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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신안 임자도, 탁트인 모래밭 12km 더위 썰물, 여유 밀물
물반 모래반 고운 수렁 밤새 속옷자락 쓸리는 소리가 나더니, 임자도 해변에 아침이 왔다. 물살은 안개에 감싸이고, 안개는 물살에 포개져 모래밭 물이랑이 흥건하다. 해당화 꽃무리, 흰 삘기밭을 흔들고 온 바람이 물안개를 밀어내자, 모래밭엔 수백 수천겹의 속옷무늬가 남았다. 물살 돌아와 찰랑일 때까지 길이 12㎞ 폭 200m, 물먹은 모래사막의 임자는 손톱만한 집게와 엽낭게들이다. 눈을 낮추면 다 들린다. 집 지고 집 찾아가는 집게들 발걸음 소리, 삽시간에 수만개의 모래구슬을 깔아놓는 엽낭게들의 모래 다루는 소리. 국내에서 가장 긴 모래밭을 자랑하는 전남 신안군 임자도의 대광해수욕장 이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쉬지 않고 걸어도 한시간이 넘게 걸리는 긴 해수욕장이다. 왕복 하프마라톤 코스에 가깝다. 실제로 이곳에선 해마다 7월 해변마라톤대회가 열리고 있다. 물이 다 빠지면 모래밭 폭이 200m를 넘는데, 절반쯤은 물반 모래반의 부드러운 수렁이다. 모래가 얼마나 고운지, 발에 밟히는 감촉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물결이 빚은 무수한 모래무늬와, 집게들의 기하학적인 이동로, 엽낭게들이 먹이를 취하고 뱉어낸 작은 모래경단들로 차마 발을 내딛기가 조심스러워지는 곳이다. 앞엔 고깔섬 무리가, 왼쪽 앞바다엔 뭍타리·섬타리 섬이 놓여 있다. 멀리로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해안경치를 지닌 소허사도·대허사도가 아스라이 수면에 깔려 있다. 물가 쪽 모래밭은 연하지만, 물기가 빠진 중간쯤까지는 매우 단단해, 자동차가 다니고 경비행기가 착륙할 수 있을 정도다. 드넓은 해변 군데군데 주민들이 숭어·밴댕이·게 따위를 잡기 위해 쳐놓은 지주식 그물인 덤장(막장식 그물)과 삼마이(일자형 그물), 그물 주변에 몰려든 갈매기들이 바닷가 풍경을 돋보이게 한다.
대광이란 이름은 주변 대기리와 광산리의 앞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본디 베틀을 닮았다는 한틀마을(대기리) 뒤쪽의 해변이란 뜻의 ‘뒷불’이었다.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을 일제가 바꿨고, 이를 뒤섞어 엉뚱한 지명이 만들어진 셈이다. 얼마 전까지도 바닷가엔 해당화가 깔린 숱한 모래언덕이 있었으나, 질 좋은 모래는 유리 제조업자들이 퍼가고, 빛깔 좋은 해당화는 한약재로 뿌리째 뽑혀나갔다. 물이 빠지면 뭍타리(육타리·무타리)까지 모래밭이 이어졌으나, 모래를 퍼간 뒤 길이 끊겼다. 이나마 모래밭이 남아 있는 것은, 중요성을 깨달은 주민들의 모래 지키기 투쟁 덕분이다. 해당화도 다시 옮겨심고 가꾼 끝에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 대광해수욕장 12㎞ 중 남쪽 2㎞는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 임자도에 뒷불해수욕장만 있는 건 아니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모래밭이 널찍한 해수욕장들이 두 곳 더 있다. 번잡한 인파를 피하려는 이들이 찾아든다는 곳들이다. 진리에서 남쪽으로 들어 이흑암리(육암리·육바구) 지나면 완만하고 꽤 널찍한 모래밭, 어머리해수욕장(육암해수욕장)이 나온다. 이 해수욕장 경치의 절정은 왼쪽 끝의 용난굴이다. 이무기가 바위를 깨고 나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굴이다. 수십길 절벽 아래, 아래위로 째진 검은 굴이 뚫려 있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자태가 아름답고 특이하다. 굴의 입구는 웅장한데,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모습이다. 