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의 왼쪽 바퀴에는 분명 나사 하나가 빠졌을 것이다. 아니면 차의 폐부 깊숙한 어느 곳에 붙어 있어야 할 꼬마애들의 머리핀 같은 작고 앙증맞은 나사 하나가 떨어져 나갔거나. 여자는 자꾸만 헛 기침을 해대는 버스의 심장 근처에 앉아 두 눈을 감고 한참동안 그 생각을 하고 있다. 버스의 왼쪽 구조를 이루고 있다 잘못된 시술로 세상 밖으로 나왔을 뼈 조각을. 그 뼈 조각은 버스의 3분의 1만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마티즈의 대뇌를 이루고 있거나 비명소리를 요란하게 지르며 밤 거리를 횡단하는 오토바이의 명치에서 몸에도 맞지 않는 제 역할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여자는 그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출발하면서 부터 폐병쟁이의 흉내를 내고 있는 버스를 불안한 눈길로 훑어보다가 어느 새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잠을 자지 않으면 또 어떤 생각에 빠질 지 모른다는 그 두려운 마음이 잠이라는 비상구를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잠이라는 그 나름의 변명은 여자에게 망설임이라는 단어를 상기시키지 않아서 좋았다. 대신 차창 밖으로 보이는 늙어버린 산과 나무, 고요하게 흐르는 강 따위를 포기해야 했지만. 덜컹덜컹 여자의 머리도 함께 흔들린다.
버스에서 내리자 계절 만큼 늙은 터미널이 기름냄새를 풍기며 앉아있다. 페인트가 벗겨진 살갓은 오랜 시간의 냄새가 베어 있고 내부에 자리 잡은 약국과 매점, 관절염에 걸린 나무 의자까지도 시간을 피해 도망치지는 못한 모양이다. 여자는 담배 하나를 베어 물고 터미널 중앙에 서 있다. 정말 쇼생크처럼 악명높은 시간의 감옥에서 탈출한 자는 아무도 없다. 새삼 여자는 늙어가는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난생 처음 와 본 어느 군 단위의 터미널에서 시간의 맹목적인 질주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무런 감정없이 다가온 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시든다는 것은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여자는 아주 오래전 부터 모든 것을 그저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시간역시 예외는 아니다. 여자는 점점 소멸되어 가는 담배를 바라보며 이것 만이 이 진리 앞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애도표시라고 생각한다. 담배 한대를 다 피우고 터미널에서 나와 여자는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거리마다 청사초롱이 걸려 있고, 인삼 모양의 티셔츠를 입은 자원 봉사자들은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하나씩 나눠주고 있다. 축제. J 말이 사실인가 보다.
여자는 어제 J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한창 운동화를 빨고 있을 때였다. 솔이 거칠어진 칫솔를 가지고 운동화의 밑창을 열심히 문지르며 이 운동화를 다 빨고 나면 얼마전 얻은 일본 커피를 맛 보리라는 생각에 잔뜩 빠져있었는데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자는 핸드폰에 찍힌 낯선 발신 번호에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잘 있었어? 한 오년 만인가?"
수화기 너머 '잘'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부터 여자는 J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 오년 만인가'하자 벌써 그렇게 됐나, 하는 세월의 무색함에 감탄했다.
"지역 축제가 다 그렇지 뭐. 근데 내일이 축제 마지막이야. 구경올래?"
