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7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루카 12,54-59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나를 고소하는 자는 누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연의 법칙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자연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을 잘도 이용합니다.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비가 오겠다고 생각하고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됩니다.
자연에 법칙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만들어지지 않으면 법칙을 가질 수 없습니다. 모든 법칙은 무언가를 만들 때 만들려는 사람에 의해 미리 계산된 설계도와 같은 것입니다. 하다못해 작은 의자를 만들려고 하더라도 설계도가 필요합니다.
설계도가 있다는 말은 그 법칙대로 만들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의자에서 한 다리만 짧아도 그 의자는 쓸모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연도 만들어졌고 법칙이 있고 그 법칙대로 살아야 온전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도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법칙은 왜 이해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며 멀씀하시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러며 이런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고소하는 자에 의해 고소당해 재판관에게 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피고로서 그 고발한 자와 합의하고 화해하지 않으면 재판관은 빌린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그를 가둘 것입니다.
그러니 미리 화해하고 재판관 앞에 나아와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심판관이신 주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세포 하나하나에도 우리 설계도가 들어있으니 분명 우리를 만든 분이 계실 것이고 그 설계도대로 살았는지 심판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살지 못했을 때 우리를 고소하는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영화 ‘할로우 맨’(Hollow Man)은 ‘인간에게 투명하게 되는 능력이 주어지면 어떻게 될까?’
라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케인 박사는 미국 정부를 위해 투명 혈청 개발을 위한 일급비밀 프로젝트에 참여해 고릴라 실험까지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고 보고합니다.
자기가 직접 투명해졌다가 돌아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투명해지자 그는 조금씩 욕망에 집착하게 됩니다.
투명하지 못했기에 하지 못하던 것들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투명한 것만으로는 자신이 얻지 못하는 것이 있게 되자 그 보이지 않는 힘을 통해 사람들을 제거해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싶은 마음을 버립니다.
케인은 자신이 투명하다는 비밀을 아는 사람들을 제거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에 그들로부터 당하고 맙니다. 불속으로 떨어집니다.
이것이 우리 마지막 심판 때도 일어날 일입니다.
케인은 왜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없었을까요? 본인이 투명하다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자기 행동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때 우리를 고발할 대상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고발하는 자는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은 우리가 설계도대로 살아가는지 심판하는
측정기구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병이 들어도 아프지 않은 상태와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나병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몸이 허물어지고 죽게 됩니다.
양심은 우리 영혼이 나병을 입지 않도록 마련해놓으신 측정 도구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면 누구나 부끄러워 자기가 한 일을 숨기려 합니다.
그 와중에 다른 사람을 더 비판하게 되기도 하고 심지어 미워하기까지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 가책을 잊기 위해 더 술에 취하거나 쾌락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힘으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을 제거하려 하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 부끄러운 부분을 나뭇잎으로 가리고 서로 상대의 탓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양심의 가책은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게 합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망가져 하늘나라에 살 수 있는 자격을 잃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양심의 가책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 솔직히 죄를 고백하고 그분이 마련하신 가죽옷을 입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만큼 깨끗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우리 안에 넣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며 우리 안에 계신 그분 덕택으로 우리를 받아주십사 주님께 청할 수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없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힘들다면 적어도 고해성사 때 사제에게는 진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죽옷을 입습니다.
먼저 양심과 화해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죄를 짓게 됩니다.
고해성사라는 양심과 화해하는 축복의 성사를 받지 못하는 이들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마지막 때에 나무가 자기에게 쓸모가 없는 썩은 나뭇가지들처럼 주님께서 떨어내시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7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에페소 4,1-6
루카 12,54-59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추구하고 획득해야 할 수많은 덕행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행은 겸손과 온유의 덕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옥중 서한이 또 한번 오늘 제 나태하고 흐트러진 삶을 쿵! 하고 내리치며. 가슴치게 만듭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제한된 공간 안에서, 내 한 목숨 건사하기도 힘겨운 상황 속에서 쓴 편지라고는 밑겨지지가 않을 정도로, 서한의 내용은 언제나 희망적이고 따스합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와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에페소서 4장 1~3절)
에페소서를 읽다보면 아직 갈길이 먼, 연약하고 미성숙한 초세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을 향한
바오로 사도의 애틋한 마음, 측은지심, 존재에 대한 연민의 정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처럼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늘 박수치고 치고 칭찬하고 격려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릇된 길로 빠져 들때나,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는, 제발 잘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강력한 경고도 하고 야단도 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그러하셨습니다.
