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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화가 났던가?]] -後-
그 긴 오르막길의 거의 꼭대기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휴게소를 알리는 전광판 기둥이 저 앞쪽 어둠 속에서 불쑥 떠올랐다. 그러자 침묵을 깨고 노신사가 소리쳤다. "기사 양반! 우리 저기 들러서 좀 쉬어가세나!"
그는 앞쪽을 향해 오른팔을 엉거주춤 쳐든 채로 거듭 말하였다. "잠시 허리도 펴고 화장실도 다녀올 겸 말이오. 얼추 두어 시간은 온 것 같으니까 기사 양반도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렇지 않소?"
그는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둘러보며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밤차 타기가 이래서 쉽지 않은 거라. 원, 이렇게 고단허고 땀나고 숨이 차서야 어디 더 배길 도리가 있어야지~"
"그래요 제발 천천히 쉬어가면서 가십시다. 나는 가슴이 할딱거려서 죽을 지경이라구요. 두말 말고 쉬어서 가십시다.~" 노부인의 맞장구였다.
뒤를 이어 여기저기서 천성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위기는 금세 쉬어가는 쪽으로 기울었다. 사실 상당한 시간을 달려왔고 또, 긴장했던 탓으로 요의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갑자기 원두커피가 마시고 싶어졌고, 더러는 따끈한 가락국수가 생각났다. 벌써부터 철그덕거리며 여기저기서 벨트를 푸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을 태운 버스는 눈곱만치도 주저하거나 망설임 없이 그대로 휴게소를 통과하고 말았다.
승객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승객들의 요구가 이렇듯 깨끗이 묵살당하다니!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고도 운전기사는 가타부타 말 한마디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한동안 말문을 트지 못하였다. 급기야는 저 중년여자가 또 발끈하고 일어섰다.
"이봐요, 운전하는 양반! 귀가 먹었어요? 다들 쉬어가자는데 왜 아무런 말이 없는 거예요?"
그러자 저 점퍼를 입은 사내도 거들고 나섰다. "저 양반, 너무 시건방지구만 그래!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사람이길래 손님 알기를 뭣같이 아는 태도냐구 지금?"
"입에다가 지퍼를 채웠나보구먼, 그러니까 검다 쓰다 말 한 토막 없지." 누군가는 끌끌 혀를 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승객들은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고갯마루를 막 넘어선 버스가 그때부터 내리막길을 사정없이 굴러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본능적인 공포감이 순식간에 그들의 분노와 비난을 삼켜버렸다. 당장의 위험이 더 다급해졌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과 시비할 계제가 결코 아니던 것이다. 시비는커녕, 그를 자극한 만한 일체의 언행을 삼가야 할 판이었다. 승객들은 치밀어오르는 화중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철저히 자제해야 할 때라고 판단하였고, 그래서 다들 긴장된 침묵 속에서 운전사의 거동만 지켜보며 숨을 죽였다.
버스는 점점 더 가속도가 붙었다. 흡사 제어장치가 고장난 차처럼 컴컴한 골짜기를 향하여 거침없이 쏟아져내렸다. 전조등의 강렬한 불빛이 핥아대는 길바닥은 빗물에 젖어 범들거렸다. 어둠 속에 텅 빈 채로 드러누운 그 길은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자주 꺾어졌다. 그러면 승객들의 상체가 반사적으로 좌측 또는 우측으로 일제히 기울어지곤 하였다. 더러는 도로가 갑자기 사라지고 두 줄기 불기둥만 허공 중에 둥싯 떠오르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재갈 물린 차가 온통 진저리를 치면서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었고, 승객들은 한꺼번에 요란한 비명을 토해내곤 하였다. 맨 앞자리의 아가씨와 그리고 뒤쪽의 그 어린 계집아이가 특히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은 더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피를 말리는 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승객들은 대부분 눈을 감은 채였다. 다들 벨트를 단단히 조였고, 팔걸이나 등받이 같은 것을 단단히 부여잡은 자세였다. 그리고는, 버스가 급경사 진 코너를 돌 때마다 갈대처럼 이쪽 저쪽으로 맥없이 쏠리면서 온통 낭자한 비명들을 거푸 토해놓았다. 여자아이가 다시 까무러칠 듯 울어 젖혔고 1번 좌석의 아가씨도 마침내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갖가지 끔찍한 환상들이 눈앞에 떠올라 심장과 더불어 목구멍이 온통 얼어붙어 버린 상태였다. 나중에는 비명조차 끙끙 앓는 소리로 변하였다. 2번 좌석의 일병 역시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그는 통로 바닥에 떨어뜨렸던 모자를 집어 꾹 눌러썼는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옆에서 쿨쩍거리고 있는 아가씨와, 그리고 운전사의 완강한 뒤통수를 번갈아 지켜보면서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을 불끈불끈 쥐어보고는 하였다. 