그 한 오 년만에 전화를 건 J는 여자에게 축제에 초대를 하고 있다.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다. 여자는 잠시 어리둥절 했다. 그 인삼축제라는 것도 처음 들어 봤거니와 '금산' 이라는 지명은 낯설다면 낯선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러지 뭐,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내일은 무슨 호텔 커피숍에서 선을 보기로 한 날이었다. 부모님의 등쌀에 못 이겨서 그러마 했던 것이었는데 마침 선을 피할 핑계 거리가 생겨 다행이라고 여자는 피식 웃어본다. 허나 그것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J의 목소리를 듣자 여자는 순간 운동화를 빨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울컥 치밀어 올랐다. J가 하는 일은 고작 빵집에서 빵 굽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여자는 눈물이 날 만큼 자신의 생이 억울한 것이다. 그래, 이 억울한 마음을 달래 보려고, 여자가 생각한 만큼 J는 크게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다짐을 받아 두기 위해 여자는 축제에 왔을 것이다. 이런 불순한 마음 때문에 버스에 오르기 전 부터 그렇게 망설여 졌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J의 말 처럼 우측 끝에는 정말 안경원이 있다. 여자는 익숙하게 낯선 땅을 밟아 간다. 꽃집과 화장품 가게를 지나치다가 여자는 속옷 가게에서 멈춰선다. 여자는 실내등 아래에서 빛을 바래고 있는 꽃집의 장미와 국화 따위를 바라 보았다. 화장품가게에서 손님의 얼굴에 크림을 발라대며 눈웃음을 짓는 주인의 미소도 스쳐 갔다. 그러나 속옷 가게에서 여자는 문득 J에게 선물을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꽃집과 화장품 가게를 지나 치면서는 들지 않았던 마음이 하얀 레이스가 달린 브레지어와 팬티를 보자 문득 J의 얼굴이 떠올른다. 여자는 속옷 가게로 들어가 J의 선물을 산다.
안경원을 돌아 가니 '파리바게트'라는 작은 간판의 빵집이 보인다. 여자는 빵집을 보며 망설인다.
"터미널에서 나와서 우측을 보면 일공공일 안경원이 있거든. 그 안경원 위에는 사진관이 하나 있구. 건물이 커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그쪽으로 계속 걸어와서 좌측을 보면 우리 제과점이 있어."
J의 말이 여자의 머리 속에서 자꾸 되새김질 시킨다. 우리 제과점. 우리 제과점. 여자는 단어가 주는 불쾌함을 생각한다. 제과점. J의 입에서 빵집이 아니라 제과점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여자는 너무나도 생경한 단어에 불쾌했다. 어쩌면 그보다 여자는 '우리'라는 말이 더 신경이 쓰였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J에게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생긴 것인가. 그 '우리'라는 존재가 주는 왠지 모를 섭섭함이 여자의 앞을 막아선다. 여자는 누구보다 J가 잘 되길 빌었다. 그러나 막상 J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자꾸만 걸린다. 그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삶이 없는 여자는 또 담배를 문다. 여자의 손에 포장된 하얀 속옷이 덜렁 거린다.
빵집 문을 열자 맑은 종소리가 울린다. 실내는 억새빛이 난다. 여자의 후각은 이제 껏 맡아 온 치열한 냄새와는 다름을 금새 눈치 챈다. 얼마전 홈쇼핑에서 본 장미 무늬가 과장되게 그려진 보드러운 카펫의 느낌이다. 어정쩡하게 둘러보는 여자를 향해 종업원이 묻는다.
"뭐 찾으시는 것 있으세요?"
여자는 어눌하게 J의 이름을 말한다. 오랜만에 부르는 이름이라 입에서 어눌하게 발음되어 나왔다. 종업원이 주방으로 들어 갔을 때까지 여자는 J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써 본다. 그리고 또박또박 발음해 본다.
"왔구나."
밀가루가 묻은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며 J가 손을 내민다.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의 손을 잡는다.
"잠깐만 기다릴래? 지금 막 오븐에서 바게트를 꺼내는 중이었거든."
여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J는 여자를 테이블 앞에 앉게 하고 접시위에 딸기잼이 든 도넛과 슈크림빵을 담아 테이블 위에 놓는다. 그리고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컵에 따른다. 여자는 유리컵을 채우는 우유를 바라본다. 하얀 우유가 절정을 향해 치닫는 순간, 여자는 허기짐을 느낀다. 자신의 몸을 지긋이 누르면 바스락 거리며 부셔질 것만 같은 느낌. J는 여자의 어깨를 몇번 두드리고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다. 여자는 J의 뒷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J의 걸음 걸이에 맞춰 한대 묶인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머리끈 부터 신발밑창까지 여자에게는 너무 낯설다. 그러나 그 머리끈을 묶은 사람이라면 악수를 청하거나 빵집을 제과점이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테이블에 놓인 우유를 단숨에 들이킨다. 이곳은 너무 아늑하다. 조각난 과일들이 생크림과 어울린 모습은 그 어떤 그림보다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 섰을 때 여자의 후각을 자극했던 냄새는 사람을 노곤하게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미각을 충족시키는 기쁨이란. 여자는 스스로에게 자조의 웃음을 보낸다. 지금 J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나? 정말 대단한 반전, 기막한 드리마다. J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니. 그 유난히 시리게 눈이 왔던 겨울, J에게 여자 사진이 붙은 수험표를 보여 주던 날. 여자는 상상이나 했겠는가. J의 빵집에서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여자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그러나 힘없이 머리카락은 다시 눈 앞으로 내려온다.
