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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학교 성적을 별로 좋지 않았으나 수학에는 매우 뛰어났다. 1905년 베
른 특허국 기사로 있으면서 특수 상대성 원리와 브라운 운동, 빛의 운동 연구 논문 발표로
유명해졌다. 이 후로 본격적인 물리학 연구에 전념하여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었다. 유대 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독일 나치스에 쫓겨 미국으로 망
명하였으며, 세계 평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2.갈릴레이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미켈란젤로가 죽기 사흘 전에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애초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피사 대학에 들어갔으나, 곧 그만두고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 이론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다가 "모든 물체는 종류와 크기에 상관없이 같은 속도로 낙하한다"는 '자유낙하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피사의 사탑에서 포탄을 떨어뜨렸다는 유명한 일화는 이 법칙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1592년, 당시 새로운 과학의 중심지였던 파두아 대학의 교수가 된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우주론, 태양중심설에 매료되어 곧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정리하여 1632년 <두 가지 주요 우주 구조에 관한 대화>라는 논문을 출간하였고, 이 논문 때문에 태양중심설을 이단시한 로마 교황청에 의해 종교재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그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망원경을 만들어 다른 행성에도 달, 즉 위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으며,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물체는 원래의 운동 상태를 유지한다"는 '관성의 법칙'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눈이 멀어가는 상황에서 1638년 출간한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대한 논술>을 통해 그는 자신의 역학을 집대성하였고, 이러한 그의 노력은 뉴턴에 가서 더욱 큰 결실을 맺게 된다
3.탈레스([[Θαλης, 기원전 6세기)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탈레스의 생애에 관해서 알려져 있는 기록에 따르면, 그는 소아시아의 이오니아지방의 밀레트라는 도시출신이며 여러 분야에 학식이 넓었다고 한다. 특히 천문학에 조예가 깊어서 기원전 585년에 일어나는 일식을 예견하였다고 한다. 또한 수학의 기하학적 방법을 빌어 이집트의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하였다고도 한다.
밤에 별을 보며 걷다가 구멍에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철학자도 실용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어느 해에 날씨가 올리브 농사에 잘 맞을 것을 예측하고 올리브 압착기들을 사들여 큰 돈을 벌었다고도 한다.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수학에서 "탈레스의 정리"는 지름의 원주각이 직각이라는 것이다. 탈레스가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탈레스가 아마도 처음으로 이등변삼각형의 밑각이 같다는 사실을 써서 이를 증명했다고 한다.
4.베게너
지구 표면의 형태에 관한 대륙 이동설로 유명한 베게너. 그는 일찍이 청년 시절부터 자신의 대륙 이동설을 증명하기 위해, 정열적인 탐험 조사를 하다가 그린란드의 얼음 벌판에서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베게너는 1880년에 독일 베를린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천문학과 기상학에 흥미를 갖게 된 그는 하이델베르크ㆍ인스부르크ㆍ베를린 대학에서 기상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대학을 나온 그는 기상학자인 형과 함께 기구를 이용하여 기상학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베게너는 1906년에 그린란드를 조사하기 위한 덴마크 탐험대에 동해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육지로부터 빙산이 덜어져 나가는 것을 보고, 대륙이동설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다고 합니다. 베게너는 그린란드에서의 기상학 연구 결과를 정리해서 ≪대기권의 열역학≫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학계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에도 베게너는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던 대륙 이동설에 대해 연구를 끈질기게 해 오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191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 지질학회에서, 마르부르크 대학의 기상학 강사인
베게너는 대륙 이동설을 논문으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의 초대륙(팡게아)이
분열하여 오랫동안 이동한 결과, 오늘날과 같은 대륙이 이루어졌다는 학설이었습니다. 현재에도 오스트레일리아와 남극을 제외한 지구상의 5대 대륙이 서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질학자들로부터 '전문가도 아니 기상학자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가'하고 격렬한 비판만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가 존경하던 스승은 함부르크 대학의 유명한 기상학 교수 쾨펜이 있습니다. 쾨펜은 베게너의 재능을 알고 기상학 외에 너무 산만하게 흥미를 분산시키지 않도록 충고했으나, 베게너의 대륙 이동설에 대한 열정과 집념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 해, 베게너는 다시 덴마크 탐험대와 동행하여 두 번째의 그린란드 탐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으며, 스승인 쾨펜 교수의 딸과 결혼도 하였습니다.
