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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산, 무릉계곡 가는 길
1. 무릉계곡의 하이라이트인 쌍폭포
八曲風煙使我開 팔곡의 풍연 나에게 순종하여 걷히니
落霞潭下水縈洄 낙하담 아래 물은 휘돌아 흐르는데
閒中每揭篷窓看 한가할 때마다 봉창 열고 바라보면
明暗無常自去來 명암은 수시로 변하여 저절로 오고 가네
―― 무릉거사 최윤상(武陵居士 崔潤祥, 1810~1853), 「무릉구곡가(武陵九曲歌)」의 ‘팔곡 낙하담(八曲 落霞潭)’
▶ 산행일시 : 2024년 7월 13일(토), 흐림
▶ 산행코스 : 댓재,통골재,두타산,대궐터삼거리,수도골(석간수),12폭포 관폭대,마천루, 전망대,쌍폭포,용추폭포,
학소대,삼화사,무릉반석,매표소,두타교,제2주차장
▶ 산행거리 : 도상 14.3km
▶ 산행시간 : 6시간 20분(11 : 12 ~ 17 : 32)
▶ 교 통 편 : 다음매일산악회(31명) 버스로 가고 옴
▶ 구간별 시간
07 : 00 – 양재역 1번 출구 200m 전방 스타벅스 앞
09 : 15 – 평창휴게소( ~ 09 : 35)
11 : 12 – 댓재(810m), 산행시작
11 : 27 – 햇댓등(0.5km) 갈림길, 두타산 5.2km, 댓재 0.9km
11 : 45 – 996m봉
11 : 51 – 1,032.3m봉
11 : 58 - △1,029.2m봉
12 : 20 - 통골재
12 : 45 – 1,242.0m봉, 휴식( ~ 12 : 53)
13 : 23 – 두타산(頭陀山, △1,357.0m)
14 : 16 – 대궐터삼거리(1,030.8m), 두타산성, 두타산 1.7km
14 : 55 – 깔딱고개 입구, 두타산(대궐터 경유) 4.0km
15 : 00 – 베틀바위 갈림길
15 : 20 – 12폭포 관폭대
15 : 25 – 수도골 석간수
15 : 36 – 마천루, 전망대
15 : 55 – 쌍폭포
16 : 00 – 용추폭포
16 : 54 – 학소대, 학소대폭포
17 : 07 – 삼화사(三和寺)
17 : 18 – 무릉반석
17 : 32 – 두타광장, 제2주차장, 산행종료, 휴식( ~ 18 : 00)
20 : 07 – 문막휴게소( ~ 20 : 26)
21 : 30 - 양재역
2. 두타산 안내도
댓재가 준령이다. 해발 810m. 동쪽 삼척에서 오르니 그 고도를 다 오른다. 나무위키의 설명이다. “동고서저(東高西
低) 지형의 특성상 서쪽 사면은 고위평탄면이어서 상대적으로 고개가 야트막한 오르막길 수준이지만 분수령 동쪽
사면은 15km 전구간이 심한 절벽과 급경사 급커브 길이다. 이로 인해 삼척시 하장면에서 도로거리로 35km 밖에
하지 않는 삼척시내까지 1시간 가까이 걸린다. 이는 하장면이 태백에 종속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
댓재가 높고 오르기가 매우 험하여 큰재, 곧 대(大) 재이려니 했는데 아니다. 산죽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죽령(竹嶺), 죽치(竹峙), 죽현(竹峴)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다.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의 내용이다. “(…) 『조선지도』, 『해동여지도』, 『대동여지도』에는 죽령(竹嶺)이라 표기되어
있다. 『진주지』에 ‘죽치(竹峙)는 삼척군 서쪽 60리에 있다. 아흔아홉 구비를 돌아 서쪽의 하장면으로 통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고개를 넘으면 『대동여지도』에서 말하는 죽현천(竹峴川), 즉 하장면 번천으로 갈 수 있어 예로부
터 영동과 영서를 넘나드는 보행로로 이용해 왔다.”