"나가자."
J가 주방에서 앞치마를 벗으며 나온다. 앞치마를 벗는 J의 동작이 그녀 삶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는 게 여자는 믿겨지지가 않는다. 그 담요 속에서 곧 질식할 것만 같던 J 삶 어딘가에 저런 여유가 있었다는 것이.
여자와 J는 빵집에서 나와 축제가 열리는 인삼 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다. 여자의 눈 앞에서 파란 불이 깜빡 거리고 있다.
"뛸까?"
J는 여자의 손을 잡고 뛰어 횡단보도를 건넌다. 아슬아슬하게 신호등에 다시 빨간 불이 들어온다.
"낮에는 별로 볼게 없구, 밤이 되야 재미있는데. 어디 들어가서 차나 한잔 할까?"
J가 어색하게 잡고 있던 손을 풀며 말한다.
"차는 됐구 술이나 마시자."
낮에 문을 연 술집을 찾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축제 기간이었으니 모두들 가게 문을 닫고 거리에 간이 천막을 친 모양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가락 국수 따위를 말아주거나 핫도그를 파는 포장마차들 뿐이다. J는 여자는 데리고 축제가 열리는 거리 깊숙히 걸어 들어간다. 점점 갈수록 행상들은 줄어 들고 전문적으로 인삼을 파는 점포들과 붉게 물든 가로수가 늘어서 있다. 도로에 길게 줄을 선 차량에 비해 정작 인삼이 거래되고 있어야 할 곳은 텅 비어 있다.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설마 저 사람들이 모두 약장수의 노랫소리나 듣자고 모인 것은 아닐텐데."
여자의 귀로 남자성기를 지칭하는 듯한 길다란 고무 풍선을 허리에 맨 약장수의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실체는 죽어가고 있어. 그렇지만 허상은 실체를 살리기도 하지."
J녀는 거리에 주저 앉는다. 여자는 입고 온 점퍼의 앞섬 주머니에서 담배하나를 꺼내 문다. 옆에 서 있는 가로수에서 붉은 잎 하나가 느리게 떨어진다. 여자는 낙엽을 오래도록 응시한다. 그네들 뒤로 있는 것은 허상인가, 여자는 잠시 기름에서 튀겨지고 있는 핫도그와 먼지가 쌓여져 가는 인삼상자를 대조해 본다. J 말대로 허상은 실체를 살려 낼지도 모른다. 하나의 오 백원 짜리 핫도그가 축제를 빛나게 해주고 결국에는 이 먼지쌓인 상자들은 서울, 경기, 강원…… 각각의 넘버가 찍힌 자동차의 트렁크에 실려 갈지도 모른다. 그럼 J의 과거는 허상인가. 현재는 실체인가. J 팔목의 시곗줄 아래로 아직 흉터는 버젓이 꿈틀대고 있다. J는 누구를 죽이려고 했던 것인가. 과거의 허상속에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죽기 위해 부단히 괴로워 했던 J는 지금 희망을 가진 실체인 삶을 살고 있나.
J는 여자를 데리고 2층 건물로 올라간다. 2층으로 오르는 벽면에는 철지난 영화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러브 엑츄얼리, 바닐라 스카이, 화양연화등 모두 로맨스물이다. 특히 금이간 벽면에 붙은 '접속'의 주인공인 한석규와 전도연이 여자에게 더 아프게 다가온다. 곧 무너져 내릴 곳을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 영화 포스터가 지켜주고 있는 것만 같아서. 고작 가벼운 사랑따위로 이 벽면을 유지시키고 있다니.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베트남 계열의 여자가 앉아 졸고있다. J가 다가가 카운터를 똑똑 두드리자 베트남 계열의 여자는 벌떡 일어선다. J는 여자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시원하게 웃어보인다.
"린, 맥주좀 주고 맛있는 안주도 부탁해."
