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내 아픔을 가져갔다
권영세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누가 내 발을 꾹 밟았다.
-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무 말도 안 했으면
많이 아팠을 텐데…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죄송하다는 그 말이
내 아픔을 가져갔다.
-《아동문예》 (2024 여름호)
두 매미
김성민
또 운다
울어도 돼, 여기서는?
그럼, 여기선 울어도 돼
나도 처음엔 되게 어색했거든
근데 여기선 다들 툭하면 울어
누가 또 운다
너도 울어
……
울고 싶지 않을 땐 어떡해?
그럴 땐 잠시 멈춰
소나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처럼
정말 여기선 다들 툭하면 우는구나
너도 울어봐
응, 울래
-《동시마중》 (2024 7·8월)
계단 올라 첫 집
김자미
1
계단 올라
첫 집 화단에
영산홍이 피고
장미가 피고
국화가 피고
매화가 피고
낮은 담 너머로
정다웠던 꽃
나무 덧대 높인
담 안에 갇혀버렸다.
인사도 못했는데
인사도 못했는데…
2
잘 지내지?
나무 틈으로 인사했다.
바람이 국화꽃 안부를 전했다.
잘 있구나, 그럼 됐어.
파란 하늘에
매화랑, 국화랑, 장미랑, 영산홍을 두둥실 그려보았다.
-《어린이와 문학》 (2024 봄호)
꽃감
김종헌
할머니가 보낸
꽃감 상자
한가득
곶감이 들어있었다
구부정한 손으로
꾹꾹 눌러 썼을 ‘꽃감’
할머니 손끝에서
땡감은 꽃으로 피어났다
하얗게 분을 내며
곶감보다 더 쫀득하게
- 『한여름 눈사람』 (2024 브로콜리숲)
생일 택배
류병숙
아침 창 밖
‘오늘’이 택배처럼 와 있다.
- 산뜻한 하늘이야
- 공기가 싱싱해
새것이라고 식구들이 좋아한다.
밤이 애써 포장해 보낸
‘오늘’이란 신상품.
이번 토요일
내 생일도
택배처럼 오겠지.
-『나 나왔다』 (2023 도서출판 계간문예)
잡아라
박영숙
바람이
대나무 사이를
샤샤샥 비켜 가며
도망가자,
대나무들 우르르
휘청휘청 대며
쏴
아
촤
소리치며 쫓아간다
-『해님이 야금야금』 (2024 소금북)
이사 온 날
박정식
세상에나! 첨 봤다야!
시끌벅적한
놀이터
뛰노는
저 아이들
새소리보다 더 좋다야!
아파트
높이 열린 창
할머니 귀다, 쫑긋 귀.
-《동시발전소》 (2024 가을호)
주차선
신복순
집이 없어
길을 헤매는 자동차를 위해
땅에
네모난 집이 만들어졌어
하얀 선으로 된
반듯한 집
길가에는
자동차를 위한 연립주택이
다닥다닥 줄지어 들어섰지
-『언제나 3월에는』 (2024 브로콜리숲)
그리다 보니
이정이
내 취미는 그림 그리기
커다란 네모 그리고
그 안에
강아지풀 같은 눈썹 두 개를 나란히
눈은 나중에,
코는 콧구멍이 보이도록 커다랗게
입은 썰어 놓은 순대처럼 굵게
아 참 눈은,
감고 있지
일요일 잠만 자는
우리 아빠
-『눈으로 찍었어』 (2023 시와 동화)
답 마중
하지혜
나올 둥 말 둥
문제의 정답을
손이 찾으러 간다
머리를 쓱쓱 문지르기도 하고
손바닥을 이마에 짚기도 하고
볼펜을 빙그르르 돌리기도 하면서
머리에서 정답까지
알 듯 모를 듯한 안갯길
손이 먼저 마중 간다.
-『소리끼리 달달달』 (2023 청개구리)
출처: 한국동시문학회공식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이묘신
첫댓글 10월 <이달의 좋은 동시>에 선정되신 김자미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전자윤님 덕분에 좋은 시를 읽네요.김자미 선생님!축하드립니다.예전엔 꽃들이 울타리 없이 집집마다 피었는데요즘에는 아파트도 벽을 치고 꽃들은 갇혀 살아요.꽃들이 안부를 묻는 발상이 재미있습니다.
첫댓글 10월 <이달의 좋은 동시>에 선정되신 김자미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전자윤님 덕분에 좋은 시를 읽네요.
김자미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예전엔 꽃들이 울타리 없이 집집마다 피었는데
요즘에는 아파트도 벽을 치고
꽃들은 갇혀 살아요.
꽃들이 안부를 묻는 발상이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