당일 산행으로 두타산을 가는 산악회는 대개 댓재를 들머리로 하여 두타산을 올랐다가 대궐터삼거리, 베틀바위,
무릉계곡으로 진행하는데, 오늘 나는 마천루를 들르고 용추폭포도 보려고 한다. 그러면 안내코스보다 2km 정도 더
길다. 서둔다. 버스에 내리자마자 경주하듯 발걸음을 재촉한다. 햇댓등(962.8m)은 들르지 않는다. 시간을 저축하기
위해서다. 햇댓등을 들르면 0.4km가 더 늘어난다. 햇댓등 내리막에 두타산이 잘 보이는 데가 한 곳이 있어 조금은
아쉽다.
임도를 간다. 평지나 다름없는 임도에는 갈림길이 두 차례 나오지만 햇댓등 사면에 가까운 오른쪽 길을 간다. 임도
벗어나 소로의 산길을 잠시 오르면 백두대간 주릉 햇댓등(0.5km) 갈림길이다. 929.7m봉도 오르지 않는다. 그 오른
쪽 사면을 길게 돌아가는 등로를 큰 부조다 하고 냉큼 따른다. 안부 지나고 이제야 산을 가는 것처럼 가파른 오르막
이 시작된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날이다. 눈 못 뜨게 땀을 흘린다. 바지자락은 칙칙 감겨 걷기가 거북하다.
긴 두 피치를 숨 가쁘게 올라 996m봉이다. 작은통골재를 몰라보고 지나고 1,032.3m봉이다. 그 약간 내린 안부가
명주목재라는데 역시 알지 못하고 지나친다. 잔 봉우리 넘고 넘는다. 파적(破寂)할 거리 찾아 주변을 둘러보면 바위
틈에 자라는 바위채송화가 한창이다. 등로 벗어난 조망 트일 만한 곳은 꼬박 들른다. 백두대간 주릉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동쪽)은 안개구름이 몰려오고, 왼쪽은 미세먼지로 산 첩첩이 흐릿하다. 그나마 △1,029.2m봉(삼각점은
오래되어 등급 등을 알아볼 수 없다)에서 두타산을 잠깐 우러른다.
1,015.7m봉을 길게 내려 바닥 친 안부는 통골재(목통령)이다. 통골재는 산행교통의 요충지다. 백두대간 인증지이기
도 하고, 오른쪽은 구룡골, 왼쪽은 통골로 간다. 여기서 1,242.0m까지 0.7km가 힘든 오르막이다. 팍팍한 돌길 오르
막이다. 주변 둘러 아무 볼 것이 없는 하늘 가린 숲속 길이다. 오르다가 가쁜 숨을 돌리려고 잠시 걸음 멈추며 날벌
레들이 떼로 달려든다. 한번은 하루살이인지 입안으로 들어와 숨이 넘어갈 듯 캑캑하고 나서는 입을 꼭 다물고 간다.
1,242.0m봉 직전 너른 공터가 쉼터다. 첫 휴식한다. 점심때가 훨씬 지났다. 마른 목을 탁주로 축이고 점심 대용으로
샌드위치 꺼내 먹는다. 1,242.0m봉도 오르지 않고 등로 따라 그 오른쪽 사면을 길게 돌아 넘는다. 야트막한 안부
지나고 완만한 오르막이다. 여전히 숲속 길이다. 왼쪽으로 청옥산과 그 너머 문래산과 각희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감질나게 보인다. 저 위는 어떨까 오르고 또 오른다. 두타산 정상이 가까워서야 조망처가 나온다. 그리고 두타산
정상이다.
3. 뒤가 두타산
4. 앞은 통골재로 내리기 전 1,015.7m봉
5. 바위채송화
6. 앞은 청옥산 남릉
7. 멀리 오른쪽은 문래봉(?)
8. 멀리 왼쪽은 각희산(?)