저 중년여인의 낯빛은 온통 퍼렇게 죽어 있었다. 의자를 꽉 메운 채 출렁거리고 있는 몸뚱어리가 금세 바닥으로 쏟아질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였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쥐고서 아예 통로 바닥으로 내려앉은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어쨌거나, 그 지옥의 골짜기를 다 내려오기까지 승객들은 엄청난 공포감에 짓눌린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산골짜기를 벗어나자마자 도로는 곧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널따란 들판을 가르면서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나갔다. 가속과 급제동 사이에서 몸살을 앓던 버스는 재갈 풀린 말처럼 다시 거침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승객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은 그때부터였다. 얼어붙었던 입이 하나둘 풀리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금방 험악해졌다.
"야 이 개새끼야. 차 세워! 당장 세우지 못해?" 맨 먼저 울분을 터뜨린 사람은 저 점퍼의 사내였다. 체구와는 달리 워낙 목청이 큰 사람이라 그의 노한 외침은 다른 온갖 소리들을 일순 덮어버렸다. 그는 오만불손하고 방약무인한 운전사를 당장 끌어내어 요절이라도 낼 듯이 살기등등하게 통로를 나섰다. 그러나, 어디에고 항상 더 성급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어서, 그보다 조금 더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저 중년여인에게 기회를 선점당하고 말았다. 그녀가 한 발 앞서 통로를 가로막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비대한 몸통에 비해 통로 공간은 너무 좁았다. 게다가 차는 또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는 상태였다. 통로를 꽉 메우다시피 하며 비척거리는 걸음이로 운전석 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이봐요, 아저씨! 지금 제정신 가지고 운전하는 거욧?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러는 거요? 우릴 몽땅 떼죽음시킬 작정이 아니라면 뭐 땜에 이런 식으로 차를 몰아? 대답해봐욧. 당장!" 여차직하면 머리끄뎅이라도 틀어쥘 듯이 그녀는 삿대질을 해대며 매섭게 추궁하였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은 사내는 묵묵부답이었다. 대답은 커녕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여자는 더 발끈하였다.
"이거 봐! 당신 귀머거리야? 사람 말이 말 같잖아 왜 대답이 없어? 귓구멍이 처막히기라두 한 거냐구?"
그래도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운전사는 여전히 묵묵부답, 고집스럽게 앞만 내다보고 있을 뿐 낯빛 한 점 변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 자리에 장착된 로봇이기나 하듯 사내의 옆모습은 냉담함을 넘어 오히려 무덤덤해 보였다.
"이 시건방진 사내 좀 보소. 내가 시방 지를 하야까시하는 중 아네!"
여자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더 이상 어찌 해볼 여지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몹시 낭패한 눈빛을 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응원군을 찾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승객들은 그녀의 거동만을 지켜볼 뿐, 갑자기 무력감 속으로 빠져들었다. 점퍼마저 입을 다문 채 통로 중간에 엉거주춤 서 있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곤혹감에 졌다. 당장 뺨따귀를 올려붙이고 머리칼을 쥐어뜯고 싶은 충동으로 격렬하게 앓고 있었지만 그러나, 도무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는 사실도 그녀는 역시 알고 있었다. 뜨거운 충동과 차가운 이성 사이에서 심하게 갈등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승객들은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뿐, 속수무책이었다. 그녀의, 분노 때문에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몸뚱어리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벼랑 끝 상황 속에서도 버스는 여전히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계기반의 속도계를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거의 광란에 가까운 속도임을 족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운전사는 얼마든지 더 밟아댈 기세였다. 가랑비가 이제는 제법 굵은 빗줄기로 변하여 앞 유리창을 두들겼고, 곧게 뻗어나간 아스팔트 위로 물보라가 허옇게 피었다. 다른 차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더 짙어진 어둠 속에서 세찬 빗소리만 그득하게 차올랐다. 예의 점퍼 차림의 사내는 슬그머니 제자리로 기어들었다. 넋이 빠진 표정이었다.