J는 너무 낡아 얼룩 무늬가 되어 버린 가죽 의자에 앉는다. 여자도 마주 앉는다. 테이블은 의자에 비해 비대하게 크다. 여자는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고 보니 이 가죽의자와 큰 테이블 만큼 모든 것은 어울리지가 않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귀여운 우체통 속에 채송화가 자라고 있고 채송화를 비추는 햇볕이 들어오는 이중 창의 안쪽 창문은 푸른색 아크릴을 대어 놓은 모양이다. 린은 주 다섯 병과 '짜죠'라는 다진 돼지고기나 새우살, 야채등을 넣고 말아 기름이 튀긴 베트남 요리를 내어놓는다. J는 병따개로 병을 따 여자에게 건내준다. 린은 다시 카운터에서 잠이 든다.
"베트남 여자야. 인삼농사 짓는 총각한테 시집 왔는데 맞고 살았다나 봐. 애기도 몇번 유산하구. 무슨 단체의 도움으로 겨우 이혼은 했는데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가기는 싫더래. 그래서 위자료 조로 몇푼 얻은 돈으로 이걸 차렸대. 린, 꿈이 뭔줄 알아? 평생동안 돈 걱정 안하고 영화 보는 거. 한국으로 시집온 것도 알고보면 그 한류열풍 때문이라지. 대한민국 남자들이 배우들처럼 다 멋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여자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린을 바라본다. 어쩌면 금이간 벽면을 유지시키고 있던 로맨스 영화의 포스터들은 상처로 무너져 내리려고 하는 린을 유지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J와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맥주 한 병을 비워낸다. 그러나 여자는 빵집에서 부터 늘러붙기 시작한 갈증이 떠나질 않는다. 여자는 병따개로 또 다른 맥주를 따 입에 댄다. J 역시 맥주 한 병을 다시 입에 덴다. 여자는 맥주 병을 잡고 있는 J의 손목을 바라본다. 여자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J는 어색하게 웃는다.
“이게 나를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J는 자신의 팔목에 입을 맞춘다. 죽기 전까지 정지가 없는게 삶이라는 놈 같은데 J는 마치 여자 앞에서 정지된 사진처럼 보인다. 정지된 사진속의 J는 시원한 맥주병을 든 손목에 입술을 대고 있다. 과거를 껴 안아 버린 J의 미소. 행복은 어쩌면 불행의 반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여자는 행복이 불행의 반댓말이라는 진리에 테클을 걸어 본다. 상처 속에서 여유를 찾은 J의 모습을 보고.
“처음엔 정말 혼자 같았어. 혼자 여기에 떨궈 졌을 때의 기분이란 모험심 보다는 두려움. 덜컥 가슴이 내려 앉더라. 딱 오 년 걸렸다. 늦은 오후 창문 틈에 먼지끼는 것도 보고, 바람 부는 데로 흔들려도 보고, 가끔… 다이어리에 매운 시절 이야기 한토막씩 써 내려가는데 딱 오 년이 걸리더라. 그 쯤해서 네 생각도 나고.”
J가 오 년만에 다시 일어섰다. 사람들은 대게 성공하면 옛 추억을 끄집어 내기 마련이다. 그 옛 추억이 뼈에 저리면 저릴 수록 지금의 성공은 무척이다 대견스럽게 다가온다. 그렇게 보자면 J는 지금 죽을 만큼 행복하다고 해야 하나. 여자는 J가 오 년만에 다이어리에 처음 쓰게 되었을 그 매운 이야기를 생각한다.
숟가락은 때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J가 사용한 건 작은 플라스틱 스푼이었다. 숟가락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크기의 작은 스푼. 따지고 보면 주위에 무기 안되는 물건이 없겠지만 그래도 저 커피나 타고 기껏해야 아이스크림이나 떠 넣을 수 있는 스푼이 J 손에서 무기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이다. 여자는 소년원에서 J를 처음 만났다. J의 죄목은 살인 미수죄. 여자는 폭력 혐의로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J는 대체로 조용했고 어디든 한계가 되는 한도까지 걷기를 좋아했다.
그 눈 내리던 겨울에 왜 여자는 J가 누굴 죽이고 싶었는지에 대해 궁금해 졌는지 모르겠다. 봄이 오면 이곳을 나가기 때문이었을까. 여자가 조심스레 물었을 때 눈 쌓이는 듯한 소리로 J는 여자에게 말했다.
“외롭다는게 어떤 건 줄 알아?”
