
1)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다.” 라는 말에서 다음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르 10,13-16).”
신앙인은(교회는)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연결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인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일
자체가 바로 그 ‘연결 통로’가 되어 주는 일입니다.
바르티매오의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그를 꾸짖은 것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거나, 아니면 공공연하게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텐데,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들은 예수님과 바르티매오 사이에서 ‘장벽’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은 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모든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해야 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2)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고쳐 주신 일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일들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2-33).”
3) 사람들이 꾸짖는데도 바르티매오가 ‘더욱 큰 소리로’ 외친 것은, 그의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앞이 안 보이는데도, 그리고 누가 도와주지 않았는데도 곧장 예수님께로 갈 수 있었던 것도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그 ‘간절함’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꾸짖는 말에 주눅 들어서 예수님께 청하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겉옷’을 벗어 던졌다는 말은, ‘낡은 삶’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얻기를 희망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덕분에 눈을 뜨게 된 그가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는 것은, 그가 원하는 ‘새로운 삶’은 바로 세속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영적 구원’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는 “나를 따라라.” 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고
떠나갔는데(마르 10,21-22),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명시적으로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는데도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모습은, 은총을 받아도 받은 줄 모르거나,
알아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은 ‘십자가를 향한 길’입니다.
그래서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간 셈이 되는데, 그 길은 십자가로 끝나는 길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따라서 걸어간 그 길은 ‘죽음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고, ‘구원의 길’입니다.
4) 몸은 멀쩡하지만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으면서, 스스로 ‘영적인 장애자’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그런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은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인데, 우선 신앙인들 자신들부터 먼저 제대로 보아야 하고,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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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8. 연중 제 8주간 목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0807
2026.05.28 03:42
슬프도록 아름다운 은총과 고독의 이야기.
고독이 불러온 선율
백야처럼 잠들지 못하는 마음의 가장자리에서 고독은 아주 천천히 한 사람의 영혼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처음에는 그것이 슬픔인 줄만 알았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침묵, 아무리 가까운 사람 곁에서도 끝내 남겨지는 외로움, 붙잡을수록 멀어지는 시간들, 사랑했기에 더 깊어지는 상실의 그림자들, 그러나 오래 고독 안에 머물다 보면 슬픔은 어느 순간 낯선 아름다움의 얼굴로 변하기 시작한다. 마치 오래된 수도원의 새벽 종소리처럼 낮고 느린 단조의 선율 하나가 영혼의 가장 깊은 우물에서부터 조용히 울려 나온다. 그 선율은 세상의 환호처럼 시끄럽지 않다.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자랑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주 오래전 잃어버린 원천의 기억을 흔들어 깨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왜 이토록 사랑을 갈망하는가? 왜 사람의 마음은 끝없이 누군가를 그리워하도록 만들어졌는가? 고독은 그 질문들을 피해 가지 못하게 만든다. 낮에는 분주함 속에 숨어 있던 영혼이 밤이 되면 자기 존재의 빈 방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빈자리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안다. 세상에는 끝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너무 사랑했기에 더 외로워지는 밤, 너무 깊이 이해했기에 끝내 붙잡지 못하는 관계들, 마음은 가까워질수록 더 아프게 떨리는 현악기 같다는 것을
나는 문득 슬픔에도 향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너무 깊은 슬픔은 오히려 사람을 맑게 만든다.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더 따뜻하게 바라보게 한다. 백야의 끝없는 여명 속에서 나는 오래된 상실들을 하나씩 꺼내어 가만히 가슴 위에 올려놓는다. 떠나간 사람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 붙잡으려 할수록 더 멀어지던 젊음과 사랑과 순간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상실들 덕분에 나는 조금 더 깊은 사람이 되어 간다.