9. 청옥산
두타산 정상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올랐다. 숲 그늘마다 휴식하는 사람들로 꽉 찼다. 두타산 정상 표지석을 들여
다본다. “두타(頭陀)는 의식주에 대한 탐욕과 세상의 모든 번뇌망상을 버리고 수행 정진한다는 (…), 고려 충렬왕 때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李承休)는 두타산 천은사(天恩寺)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다.” 흔히 두타
행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범인으로서는 지키기 매우 어려운 12개 조항을 말한다. 즉, 인가와 떨어진 조용한 숲 속
에 머문다. 항상 걸식을 한다. 걸식할 때는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하루에 한번만 먹는다. 지붕이 없는 곳에 앉는다.
단정하게 앉고 눕지 않는다 등이다.
고려 후기 문신인 두타산거사 이승휴(頭陀山居士 李承休, 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에서 찾아보았다.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를 바치는 표문(帝王韻紀進呈引表)’부터 감동적이다. 내용 중 삼분(三墳)은 삼황(三
皇)의 사적(事迹)을 기록한 서적(書籍)이고, 오전(五典)은 오제(五帝)의 세계(世系)를 기록한 서적(書籍)이다.
“신 이승휴가 말씀드립니다. 신이 제왕운기를 삼가 편수하여 두 권으로 나누고, 바로잡아 고쳐 필사하여 바치는 것
은, 부족한 선비[牛襟下士]가 『오전(五典)』과 『삼분(三墳)』에서 거칠게나마 깨달음을 얻어 반딧불이의 빛과 같은
희미한 밝음으로 해와 달의 밝음에 도움이 되기를 기약하여서입니다. 신 이승휴는 실로 황송하고 두려워하며 머리
를 조아리고 조아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주(周)나라보다 성대하시고 탕왕보다 밝으며, 천자
의 누이를 비(妃)로 삼았으니, 어찌 삼한(三韓)이 일찍이 〈이처럼〉 용루(龍樓)가 모임[成集]을 보았겠습니까?”
“실로 생각하건대 100대(代)에 듣기 어려우며 10,000세대에도 만나기 힘든데 한 때에 모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
대, 신은 선대가 남기신 가르침을 따르고 하늘 가운데 해가 떠오르는 상서로움에 보답하고자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동서로 다녔던 인연으로 단계를 뛰어넘어 화려하고 중요한 직책에 제수되었습니다. 정수리부터 발뒤꿈치까지 온 몸
이 군주의 깊은 은혜에 흠뻑 젖었으니, 머리카락을 뽑아 은혜를 헤아리고 맑은 실로 곤룡포를 기워야겠으나, 이에
인연과 명이 박하여 도리어 몸이 한가롭게 되었으니, 하늘을 볼 계책이 없음이 한탄스럽지만 만수무강을 축원할 수
있는 처지임은 기쁩니다.”
이어지는 ‘제왕운기(帝王韻紀) 상권(上卷) 병서(幷序)’는 제왕운기의 개괄로 엄격하다.
“예로부터, 제왕(帝王)들이 서로 계승하여 주고받으며 흥하고 망한 일은 세상을 경영하는 군자가 밝게 알지 않아서
는 안 되는 바이다. 그러나 고금의 전적은 한없이 많아 끝이 없고, 앞뒤 〈일들은〉 서로 뒤섞여 어지럽다. 만약 능히
요체를 취하여 시로 읊을 수 있다면 또한 보기에 편하지 않겠는가? 삼가 옛 책을 근거하여 짓고 제자(諸子)의 서적
과 사서(史書)를 채택하여 확충하였다. 지금까지 아직 책[方策]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우선 분명하게 익히 듣고 본
것을 근거로 삼아 읊조림에 맞게 하였고, 그 선하여 본받을 만 한 것과 악하여 경계로 삼을 만 한 것은 모두 일마다
『춘추(春秋)』의 필법에 따랐다. 이름을 붙여 제왕운기라 하였으니, 모두 2,370자이다. 대체로 충신과 효자가 군주와
아비를 호위한 뜻이다.”