"아주머니, 그만 제자리로 돌아가시지요." 노신사가 그녀를 달랬다. "그렇게 서 있는 게 매우 위험해 보입니다."
"그러는 게 좋겠어요. 보세요, 점점 더 무섭게 달리고 있잖아요." 노부인의 말이었다. 그녀의 저 온화하던 얼굴은 잿빛으로 굳어버렸고, 목소리도 갑자기 십 년은 더 늙어버린 노파의 것이었다. "우리 말을 들어먹을 사람이 아니에요. 저 사람, 기어이 큰일을 내고 말걸요? 아마 거의 틀림없이~ 첨부터 우릴 떼죽음시키기로 작정을 한 거라구요! 오, 하느님 아버지!"
노부인은 남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쿨쩍거렸다. 노신사가 아내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안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운전석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통로 바닥 위로 무참하게 나동그라졌다. 버스에 또 한번 급제동이 걸린 때문이었다. 무거운 푸대자루처럼, 비좁은 공간에 메다꽂힌 탓에 여자는 사지를 버둥거리기만 할 뿐 일어나지 못하였다. 운이 좋았다고해도 뼈 한두 군데는 상했을 법하였다. 주변 사람들이 여럿 거들고 나서자 그녀는 연신 앓는 소리를 냈다. 어딘가 몹시 상한게 틀림없었다. 부축을 받아 간신히 제자리로 돌아간 그녀는 울분과 고통과 수치심 때문에 종당에는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예의 일병이 갑자기 결연한 태도로 모자를 벗어 통로 바닥에다 팽개치며 벌떡 일어섰고, 그러자 4번 좌석의 등산모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를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힌 것도 그때였다.
"우리 냉정합시다!" 등산모의 사내가 엉거주춤 일어서서 말하였다. "흥분은 절대 금물입니다. 잘못하면 커다란 불행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옳은 지적이었다. 승객들은 모두 몸서리를 쳤다. 이제 모든 게 분명해졌다. 지금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자신들의 생명을 움켜쥐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승객들은 가슴 섬뜩하게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랬다. 생사여탈의 권한을 틀어쥐고 있는 자는 하나님도 악마도 아니었다. 저 운전석을 차지한 채 이쪽으로 뒤통수만 보이고 앉아 있는 바로 그 사내, 차를 타면서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바로 그 사내였다. 승객들은 두려움에 가득 질린 눈으로 새삼스레 그를 지켜보았다. 여전히 얼굴은 없었다. 하나의 견고한 벽처럼, 그들로부터 등을 돌려댄 채로 무심히 앉아 있는 뒷모습만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앞자리에 계신 분들은 가급적 뒷좌석으로 옮겨 앉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통로에 선 채 등산모가 말하였다. "중간 이후가 그래도 안전할 듯싶습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런 속도에서 사고가 발생한다면 어느 자리인들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랴마는, 그래도 앞자리 승객들이 치명적일 확률이 훨씬 높다고 생각되었다. 맨 먼저 움직인 사람은 1번 좌석의 아가씨였다. 그녀는 재빨리, 점퍼 입은 사내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세 번째 줄에 있던 노부부는 서너 줄 더 뒤쪽으로 옮겨가서 통로를 사이에 두고 따로 떨어져 앉았다. 나란히 비어 있는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몇사람이 더 자리를 바꾸었고, 2번의 좌석의 일병은 마지막까지 주저하다가 결국 맨 뒷자리, 저 술푸대처럼 처박힌 채 잠들어 있는 사내 곁으로 옮겨갔다. 몹시 자존심이 상해하는 표정이었다.