슬픔은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더 넓은 침묵으로 데려간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지나가며 남기는 빛이라는 것을, 인생은 붙드는 일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 곁에 오래 앉아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인간의 슬픔 가장 깊은 곳에는 사실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이 숨어 있다는 것을, 세상의 어떤 사랑도 완전히 채워 주지 못했던 허기, 아무리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던 외로움, 끝없이 무언가를 찾으며 떠돌게 하던 목마름, 그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원천을 잃어버린 영혼의 귀향 본능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어떤 고독은 단순한 우울이 아니라 영혼이 자기 근원을 향해 돌아가는 길목이 된다. 기도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말이 많아서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릎을 오래 꿇어서 기도가 되는 것도 아니다. 어느 날 문득 내 힘으로는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빈자리 앞에 서게 될 때 사람은 비로소 하늘을 향해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나는 없습니다. 당신만이 계십니다.” 그 기도는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자유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존재 전체를 사랑의 원천께 맡기는 순간, 영혼은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주 반대로 살아간다. “나만 있고 그분은 없습니다.” 그때 삶은 점점 메말라 간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채워지지 않고, 아무리 사랑받아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만으로는 영혼의 무한한 깊이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 없이 살아가는 영혼은 마치 샘을 잃어버린 강처럼 겉으로는 흐르는 것 같아도 안쪽에서는 조금씩 말라 간다. 그래서 고독은 은총이다. 고독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채워진 것들을 하나씩 벗겨 내기 때문이다. 사람은 홀로 남겨졌을 때 비로소 자기 영혼의 진짜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깊은 침묵 속에서
슬프도록 아름다운 선율 하나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 선율은 “나에게 돌아오너라” 하고 부르는 원천의 목소리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실은 그분의 흔적이었음을, 모든 사랑이 그분 사랑의 작은 그림자였음을, 모든 그리움이 결국 그분께로 향하는 길이었다는 것을, 영혼은 그제야 조금씩 알아듣기 시작한다. 백야의 끝없는 푸른빛 아래 나는 오늘도 고독 속에 앉아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단조의 선율을 듣는다. 슬픔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슬픔 안에서 나는 이전보다 더 깊이 살아 있다. 왜냐하면 이제 고독은 나를 닫아 두는 어둠이 아니라 원천을 향해 열려 있는 기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기도의 끝에서 나는 조용히 알게 된다. 참된 평화는 내가 사라질 때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분이 머무를 공간이 열릴 때 찾아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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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8. 연중 제 8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3:30 추가.
마르 10,46ㄴ-52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벨기에 출신의 작가 마테를링크가 쓴, 『파랑새』라는 동화를 보면, 주인공 치르치르와 미치르 남매는 ‘마술할머니’로부터 병에 걸린 딸을 위해 ‘파랑새’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꿈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거기에 있는 ‘추억의 나라’에서 죽은 혼령을 만나고, ‘밤의 궁전’에서는 재앙의 실상을 보고, ‘숲’에서는 자연의 두려움에 대해 알게 됩니다. 그리고 ‘행복의 궁전’에서 물질적인 행복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닫게 되지요.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파랑새를 찾을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빈 손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한 치르치르 남매는 깜짝 놀랍니다. 그들이 집에서 키우던 새가 바로 ‘파랑새’였던 것입니다. 그 새를 할머니에게 갖다드리자 딸의 병은 나았고, 그리고 나서 파랑새는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 버립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파랑새’는 ‘행복’을 상징합니다. 행복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사소하고 평범한 곳에 있지만, 우리의 시선이 언제나 다른 것을, 즉 값 비싸고 화려하며 특별한 것에만 머무르기에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고통과 시련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트이면 비로소 내 곁에 있는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버려 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음을 알기에 고된 현실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라는 이름의 눈 먼 거지를 치유해주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으시자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가 바랐던 것은 단순한 시력의 회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앞을 보지 못하게 된 뒤에야 ‘시력’이 얼마나 소중한지,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뒤늦게 깨달았던 그였습니다. 그랬기에 모든 걸 ‘당연하게’ 여겨 그 참된 가치를 몰라보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시각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세상과 삶을 바라봄으로써 하느님께서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 사이에 숨겨두신 삶의 참된 행복들을 놓치지 않고 하나씩 제대로 맛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치유의 은총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바꾸는 ‘변화’의 은총, ‘회개’의 은총을 주시기를 청했던 것이지요.