베게너는 1914년에 일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후방에 있는 측후소에서 근무하였는데, 그 덕분으로 대륙 이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 중인 이듬해 그의 이론은 ≪대륙과 해양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그 뒤에도 새로운 내용과 예증을 보강하여 두 차례나 개정되었습니다. 베게너가 대륙 이동설의 근거로 삼은 많은 증거는 현대 과학으로 보아도 대부분이 옳은 것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의 이론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근본 원인은, 대륙을 이동시키는 원동력을 확실히 밝히지 못했끼 때문입니다. 오느날 베게너의 대륙 이동설은
맨틀 대류설(영국; 홈스)이나 해저 확장설(미국; 헤스와 디츠)ㆍ판 구조론 (미국; 매켄지) 등에 의해 충분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 자기학의 발전 등과도 관련하여, 최근 들어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대륙 이동설을 확인하고 검증하기 위해 평생의 정열을 쏟은 베게너는, 1930년에 그의 이론을 키워 준 그린란드의 빙원에서 50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이론이 새로운 학문에 의해 증명되기 20여년전의 일이었습니다. 베게너의 몸 속에 들끓고 있던 모험의 피는, 대륙 이동설을 완성시키기 위해 온갖 분야의 연구에 나서게 했습니다. 또, 미지의 그린란드를 4번씩이나 탐험하여, 고공 기상이나 빙하에 관한 연구에 온 정열을 바쳤으나, 냉엄한 자연에 목숨을 빼앗긴 것입니다.
5.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 마케도니아 근처 칼키디케 스타기로스~
BC 322 그리스 에우보이아 칼키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3대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서양 철학사 내에서는 비중이 큰 사람이죠. (3대 철학자: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대표적인 명언은 잘 모르겠구요. 저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논리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시학
등
무엇보다도 그의 논리학은 철학 사상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로 꼽히고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3단 논법'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도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플라톤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지식입니다. 그가 플라톤에게서 배울 때에 이미 소크라테스는 죽었습니다.)
이 사람의 대표적 업적은 말하기 곤란하군요. 왜냐하면 너무 나도 많은 업적에서 아리스토테레스의 이름이 나와 있기 때문이죠. 윤리학, 논리학, 정치학, 시학, 생물학, 지질학, 심리학, 화학 등 16세기에 이르기 까지만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많은 저서들은 교과서로 쓰였습니다. 기원전 사람인데도 말이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아직까지도 그 영향이 가시지 않는 것은) 논리학인데, 논리학 업적 중에서 3단논법은 철학사상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6.
퀴리부인
Marie Curie
결혼 전 이름은 Maria Sktodowska.
1867. 11. 7 폴란드 바르샤바~1934. 7. 4 프랑스 살랑슈 근처.
폴란드 태생 프랑스의 물리학자.
퀴리
방사능에 관한 연구로 유명하다. H. 베크렐과 그녀의 남편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1911년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는 등 노벨상을 2번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비범했던 그녀는 16세에 러시아 고등중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마치면서 금메달을 받았다. 수학·물리학 교사였던 아버지가 투자를 잘못해 돈을 잃었기 때문에 그녀는 교사자리를 얻어 일을 해야 했으며 동시에 여성 노동자들에게 폴란드어를 가르치면서 민족주의자의 '자주강좌'에 비밀리에 참여했다. 18세에 가정교사직을 얻었는데 그곳에서 불행한 연애사건을 겪었다. 마리는 나중에 언니 브로냐가 그녀를 도와준다는 합의 아래 자신의 수입으로 파리에서 의학공부를 하는 언니를 도와 주었다. 1891년 마리는 파리로 가 소르본대학교에서 P. 아펠, G. 리프만, E. 부티의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J. 페랭, C. 모랭, A. 코통 등 이미 잘 알려진 물리학자들을 만났다. 그녀는 학생기숙사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했으며 실제로 빵과 버터와 차만 먹고 살았다. 1893년 1등으로 물리과학 학사자격을 얻었고 그후 리프만의 연구실에서 일하기 시작해 1894년 2등으로 수리과학 학사자격을 얻었다. 그해 봄 그녀는 피에르 퀴리를 만났다.
