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5 : 3. 심령이 가난한 자(하) 5 : 4. 애통하는 자
(4) 복이 있나니 : 복이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 된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 된 자들에게 주시는 복을 여러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① 복(福)은 천국(天國)이다.
* 마 5: 3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② 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마 11: 6 -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③ 복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
* 신 8: 16 -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④ 복은 영생이다.
* 시 133: 3 -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⑤ 복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 것이다.
* 계 19: 9 -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⑥ 복은 거룩한 성에 들어가는 것이다.
* 계 22: 14 -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⑦ 복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
* 계 21: 4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3) 복음의 시기 : 때가 가까움이라.
그리스도께서 승천한 이후부터 다시 오실 재림의 때까지는 인간 편에서 볼 때 항상 임박한 긴장(緊張)의 시간이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정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Johnson, Mounce).
'때가 가까움'에서 '때'는 인간의 시간관념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이다. 헬라어에는 일반적 시간으로 크로노스(historical)가 있고, 하나님의 작정의 때로서 카이로스(historic)가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 오신 후로부터는 천국과 지옥이 선포됨으로써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말세를 사는 것과 같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불신자는 지옥이라는 미래를 안고 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종말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소위 종말론적 사고방식으로 표현할 때 우리는 각자가 개인적으로 종말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이 '때'를 종교 철학 용어로 종말론적 시간(終末論的 時間)이라 한다. 적절한 때 곧 하나님이 합당하게 역사하실 기회의 때를 말한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탄생하심으로 영적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다. 천국과 지옥이 소개되었고 인생은 갈림길에 섰다. 그런 의미로 종말의 때는 우리의 삶 속에 가까이 왔다. 인간의 실존은 이미 예수께서 탄생하신 이후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 서게 된 것이며 개인적으로는 출생하는 순간부터 곧장 심판으로 달려가고 있다.
하나님을 구원의 축복 가운데서 만나게 되는 때가 있다면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기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시간 개념에 충실할 때 신앙생활이 풍성해진다. 살아 있는 시간 의식, 이것이 생존하신 하나님과의 동행을 가능케 한다.
3]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 나타낸다. 이는 메시야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려는 마태의 면모를 보여 준다. 천국은 가난한 자,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메시야의 통치를 향유하고 그가 주시는 축복을 받을 자의 소유이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한다(Alford).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present)이다.
한편 첫 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 것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과 관계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첫 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재 시제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다(4: 17).
* 마 8: 29 -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 마 12: 28 -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니라."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의 소유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복되다는 말씀이다. 심령이 가난치 않고는 천국의 소유자가 될 수 없다.
* 마 18: 3 –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의 뜻은 사람이 겸손한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 곧 구원받는 자는 누구나 심령이 교만치 않고 겸손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복음을 믿게 된다.
교만한 자는 믿을 수 없고 오직 겸손한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다. 물론 구원받은 자의 심령은 계속 겸비해야 한다. 자신의 부족과 무능을 계속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계속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 잠 16: 18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여러분은 참으로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한가? 혹 자신의 부족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자기 자신을 바르게 판단하고 평가하자.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본 절의 복은 현세에서 성취될 수 있는 복이라면 10절의 복은 내세에서 성취될 복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본 절에서 성취되는 복이 마음 천국이라면 10절의 복은 예수의 재림으로 이 땅에 완성될 천년왕국의 축복을 말한다.
마 5 : 4. 애통하는 자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사람에게 복이 되는 애통은 회개의 애통뿐이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하고 자신의 죄의 심각함, 즉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노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자신의 부족과 죄를 애통해야 한다. 그런 자는 복이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하였다(시 51: 17).
요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라고 말하였다(욜 2: 12-13).
예수께서 한 동네에 들어가셨을 때 죄인인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그의 뒤로 와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그것은 회개의 눈물이었다고 본다(눅 7: 37-38).
1] 애통하는 자(*, 호이 펜둔테스)는 복이 있나니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사 61: 1의 반영이다.
* 사 61: 1 –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70인 역에서 이 어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다. (Mc Neile).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기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에 대한 애통이다. 사람들이 자랑하던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이다.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그들 백성의 개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이 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신다(4: 17).
2]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것은 죄 문제의 해결을 통해, 즉 죄 사함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앞에 말한 그 여자에 대해 예수께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말씀하시고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다.
* 눅 7: 47, 50 –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애통해 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죄의 용서는 지극히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다. 왜냐하면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고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우리의 더러운 죄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깨끗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온다.
'위로'(*, 파라칼레오)라는 말은 '곁으로'(*)와 '부른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당신의 백성에게 내주하시고 동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위로'가 되려 하심이다.
* 눅 2: 25 –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가 되기 위함이다.
* 요 14: 16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진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로 연결된다.
* 계 7: 17 -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 계 21: 4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진정 애통해하지 않는 자에게는 현세와 내세의 위로를 전혀 기대할 수 없다.
* 사 61: 1-3 –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애통은 단순히 병이나 전쟁이나 기근이나 죽음으로 인하여 애통해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불행한 일들의 근본 원인이 되는 죄를 회개하는 애통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참으로 복된 애통은 회개의 애통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고백하였고(시 51: 17) 그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라고 말했다(시 34: 18).
* 욜 2: 13 -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 고후 7: 10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이렇게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 그것은 사죄의 위로이다. 이 사죄는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에 근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죄는 지극히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다. 왜냐하면 죄인의 크고 더러운 죄,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었던 죄, 하나님의 공의 앞에 피할 방법이 없었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 요일 1: 9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자기의 죄를 회개치 않은 채 지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후회하며 슬피 울 것이다. 지금 자신의 죄를 인하여 애통하며 회개하는 자는 사죄의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항상 자신의 부족과 죄를 깨닫고 슬퍼하는가? 혹 자신의 죄에 대해 무감각하여 아무 슬픔이나 애통이 없는 자는 없는가?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께서 오시면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실 것이라 예언하였다(사 61: 1-3).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회개하며 그를 믿는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셨고 우리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주셨다.
자기의 죄를 회개치 않은 채 지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후회하며 슬피 울 것이지만, 지금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며 회개하는 자는 사죄의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참으로 죄를 회개했는가? 또 사죄의 위로를 경험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