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덴 (Dryden, Ontario), 그 깡촌
드라이덴 ( DRYDEN, ONTARIO ), 그 깡촌
- 우리가 탄 비행기가 곧 위니펙 (Winnipeg, Manitoba) 공항에 도착한다는 아나운스멘트가 있고 나서 비행기는 천천히 하강을 시작하더니 잠시후 캐나다 중부의 주요 거점 도시인 위니펙에 착륙 했다. 위니펙은 마니토바주 주도로서 인구 약 100 만 정도의 캐나다의 8대 도시이다.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인구 100만 이면 별것 아닌것 같지만 캐나다에서 인구 100만 이 넘는 도시는 토론토/밴쿠버/몬트리얼/캘거리/에드몬턴/퀘벡/오타와 정도에 불과 하다. 국토는 남한의 약 100배 인데 인구는 3500만 명으로 국토에 비해 인구가 적어도 너무 적다. 그래서 해마다 약 30여 만명의 이민을 받아들여 겨우 인구 증가율 1.5-2%를 유지하는데 그 덕에 필자도 캐나다 땅에 이민자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 필자가 12월 한 겨울에 이곳 위니펙에 간 것은, 그것도 겨울에 춥기로 유명한,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400킬로 떨어진 드라이덴 이라는 작은 마을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곳은 인구가 8000정도 밖에 안되니 물론 밴쿠버에서 항공으로 직행은 없고 위니펙에서 버스로만 진입이 가능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조금 넘었다. 드라이덴 행 그레이하운드 버스는 6시 반이니 어디선가 4시간 반을 보내야 하는데 위니펙이 초행에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12월 27일 인지라 감히 시내 관광은 엄두도 못 내고 시내 식당에서 늦은 점심식사나 하고 그레이하운드 버스 정류장에서 대기 하기로 하고 택시를 탔다.
- 택시기사 말이 버스 정류장에도 식당이 있다고 해서 이왕이면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버스를 기다리는 편이 여러모로 편리할 것 같았다. 그러나 기대 했던것과는 달리 그곳은 그저 샌드위치나 햄버거에 커피 정도나 파는 간이 식당이어서 우리는 크게 실망했다. 차라리 시내 중국식당으로 갈 걸 하고 후회가 많았다.
- 시장한 김에 햄버거와 커피로 식사를 한후 버스 시간을 체크 하고도 아직도 3시간이나 여유가 있어 대합실을 천천히 한바퀴 도는데 나와 같은 유색인종인 인디안들이 상당히 많았다. 아마 이 근처에 인디안 마을이 있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그 때는 이들이 나의 큰 고객들이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 했다.
- 드라이덴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겨울철은 오후 4시면 어두워지는데 6시 반 버스를 타고 곧 위니펙 시내를 벗어나니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드믄 드믄 있는 민가의 불 빛 뿐 사위가 모두 캄캄했다. 민가의 불빛이 그야말로 십리를 가야 하나씩 나타나는듯 했다. 약 2시간을 달려 케노라라는 제법 큰 마을 같은 곳에 들러 30분을 쉬어 가며 그사이 승객이 내리고 새 승객이 올라 탄다. 그곳 정류장에 있는 조그만 식당에서 따끈한 커피와 샌드위치로 요기를 하고 또 동쪽으로 동쪽으로 2시간을 계속 달리다 보니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인 드라이덴에 도착했다.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영하 20도에 눈보라가 심하게 휘날리는게 그곳의 첫 인상은 춥고 살벌 했다.
- 늦은밤 이었지만 우리는 우리를 그곳에 초청한 C사장 내외의 열열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우리보다 약 1년 먼저 캐나다에 이민와서 이것저것 먹고 살 궁리를 하다 택한것이 드라이덴에서의 모텔업 이었다. 그 또한 한국에서 최고로 알아주는 K은행에 다니다 IMF로 날 벼락을 맞고 재 취업도 실패하고 캐나다로 이민 온 점이 필자와 같았다. 이 날은 너무 늦어 그들이 운영하는 모텔은 다음날 보기로 하고 바로 그들의 집으로 향했다.
- 워낙 작은 도시라 차로 10분도 걸리지 않아 그들의 집에 도착해 보니 이건 조그만 궁궐이었다. 한국에서 또는 밴쿠버에서도 이런 집을 소유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컸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경치 또한 수준급 이었다. 호수가에 조그만 보트를 댈수 있도록 목재로 만든 선교도 있는 집 이었다. 비록 보트는 미처 준비를 못 했지만. 그것도 장사만 잘되면 내년 여름에는 하나 장만할 것이라고 했다.