그가 예수님께 원하는 것을 청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에 그런 것을 청할 수 있었던 것은 입고 있던 ‘겉옷’을 과감하게 벗어던진 ‘결단’ 덕분이었습니다. 사막지역에서 겉옷은 낮에는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는 ‘천막’이 되고, 밤에는 추운 날씨로부터 몸을 보호해주는 ‘이불’이 되는, 절대 없어서는 안될 ‘재산목록 1호’입니다. 구걸을 하며 살아가던 바르티매오에게는 그 겉옷이 ‘전 재산’이었지만, 그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을 입어 변화되기 위해, 걱정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기꺼이 그것을 내던져 버린 겁니다. 그런 깊고 단단한 믿음 덕분에 원하던 대로 ‘다시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원’이라는 귀한 선물까지 받게 되었지요.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합니다. 나는 주님께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청하고 있습니까?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삶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그 소중한 기회를, 금새 사라지고 말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청하는데에 써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행운’이라는 이름의 네 잎 클로버를 찾겠다며, ‘행복’이라는 이름의 세 잎 클로버를 마구 짓밟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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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8. 연중 제 8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 11:30 추가
숨영성 묵상글
예수님께서는 오늘 바르티매오를 통해 우리에게 "참된 시력"을 회복시켜 주려 하십니다!
이 치유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에 두 번의 눈먼 이 치유 이야기 중 두 번째로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눈먼 이들의 눈을 열어 주는 일은 메시아의 표징으로 예언되었습니다. "그날에는…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야 29,18; 32,3 참조). 실제로 바로 다음 장면에서 군중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환호합니다.
그들은 이제 예루살렘(약 24킬로미터 거리)을 향해 가고 있으며, 그곳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야기는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모든 이의 시선이 예수님께 향하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고, 악의적인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눈을 뜨게 된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만은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이 복음 대목은 여러 형태의 "눈멀음"에 대해 성찰하게 해 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시력을 나빠질 때 비로소 우리가 이 시력에 얼마나 의존해 왔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사물을 피하고 길을 찾는 데만이 아니라,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에도 이 시력을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게다가 인간의 얼굴은 입뿐 아니라 모든 표정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상대의 얼굴을 보기 때문에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눈먼 거지의 비참함은 배가됩니다. 사실 그의 고통은 단순히 눈먼 이의 고통과 거지의 고통을 더한 것보다 더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완전히 타인의 자비에 맡겨져 있으며,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지만 상대의 표정을 읽을 수 없고,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모든 신앙인은 바로 그 사람과 같습니다. 믿음은 어둠 속의 앎입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 가운데 손을 들어 올리지만, 그분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약속도 거절도 듣지 못합니다. 바로 그때 바르티매오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복음 이야기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크게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 오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그분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합니다. 이어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라고요.
그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겉옷을 벗어 던졌다는 사실에 주목해 본 적이 있습니까? 눈먼 사람이 겉옷을 벗어 던져 버린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가 벗어 던진 그 겉옷을 다시 찾을 수 있었을까요? 눈먼 사람들은 물건을 찾는 데 큰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세상이 제자리에 있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물건을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정성스럽게 제자리에 둡니다. 반면,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물건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곤 합니다.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내던짐으로써 마치 시력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다른 모든 시력 있는 이들이 자기 겉옷과 소유물을 손에 꼭 쥐고 있을 때, 눈먼 바르티매오만은 겉옷을 벗어 던지고 주님께 달려갔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삶을 강력하게 상징합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걸었습니다. 믿음은 분명 하나의 앎이지만, "어두운 앎"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앎은 우리의 육신의 눈에 분명하게 보이거나 증명되는 식의 앎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어두운 앎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어떤 신뢰 속에서 움직이게 합니다.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어떤 존재에 대한 크나큰 신뢰심으로 인해 두려움 없이, 자유와 기쁨으로 우리의 삶을 걸어갈 수 있다면 말입니다!
한 눈먼 거지가 그 길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흔히 "보아야 믿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는 것에 큰 비중을 둡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의 2,500년 전에 "시각은 지식의 주요 원천"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양 문화는 특히 이 점을 따랐고, 다른 감각보다 시각을 더 선호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말을 뒤집어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믿어야 보게 된다!"라고요...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근원적인 "봄"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바르티매오를 통해 우리에게 이 참된 시력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에머슨(Emerson)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이는 특별한 것에만 감탄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일상의 것에 감탄한다."라고요. "참된 시력"이란 삶 속의 특별한 사건에만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흩어져 있는 아름다움들, 하느님께서 매일 선물처럼 놓아 주시는 은총을 알아보는 시력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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