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조씨 시조
함안조씨 시조는 휘 조정趙鼎이고 자는 우보禹寶이며 호는 보당이고 익호는 충장忠壯이다.
중국 후당 사람으로 신라 말기에 두 아우 부釜와 당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온 뒤 합천에서 터를 잡아 세력을 키워 930년 고창성(안동)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견훤군을 대파하고 동경주현의 항복을 받아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공훈을 세우고 대장군에 올랐다.
그리고 940년 신흥사를 증축하여 공신당을 설치하고 고려를 건국하는데 크게 공헌한 공신 3천2백여명의 도형을 동서벽면에 그려 붙임으로써 훗날 이들을 벽상공신. 삼한공신. 개국공신 등으로 브르게 됨에 따라 시조도 개국벽상공신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후삼국을 통일 하는데 크게 공훈을 세운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등 장군과 930년 고창 전투에 함께 참여한 안동권씨 시조 권행과 안동김씨 시조 김선평 등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이렇게 고려 개국벽상공신이 됨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함안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함안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1988년 전북대학교 발행 전라문화논총 제2집에 발표한 박천식교수의 "고려시대 공신유형과 태조공신"이라는 논문에 등장하는 126명의 고려 개국공신 명단에 78번째로 올려져 있는 개국벽상공신 대장군이시다.
이 논문에 등장하는 趙씨가 또 한분 있어 이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하고자 한다.
고려를 건국하는데 크게 공헌한 공신 3천2백여명에 대해 문헌기록 등을 통하여 태조대의 활동 인물을 추적하면 300명을 찾을 수 있는데 그 중 태조공신으로 추정할 수 있는 인물은 126명이며 이들 중 태조공신이라는 기록이 있고 출신지가 확인되는 인물은 83명이 된다.
이들을 태조배형공신을 비롯하여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인물과 금석문 자료로서 묘지, 그리고 제종문집류에 산재한 행장. 묘갈. 익장. 제가의 족보와 가승기록. 문헌비고제계고성씨항 등의 기록에 의해 찾은 태조공신 126명의 사례를 모아 분류해 보기로 한다. 먼저 유지우 묘지에 태조공신인 대광 유금필은 관향이 무송으로 그 일문의 군적지이며 후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걸쳐 전형적인 재지호족在地豪族으로 존속하였고 그 후계가는 누대공신을 배출한 재상가문으로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 귀조카문임이 확인된다. 그의 행적은 고려의 형성, 통합 후의 제 과정을 가장 구체적으로 전하는 기록으로 고려건국사 연구의 시금석에 해당하는 자료이다.
이렇게 태조공신 중에 유금필의 예와 같이 중요한 방증자료가 현존하거나 고려사열전에 등재된 인물을 원칙으로 하여 태조 대 사람으로 추출된 경우라도 방증문헌자료가 확인된 경우와 후손의 묘지 등에 태조공신과 같은 개념의 기록이 전제된 인물은 1번부터 51번까지 52명에 해당된다.
다음은 금석총람재 묘지墓誌에 기록된 "00공신 모謀의 손"과 같이 분명한 기록에 의하였는데 태조공신의 명칭이 고려사열전에 없는 경우로 죽은 사람의 이름, 계급, 행적, 자손의 이름, 장의 연월일 등을 새겨서 관과 함께 묻은 돌이나 도판 등에 새긴 글에 의하여 확인된 공신은 52번부터 65번까지 14명인데 풍양조씨 시조이신 휘 조 맹趙孟은 65번째에 기록되었다.
풍양조씨 시조에 대한 묘지는 1404년 휘 조운흘이 사망하기 전에 자제自製한 것으로 고려사열전과 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지는 내용은 "조운흘본풍양인고려태조신평장사조맹삼십대손. 운흘은 풍양사람으로 고려 태조의 신하로 평장사에 오른 조 맹의 삼십대 손이 된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함안조씨도 족보재명공신으로 증보문헌비고제계고성씨항의 시조나 중조中祖로서 "태조공신 모" 등으로
표기된 경우를 추가하여 추출한 18명을 포함한 66번부터 83번까지의 공신 중 78번째에 등재됨으로써 나라趙자를 성으로 사용하는 22개 본관 중 2분의 시조 중 한분이 되신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풍양조씨와 함안조씨는 신라말기에 거주한 성씨로 22개 본관 중 가장 오래된 성씨지만 함안조씨는
중국에서 건너와 합천을 근거지로 세력을 형성하여 활약 하던 930년 고창전투(現 安東)에서 후백제 견훤군의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린 왕건을 도와 승리로 이끌고 대장군에 올랐다. 그리고 940년 신흥사를 중수하여 3천2백여명의 공신의 도형을 그려 붙임으로써 훗날 그를 개국벽상신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고창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움으로써 당시 유력한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등 장군들과 고창전투에 함께 참전한 안동김씨 시조 김선평, 안동권씨 시조 권 행과도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반면 풍양조씨는 양주 속현인 풍양현의 독정이에서 농사를 지으면 살다가 왕건을 맞나 그를 도와 고려를 건국하고 정승에 올랐다는 전설이 있으나 이는 전설일 뿐이고 휘 조 맹에 대한 최근 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속현인 풍양현의 호족으로 활약하던 918년 6월 왕건이 파견한 특사의 권유를 받고 귀순하여 그를 돕고 귀순자에게 내린 최고 벼슬인 시중에 제수되고 국가 최고의 영전인 정1품 태사에 봉해지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자에게 내리는 최고 훈직인 상주국을 받고 고려 만의 품계로 최고 품계인 1품 삼중대광을 받으셨다. 이렇게 함안조씨와 풍양조씨는 함께 고려 개국공신인 선조를 시조로 모시는 趙씨 일가다.
이렇게 훌륭한 시조를 모시고 있는 함안조씨는 이번 총선에 국민의힘으로 3명. 민주당으로 2명의 국회의원 후보를 배출하여 서울에서 은희씨가, 부산에서 경태씨와 승환씨가 국민의힘으로 당선이 됐고 대전에서 승래씨가 민주당으로 당선이 됨으로써 4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여 함안조씨의 명예를 드높혔고 중흥中興의 시대를 맞고 있어 趙씨 일가 모두가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풍양인 남 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