그들의 결혼(1895. 7. 25)으로 인해 폴로늄(마리가 자신의 모국을 기념하여 그렇게 불렀음)과 라듐의 발견 등 세계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성취하게 될 협력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학위 논문의 주제를 찾고 있던 마리 퀴리는 H. 베크렐이 발견한(1896) 새로운 현상(그녀는 후에 이 현상을 ' 방사능'이라고 불렀음)에 접하고 우라늄에서 발견되는 성질이 다른 물질에서도 발견되는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녀는 G. C. 슈미트와 같은 시기에 토륨의 경우에도 같은 성질이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광물질을 조사하면서 역청 우라늄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역청 우라늄광은 순수한 우라늄보다 방사능이 큰 광물질로 방사능이 매우 큰 소량의 알려지지 않은 물질의 광석에 존재한다는 것으로서만 설명될 수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가 착수했으며 새로운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으로 이어진 연구에 피에르 퀴리가 참여했다.
피에르 퀴리가 주로 새로운 복사(輻射)를 물리적으로 연구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동안 마리 퀴리는 금속상태에서 순수 라듐을 얻기 위해 애썼는데 피에르 퀴리의 제자 중 한 사람인 화학자 A. 데비에른의 도움으로 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연구 결과 그녀는 1903년 6월 과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피에르와 함께 왕립학회의 데이비 메달을 받았다. 또한 1903년 그들은 방사성을 발견한 공로로 베크렐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두 딸 이렌(1897)과 이브(1904)의 출생도 그녀의 열성적인 과학 연구를 방해하지 못했다. 세브르에 있는 여자고등사범학교의 물리학강사로 임명되었으며(1900) 그곳에서 실험적 증명에 기반한 교수법을 도입했다. 1904년 12월 피에르 퀴리가 지도하는 연구실의 책임조교로 임명되었다. 피에르 퀴리의 갑작스러운 죽음(1906. 4. 19)은 마리에게 쓰라린 충격이었지만 그녀의 생애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그 이후로 그들 부부가 수행하던 과학 연구를 홀로 완성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았다. 1906년 5월 13일 남편이 죽은 후 공석으로 남아 있던 교수직에 임명되었는데, 이로써 소르본대학교의 첫번째 여교수가 되었다. 1908년 명예교수가 되었고 1910년에 방사능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출간했다. 1911년 순수 라듐을 분리해낸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으며, 1914년 파리대학교 라듐 연구소가 건립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마리 퀴리는 딸 이렌의 도움으로 'X선 사진법'(X-radiography)의 이용법을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1918년 이렌이 합류한 라듐 연구소는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핵물리학과 화학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이제 최고의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1922년부터 의학 아카데미의 일원이 되어 방사성 물질의 화학적 성질과 이를 의학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1921년 두 딸과 함께 미국 여행을 했는데 W. G. 하딩 대통령은 그녀에게 미국 여성들이 모금하여 마련한 1g의 라듐을 선물했다. 그녀는 특히 벨기에·브라질·스페인·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강연을 했다. 국제연맹위원회는 그녀를 국제지적협력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밖에 파리에 퀴리 재단이 만들어지고 1932년 언니 브로냐가 소장인 바르샤바의 라듐 연구소가 개관되는 것을 만족해했다.
마리 퀴리의 뛰어난 업적 중 하나는 질병 치료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핵물리학 연구를 풍부하게 지원하기 위해서도 강력한 방사성원을 축적할 필요를 이해한 일이었다. 그결과 비축된 방사성원은 1930년 입자가속기가 출현할 때까지 비할 데 없는 도구였다. 수년에 걸쳐 라듐 D와 폴로늄이 축적된 1.5g의 라듐이 파리 라듐 연구소에 저장되어 있었던 것은 1930년경 수행된 실험과 특히 이렌 퀴리가 1926년 결혼한 프레데리크 졸리오와 함께 수행한 실험이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연구로 J. 채드윅 경에 의해 중성자가 발견되고 결국 졸리오 퀴리에 의해 인공 방사능이 발견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뒤 몇 개월 후 마리 퀴리는 복사작용으로 생긴 백혈병으로 죽었다. 2회의 노벨상 수상으로 그 중요성이 드러난 그녀 자신의 연구뿐만 아니라 이후 세대의 핵물리학자와 화학자에게 미친 영향으로 보아 물리학에 대한 그녀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7.뉴턴
Sir lsaac Newton
1642. 12. 25(신력 1643. 1. 4) 링컨셔 울스토르프~1727. 3. 20(신력 3. 31) 런던.
영국 출신의 물리학자·수학자.
뉴턴
17세기 과학혁명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광학·역학·수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1687년에 출판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는대과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힌다.