때로 힘겨워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따뜻히 위로하고 격려하는가 하면, 우상숭배나 악습과 결별하지 못하는 교우들을 향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하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너무 심했나?’ 하는 마음에 또 다시 눈물로 하소연했습니다.
편지 서두를 보면 바오로 사도께서 교우들의 냉담한 마음이 움직여지기를 얼마나 간절히 염원했는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그런 표현을 접하면서 그분의 마음을 읽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감옥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어둡고 깊은 지하 감옥에서,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느끼고 있을 무력함,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을 생각하며 편지를 쓰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을 것입니다.
악습을 끊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4가지 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 인내와 일치.
오늘 우리가 항상 추구하고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인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겸손의 덕에 기초해야 정답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피서 2장 5~8절)
겸손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가장 본성적인 특성이 온유의 덕입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오 복음 5장 5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1장 29절)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추구하고 획득해야 할 수많은 덕행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행은 겸손과 온유의 덕입니다.
그러나 그 덕을 얻기란 그리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셀수도 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엄청난 에너지와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덕행, 그러나 살아생전 반드시 획득해야 할 덕행이 곧 겸손과 온유의 덕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루카 12,54-59)
<시대의 표징>
날씨는 예측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표징은 알아보지 못하느냐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꾸짖으십니다.
시대의 표징이란 메시아 시대의 표징을 뜻합니다.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바뀌었고, 율법만 잘 지키면 되는 시대에서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하는 시대로 바뀌었음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물질적인, 또는 세속적인 이익은 구할 줄 알면서도
영적인 이익은 구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속의 일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도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꾸중입니다.
아무리 재테크를 잘하면 뭐합니까?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날씨 예측은 왜 합니까? 불행을 예방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태풍의 진로를 예측하고 미리 대비하는 것은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은 아직 태풍 자체를 막지도 못하고 진로를 바꾸지도 못합니다.
겨우 진로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으로 교만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물난리를 겪을 때마다 늘 듣게 되는 말이 “이것은 천재가 아니라 인재다.” 라는 말입니다.
첨단 시스템만 믿고 교만해지는 것은 바벨탑을 쌓는 어리석음입니다.
바벨탑이 무너진 것도 천재가 아니라 인재였습니다.
구약성경의 내용을 보면 바벨탑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쌓다가 중간에 그만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달라져서 공사가 중단된 것입니다.
(흔히 하느님께서 벼락을 떨어뜨려서 바벨탑을 부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린이들의 만화 같은 것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종말보다는 개인의 운명입니다.
사람들은 일기 예보를 궁금해 하듯이 자신의 미래를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미신을 믿고 점을 칩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의 미래는, 또는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정해져 있지 않다면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정해져 있다고 믿기 때문에 미리 알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 자체가 모순입니다. 정해져 있다는 것은 바꿀 수 없다는 뜻이고, 바꿀 수 없다면 미리 알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바꿀 수 있다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고, 정해져 있지 않다면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잘만 하면 과거는 알아맞힐 수 있습니다. 그건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현재의 상태도 꿰뚫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래도 미래를 예언하고, 예언한 대로 되는 일이 있지 않으냐? 라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긴 하지만, 그건 확률의 문제입니다.
노스트라다무스처럼 유명한 예언서들을 보면 해석하기 나름인 경우도 많습니다.
쉽게 말해서 말장난이라는 것입니다.
미래를 알고 싶다면 과거와 현재를 알면 됩니다.
자기의 미래의 운명을 알고 싶다면 자기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반성하면 됩니다.
그것은 수사관들이 범인의 심리를 분석해서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확률이고 추측이고 짐작일 뿐입니다.
야곱과 에사우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에사우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야곱이 도망쳤습니다.
세월이 흘러 다시 돌아왔을 때에 야곱은 에사우가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했습니다.
자기의 운명,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러나 에사우는 변해 있었습니다.
야곱은 아주 오래 잘 살았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바꾸고 싶다면 현재 상태를 바꾸면 됩니다.
구원을 받고 싶다면 회개하면 됩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하느님께서 선고를 내리시기 전에 우리 자신이 결정합니다.
지금의 태도가(사는 모습이) 그대로 심판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지금 당장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