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선 코람데오 Coram Deo !!!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편139:1-4
어느 수도원에 덕망이 높은 원장이 있었다. 그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특별히 총애를 받는 제자가 있었다. 그런데 총애받는 그는 못생기고 지력이 없고 좀 덜 떨어졌기에 다른 제자들이 볼만이 많았다. 기회가 있어서 제자들이 원장에게 황의를 했다. 원장은 그들에게 그를 총애하는 이유를 알려 주겠다고 하면서 한 가지 미션을 원했다. 병아리 한마리씩을 주면서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병아리를 죽여 가지고 와라"제자들은 수도원 곳곳으로 흩어져서 병아리를 죽였다. 한참 후에 제자들은 죽은 병아리를 가지고 모였다. 가장 늦게 나타난 총애받는 제자의 손에는 살아있는 병아리가 있었다. 병아리를 죽이지 못하고 온 그 이유를 물었다. "아무리 으슥한 곳을 찾아봐도 하나님은 보고 계셔서 병아리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원장은 기뻐하면 말했다. "이것이 이 아이를 총애하는 이유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사건을 겪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공간이 넓어진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건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생생하게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아가는가?
유지파 세라의 증손 십다의 손자 갈미의 아들은 아간을 기억한다. 여호수아서 6,7,8장에 사건을 보면, 이스라엘은 유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만난 것은 낙공불낙의 여리고성이다. 하나님은 그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신다. 그 사건을 목격한 이스라엘은 감격한다. 하나님은 이 사건에서 한가지를 말씀하신다. '여리고성을 함락하고, 그 성의 노획물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손대지 말라' 그것이 지켜진 것으로 알았다. 사기가 충천한 이스라엘은 여리고성에 비교도 안되는 조그마한 아이성을 공격한다. 그곳에서 특별히 선발된 5,000명의 군사를 잃고 패배한다. 그 원인을 파악하던 이스라엘은 놀라온 사실을 발견한다. 유다지파 세라의 증손. 십다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여리고성의 탈취물 중에 시글 산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 오십 세겔을 훔쳐서 감추었던 것이다. 아간이 애써 외면했던 것이 무엇인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시선이다. 아무도 안 보는 줄 알았다. 숨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고 계셨다. 하나님의 시선은 피할 수도, 숨어 버릴 수도, 감추워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이다.
다윗을 기억한다. 그는 하나님의 시선을 늘 의식하고 살던 사람이다. 그러던 그는 밧세바를 차지하기 위해 완전 범죄를 흭책한다. 왕의 권위로 그가 꾸민 완전밤죄는 완벽했다. 밧세바의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어 죽이고 그 여인을 차지했다. 왕의 권력으로 은폐하고 조작하고 축소했다. 다윗이 인간의 본능에 지배되면서 애써 외면 하던 것도 하나님의 시선이다.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모든 잔꾀로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보고 계셨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아야기를 기억한다. 부부는 은혜를 받았다. 선한 일을 충동되었다. 집을 팔고 재산을 처리해서 교회 앞에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그 부부 역시도 인간의 본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까웠다.반을 전부라고 속였다. 善한 행위 뒤로 숨겨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부부가 선행이라는 것, 그것 뒤로 자신들 추함을 숨기면 애써 외면한 것도 하나님의 시선이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보고 계셨다.
시인을 이렇게 노래한다. "하나님은 나를 감찰하시고 나를 아신다. 하나님은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 하나님은 멀리서 나의 생각도 확실히 아신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길. 나의 눕는 것. 나의 모든 행위를 아신다. 하나님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다 아신다. 하나님은 하늘에도 계시고 하나님은 스올에도 계시고 하나님은 새벽에도 계시고 하나님은 바다끝에도 계시다."
욥은 하나님의 시선을 외면할 충분한 이유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도 인정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당한 고난은 하나님이 안 보고 계시다!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 하는 말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그는 그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한마디의 실수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믿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심을 믿었다.
욥 23:10 이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요셉도 마찬가지다. 형들의 이유없는 미움을 받을 때도 형들에게 죽음을 당할 뻔하다가 노예로 팔려갈 때도 그에게는 하나님의 시선을 부정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인 보디발에 부인이 준수한 청년 요셉을 유혹할 때 "아무도 보지 안는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에 요셉이 결국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시선이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시다. 한국에 가도 계시고, 미국에도 계시다. 회사에 출근을 해도 거기에 계시고, 퇴근을 해서 집에 와도 계시다. 골프장에 가도 거기 계시고, 낚시하러 가도 거기 계시다. 땀 흘려 열심히 일할 때에도 거기 계시고, 조용히 쉬고 있을 때도 계시다. 도서관에 가도 계시고, Mall 에 나가도 계시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나의 약점을 아실뿐만 아니라 강점을 아신다. 하나님은 나의 꿈도 아시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신다.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으지도 아시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신다. 하나님은 나의 과거를 아실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아신다. 하나님은 나에 대해 모르시는 것이 조금도 없으신 분이다. 이런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다.
나가는 이야기 어떤 아이가 친구 생일 잔치에 초청을 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날 심한 눈보라가 몰아쳐 앞이 보이지 않는 날씨였다.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 아버지가 가지 말라고 말렸다. 그러나 아이는 울면서 졸라대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온다고 했는데, 다른 아버지들은 다 허락했다고 한다. 하도 그래서 아버지는 결국 허락했다. 아이는 좋아라고 눈보라를 헤치며 친구 집으로 갔다. 힘들지만 겨우 겨우 도착했다. 그 집의 초인종을 누르면서 무심코 뒤를 돌아다본다. 그때 눈보라 사이로 사라지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바로 그 아버지였다. 그 아이가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 눈보라를 헤치며 살금살금 아들의 뒤를 따라왔던 것이다. 이게 아버지의 사랑이요, 보호하는 시선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사도가 환상 중에 본 7교회를 상징하는 7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표현한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마리와 털은 흰양털과 눈 같이 희고 그의 눈은 불꼴 같고” 계1:14
하나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피할 수 없는 시선으로 우리를 보고 계시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코람데오 Coram Deo !!!, 하나님 앞에서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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