오늘 산행 일행 중 청옥산까지 가겠다는 이는 없다. 멀리 간다고 해도 내가 가는 코스다. 대궐터삼거리를 향한다.
나로서는 처음 가는 길이다. 처음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렌다. 당분간은 외길이다. 내리는 길이 여간 사납지 않다.
바윗길을 자주 내린다. 조망 트일 암반지대가 나오지만 짙은 안개구름이 천지에 가득하여 사방 캄캄하다. 볼 것이
없어 쭉쭉 내린다. 대방골 갈림길이나 천은사 갈림길, 대궐터삼거리에서는 왼쪽의 무릉계곡 방향표시를 따른다.
두타산성을 지난다. 허물어진 성곽이다. 이끼 낀 돌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두타산성은 102년 신라 파사왕 23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1414년 조선 태종 14년에 김맹손에 의하여 축성된 것으로 천연적으로 험준한 산의 지형을 이용하
여 지어진 산성이라고 한다. 거목인 소나무 숲을 지나기도 한다. 길고 긴 내리막은 골짜기에 다다르고 ‘깔딱고개
입구’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계류 건너 한 피치 오르면 ┳자 갈림길이 나오고, 오른쪽은 두타산성과 두타산, 왼쪽이
무릉계곡으로 간다.
10. 두타산 정상
11. 두타산의 예전 정상 표지석
12. 둥근이질풀
13. 두타산성 흔적
14. 무릉계곡 가는 길
무릉계곡으로 가는 길은 벌써 반석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등로 왼쪽 지계곡에는 우렁찬 물소리와 함께 이름 없는
폭포들이 보인다. ┫자 갈림길이 나오고 직진은 베틀바위, 왼쪽이 마천루와 용추폭포로 간다. 폭우 시 출입금지라는
폭포 아래 계류를 건너고 사면을 돌아간다. 등로 옆 전망바위마다 들른다. 골짜기 건너편으로 천연산성인 석벽이
안개구름이 몰려오는 중에도 아찔하게 보인다. 그 석벽 사이로 긴 물줄기가 보인다. 12폭포임에 틀림없다. 그리로는
접근하기 어려워 다만 이 관폭대에서만 보아야 할 것 같다. 설악산 토왕성폭포 버금가는 위용이다.
12폭포 관폭대 지나고 얕은 골짜기와 너덜을 지나 사면 오르면 ‘수도골 석간수’다. 깊어 어둑한 동굴 속에 석간수가
있다. 석간수는 마시지 말라고 한다. 바위천장을 연속해서 지난다. 암벽 중간에 바위가 떨어져나가 천장이 되었다.
위태하다. 지금이라고 바위가 떨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라 얼른 지난다. 산모퉁이 돌면 마천루와 두타협곡
전망대다. 아깝다! 안개구름이 전망을 가린다. 겨우 흐릿한 석벽 사이로 용추폭포를 알아본다.
‘두타산 협곡 마천루’의 안내문이다.
“동해바다의 높은 돛대를 상징하듯, 빌딩 숲처럼 암릉과 기암절경이 호위하는 해발 470m 이곳 마천루는 금강산바
위 위로 아슬아슬하게 조성된 잔도 데크 길을 따라 두타 협곡과 주변 풍광이 가장 잘 보이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 마천루에서 마주 보는 신선봉과 용추폭포는 우리나라 최초의 간행 소설집인 신광한의 기재기이의 배경무대이
기도 하다.”
새삼 ‘기재기이’를 알고 싶어졌다. 문득 중국 청나라 포송령이 포송령(蒲松齡, 1640~1715)이 지은 소설집 『요재지
이(聊齋志異)』가 생각났다. 요재는 포송령의 서재 이름으로 요재가 기록한 기이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요재지이
(聊齋志異)』는 예전에 읽어 보았으면서도 ‘기재기이’를 여태 모르고 있었다는 게 부끄럽다. 『기재기이(企齋記異)』.