여자는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아이가 뱃 속에서 없어졌을 때, 그런 생각을 했어. 비 오는 오후에 혼자 풍선껌을 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라고. 이게 외롭다는 건가?”
J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럼 외로워서 사람을 죽이려고 했단 말이야?”
여자가 물었다.
“갖고 싶었거든. 안 그럼 굶어 죽을 것 같아서.”
여자는 스무 살이 되던 봄에 그곳을 나왔다. J는 복무기간이 더 남아 청주여자교도소로 옮겨갔다. 여자는 간간히 J를 생각했다. 굶어 죽을 것만 같았다는 J, 외로움에 허기졌다는 J, 독서실 창가에서 바라뵈는 낮은 풀들을 볼 때마다 그녀가 떠올랐다. 저렇게 살아라. 세상 속 깊이 뿌리 내리고.
“그 때, 내가 수험표 들고 너 찾아간 날. 그 남자였지? 네가… 죽이려고 한 사람?”
J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는다.
“얼마전에 죽었대. 과로로. 사랑은 한정되어 있는데 쪼개서 나눠주느라고 그런 거야. 그 사랑 맛 본 애들은 자꾸 졸라. 떼써. 더 달라구. 나만 달라구. 나도 떼썼어. 배고프니까 나만 갖겠다구.”
여자는 소년원에서 나온 그해 입시준비를 해서 시험을 봤다. 그리고 시험 본 후 얼마되지 않아 J를 찾아갔다. 면회실 앞에서 여자는 한 남자를 봤다. 고아인 J를 후원해 준다던 남자는 내가 J의 친구라고 말하자 나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깊이 아픈 아이입니다. 필요한 건 사랑 뿐이죠.”
남자가 흰 와이셔츠에 받쳐 입은 브라운 계열의 쪼끼는 무척 따뜻해 보였다. 저 쪼끼 속의 따끈한 심장을 한 스푼 맛 본 J가 미치도록 갈구 했음은 안 보아도 뻔한 이치였다.
“코코아를 타고 있었어. 내가 타준 코코아를 한 모금이라도 마셔줄 시간이 있었다면 나는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까.”
테이블에서 고개를 든 J가 여자를 똑바로 응시한다.
“아마 그래도 난 죽이려고 했을 거야. 사랑이라는게 그런 거드라. 중독 같은 거. 처음엔 내가 타 준 코코아 한 잔만 마셨으면 좋겠다, 했다가 또 나만 바라봤으면 좋겠다, 했다가 또 영원히 내 속에 갇어 놓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이더라.”
여자는 그 수험표를 들고 J를 방문한 후 쭉 그녀를 보지 못했다. 여자는 여자 나름대로 대학 생활과 사회인으로서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여자는 약혼자에게 파혼 당한 날 J를 찾아 갔으나 이미 출감한 뒤었다. 여자의 약혼자는 여자의 아랫배에 난 중절 수술 자국을 보고 그 날로 모든 걸 취소시켜 버렸다. 여자는 그날 처음 알았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취소!’ 해 버리면 없어 진다는 사실을. 그 후 여자는 가끔 J의 소식을 듣기도 했다. 교도소시절 J와 같은 방을 썼다는 누구는 J가 무슨 여성 단체의 도움을 받아 어느 고장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자세한 정보를 알려 주기도 했었다.
“지금은 배고프지 않지?”
여자가 묻는다. J는 고개를 돌려 카운터에 잠든 린의 모습을 보며 대답한다.
“받는 것 보다 주는 게 더 배부르더라. 이상해. 퍼주면 오히려 허기져야 하는데 퍼주면 퍼줄수록 내 배가 부르더라.”
어느 순간 J는 자신의 죄를 알았다. 애초부터 누구의 마음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되는 거였다. 그것은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가질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녀 혼자만 독차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조금씩, 사랑을 주는 기쁨으로 그녀 배를 채우고 있다.
“독한 기집애.”
여자의 말에 J가 장난스레 혀를 쏙 내밀어 보인다. 어느 순간 부터 빛을 바래는 붉은 계열의 조명은 J의 행동 만큼이나 여자를 풀어주고 있다.