뉴턴은 1642년 소지주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생후 2년 만에 재가해서 그의 곁을 떠났고 할머니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 의붓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9년 동안 그는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고, 이것은 그의 심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에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보인 심리적 불안감이나 비판에 대한 지나친 반응 등은 모두 어렸을 때의 모성결핍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랜트햄에서 기초교육을 마친 후 1661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당시는 과학혁명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지만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대학도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도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으나, 곧 데카르트를 접하게 되었고 우주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운동과 물질로 설명하려는 기계적 철학에 매료되었다. 1664년경부터 쓰기 시작한 〈몇 가지 철학적 문제들 Quaestiones Quaedam Philosophicae〉이라는 기록은 과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신호였다. 그는 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첨가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의 친구다. 하지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진리다."
그가 다룬 '문제들'을 보면 그가 과학혁명의 근간이 되는 새로운 생각들과 접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데카르트의 저작들뿐만 아니라 피에르 가생디가 부활시킨 원자론도 공부했는데 그는 여기에 더욱 끌렸다. 로버트 보일의 책에서는 화학에 관한 지식을, 케임브리지의 플라톤주의자였던 헨리 모어를 통해서는 허미티시즘 전통(Hermetic tradition:자연현상을 연금술과 마술적인 개념들을 가지고 설명하는 전통)을 접했다. 자연철학의 중요한 두 전통인 기계적 철학과 허미티시즘 전통은 지속적으로 그의 학문에 영향을 미쳤다 .
이 시기부터 수학에 관한 연구도 시작했다. 그는 데카르트의 〈기하학 La Géometrie〉에서 대수적인 기법을 기하학에 적용하는 법을 배웠고 고전기하학도 깊게 공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항정리를 발견했고 미적분학을 개발했다. 1669년까지는 그동안의 성과를 종합하여 〈무한급수에 의한 해석학에 관하여 De Analysi per Aequationes Numeri Terminorum Infinitas〉를 펴낼 정도로 발전했다. 그후 2년 동안 보완해서 〈급수와 유율(流率)의 방법에 관하여 De methodis serierum et fluxionum〉를 수고(手稿) 형태로 세상에 내놓았다.
1665년 4월 학사학위를 받을 때까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철학과 수학의 세계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해 흑사병으로 대학이 문을 닫게 되자 고향집에 돌아와 2년 동안 그가 배운 것들에 대해 여유를 갖고 명상했다. 이 기간 동안 미적분학의 기초가 다져지고, 〈색깔에 관하여 Of Colours〉에 정리될 중요한 내용들이 나타난다. 또 원운동의 요소들을 분석했고 이것을 달과 다른 행성들에 적용해서 역제곱법칙(inverse square law:힘의 크기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유도했다. 그러나 이 발견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1667년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되었다. 2년 후에는 아이작 배로우의 후임으로 루카스 석좌(碩座) 수학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광학에 대한 강의로 교수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색깔에 관하여〉로 발전되고 후에 〈광학 Opticks〉의 제1권이 되었다.
그는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빛이 기계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와는 달리 빛을 원자와 같은 작은 입자들이 공간을 이동하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보았다. 그가 광학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은 무엇보다도 색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빛은 원래 흰색의 단색광이고 변형에 의해서 여러 가지 색깔로 나타난다는 고대로부터의 색깔이론을 부정했다. 1665~66년에 수행한 일련의 실험을 통해 빛이 단색광이 아니라 혼합광이라는 것을 밝혔고, 색깔은 이질적인 혼합광이 개개의 요소로 분해되면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또 각각의 광선이 일정한 각도로 굴절되는 성질 때문에 무지개와 같은 현상이 생긴다고 밝혔다. 이후부터 빛의 이질성은 물리광학의 기본이 되었다. 한편 렌즈의 색수차(色收差)를 제거하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반사망원경을 최초로 발명했다.
그의 색에 관한 이론은 런던의 왕립학회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1671년 반사망원경의 발명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졌고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고무되어 1672년 빛과 색깔에 관한 논문을 학회에 제출했다. 이 논문은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학회 지도자였던 로버트 훅과의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훅의 신랄한 비판은 그를 격노하게 만들어 결국 한동안 모든 외부와의 관계를 끊고 고립생활에 들어가게 했다.