조선 전기 문신인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이 지은 전기(傳奇)소설집이다. 기재(企齋)는 신광환의 호이고, ‘기이
(記異)’는 ‘특이한 일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기재 신광한는 37세에 삼척부사에 자원하여 두타동천(頭陀洞天)을 자주 찾아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두타동천이 있
는 두타산은 『기재기이(企齋記異)』 중 「최생우진기(崔生遇眞記)」의 배경이 된다. 진주부(眞珠府)는 지금의 삼척이
고, 임영(臨瀛)은 강릉이다.
다음은 「최생우진기(崔生遇眞記)」(신영산 역)의 서두이다.
“진주부(眞珠府) 서쪽에 산이 있어 두타(頭陀)라고 하는데, 산의 형세가 북쪽으로는 금강산을 당기고, 남쪽으로는
태백산으로 이어져 있다. 하늘과 맞닿아 하늘을 가로질러 나누는데, 그 동쪽이 영동(嶺東)이다. 서산(西山)의 높이
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사이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에 못이 있는데, 그 깊이는 알 수가 없다. 못 위에는
현학(玄鶴)의 둥지가 있는데,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학소동(鶴巢洞)이라 부르기도 하고, 용추동(龍湫洞)
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세상에서는 그곳을 가리켜 진경(眞境)이라고 하는데 그 근원을 찾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임영(臨瀛) 땅에 최생(崔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대범하게 영리(榮利)를 멀리하고, 산수를 유람하기 좋아하니,
사람들은 그의 우활함을 비웃었다. 일찍이 선(仙)공부를 하는 증공(證空)이라는 스님과 더불어 두타산 무주암(無住
庵)에서 오래 지낸 적이 있었다.”
데크 잔도를 간다. 거대한 석벽 상단을 가로지르는 잔도다. 걸음걸음이 경점이겠지만 날이 궂다. 데크 잔도를 다
내려오고 박달령에서 박달골로 내려오는 홀로 산꾼을 만났다. 박달골 계류가 볼 만하던가요? 하고 묻자 고개 가로저
으며 아무런 볼 게 없더라고 한다. 마음이 적이 놓인다. 어서 가서 쌍폭포와 용추폭포를 보자 하고 함께 잰걸음 한
다. 데크로드를 걸으면서 바라보는 신선봉과 병풍바위가 그 이름에 아주 걸맞은 가경이다.
17. 12폭포 관폭대에서 바라본 골짜기 건너편 사면
18. 아래쪽 가운데에 12폭포 하단이 보인다
19. 12폭포
21. (중간 가운데가) 마천루 전망대에서 바라본 용추폭포
22. 마천루와 그 주변
23. 신선봉와 병풍바위
24. 쌍폭포
두타협곡 바닥에 다다르고 계류 거슬러 오른다. 쌍폭포. 그 첫인상은 깜짝 놀랄 만큼 장려했다. 무릉계곡의 하이라
이트이다. 마치 도봉산 문사동폭포를 처음 본 느낌이다. 관폭대로 내려가서 그 양쪽 폭포를 본다. 한동안 침묵하여
별유천지에 빠져든다. 용추폭포는 쌍폭포 위쪽으로 20m 정도 떨어져 있다. 단순하고 장대하다. 아울러 힘차다.
일당백이다. 쌍폭포는 한쪽은 섬세하고 다른 한쪽은 장대하여 용추폭포보다 더 매력적이다.
무릉계곡을 간다. 무릉계곡 본류는 잔재미가 적다. 방태산 적가리골이나 도봉산 도봉계곡은 눈으로 하여금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 대중소와(大中小臥) 폭포들의 연속인데 이곳은 유유한 대천이다. 학소대폭포는 지계곡 폭포로
요즘 장마철 잦은 비에도 너른 암반을 약간 적실뿐이다. 계류가 등로와 멀어지는 틈을 타서 계류로 다가간다. 알탕
을 하기 위해서다. 숲 그늘 아래 큰 바위 조용히 휘도는 약간 깊은 물살에서 자맥질한다. 수온이 알맞다. 물살은
비단결보다 더 부드럽다. 탁주잔으로 유상곡수(流觴曲水) 흉내한다.