바닥에 물이 고인, 높이 7~8m, 폭 1m 안팎의 비좁고 축축하고 주름 많은 굴을 따라 들어가면, 그 끝에서 눈부시게 열리는 새로운 바다를 만나게 된다. 이 느낌은 이 굴에서 나와본 자만이 알 수 있는 묘한 것이다. 이 느낌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던지, 옛날 임자도 초등교 선생님들은 이 굴 주변을 단골 소풍 장소로 삼았다고 한다. 면장이 되고, 농협 직원이 되고, 식당 주인이 된 주민들은 그래서 용난굴 소풍을 잊지못할 추억거리로 간직하고들 있다. 물이 들면 굴이 절반쯤 물에 잠겨 반대쪽과 물길이 통한다. 광산리 뒷산인 벙산(부엉산) 중턱에도 열두문턱굴(무장굴)이라는 굴이 있다. 열두 번 바위턱을 지나면 굴은 낭떠러지로 바뀌어, 그이상 들어가본 이가 없다고 한다. 뭍타리 앞바다 용둠벙과 연결돼 있다는 전설이 있다. 어머리해수욕장 오른쪽 산길을 한굽이 돌아 내려가면 또하나의 아담한 해수욕장이 펼쳐진다. 숨을 은(隱) 자를 쓰는 은동해수욕장이다. 임도가 뚫리기 전까지 이 마을 주민들은 대둔산 (한동산) 자락 비좁은 산길을 걸어 넘어다녔다고 한다. 이흑암리와 은동마을은 임자도에 3년간 유배됐던, 조선말 조선문인화의 대가 조희룡의 슬픔과 기쁨이 서린 곳이다. 조희룡은 유배시절 따르는 제자들과 용난굴을 구경하고, 은동 뒷산인 한동산에서 “평생 달구경 중에 가장 멋진 보름달”을 감상하며 시름을 잊기도 했다. “삿갓에 나막신 신고 바람 맞으며 산에 올라/푸른 바다 내려보니 바닷속 하늘 개었네/작년 서울의 1만채 집을 비추던 달이/지금은 어룡의 등 위를 가고 있네.”(김영회 지은 <조희룡 평전>에서 발췌) 임자도(신안)/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차림표도 없지만 80년 전통 손맛 서울식당 임자도는 일찍부터 해산물의 보고였다. 새우를 비롯해 민어·병어 등 어족자원이 풍부했다. 전장포(앞장골·장불)는 한때 전국 새우젓의 60% 이상이 생산되던 곳이었고, 섬타리·뭍타리 일대는 해방 뒤까지도 대규모 파시가 형성되던 곳이었다. 임자도의 ‘타리 민어’는 일찍부터 진상품으로 이름을 알렸다. 6·25로 섬타리·뭍타리 파시가 사라지고, 좀더 큰 섬인 옆의 재원도에서 파시가 이어졌다. 70년대말까지 파시로 흥청대던 재원도 앞바다는 고깃배가 들어차, 배를 딛고 다른 섬까지 건너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아 딴디 식당이 있어도, 안 가고 다 이리덜 오는 것이여어. 그래, 밥 허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차려줬다닝께.” 시할머니에 이어 시어머니 김금순(81)씨로부터 손맛을 배우고 이어받아 36년째 이 집에서 밥을 차려 온 며느리 김유자(60)씨의 말이다. 주민들 말을 종합해보면, 공무원이고 기업 직원이고 일반 주민들이고간에, 귀하다싶은 손님이 찾아오면 죄다 이 집으로 데려온다고 한다. 그만큼 남도의 맛 중에서도, 시골 가정집의 전통 손맛을 간직했다는 게 이들의 중론이다. 이 집 손맛의 근본은 젓갈에서 나온다. 황석어젓·새우젓·밴댕이젓·숭어창젓·까나리무젓·전어새끼젓 등 철에 따라 필요에 따라 다양한 젓갈을 직접 담가 상에 낸다. 소금은 유월 소금만을 골라 쌓아둬, 염기를 뺀 뒤 사용하고, 식초도 직접 담근 것만을 쓴다. 지금은 회와 찜·조림이 일품인 병어가 제철이고, 곧 고급어종인 민어 철이 된다. 민어의 어린 것(통치)은 지금도 나오고 있다. 80년 전과 달라진 것은 초가지붕이 어색한 기와지붕이 된 것과 기둥을 갈아끼운 것과 점방을 들였던 곳에 새로 식당칸을 조금 늘린 것뿐이라고 한다. 차림표도 없고 가격표도 없다. 단골들은 먹을 걸 정하고 미리 주문을 한다. 손님이 많으면 밥상과 밥이 모자라고, 교회 간다며 문을 닫기도 하므로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백반 5000원. (061)275-3038.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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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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