창 밖 어둠 속에서는 굵어진 빗발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멀리서 이따금씩 떠오르곤 하던 마을의 불빛들마저 이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모든 그것을 지워버린 때문이었다. 버스는 어둡고 습기찬 공간을 꿰뚫으며 계속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였다. 바퀴소리와 엔진 소리가 활주로를 막 이륙한 비행기처럼 한결 날렵하고 매끄럽게 아우러졌고, 그럴수록 파멸의 공포감은 걷잡을 수 없어 점점 더 커졌다. 끔찍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남자들의 토막난 신음과 여자들의 짓눌린 울음소리가 가냘프게 흘러나왔다.
등산모의 사내가 통로를 따라 천천히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좌우의 빈자리들을 지나 운전석 곁에까지 다가선 다음, 왼손으로 운전석 뒤의 쇠기둥을 잡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무릎을 짚고 허리를 낮춘 다음 차분하게 계기반을 들여다보았다. 운전사의 콧김이 느껴질 정도로 지근거리였다. 속도계의 엄첨난 수치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호흡이 잘 맞는 조수이거나 하듯 운전사와 똑같은 투로 전방에다 눈길을 박은 채 다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전조등 불빛은 이제 두 개의 거창한 물기둥으로 변해 있었다. 저 앞 어둠 속으로부터 물보라가 한 가득 끓어 넘치고 있는 고속도로가 마치 머리도 꼬리도 보이지 않는 한 마리 거대한 뱀처럼 무수히 반짝이는 금비늘들을 털며 곧추 일어서고 또 일어서곤 하는 것을 그는 보고 있었다. 그것은 또,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는 거대한 수렁 같았다. 예외는 있을 수 없었다. 자신도, 운전사도, 그리고 어쩌다 운명을 함께하게 된 다른 모든 승객들과 버스까지도 깡그리 그 속으로 빨려들고 있는 느낌에 그는 온통 압도 당하였다. 절체절명의 느낌이었다. 그는 시선은 거두어들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운전사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것은 참으로 짧은 순간이었다. 운전사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혹 착각이었던가? 갈색 보안경 너머에 음험하게 숨어 있는 눈빛은 잘 읽을 수 없었다고 쳐도 그러나, 돼지털 같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돋아나 있는, 그 검푸른 빛깔의, 입 언저리에는 분명 음습한 웃음이 묻어 있었다고 그는 확신하였다. 허리를 편 그는 아무 말 없이 1번 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어느 순간부터 차의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한 사람, 그 운전사를 제외하고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승객들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들었다. 죽음의 공포와 사투를 벌이고 있던 그들은, 한 순간일망정,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절체절명의, 피를 말리는 상황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환청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참으로 한가하고 태평스럽게 코를 골아대는 소리였다. 승객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저 뒷자리에 구겨박힌 채 잠들어 있는 술꾼을 기억해냈다. 그 덩치 큰 사내야말로 참으로 상황과는 철저히 무관하게 그는 여전히 기세좋게 드르릉 드르릉 코를 골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왜 갑자기 그 소리가 승객들의 귀를 새삼스레 파고 들었던가? 그것은 분명 기이한 노릇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곧 사정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째는 세차게 쏟아지던 비가 어느새 멎어 있었고, 그리고 둘째는, 이거야말로 기적 같은 사실인바, 그처럼 고집스럽게 미친 듯이 내달리던 버스가 어느결에 순한 나귀처럼 얌전해져 있었던 것이다. 승객들 중에는 문득, 그렇다면 악몽을 꾸었던 건 아닌가 하고 주위를 뚤레뚤레 둘러보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단지, 일진이 나빴던 것이다. 하필이면 지랄 같은 버스에 걸려든 게 불운이었다. 삼십 분 앞서 출발한 차를 탔더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직은 무사하며, 머지않아 목적지에 닿을 것이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승객들은 차의 무리 없는 주행 속에서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긴장과 노여움이 누그러지면서 낯익은 평화 - 저 일상 중에서 종종 경험해왔던- 가 그들의 마음을 푸근히 가라앉게 만들었다.
위험한 순간은 더 이상 없었다. 버스는 쾌적한 속도로 남은 여정을 끝내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터미널로 진압한 차가 동체를 한두 번 가볍게 출렁거리고 나서 점잖게 멎었고 이어 출구가 매끄럽게 열렸을 때, 그랬다. 일부 승객들이 운전사에게 보여준 그 감사의 표시는, 그러므로 거짓 없는 감정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일테면, 저 노부인이 그랬다. 남편보다 한 발 앞서 출구로 나온 그녀는 운전사의 등을 토닥이며 거듭거듭 말하고 있었다.