발걸음이 한결 가뿐하다. 대로 옆 삼화사(三和寺)를 들른다. 대찰이다. 본전은 적광전(寂光殿)이다 현판과 주련은
탄허(呑虛) 스님의 친필이다. 다음은 천왕문의 주련이다. 경허(鏡虛) 스님의 선시라고 한다.
摘何爲妄摘何眞
眞妄由來總不眞
霞飛葉下秋容潔
依舊靑山對面眞
무엇을 거짓이라 하고 무엇을 가리켜 참이라 하는가
참과 거짓 본래 모두 참이 아니네
안개 걷히고 낙엽 져 가을빛이 깨끗하니
푸른 산은 옛 그대로 참모습 보여주네
삼화사 천왕문을 나서고 다리 건너고 일주문을 지나면 무릉반석이 바로 옆이다. 들른다. 너른 반석이 성한 데가 없
다. 천하경승인 이곳에 숱한 사람들이 자기의 고귀한 이름 석자를 남기고자 여기저기 각자하였다. 몰랐을까? 무수히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아무렇게나 짓밟힐 줄을.
승용차만 주차할 수 있다는 제1주차장 지나고 먹자거리 지나고 야영장인 두타광장과 우리 버스가 주차한 제2주차장
이다. 뒤돌아보는 산릉은 안개구름에 가렸다. 버스는 18시 정시에 출발한다. 출발한 지 5분쯤 지났을까 여자 일행
한 분이 그만 화장실에 휴대전화를 놓고 왔다고 한다. 뒤돌아간다. 주차장에 다시 도착하고 그 여자는 화장실로
부리나케 달려가더니만 금방 휴대전화를 들고 만세 부르며 나온다. 우리도 박수친다. 서울 가는 길이 기쁘다.
25. 쌍폭포 왼쪽 폭포
26. 용추폭포
27. 학소대폭포와 학소대
28. 삼화사에서 바라본 두타산 동쪽 지능선 자락
29. 무릉계곡
30. 무릉반석
32. 무릉반석 암각서
안내판 내용이다.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이라는 암각서로 그 아래에 옥호거사서신미(玉壺居士
書辛未)라는 각서가 있는데, 신미년에 옥호거사가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릉선원은 도교(신선)사상을, 중대천석은 불교 또는 유교사상을, 두타동천은 불교사상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 글씨
는 봉래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직(1571~1576) 기간에 전임 정두형 부사의 부친상 관계로 신미년(1571)에 광천(비
천)을 방문했을 때 무릉계곡을 방문하여 썼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옥호자 정하언이 삼척부사 재직(1750~1752)
기간 중인 신미년(1751)에 무릉계곡을 방문해서 썼다는 설도 있다.
첫댓글 어느날이던가 베틀바위 코스가 열렸다고 해서 찾아갔더가 얼어붙은 쌍폭은 보고 용추폭을 그냥 지나쳐와 아쉬웠었지요. 악수님 사진으로라도 다시 보니 반갑네요.ㅎ
저는 아직 베틀바위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두타산을 여러 번 갔지만 그때마다 주릉 위주라서요.^^
정말 간만에 두타산 봅니다
그짝동네서는 최고의 산인데 너무 홀대 당한듯요
두타산도 신경 좀 써주셔요.
덕순이 소식이 없지만요.ㅋㅋ
역시 명산입니다...바위가 멋지고, 폭포 또한 시원스럽습니다^^
두타산은 가을 산이라고 하더군요.
이날은 날이 흐려 아쉬웠습니다.
가을에 다시 와야겠습니다.
예전에 노궁 선생을 뵙던 기억을 되살려서요.^^
두타산 폭포들이 볼만합니다. 예전의 추억들은 잊혀지고...
망각도 축복이랍니다.
처음 가는 산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가게 되니.
제가 그렇습니다.^^