여자는 잠시 ‘취소!’라고 말하고는 떠나버린 남자를 생각한다. 여자에게 꽤나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기색으로 걸레 같은 년,이라고 내뱉어 버리고 뒤돌아 버린 남자. 여자는 남자 때문에 한동안 대인기피증에 시달려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남들 보기에 더러운 몸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사람들과 마주치는게 그렇게 두려울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나. 여자는 술병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지난날의 과거? 그 흘러가 버린 시간의 흔적 때문에 여자는 슬프다. 아니, 억울하다.
밖은 어둠이 내렸지만 인파에 둘러 쌓인 거리 곳곳은 축제 마지막 답게 화려한 불빛들이 장식하고 있다. 여자와 J는 함께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차라리 옥상으로 올라갈까? 불꽃 놀이도 한다는데.”
테이블 위에 지폐 몇장을 올려 놓으며 J는 말한다. 여자는 일어서려다가 잠시 가방속의 J 선물로 준비한 속옷을 생각한다. 그리고는 꺼내 주려다가 그만둔다. 이제 J에게 이것은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옥상 난간에 여자와 J가 서 있다. 어느 순간 그네들의 머리 위에서 화려한 불꽃이 환호성을 치며 타 오른다. 가슴속에 매어 놓았던 비명을 풀어 내어 놓듯 시원하게 밤을 울리고 있다. 거리 곳곳에 서 있는 사람들도 모두 밤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다. 저마다 불꽃의 아쉬운 아름다움 앞에서 아픈 기억하나가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난다. 아픔 혹은 기쁨이 없는 순간은 현재의 삶을 품지 못한다. 여자는 아픔이었던 순간, 그 순간을 잊고 지내려고만 했다.
“아이를 하나 키워야 겠어.”
여자의 말에 J가 돌아본다.
“네 팔목의 상처처럼 나를 일으켜 세워줄 힘이 될 수도 있으니까.”
아주 오래전 여자는 자신의 뱃속에 우울의 씨앗을 하나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이 삶의 죄가 되는 줄 알았는데 살아갈 희망이 되기도 한다는 걸 여자는 알았다.
첫댓글사물을 묘사하는 방법이라던지, 내용을 이끌어가는 면이 고등학생이라고 보기에는 믿어지지 않을정도네요... 혼자서 이정도를 써내셨다면 앞으로의 발전가능성이 기대되네요.^^ 우선 전반적인 흐름은 좋아요. 그런데 서술 방식이 읽는 이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게 할 수 있어요.. 부각시켜야 할 부분과 그렇지 않을 부분
잘 읽었습니다. 정말 고등학생이라고 믿기지 않는 군요. 묘사가 괜찮군요. ㅎㅎ 휴... 내 고등학생 시절은 어땠지? 한탄이 나오네요. 하지만 풍경님께서 느낀 것을 저도 모두 느꼈습니다. 특이 평이하게 나열된 느낌이 강해서 조금 질리더군요. 구성이나 문장, 복선. 뭐 여러 가지를 이용해서 긴장을 줘보는 건 어떨까요?
첫댓글 사물을 묘사하는 방법이라던지, 내용을 이끌어가는 면이 고등학생이라고 보기에는 믿어지지 않을정도네요... 혼자서 이정도를 써내셨다면 앞으로의 발전가능성이 기대되네요.^^ 우선 전반적인 흐름은 좋아요. 그런데 서술 방식이 읽는 이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게 할 수 있어요.. 부각시켜야 할 부분과 그렇지 않을 부분
모두 평이하게 나열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요? 여자와 j 의 관계, 그리고 인삼축제를 통해서 느끼는 삶에 대한 고찰, 베트남 여자, 이런 사건들을 좀 더 위기감? 있게 서술하여 조금만 더 신경을 쓴다면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있는 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다소 글이 짧은 감이 있습니다. 제가 느끼기엔요 ^_^
잘 읽었습니다. 정말 고등학생이라고 믿기지 않는 군요. 묘사가 괜찮군요. ㅎㅎ 휴... 내 고등학생 시절은 어땠지? 한탄이 나오네요. 하지만 풍경님께서 느낀 것을 저도 모두 느꼈습니다. 특이 평이하게 나열된 느낌이 강해서 조금 질리더군요. 구성이나 문장, 복선. 뭐 여러 가지를 이용해서 긴장을 줘보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밀도 조절도 좀 필요한 거 같습니다. 기분이 안 좋으시다면 죄송해요. ^^ 잘 읽었구요. 건필하세요.
많이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