- 우리는 밤 늦도록 와인을 마셔가며 일년만의 해후를 기뻐했다. 주로 우리의 제일 큰 관심사인 캐나다에서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그들 부부는 이구동성으로 자기네가 하는 모텔업이 우리 한국인 이민자들이 하기에는 그래도 제일 나아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여름은 성수기이니 그렇다 치고 겨울은 여행자들이 아주 적으니 그 땐 힘들것 아니냐고 했더니 모르는 말씀이라고 한다.
- 겨울은 이곳 아이스 하키 경기장에서 계속 경기가 있어 주변의 마을에서 경기 하러 몰려드는데 특히 어린이 경기가 있는 날은 부모네까지 함께 오기 때문에 방이 모자랄 지경이며 그 밖에 주변에 널려있는 인디안 부락에서도 쇼핑하러 오는 곳이라서 겨울이라도 크게 타격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짐짓 수년내에 교포 갑부하나 탄생할 것이라고 했더니 한술 더 뜬다. 다름 아니고 자기네가 이렇게 큰 집을 작만한 것은 한국에 있는 자식들 2명까지 불러와 이곳에서 함께 살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수입규모가 짐작이 갔다. 이젠 더 물어 보고 자시고 할 정도는 넘어섰다. 내일 그들의 모텔을 둘러보고 맘에 들면 필자도 당장 이곳에서 모텔업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 그리고 그 동네 인심에 대해서도 말 해주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후 필자의 선택은 이미 그곳에서의 모텔업으로 완전히 기울게 된다. 그들이 어찌어찌 해서 이곳의 모텔 하나가 시장에 나온것을 발견하고 이 낯선 곳에 발을 디뎠고, 어리버리하며 계약을 하러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는데 그 변호사가 보기에 그들이 구사하는 영어나 그들의 경험으로 볼 때 도저히 그곳에서 모텔업을 성공적으로 해 낼것 같지 않았던지 잠간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디에 전화를 걸더란다.
- 그리고 조금 있으니 어느 동양사람이 그 사무실로 들어서더니 당신네들 한국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자기도 한국사람인데 반갑다고 하며 자기가 여기 오게된 것은 이 변호사가 자기에게 전화해서 여기 한국사람들이 와 있으니 당신이 와서 이 사람들이 정말 그 모텔을 인수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 좀 해 달라고 했단다.
- 그리고 그 분의 입회하에 모텔 인수는 무사히 마치게 되었고 그분 집에까지 가서 저녁도 먹게 되었다. 그 분과 변호사와의 관계는 아이들 학교 학부모로서 학부형회에서 처음 만나 그후로 약 30여년간 한 동네에서 한 사람은 변호사로 또 한 사람은 그 곳에 있는 세계적인 제지회사 간부로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 훗날 우리는 그 분을 마선생님이라고 불렸는데 독일에서 제지학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직장을 구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해 캐나다 퀘벡주의 제지회사에 입사원서를 내어 합격해서 그곳에 갔더니 드라이덴 제지공장으로 발령을 냈다. 모든 조건은 좋지만 이곳이 워낙 벽지라서 해마다 퀘벡의 공장으로 전출상신을 했는데 본사에서는 1년만, 1년만 참고 있으라고 한것이 벌써 30년이 흘렀단다. 그 사이 이곳에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아 이곳 국민학교 중.고등학교를 거쳐 토론토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둘 다 출가시켰으며 그들은 지금은 모두 토론토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 그들 부부는 자식들이 다 떠난 큰 집에서 외롭게 살고 있었으나 후에 필자 가족이 드라이덴으로 이주 하면서 졸지에 한국인 3가구가 그 깡촌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게 되었다.
- 우리는 드라이덴에서 하루를 더 머믈며 C사장의 모텔에서도 반나절을 머믈렀는데 그들의 말 대로 모텔은 한 겨울임에도 손님으로 북적 거렸다. 좋은것을 보면 그대로 따라 하고 싶어 안달이 나고 조금 잘 했다 싶으면 우쭐대는 필자의 성격 결함이 또 발현되었다. 모텔업이 내 적성에 제일 맞는듯 했다. 이젠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서 모텔업을 시작하지 않고는 안 될것 같았다.
- 그래서 우리는 C사장 부부에게 이곳의 모텔이 시장에 나오면 제일 먼저 우리에게 알려줄 것을 신신 당부하며 밴쿠버로 돌아왔다.
첫댓글 - 제목이 2번 나타나는데 아무리 지우려해도 안되네요.
- 너그럽게 봐 주시기 바랍니다.
넹 …
회원님들은 다음 얘기가 궁금하실 거예요. ^•*
흥미 진진한 대하드라마 같은 이민사,
다음글이 기다려 집니 다 .
정선생님 저도 담 얘기 기다립니다
늘 흥미롭수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