"운전사 양반, 정말 수고가 많았수. 얼마나 피곤하우? 정말이지 난 너무너무 감사해~" 그녀의 얼굴은 무사 귀환의 기쁨 때문에 평소의 온화함을 넘어 거의 눈부시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노신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꽤나 지치고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 천천히 차에서 내려섰는데 그 거동하며 뒷모습이 노인 티가 완연하였다. 말이 없기로는 저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지나간 시간을 이미 마음에 담고 있지 않았다. 통로에서부터 열심히 밖을 기웃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마중꾼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운전석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런가 하면 저 일병은 좀 색다른 태도였다. 차에서 내려가기 전에 그는 운전사의 정수리에다 꼬챙이 같은 시선을 박은 채 잠시 뻣뻣하게 서 있었다. 구겨진 자존심 때문에, 일병 계급장이 달린 군모를 푹 눌러쓴 그의 얼굴은 도무지 편하지가 못하였다.
더러는 한두 마디씩 감정이 담긴 말들을 뱉기도 했는데 저 대여섯 살짜리 계집아이를 데리고 탔던 젊은 어머니가 말하자면 그런 쪽에 속했다.
"당신은 애들도 없어요? 운전이라도 해먹고 살려거든 맘뽀부터 곱게 가지라구요!" 말은 순했지만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 그녀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가장 험한 말들을 뱉은 사람은 저 뚱뚱한 중년 여자였다. 한바탕 걸쭉한 욕설을 퍼부은 다음 그녀는, 온몸이 쑤시고 저린다면서, 진단서를 떼어 기필코 니놈을 고발하고 말겠노라고 거품을 물었다. 하지만 종당에는 저 점퍼 차림의 사내로부터 위로와 부축을 받으며 그다지 어렵지 않게 승강대를 내려갔다.
대부분의 숭객들이 그런 식으로 뿔뿔이 흩어져 간 후에도 마지막까지 차 안에 남은 사람은 둘, 아니 셋이었다. 운전사와 등산모의 사내, 그리고 맨 뒷자리에서 여전히 코를 골고 있는 그 덩치 큰 사내.
등산모의 사내가 운전석을 향해 진작부터 던져두었던 시선을 마침내 거두어들고 나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통로를 거슬러 맨 뒷자리까지 갔고, 거기서 한동안 실랑이를 치른 끝에 아름드리 술푸대처럼 출렁거리는 사내를 떠메다시피 하여 다시 출구 쪽으로 나왔다. 그동안 운전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팔은 여전히 핸들을 감싸쥐고 고개를 약간 꺾은 채로 그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덩치 큰 취객을 떠메고 차에서 내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등산모의 사내는 그 힘겨운 노력 중에도 운전사의 거동을 놓치지 않았다. 비좁은 출구를 간신히 빠져나온 다음 그가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 때 운전사의 얼굴이 비로소 이쪽을 향해 정면으로 열려 있는 것을 그는 보았다. 보안경을 벗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그저 맥빠지고 꾸적꾸적한 얼굴이 하나 거기 있었다.
-끝-

첫댓글
오래된 뜨락, 드나드는 흔적 있어 왕선생의 와병 걱정사안 아닌듯 하여 안심.
그럴 떄가 있지요.
음악 글 올리기 심드렁한 기분... 나아가 헛된 느낌이 들 때도.
그래도 내게 소중한 건 늙디늙어... 가능하면 가는 그 날까지 주절거릴... 오래고 오랜 친구와의.... 존재론적 인식.
그 하나. 하하하
어제 비 내리는 부산.
마누라 여든번 쨰 셍일이었는데, 아이들 오가며 불편했을테지만.. 비 좋아하는 늙은이에게는 그럴듯한 운치... ㅎㅎㅎ
이 시각 베란다 유리창 뱆힌 빗방울.
그래도 용약, 해양길 나서려 하는 노익장, 예 있습니다.
왕선생의 좋른 하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