1675년 런던을 방문한 뉴턴은 훅이 신의 색깔이론을 인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자신을 얻어 얇은 막에서의 색깔현상을 다룬 2번째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빛이 반사를 통해서도 분해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 고체의 색현상을 설명했고, 뉴턴의 원무늬(Newton's rings) 발견도 싣고 있다. 이것은 후에 〈광학〉 제2권의 내용이 된다. 훅과의 관계는 이 논문의 발표로 더욱 악화되는데, 훅은 뉴턴이 자신의 생각을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또 영국의 한 예수교 분파도 이 논문의 내용을 공격했다. 1678년까지 계속된 이 싸움은 뉴턴의 신경쇠약을 동반한 발작으로 끝을 맺게 되는데, 그후 6년 동안 그는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었다. 이 격리기간 동안 허미티시즘 전통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이전부터 흥미를 갖고 있던 연금술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자연관도 큰 변화를 겪어서 기계적 철학에서 벗어났다. 1679년 빛의 현상을 설명하려고 도입했던 에테르(ether)와 그에 수반된 눈에 보이지 않는 체계를 포기하고, 대신 인력(引力 attraction)과 척력(斥力 repulsion)을 도입했다. 인력과 척력은 원래 화학적 친화력, 화학반응으로 생기는 열, 액체의 표면장력, 모세관현상 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했는데, 허미티시즘의 동감(sympathy)과 반감(antipathy)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는 이 개념을 기계적 철학의 한 변형으로 보았다. 사실 인력은 정량적으로 규정될 수 있었고 17세기 과학의 두 주요 조류인 기계적 전통과 피타고라스적 전통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
처음에는 인력과 척력을 지상의 현상에만 적용했다. 그러나 1679년말부터 훅의 편지에서 암시를 받아 행성의 운동에도 이 개념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뉴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훅은 인력에 의해서 직선운동이 지속적으로 방향을 바꾸어나간다는 점과 중력은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서 감소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직관에 의한 추측일 뿐 구심력이나 케플러의 제3법칙에서 수학적으로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뉴턴은 이미 10년 전에 이러한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 자신은 후에 훅의 편지에서 타원 궤도가 한 초점을 중심으로 역제곱의 인력관계를 수반한다는 암시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또 인력이 지속적으로 작용해서 행성의 궤도이탈을 방지한다는 훅의 생각은 힘을 천체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했지만 아직 중력(gravitation)이라는 개념에는 못미쳤다.
1684년 8월 궤도역학의 문제로 곤란을 겪던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가 뉴턴을 방문했다. 3개월 후 핼리는 뉴턴으로부터 〈운동에 관하여 De Motu〉라는 짧은 논문을 받았는데, 이것이 2년 반 후에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라고도 부름)로 확장된다. 〈프린키피아〉에서는 기계적 철학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체계에 관한 설명이 없다. 다만 눈에 보이는 물체의 운동을 엄밀한 계량적 방법으로 다루고 있다. 그의 새로운 역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운동법칙에 근거한다. 첫째, 물체는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현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둘째, 운동량의 변화는 주어진 힘에 비례한다. 셋째, 모든 작용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이 있다. 이 운동법칙으로 구심력을 계량적으로 유도해낼 수 있었고, 케플러의 제3법칙을 대치할 수 있었다. 그결과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운동뿐 아니라 지구나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의 운동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태양계의 모든 천체운동을 지배하는 단일한 힘을 상정하고 그것을 중력(gravitas:라틴어로 '무거움'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이 중력(또는 만유인력)은 혜성의 운동이나 조석현상의 설명에도 성공적으로 적용되었고, 우주의 모든 물질입자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프린키피아〉의 출판으로 그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대륙의 과학자들은 원거리(遠距離)작용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뉴턴의 이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기술적인 완벽함에는 찬사를 보냈다. 영국에서는 젊은 과학자들이 곧 뉴턴의 뒤를 따랐고 그의 후원하에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그래샴 칼리지와 같은 주요대학의 교수직을 이어나갔다.
열렬한 개신교도였던 그는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정책에 반기를 들었고 명예혁명 후 케임브리지대학교를 대표하여 혁명회의에 참석했다. 이 기회를 통해 폭넓은 교제를 하게 되고 철학자 존 로크와도 친교를 맺었다. 런던 생활을 즐기게 된 그는 친구인 수학자 파티오와 찰스 몬티규(후에 핼리팩스 경이 됨)의 도움으로 1696년 조폐국 이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후에는 국장으로 승진해 매년 2,000파운드의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그는 화폐의 재주조가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동안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임무를 완성한 후에는 화폐의 위조를 방지하는 데 힘썼다. 그당시 런던의 위조범들에게 그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실제로 많은 위조범들을 교수대로 보냈다.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뉴턴은 영국 과학의 대부 역할을 했다. 1703년 왕립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705년 과학자로서는 최초로 기사작위를 받았다. 그는 왕립학회를 독단적으로 운영했다.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 대장이자 왕실천문가였던 존 플램스티드는 〈프린키피아〉를 집필하는 데 필요한 많은 관측자료들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뉴턴에게 우호적이지 않아 부당한 대우와 모욕을 받았다.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의 불화는 잘 알려져 있다. 현재는 뉴턴이 라이프니츠보다 훨씬 먼저 미적분학을 개발했고 라이프니츠도 독립적으로 미적분학에 도달했다고 인정받고 있다. 문제는 뉴턴이 자신의 연구결과를 일찍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1694년에 나온 라이프니츠의 논문이 세상에 먼저 알려졌다는 점이다. 처음에 추종자들의 부추김에 못이겨서 시작한 우선권 논쟁은 뉴턴이 이성을 잃어버릴 만큼 화를 내면서부터 추잡한 싸움으로 변했고, 라이프니츠 사후에도 계속되었으나 뉴턴의 죽음으로 하여 싸움은 끝을 맺었다. 그는 말년을 〈프린키피아〉와 〈광학〉을 수정·보완·번역하는 데 바쳤다. 최후까지 왕립학회를 주관했는데, 회의 도중 조는 때가 많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8.
샤를
프랑스의 실험물리학자로 보장시에서 1748년 태어났다. 소르본 대학과 파리의 공예 학교 물리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과학 아카데미 회원을 지냈다. 파리를 방문한 프랭클린의 영향으로 실험물리학 공부를 시작하여, 1783년 기계 기사인 로베르트 형제와 함께 수소 기구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몽골피에 형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기구의 개발을 추진하였는데, 열기구 대신에 가벼운 수소를 기구에 주입하는 방식이었다. "과학자" 라기 보다는, 오랜 경험과 장인적 노력에 의하여 열기구를 개발했던 몽골피에 형제와는 달리, 샤를은 기체의 성질에 관해 연구한 뛰어난 물리학자였고, 공기보다 가벼운 수소의 특성을 이용하여 기구를 만드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실험용 수소기구가 상공에서 폭발을 일으키는 등, 어려움도 많았으나 문제점들을 지속적으로 해결하여, 83년 9월 몽골피에가 먼저 성공하였으며, 1783년 12월 1일 수십만의 파리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샤를 자신이 직접 수소기구를 타고 하늘 높이 올랐다가 무사히 내려 옴으로써 그의 수소기구도 커다란 성공을 이루었다. 1787년 기체의 성질을 연구하여 '일정한 압력하에서 기체의 부피는 온도에 비례하여 증가한다.'고 하는 '샤를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후에 게이 뤼삭에 의해 더욱 확고히 성립되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게이 뤼삭의 법칙'이라고도 불린다. 샤를은 그 밖에도 전기학의 연구, 각종 실험 기구의 발명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9.
보일
로버트 보일의 이름은 기초물리를 배우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기체에 관한 '보일의 법칙'으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법칙은 보통 "어떤 주어진 온도에서 질량의 이상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 또는 수식 PV = C(C는 상수)로 표시된다. 이런 은밀한 표현을 로버트 보일이 본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는 과학의 세계가 정량적인 관계가 잇다는 사실 등을 믿지 않았으며, 수학을 사용하는 것은 사람을 속일뿐만 아니라 어쩐지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연구한 많은 과학적 결과는 최소한의 수학을 이용해 표시했는데 이것은 그가 널리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서고자 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보일이 실시했던 가장 중요한 실험은 Mageberg의 반구로 알려진 오토 폰구에리케의 공기 펌프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이 실험에서 압력을 낮춰 물을 끓이기도 했으며 공기의 무게를 측정하기도 했다. 새로 설립된 Royal Society에서 공기의 무게를 측정하는 실험을 할 때, 이 실험은'쾌활한 전제군주'로 평판이 있는 국왕 찰스 2세를 비롯해서 과학자들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큰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열에 관한 보일의 이론은 기체의 궁극입자에 기초한 현대적인 운동이론에 아주 가까운 것이었다.
보일의 가장 위대한 과학적 공헌은 분명히 화학에 대한 그의 독특한 접근 방법일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류의 화학 관찰방법을 버리고, 자연을 이루는 모든 물질은 근원적으로 단순한 요소로 구성되었다는 원자론을 주장했다. 그는 물질은 그것 이상은 분해 할 수 없는 궁극 소립자로 이루어진다는 관점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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